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을 치료하는 하심(下心)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금강경에는 사람이 상(相)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상이란 나를 남에게 과시하고 나의 장점이나 능력을 자랑하는 아만심 따위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수행에 있어 금물이며 일반사람의 교양에도 크게 어긋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놓아도 그것을 자랑하고 과시하면 오히려 남에게 미움을 사는 법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있듯이,
자기가 한 선행을 스스로 숨기는 것이 더 큰 미덕이 됩니다.
이를 밀행(密行)이라고 하며 나를 드러내지 않고
몰래 남을 도와주는 것을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보체계로 움직여지는 현대사회는
각종의 알림인 선전과 광고의 홍수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소위 PR(Public Relation) 시대라고 말하듯이 갖가지 상업광고를 위시하여,
업소나 단체의 이름을 스스로 선전하는 소문 내기가 너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매스컴의 발달에 의한 당연한 추세이긴 하지만 어쩐지 찜찜할 때가 있습니다.
이 PR 시대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보면
개인이나 단체를 대중에게 알리고 보자는 상(相) 내기 운동에 열중합니다.
그리하여 상(相)을 내지 못할 때는 스스로 소외의식이나 열등의식을 가져버립니다.
소외와 열등의식은 생활의 기를 꺾어 인간의 의지를 나약하게 하고
어떤 패배주의에 빠져 세상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지 못하게 합니다.
또 남의 일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가져서 남과 동화되지 못하는 사태를 낳기도 합니다.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자기 자존심을 높이고자 함과 세상의 명예를 탐할 때 더욱더 강하게 일어납니다.
하기야 사람에게는 자기의 입장을 떳떳하고 당당하게 가지는 자존심이 필요합니다.
자존심을 가지고 소신껏 살아가는 주체 의식이야말로 인간 승리의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존심이 상(相)을 내는 자기 과시가 되어
사람 사이의 충돌과 마찰을 빚어내는 불화의 요인이 되는 수가 허다합니다.
더구나 경쟁사회에서 자기주장을 세우고 관철하기 위해서 입장 대결이 생길 때
한판의 승부를 겨루자고 벼르는 독선과 아집은 인간의 착한 모습이 결단코 아닙니다.
이기고 보자는 승부 근성이 개인의 생존에 필요할 때도 물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이기느냐 하는, 승리를 얻어내는 방법이 좋아야 합니다.
비겁하고 야만적인 수단을 써서 이기는 것은
승리 자체가 비겁하고 야만적인 것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대중이 모여 사는 공동사회의 안녕을 도모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이 하심(下心)입니다.
모든 도덕적 가치를 세우는 근본도 물론 하심에서 비롯됩니다.
불가에서 대중처소에 처음 들어갔을 때
지켜야 하는 다섯 가지 법[입중오법(入衆五法)]이 있는데,
제일 먼저 하심(下心)이 나옵니다. 잘난체하지 말고 자기를 내세우지 말라는 말입니다.
내가 남에게 겸손하고 상대를 더욱 존중해 주는 하심의 정신은
진정한 인격 수양으로 아만을 꺾어 자신을 착하게 만드는 약입니다.
인간 상호의 이해타산이 맞물려 움직이는 사회생활 속에서
가끔 자존심 상하는 불쾌한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사람이 남에게 무시당하고 기분이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존심의 상처는 손가락을 다친 것보다 더 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자존심을 치료해 주는 약은 하심(下心)뿐입니다.
육바라밀에도 인욕바라밀이 나오지만,
사바세계는 참고 견디는 인욕에서 사람의 정신적 무게가 커지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자존심은 도덕적 윤리 의식과 의(義)와 용(勇)에 의하여 지켜지는 것입니다.
아만을 내세우는 것은 자존심이 아닙니다.
공자는 학문에 있어서 자존심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가 논어에서 말한 불치하문(不恥下問)이란 말은 배움에 있어서는,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쓸데없는 일에 자존심을 자주 상하곤 합니다.
과민한 신경으로 매사를 대하다 보니 한 생각 감정의 실수가 쉽게 터집니다.
예와 의를 잃고 부지불식간에 남의 기분을 해쳐버리는 수가 빈번합니다.
극기의 수양 부족 현상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좀 더 하심을 배우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 지안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