최초의 박해 때부터 순교자를 탄생시킨 낸 한양의 군사적 요충지
남한산성은 한양의 군사적 요지로, 1791년 신해박해 당시부터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때까지 박해 때마다 광주를 비롯한 인근 고을의 여러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고문을 당하다가 순교함으로써 잊을 수 없는 치명터가 되었다.
최초의 박해인 신해박해(1791년) 때부터 신자들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으며, 신유박해(1801년) 때에는 이곳에서 최초로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이어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에 이르기까지 약 300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게 되는데 순교자들의 시신은 남한산성의 물이 나가던 남한산성 동문 옆의 수구문(水口門)을 통해 버려졌다.
남한산성이 위치한 광주 고을은 천주 신앙에 관심 있는 학자들이 모였던 천진암이 위치하고 있음에서 알 수 있듯이 교회 창설기에 천주교 신앙 운동이 우선적으로 전개 되었던 곳이다. 남한산성에서 맨 먼저 순교한 이는 광주 의일리(현 의왕시 학의동)에 살다가 1801년에 체포되어 동문 밖에서 참수된 한덕운(韓德運, 토마스, 1752~1802)이다.
그 뒤를 이어 광주의 거북뫼 곧 구산(龜山, 현 하남시 망월동) 출신인 김덕심(金德深, 일명 萬集, 1798∼1841, 아우구스티노)이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1841년 초에 남한산성 옥중에서 진실한 통회와 애덕의 정을 지닌 채 순교하였다. 한편 김만집의 형 김성우(金星禹, 1795~1841, 안토니오) 성인은 이때 서울의 포도청에서 수많은 형벌을 받은 뒤 1841년에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곳 남한산성에서 다시 순교자가 탄생한 것은 1866년의 병인박해 때였다. 바로 그해 겨울 이천 단내(이천시 호법면 단천리)에 거주하던 정은(鄭溵, 1804~1866, 바오로)도 63세의 나이로 체포되어 재종손 정 베드로( ?~1866)와 함께 1866년 12월 8일 남한산성에서 백지사(白紙死, 죄수의 팔다리를 고정시킨 상태에서 얼굴에 한지를 덮고 물을 뿌려 질식케 한 형벌)로 순교하였다.
박해자의 손길은 얼마 되지 않아 이미 교우촌으로 알려져 있던 구산에 뻗혔다. 김윤심(金允深, 일명 文集, 1801∼1868, 베드로 알칸트라)을 비롯하여 집안의 어른 남자들이 모두 체포되었고,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그와 함께 체포된 김씨 집안의 신자들은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인 성희(金聖熙, 1815~1868, 암브로시오), 순교자 김덕심의 차남 차희(金次熙, ?~1858), 김윤심의 외아들 경희(金敬熙, 1823~1868), 경희의 5남이자 성희의 양자인 교익(金敎翼, 토마스), 경희의 6촌 윤희(金允熙, 1834∼1868) 등 모두 6명이었는데, 이중에서 김교익 만이 안면있는 포교의 도움으로 생환하였을 뿐 모두 순교하였다. 결국 구산의 순교자는 김성우 성인을 비롯하여 김씨 집안에서만 7명으로, 여기에 최지현(崔址鉉, 揮斗, ?~1868), 심칠여(沈七汝, 아우구스티노, 1832~1868) 순교자까지 더하여 모두 9명이 된다.
▒ 남한산성
조선 시대 남한산성은 광주부의 치소(治所)이자 서울을 둘러싼 4배도(陪都)[개성, 강화,광주, 수원] 중의 하나로서 유사시에는 국왕의 피난처로서 보장처(保障處)의 역할을 하였다. 동시에 광주부와 일대 지역의 군사와 치안을 총괄하는 업무를 맡았다. 1791년 신해박해 당시 이가환(李家煥)이 광주부윤 겸 토포사로 재직하던 때부터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때까지 박해 때마다 광주를 비롯한 인근 고을의 여러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고문을 당하다가 때때로 순교함으로써 잊을 수 없는 치명터가 되었다.
■ 남한산성 내의 순례지
○ 좌승당(坐勝堂)
행궁의 상궐 왼편 담밖에 위치한 좌승당(坐勝堂)은 1817년(순조 17년) 유수 심상규(沈象奎)가 행궁에서 집무하는 것이 군신지례(君臣之禮)의 측면에서 불편하여 별도로 집무처를 건립한 곳이다. 행궁 옆에 있는 이아(二衙)는 판관의 공식 집무실이었고, 제승헌(制勝軒)은 판관의 숙소로 여겨진다.
○ 수어영(守禦營)
수어군을 훈련하고 지휘하던 본부로서 수어영(守禦營)이 있었으니, 연무당(練武堂), 연병관(鍊兵館)이라고도 했다. 이곳 연무관 앞에서는 군사들이 훈련을 할 때마다 그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무술 연마 대상으로 삼아 목검으로 찌르고, 매로 때리곤 하였다고 전해진다.
○ 군뢰청(軍牢廳)
연무관 바로 오른편의 큰 건물이 일종의 군사 감옥이라 할 수 있는 군뢰청(軍牢廳)으로 추정된다. 군뢰청의 원래 기능은 요즘의 헌병대와 같은 군기 감찰 기관이었다.
○ 포도군관청(捕盜軍官廳)
로터리 남동쪽 개천가에는 광주부의 치안을 담당하는 포도군관, 포졸들이 근무하던 포도군관청(捕盜軍官廳)이 있었다. 여기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신문을 받고,온갖 고문을 받았다고 보여진다. 현재 로터리 주차장 천일관 식당 앞에 포청골 자리 표지가 세워져 있다.
○ 형옥(刑獄)
형옥 위치는 정확히 비정할 수는 없지만 대략 2가지 추정이 가능하다. 하나는 연병관 옆의 작은 두채의 건물을 남옥(男獄), 여옥(女獄)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가지는 실제 심문이 이루어졌을 포도군관청 근처에 옥이 존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후자의 설에 근거하면 로터리 주차장 부지 내 포도군관청 자리 북서쪽에 옥터가 있었을 것이다.
○ 수구문과 골짜기
동문 오른쪽에 있다. 남한산성의 물이 나가던 수구문은 성안에서 처형된 천주교 신자들의 시신이 이곳 골짜기에 버려지면서 시구문(屍軀門, 시체가 나가는 문)이 되어 버렸다. 이제 그 흔적은 골짜기의 물과 함께 흘러가 버렸지만, 박해 시대는 순교자들의 시신이 수십 일씩 방치되면서 사람들이 꺼려 했던 곳이다.
○ 저잣거리
남한산성의 옛 장터가 있던 곳, 포졸들은 이곳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끌고 다니며 시위하거나 사람들을 모아놓고 처형함으로써 누구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엄포를 놓았다고 전해진다.
○ 동문 밖
현재 남한산성 동문 밖 지역은 한덕운 토마스가 1802년 1월 30일(음 1801년 12월 27일)에 참수형을 당한 사형터로서 기록에 남아 있는 곳이다.남한산성은 조선 시대에 관방 기지이자 중요한 교통 요지이기도 했다. 즉 주요 간선 도로였던 ‘영남대로’가 남한산을 경유하도록 되어 있어 한양에서 송파 나루를 통해 한강을 건넌 사람들이 산성을 거쳐 광주 경안, 이천, 충주로 해서 동래까지 갈 수 있었다.
이 간선 도로를 중심으로 인근 각지로 지선들이 개설되어 있었고 그 근처에 장터가 성황을 이루었다.(송파장, 덕풍장,경안장, 오포장, 판교장, 사평장) 따라서 남한산성의 동문 밖은 이러한 간선 도로가 이어지는 중요한 길목이자 장이 서는 곳이어서 인파가 많았다.
○ 야외 미사터
현재 야외 미사터는 성당을 지나 조금 올라가면 숲속에 있다. 십자가의 길과 함께 있어 묵상과 사색하기 좋은 환경이다.
○ 북문(전승문)과 남문(지화문)
죄인 아닌 죄인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끌려온 문이요, 한번 들어오면 죽어 나가야 하는 문이었다. 순교자들은 포졸들에게 포박되어 이 문을 통과하면서 기쁨에 겨워했고, 죽어 나가면서도 하늘의 문으로 들어가는 영광에 또 기뻐했을 것이다. 구산의 순교자들은북문을 통해 남한산성 내 감옥으로 끌려 들어왔다.
○ 소성당
성체가 현시되어 있으며 성 김성우(金星禹, 1795~1841, 안토니오), 성 최경환(崔京煥, 보명 永訥, 1805~1839, 프란치스코) 등 두 명의 성인 유해가 모셔져 있고 성지 순례 미사 전례 시 양형 영성체를 하고 있다.
◆ 이가환(李家煥)(1742∼1801)
천주교인들을 사학 죄인으로 치죄한 최초의 광주 토포사, 즉 광주부윤은 이가환이다. 이가환은 남인학자로 실학자 성호 이익의 종손이며,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의 숙부로서, 그 자신이 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로 지목되어 죽음을 당한 순교자이다.
그러나 한때는 박해에도 앞장섰는데 1791년(정조5년) 광주부윤으로 임명되어 조정의 뜻을 지키고자 각 면리에 이단 배척의 뜻을 명령하고, 장시에 방을 붙여서 널리 사학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수배를 통해 천주교 신자 4~5명을 체포하였는데 이들에게 곤장을 쳐서 신문하고, 결국 마음을 바꾸겠다는 다짐을 받고 풀어 주었다고 스스로 밝혔다.
그는 당대의 대표적인 유학자로, 이벽이 수표교에서 처음으로 서교(西敎)를 선교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슬프도다. 나도 일찍이 <천주실의>, <칠극>을 보았는데 비록 그것이 명설이라 할지라도 정학(正學)은 아니다.
이벽이 그것을 우리의 도(道)와 바꾸려 하다니 어찌될 것인가”라고 말하면서, 토론으로 그를 설득코자 찾아갔다. 그러나 이벽의 이론에 굴복당하여 그는 오히려 그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구해다 읽고 연구한 끝에 믿을 것을 결심하였을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전교하고, 이벽, 권철신, 정약용과 늘 왕래하면서 교회 일에 많은 협력을 하였으므로 반대파로부터 사교의 교주라는 말까지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입교 여부는 분명치 않고 1791년 신해박해 때 반대파의 모함으로 천주교인으로 몰려 체포되었다가 석방되고, 광주부윤이 된 후로는 천주교를 탄압하는데 앞장을 섰다. 그 뒤 관직이 승진되어 개성부 유수가 되었으나 1795년 주문모 신부의 밀입국 사건으로 충주 목사로 좌천되어 여전히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그러면서도 1801년 신유박해 때 이승훈, 홍낙민, 정약용 등과 함께 사학의 괴수라는 혐의로 투옥되어 그 해 4월 8일(음 2월 26일)에 60세로 옥사하였다.
▒ 나의 작은 잔에도 (남한산성 동문에서) <김영수> ▒
슬픔으로 맑게 무너지다
기도로 뜨거이 일어서는 남한산성
여기 동문에서는
물소리 풀향내 가득합니라
알뜰히도 부서져 아득히 던져진 곳
그렇다면 부서져야
하늘 만날 수 있는 것입니까
바람 밝게 흔들릴수록
눈물 희게 빛나는 골짜기엔
흰 구름들 팽팽히 걸려들고
나의 작은 잔에도
죽음 밝게 차오르고 있습니다
수구문(水口門) 커다란 바위들에는
위대한 약속 새겨져 있고
바위들 적시며 흐르는 물에는
영원에 이르는 아픔 보입니다
정녕 나의 슬픔에도
피 어린 기도 스밀 수 있을까요
■ 순교자
◆ 이밖의 순교자들
서태순, 이조녀, 이학록, 이정현, 엄쾌길, 서상철, 이기좌, 권경보, 김준원, 오선장, 김하상
정원명, 정성재, 한동원, 이재금, 한경조, 이장복, 정오복, 윤재현, 김상희, 송일지, 송칠지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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