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졸업을 일주일 정도 앞둔 이월 하순경으로 그날 아침은 몹씨 쌀쌀하고 바람이 차가웠었다.
교실에 들어서니 찬 공기로 썰렁하여 난로에 불 부터 피워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들어온 친구와 밖으로 나와 난로에 땔 나무를 찾으니 등걸토막 밖에 보이지 않아 그것을 쪼개려고 모탕 위에놓고 도끼로 내려치니 좀처럼 바로맞이 않고 빗맞아 얼음이 번질번질한 꽁꽁언 빈바닥에 쭉째기만 떨어진다.
찬 바람이 지나갈 때 마다 볼때기가 찟어지는 뜻 따갑고 손 발 끝은 실이다 못해 아리다. 추위를 도저히 참지 못하겠어서 등걸토막을 안고 교실로 들어갔다. 난로 옆에 등걸토막을 놓고 도끼로 내려치니 도끼가 등걸토막에 깊이 꽃여서 빠지지 않아 도끼가 등걸토막에 꽃인대로 들어서 바닥에 내려치니 방바닥 구둘장이 내려앉으며 시커먼 구들고래가 드러났다. 구들장이 내려앉이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이렇게 쉽게 내려앉을줄은 몰랐다.
내가 다니던 마차4리에 분덕분교 건물은 겨울 피란때 완전히 소실 되었다.
우리집 바로 옆에 일자형으로 긴 면사무소 사택건물이 비어 있었는데 그 건물 방 한구석에 터지지 않은 항아리만한 크기의 포탄이 지붕을 뚫고 들어와 있는것을 제거하고 방과 방 사이 벽을 헐고 수리하여 교실로 사용 하였으므로 방 바닥 밑에는 고래가 있었는데 그것이 드러난 것이다.
고 고인규 단임 선생님은 들어오면서 이내 방바닥이 내려앉은 것을 발견하고 누가 이랬는지 나오라고 추궁 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으나 계속추궁하니 누군가 내 앉은쪽을 가리켰는데 그때까지 나는 선뜻 내가 그랬다고 일어서지를 못했습니다.
불려나간 나는 선생님 앞에서 변명을 하려했지만 내 예기는 들으려 하지도 않고 "쪼맨한것이 이 삼일 후이면 졸업한다고 깽판을 처 " 하시며 입을 다물고 내가 때리는 대로 새라고 하였습니다. 그 큰 손바닥이 내 뺨에 철석하고 와 닫는 순간 내 눈에서는 별이 번쩍 했습니다. "하나"하니 왼쪽뺨을 때리고 "둘" 하니 또 오른쪽 뺨을 때렸습니다. 그렇게로 나는 계속세고 선생님은 때렸습니다. 사십까지 세고 나는 옆으로 쓰러졌습니다.
양쪽 볼이 후끈 거렸습니다. 선생님의 너무나 가혹한 처벌에 분하고 서러워서 집으로 오면서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가 보시고 네 얼굴이 왜 이렇게 부었냐고 하시기에 교실에서 있었던 일들을 사실대로 예기했습니다. 네가 맞을짓을 했다마는 어떻게 이렇게 까지 때릴 수 있느냐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옆에서 묵묵히 듣고계시던 아버지는 "이놈의 새끼 내 당장에 요절을 내 놓고 말거야"하시며 부르르 떨며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 일어서는 아버지의 두 눈에서는 불똥이 튀었습니다.근방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것 같은 아버지의 기세에 어머니는 겁을먹고 나가려는 아버지의 바지가랑이를 붇들고 제발 참자고 한사코 말리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친구들 사이에서는 "재옥"이는 졸업이 보류된다는 말이 누구 입에 선가 나와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졸업을 못하면 어떡허나 하고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친구들이 선생님댁에 놀러간다며 갖이 가자고 하였습니다. 나는 가고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졸업이 보류된다는 말이 신경이 쓰여 뒤따라 갔었읍니다.
친구들이 선생님과 이런 저런 예기를 주고 받을때 나느 뒤에 앉아 머리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반 시간 정도 시간이 흘렀슬까? 선생님은 나를보고 그날 많이 아팠지 하시며 위로의 말을 해 주셨습니다. 일 순간 졸업이 보류되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이때까지 선생님에게 품었던 나쁜 생각들이 봄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가벼운 마음으로 선생님 집을 나설 수 있었습니다. 2012. 11. 24.
첫댓글 거암, 잘읽었네. 그런일이있엇군, 거암답게 변명은 하지않코 말일세. 나는 이상하게도
국민학교시절의 일은 도통 생각이아나니...? 참으로 이상하다고 늘-생각한다.
매사 깨우치는게 남보다는 늦어서인걸 후일에 알게됐지만...그런 아름다운 추억들
하나도 기억해 내지 몾하는게 안타깝다. 그당시는 춥기는 추웠지. 난로가에
서로 앉으려고 하고. 나무구하려고 이리저리 쏘다니기도했지. 재미있는글 잘읽엇다.
종종 아름다운 추억들 올려주기 바라네.
나도 같이 다마치기 하고 재기차기 등 같이 놀던 친구들의 이름 같읕건 기억나는게
없읍네다 어쩌다 힘들게 넘겼던 시간들이 생각날 뿐...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겨울은
참으로 추웠었지 아버지가 광업소에 광부로 일한 노임을 현금보다는 쌀로 배급을
주었는데 배급타러 배급소에 가서 한 두 시간 엄동설한에 기다려보면 정말 요즘은
천국일세...ㅎㅎ
거암의 글을 묵묵히 읽어내려 가노라니 갑자기 국민핵교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이네.
그래그래~그때는 선상님의 말씀이라면 꼼짝도 몬했지..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체벌이구먼..
그담임선상~체벌이 너무 심한거 같으이..그러나 본인이 그일을 잊어버렸다니 추억만 남았구려
핵교 다닐때의 추억담 잘읽었수다.누가 또 학생시절의 야그를 해줄까 기다려 봅니다.
야초의 선상님은 하송리 김진억이지 요즘 문안인사 가끔 드리는가? ㅎㅎ
그때 그 고인규 선생님은 폐병환자로 40가치이 되었어도 장가를 가지못했는데
정신적인 히스태리 아니었나 생각되이...
그래 맞아 그때 많이 맞았지 40대를 맞았으니 참 많이 맞았네 난 몇차리 맞은줄알았는데 초등학교 6학년에 너무 가혹하였네 그선생님은 장가도 못가고 페병으로 돌아가셨지 참 그때가 옛날이네 맞은지 환갑이 지났구먼 좋은글 고마워요
벽암은 기억을 하는구만 ... 몇 차리가 뭔가 처음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큰 소리로 숫자를 세었는데
맛는회수가 쌓일수록 정신이 몽롱해 지드라구...40십 까지 세고 그 후엔 어떻게 되었는지 필림이 끊어
젔다가 집에 들어갈때 눈물을 흘리면서 들어간 기억이나네
국민학교 다닐때 추억거리가 나와서 나도 한마디 합네다.
그릉께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야그 올세다.
나는 녹전국민핵교 14회 졸업생인디..그때가 바로 1952년..
6.25 사변으로 학교는 인민군이 불태워 소실되고..
민간인 주택을 빌려 6학년 수업을 했었제..
졸업식은 학교가 없응께 운동장에 멍석을 깔아놓고
졸업생은 멍석위에 않히고 재학생들은 뒤에 도열하고 서있었고..
지금도 귀에 생생한 풍금소리!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하며 졸업가가 울려퍼지고..
마분지에 인쇄한 졸업장을 받아들고 교문을 나서던 그때가 어언 60년이 되었구랴..
아 ~ 추억의 옛날이여!
맞아 그 때가 어언 6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네
녹전국민학교도 사변후에 다시 지은 건물인가? 봄이면 벗꽃이 볼만하지
그라고 터가 좋아 장성이 나고 훌륭한 인제가 많이 베출되었다고 하지..건강하시기요
40번을 뺨을 때리다니! 그건 완죤 요즘말로 폭력이구먼유
두세번 때리면 마음이 가라앉기 마련인데 정말 독 한 슨상님이네.
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밋기지 않치요. 몇차리 때렸을때에 무릅을 굵고 앉아 잘못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빌었으면 선생님도 분이 풀렸을지 모르지요. 꼬박꼬박 세면서 오기를 부렸으니
선생님도 약이 더 올랐으리라 생각됩니다.
초등학교 졸업무렵 얘기 참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정말 너무 심한 체벌이었네요.. 그것도 난로 불 피우려는 과정에서 발생된 일인데 변명도 듣지않고.. 정말 억울했겠습니다.
요즘 세상엔 상상도 못할 일이지요.. 그땐 참 무서운 선생님도 있었지요..
이렇게 옛얘기 풀어 놓는 것이 70대의 우리들에겐 그것이 즐거운 얘기이던, 괴롭고 어려웠던 얘기이던 이젠 그것이 귀중한 추억이 됩니다..
자주 이런 추억담 들려주세요..
결과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도 중요하지요. 그런대 내 예기는 들어보지도 않고 때렸으니
정말 분하고 서러워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요즘 같으면 부모들이 가만이 있겠습니까 ?
선생님도 나중에 집에서 만났을때 진정으로 미안해 하는것 같아 마음에 품었던 나쁜 생각들이
일순간에 풀리더군요.
자초지종 들어보지도 않고 더군다나 어린제자의 종아리도아닌 뺨을 그렇게 치다니
이해불갑니다 그시절에나 있었을 체벌이네요
거암님의 오기도 대단하셨으니 그선생님에 그제자인듯 합니다 ㅎ
자존심 무너젔던 유년의 사실이 60년 세월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그려지지요?
요즘 이 삼일 안보이시는 것 갔았는데 어디 갔다 오셨나요.
하도 오래된 일이라 친구들도 다 잊어버렸을 줄 알았는데 갖이 졸업한 벽암과 제천에 이철호친구
희미하게라도 기억 하고있네요. 댓글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