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11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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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마지막 군주, 순종(純宗)
병약한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1874~1907)황태자 이척(李拓)은 명성황후가 낳은 아들로, 실로 오랜만에 왕실에서는 적장자가 탄생했다.
헌종 40여 년간 조선왕조는 후궁이나 방계 출신이 왕위에 올랐으니 이척(李拓)의 탄생은 왕실의 경사였다.
게다가 순종(純宗)은 명성황후가 낳은 여러 아이 중에서 유일하게 성년으로 성장한 왕자였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왕실의 걱정이 컸다.
이 때문에 어머니 명성황후가 무당을 불러 굿을 자주 해 순종(純宗)의 건강을 기원하는 행사에 엄청난 돈을 쓰기도 했다.
더구나 1898년에 러시아 역관 김홍륙이 고종을 독살하기 위해 고종이 즐겨 마시던 커피에 독약을 넣었는데 고종은 바로 뱉어버렸지만, 순종(純宗)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해 끝까지 마셨다.
(이런~ㅠㅠ)
아마도 커피광이었던 아버지 고종은 커피 맛의 변화를 금세 눈치를 챘지만, 순종(純宗)은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김홍륙의 독차 사건으로 순종(純宗)은 이가 다 빠져 틀니를 끼고 살아야 했고, 혈변을 자주 누는 등 몸이 극도로 안 좋아졌다.
결국 이 때문에 순종(純宗)의 몸과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 500여년 조선왕조의 멸망 - 경술국치♡
1907년 고종이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양위하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나자, 33세였던 황태자 이척(李拓)이 대한제국의 마지막 왕인 순종(純宗)으로 즉위해 대한제국이 망할 때까지 3년간 재위했다
고종과 순종은 당시 상황에 대한 반발로 양위식(讓位式)에 나타나지 않아 결국 다른 두 사람이 대리로 양위식을 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순종(純宗)은 즉위한 후 연호를 광무에서 융희(隆熙)로 고쳤다.
사실 순종(純宗)은 재위라고 할 것도 없었다.
일본 애들이 옥새를 빼앗아가는 바람에 한일병합 때까지 그냥 때가 되면 순순히 식사나 하시다가 그만두신 것이었다.
그래서 시호가 순종(純宗)이다.
결국 순종만 하다 그만두셨는데 1910년 폐위된 후 16년간 창덕궁에서 살다가 1926년 53세로 세상을 떴다.
순종(純宗)이 왕이 된 1907년부터 일본은 조선에 대한 침략을 더욱 노골적으로 단행했다.
먼저 송병준, 이용구 등의 친일파를 앞세워 나라를 일본에 합쳐 달라는 청원서를 내게 했다.
이는 일본이 강제로 조선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조선인의 요청에 의해 병합(倂合)이 이루어진 것으로 꾸미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은 조선의 입법권, 관리 임명권, 경찰권, 사법권 등을 야금야금 가져가더니 결국 1910년 8월 22일에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대신들과 데라우치 사이에 한일 병합 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1주일 뒤인 8월 29일에 이 사실을 발표하게 했다.
이날이 국권을 상실한 경술국치 일이다. 8월 29일을 잊지말아야 한다
"일본국 황제와 한국 황제는 두 나라 간의 특수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서로의 행복과 동양 평화를 위해 한국을 일본에 합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확신한다.
(중략) 제 1조, 한국황제는 한국 정부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 황제에게 넘긴다.
제 2조, 일본 황제는 1조의 내용을 수락하고 한국을 완전히 일본 제국에 포함시킨다
이로써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세운 500여 년 동안 유지되어 온 조선왕조는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인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의 가장 마지막 장(章)인 순종실록은 어떻게 끝나게 되었을까?
바로 한일병합 조약의 내용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우리나라를 다스렸고, 순종(純宗)은 창덕궁에 거주하게 되었다.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조선은 망국의 군주였던 순종(純宗)의 별명이 '창덕궁 전하'가 될 정도였고,
순종의 이복동생인 영친왕과 덕혜옹주는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식 교육을 받고 일본인과 강제로 정략 결혼을 하게 되었다.
'조선과 일본은 하나'라는 일본의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서 말이다.
물론 백성들도 식민지하에서 고달픈 삶의 역사가 35년이나 지속되었다.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비통(悲痛)해서 침묵만이 답이다.
자, 이제 조선사(朝鮮史)의 대단원이 내려졌다.
개인적으로 조선의 멸망원인을 크게 3가지로 집약하고 싶었지만, 혹여나 의견대립이나 말다툼 등의 논란으로 유종(有終)의 미(美)를 거두지 못할 염려가 있는바, 그 몫은 이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분들의 몫으로 돌릴까 합니다.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 (11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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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과 침략의 시대에 서 있던 임금, 고종(高宗)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
만동묘(萬東廟)와 서원철폐
서원(書院)은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물을 제향(祭享)하고 유생의 교육을 담당하는 사설 교육기관이었다.
서원(書院)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서원에 딸린 토지는 면세였고, 서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군역이 면제되었으며, 유생들은 어느 서원이든 등을 대고 있어야 벼슬길에 나갈 기회가 있었다.
거기다 서원(書院)은 조정의 지원까지 있었으니, 내세울 것도 없는 것들이 거들먹거리고 싶어서 돈푼만 있으면 마구 서원(書院)을 세우기 시작해 18세기가 되자 전국에 서원이 1,000개가 넘어섰다.
아니 훌륭한 교육기관이 이렇게 많고, 거기서 인재들이 송사리떼처럼 쏟아져 나오는데 조선이라는 나라는 왜 이렇게 🐕판이 되었을까?
이 서원(書院)이라는 것이 초창기에는 공부도 제법 시키고 하더니, 점차 파벌로 나뉘어 당파 싸움의 온상이 되고, 종장에는 부패의 온상으로 변해 버렸다.
유생이 되거나 서원의 일꾼이 되면 군대를 안 가고 부역을 안해도 되니 이놈 저놈 모조리 돈과 빽을 써서 유생으로 등록하거나 서원(書院)에 일자리를 얻었다.
거기다 관립교육기관인 향교(鄕校)와 촌구석 지배권을 놓고 저희들끼리 박 터지게 싸우고 난리였다.
또한 제사 때가 되면 경비 염출을 위해 액수가 적혀 있는 묵패(墨牌)를 각 관아의 부호들이나 수령들에게 돌렸는데,
이 돈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가는 무슨 행패를 당할지 몰랐으며,
수령인 경우에는 서원(書院)이 속해 있는 당파까지 나서서 모가지를 날리는 수도 있었다.
서원(書院)은 이렇게 돈을 거두어 제사를 지내고, 시회(詩會)를 열어 먹고 마셔 경비를 없앴다.
이렇게 저희끼리만 처먹고 놀면 누가 뭐라 그래?
이것들이 지체가 좀 낮은 양민을 보면 양반에게 대들었다느니, 선비를 능멸 했다느니 멀쩡한 사람들을 툭하면 데려다 요절을 내니,
서원(書院)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은 관가보다도 더 높았다.
1864년 이런 꼴을 보다 못한 대원군은 서원 철폐령을 내렸다.
대원군의 재가를 받은 서원 47개만 남기고 나머지 서원(書院)들을 모조리 폐쇄하고 건물을 헐어버리도록 명한 것이었다.
서원(書院)이 헐리기 시작하자 전국적으로 난리가 났다.
전국의 유생(儒生) 수천 명이 상소문을 들고 한양으로 올라와 대궐 앞에 거적을 깔고 꿇어앉아 도끼를 옆에 놓은 채 데모를 하기 시작했다.
도끼를 옆에 놓은 것은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도끼로 목을 치라는 협박이었다.
이에 대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강경한 태도를 고수했다.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설령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해도 용서하지 않겠다!"
이 발언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성리학의 나라에서 공자의 뜻을 받들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정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위험한 발언이었다.
그 만큼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서원 정리에 엄청난 개혁의 힘을 쏟았고,
이 개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대원군은 '만동묘(萬東廟)'도 폐지했다.
만동묘(萬東廟)는 명나라의 황제 신종(神宗)을 모시는 사당이다.
아니, 뜬금없이 웬 신종?
임진왜란 때 지원군을 보내준 신종(神宗)에 대한 고마움으로 조선은 그때까지 비싼 돈을 처들여 명나라 신종의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청나라에 의해 이미 망해 버려 역사 속에서만 존재하는 명나라 황제의 사당이라니?
그것도 명분을 운운하며, 그 나라에서도 모시지 않는 사람을 아직도 우리가 몇백 년 동안 모시고 있었다니....
(헐~완죤 멘붕이다 ㅠㅠ)
이 만동묘(萬東廟)는 1874년 대원군이 실각하자 화양동 서원이 복구되면서
다시 세워져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이 시베리아 벌판에 피어있는 🐕나리 같은 족속같으니!
(충북 괴산 청천면 화양동 서원에 만동묘 가 있습니다)
철저한 사대주의(事大主義)!
중국을 종주국으로 보는 철저한 사대주의 지식인들이 떠 받들고 있던 만동묘.
대원군(大院君)은 이 만동묘(萬東廟)와 서원을 폐지하면서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게 된다.
대원군의 치세중 결정적인 실수인 경복궁 중건이 발목을 잡으면서 말이다.
한심한 조선의 기득권 새끼들!
"걔들 죽지 않을 만큼 패!"
서원 철폐를 반대하는 유생들이 궁궐 앞으로 몰려왔을 때 했던 흥선대원군의 대답이 어울리는 114편이었다.
그동안 읽어주시느라 고맙고 감사의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