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은요. 그냥 "신념"입니다. "불교적 신념"을 "신심"이라고 하는 거죠. 그리고 "신념"은요. "하나의 어떤 기준"입니다. 인간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경우가요. 스스로 어떤 기준을 세우고 즉 기억하고, 그 기준에 따라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신념을 가지고 살다 죽었다면, 그는 인간으로 살다가 죽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 신념은 생물학적 인간을 정신적으로도 인간이게 하는 것이구요. 어떠한 형태로든, 절제를 요구합니다. 신념에 따라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하게 하니까요. 위와 같으므로, 불교는 다양한 신념의 유용성을 긍정합니다. "꼭 불교가 아니더라도, 신념을 가지지 않는 것보다는 신념을 가지는 것이 더 좋다"는 겁니다. 불교를 기준으로...인간으로 살다가 죽었다면, 최소한 인간으로 태어날 것이고...그것은 곧 삼악도를 면한다는 의미를 가지거든요.
신념을 가지는 것은, 예상 외로 어렵습니다. "신념은 인격을 완성시키는 것"이기에 그래요. 물론 상식적으로, 문제가 있는 신념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상식적 기준 이전입니다.
상식보다는 인간이 앞서는 거예요. 그래서 신념이 상식에 비춰 그릇되다고...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신념을, 상식에 맞게 개조시키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막말로요. 죽일 수는 있지만, 신념을 빼앗아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고상하게는, "인간으로 죽게 하라"는 거죠... 어쨌든 골치 아프고 어려운 문제는, 이 정도로 넘어가구요...
불교적 신념은요. "삼보 귀의"라고 합니다. 불, 법, 승을 의지처로 삼는 건데요. 가장 근본은,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이 근본이기에, 부처님과 떨어져 있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는 것이구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아야 하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보존하여 알려주는 집단에도 의지하는 겁니다.
결국 불교적 신념인 [ 신심 ]은, 위에서 신념과 관련해 사용한 표현을 가져 오면, [ 스스로 부처님을 세우고 즉 기억하고, 부처님에 따라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것 ]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고 의지하면요. 불상을 떠올리더라두요. 뭔가 행복하고 편안해지지 않습니까? 누군가를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행위는요. 그 자체만으로, "선업"입니다. 그래서 "행복과 평안이 과보"로 함께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처님만 생각하고 살 수는 없잖아요? 마음속으로 불상만 떠올리면서 살 수는 없단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는 부처님은 뭘까요? 행복과 평안으로 이끈, 업의 내용이 뭐냐는 거예요. 단순히 불상은 아니거든요.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순간적이나마 전적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도록 하냐는 거죠. 소위 불, 법, 승 삼보귀의는요. "법" 즉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렇게 하도록 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불법을 공부하거나 수행한다는 것은요. 자신이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부처님을 구체화하는 겁니다. 자신이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부처님을 구체화한다는 것은요. 신심을 구체화하는 겁니다.
결국 (공부도 수행의 하나이므로) 수행이란, 신심을 구체화하는 겁니다. 수행의 완성이란, 신심의 완성이 되는 것이구요. 그래서 "처음 일으킨 신심이 무량한 공덕을 함유한다"고 합니다. "처음 일으킨 신심"과 "완성된 신심"이 다른 것만은 아니거든요.
처음 일으킨 신심을 구체화하여 완성된 신심이 있는 즉, "부처의 공덕" 즉 "무량한 공덕"은 처음 일으킨 신심에 함유된다는 겁니다. 12연기의 무명이 생로병사우비고뇌를 초래하는 최초의 조건인 것처럼, 처음 일으킨 신심이 무량한 공덕을 이루는 최초의 조건이라는 겁니다.
상식적 기준만을 가지구요. 정리하자면요. 신념은, 인간을 비로소 인간이게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주변의 여러 동물등과 비교할 때, 최소한 인간의 특성이 가장 잘 발현된 것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잖아요. 아닌가요?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인간으로 살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변의 인생들을 한번 봅시다. 저는요. 주제 넘게 좀 안타까운게요.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살고 있냐는 겁니다. 스스로 그러한 질문을 진지하게 던져보느냐는 겁니다. 별로 아닌 것 같아요...가만 보면 그렇단 말이죠...
삶의 의미등 허공에 묻힐 질문을 던지기 전에,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나는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살고 있는가? 인간의 특징이 가장 두드러지는 뭔가를 하고 있는가?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의 특징이 가장 두드러지는 뭔가는 하지도 않으면서, 삶의 의미등을 묻거나 허무감등을 하소연해서 어디에 쓰겠습니까? 인간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다면, 삶의 의미등을 묻거나 허무감을 하소연하는 것은...허공에 발을 디딜려는 것과 같습니다. 만구 꿈이고 환상이라는 겁니다
인간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애초에 발생하지 않을 의문등이거나 순간적으로 스치는 인지상정의 감상등일 뿐이거든요. 우리가 인간으로 살기 위한 노력을 한다면, 신념을 가지고 살려고 노력한다면...대용품으로 뭔가에 탐닉하는 일은 줄어듭니다. 필요해서 하거나, 즐기면서 하는 일이 늘어나구요. 그래서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불자의 신념, 즉 신심은...불자를 인간이게 하는 결단이구요. 스스로를 만드는 결단입니다. 부처님이 기준이므로, 부처님을 구체화시키는 결단입니다. 완벽하진 몬해도, 스스로의 결단에 따라 하나의 생을 보냈다면...그래서 인간으로 태어나 비로소 인간으로 살다 죽었다면...더 바랄 바는 없을 듯...
=== [ Udana 02-08 Suppavasa ]도 참조하시구요. 뭐...꼭 신념이 아니더라두요,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산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뭐겠는가?"를 한번 고민해 보는 것도 좋을 거 같습니다.
첫댓글좋은 질문을 해 주신 스민님 감사합니다. 댓글을 본글로 만들지 말라 하셨지만 이번엔 거역합니다. 신념, 신심에 대한 근본적 문제에 대한 지적이 저에게 굉장한 신선함으로 다가와서 멋대로 올립니다. === 신심을 가지는 일, 신념을 확립하는 일에 있어서 제가(제 수준에서)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있는데 참 아픈 지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람은 여러 부류가 있을 것 같아요. 물질 혹은 육체적 문제에 집착하는 부류가 거의 대부분일 것 같고요, 그렇게 물질적인 것에서는 의미를 찾지 못하고 정신적 고귀함을 추구하는 부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 경우는 굉장히 희소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본글을 읽고 보니 저는 당연히 물질에 집착한 부류예요. 신심을 갖게 된 것도 물질적인 것에서 오는 고통( 일상의 고통이라고 해야 옳을 듯)을 피해보자는 심산이었지 어떤 수승하고 고매한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다가 얻게된 신심은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스스로 신심을 얻게 되었다고 말하면서도.. 그 신심의 의미를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살고 있는가?>로 받아들이지 않고, <물질적인 것으로부터의 탈출구>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갑자기 부끄러움이 확 올라옵니다.
불교 하일라이트가 자비라는 것은 아는데요..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가 뭔가? 그 의미를 확실히 아는가? 가 키포인트겠죠. 자비라는 말에 들어있는 깊은 의미가 이해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어만 가져다 사용한다면 구호로 끝나고 말것이라고 생각해요. 자비라는 말의 의미가 심도있게 이해되어야 그 것을 나의 의지처로 만들 수도 있고 그것이 나의 의지처가 되었을 때 비로소 신심을 얻은 때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경을 보면.. 알아야한다는 말 정말 많이나오잖아요. ..정견을 가지라는 말이겠죠. 신심은 정견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첫댓글 좋은 질문을 해 주신 스민님 감사합니다.
댓글을 본글로 만들지 말라 하셨지만 이번엔 거역합니다. 신념, 신심에 대한 근본적 문제에 대한 지적이 저에게 굉장한 신선함으로 다가와서 멋대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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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을 가지는 일, 신념을 확립하는 일에 있어서 제가(제 수준에서)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있는데 참 아픈 지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람은 여러 부류가 있을 것 같아요.
물질 혹은 육체적 문제에 집착하는 부류가 거의 대부분일 것 같고요,
그렇게 물질적인 것에서는 의미를 찾지 못하고 정신적 고귀함을 추구하는 부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 경우는 굉장히 희소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본글을 읽고 보니 저는 당연히 물질에 집착한 부류예요.
신심을 갖게 된 것도 물질적인 것에서 오는 고통( 일상의 고통이라고 해야 옳을 듯)을 피해보자는 심산이었지 어떤 수승하고 고매한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다가 얻게된 신심은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스스로 신심을 얻게 되었다고 말하면서도.. 그 신심의 의미를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살고 있는가?>로 받아들이지 않고, <물질적인 것으로부터의 탈출구>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갑자기 부끄러움이 확 올라옵니다.
종교의 액기스는 신심이라고 본다.
불교 신심의 하일라이트는 자비이고
자비의 궁극은 분주히 오가는 마음을 소멸시켜 마음으로 인하여 불타는 세상을 구제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심의 하일라이트는 사랑이고
사랑의 궁극은 나를 죽여 나로 인해 불타는 세상을 구제하는 것이다.
불교 하일라이트가 자비라는 것은 아는데요..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가 뭔가? 그 의미를 확실히 아는가? 가 키포인트겠죠. 자비라는 말에 들어있는 깊은 의미가 이해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어만 가져다 사용한다면 구호로 끝나고 말것이라고 생각해요.
자비라는 말의 의미가 심도있게 이해되어야 그 것을 나의 의지처로 만들 수도 있고 그것이 나의 의지처가 되었을 때 비로소 신심을 얻은 때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경을 보면.. 알아야한다는 말 정말 많이나오잖아요. ..정견을 가지라는 말이겠죠. 신심은 정견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