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이수익
말이 죽었다. 간밤에
검고 슬픈 두 눈을 감아 버리고
노동의 뼈를 쓰러뜨리고
들리지 않는 엠마누엘의 성가(聖歌) 곁으로
조용히 그의 생애를
운반해 갔다.
오늘 아침에는 비가 내린다.
그를 덮는 아마포(亞麻布)위에
하늘에는 슬픈 전별(餞別)이.
(시집 『우울한 샹송』, 1969)
[어휘풀이]
-아마포 : 아마로 짠 천, 아마는 아마과의 한해살이 풀. 껍질의 섬유로는 리넨 따위의 피륙을 짜고, 씨로는 기름을 짜며 약재로도 쓴다.
[작품해설]
이수익은 맑고 아름다운 서정시로써 이 시대의 어둠을 맑게 정화시켜 주는 시인의 한 사람이다. 그는 첫 시집 『우울한 샹송』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투명한 지성으로 비애의 정서를 고양시킴으로써 한국 서정시의 황금부분을 조용히 갈고 닦아 온 시인이다. 흔히 잔잔한 우수와 비애의 정서, 명징한 이미지와 언어의 세계, 상실감 회복의 미학으로 평가받는 그는 평자에 따라서는 소월과 지용의 장점만을 석어 놓은 시인, 또는 타고난 천성의 시인이라는 극찬을 듣기도 한다.
이 시는 그의 첫 시집 『우울한 샹송』에서 가장 완벽한 구조의 서정시로 손꼽는 작품으로, 삶의 허망함과 죽음의 막막함을 투명한 지성적 통제 아래 절제된 감정으로 잔잔하게 노래하고 있다. 연 구분이 없는 전 9행의 소품이지만, 시인이 이 작품에 기울인 시적 의장(意匠)의 치밀성과 각 시어나 시행마다 쏟아 넣은 섬세함을 엿볼 수 있다.
이 시에 설정된 시적 상황은 지극히 단순하다. ‘간밤에 말이 죽었고, 오늘 아침 그 말의 주검 위에 비가 내린다.’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이 시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그러한 의미가 아니라, 시적 대상인 말의 죽음을 대하는 마음의 자세이다. 겉으로는 분명히 나타나지 않지만, 시인은 애정을 가지고 따스한 시선으로 말의 죽음을 바라본다. 검고 슬픈 눈을 가진 말의 순결성, 그 동안 말이 견뎌야 했던 노동, 어느 누구 한 사람 지켜 주지 않았던 최후, 그 말의 죽음을 위로하듯 내리는 비 등, 시인이 관찰하고 명상하는 내용 속에는 이와 같은 사랑의 정신이 담겨 있다. 그리고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가 맞이하게 되는 생명의 종식에 대한 안타까움, 외로운 영혼이 지닌 순결성에 대한 명상이 시행 사이에 응결되어 있다.
시인은 먼저 말이 죽었다는 사실을 첫 행에서 제시한 다음, 말의 순결성과 고통스런 삶의 과정을 2.3행의 ‘두 눈을 감아 버리고’와 ‘뼈를 쓰러뜨리고’라는 대구 형식으로 드러낸다. 그 다음에는 말의 고독한 영혼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4~6행으로 제시하는데, ‘운반해 갔다’라는 구절은 말의 노동 행위와 연관되는 표현으로 절묘한 효과를 자아낸다.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노동으로 평생을 보냈을 말이므로 죽어서도 자신의 삶을 죽음으로 운반해 갔을 것이라는 시인의 뛰어난 상상력을 엿보게 하는 이 구절에서 우리는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숙명적으로 겪어야 하는 생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
그 다음 7~9행은 하늘이 말을 위해 베풀어 주는 전별 의식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비가 내린다’ 다음의 쉼표(,)와 ‘슬픈 전별’이 다음의 마침표(.)이다. 앞의 쉼표는 호흡의 단절을 막고 뒤의 마침표에서 시상이 긑나도록 유도하는 기능을 갖는다. 그러므로 서술어가 생략된 채 마침표로 끝나 버린 마지막 시행의 공백 뒤에는 죽음의 침묵과 적막이 자리 잡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죽음을 바라보고 느끼는 시인의 허망함이 진하게 배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작가소개]
이수익(李秀翼)
1942년 경상남도 함안 출생
서울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졸업
196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고별」,「편지」가 당선되어 등단
1963년 『현대시』 동인
1965년 제4회 신인 예술상 수상
1980년 부산시문화상 수상
1987년 제32회 현대문학상 수상
1988년 대한민국문학상 수상
1995년 제7회 정지용문학상 수상
시집 : 『우울한 샹송』(1969), 『야간열차』(1978), 『슬픔의 핵(核)』(1983), 『단순한 기쁨』(1986), 『그리고 너를 위하여』(1988), 『아득한 봄』(1991), 『푸른 추억의 빵』(1995), 『눈부신 마음으로 사랑했던』(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