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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은 갈 때마다 장려하더라 – 오색,대청봉,천불동계곡,소공원
1. 중청봉 내리면서 바라본 전경, 왼쪽 멀리는 금강산, 그 앞에 희게 보이는 산은 향로봉
그만큼 금수강산이라 불리는 한국의 자연미는 빼어나며, 흔히 금강산으로 대표된다. 하지만 6.25 이후 남쪽으로 넘
어오게 된 설악산도 금강산 못지않은 명산이요 웅산이다. 두 산을 비교해 보면 차라리 짐작이 수월하다. 금강산이
표고 1,638m인데다 설악산이 1,708m이다. 우선 그 높이에 있어 설악 쪽이 70m나 더하고, 봉우리 수는 금강이 1만
2,000봉, 설악은 7,000봉. 결국 낮은 산에 봉우리 수가 많은 금강은 아기자기한 느낌인데 반하여, 봉우리 수가 적으
면서 높은 설악은 오히려 굳게 뻗은 기상인 것은 뻔하다. (…) 묘향산이나 지리산 또는 한라산 같은 규모가 큰 이른
바 장산(壯山)이 아닌, 쭈빗쭈빗한 이런 웅산(雄山)만이 지니는 다양한 변화며 오밀조밀한 구성면에서 두 산이 함께
비슷하긴 하나, 그렇더라도 정교하면서도 여전히 꽉 짜인 설악의 산다운 기상은 금강산에 뒤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은 넘어선다.
—— 김장호(金長好, 1929~1999),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설악산’에서
▶ 산행일시 : 2024년 2월 8일(금) 맑음
▶ 산행코스 : 오색(남설악탐방지원센터),설악폭포,대청봉,중청봉,소청봉,희운각대피소,신선대 철난간 슬랩,
무너미고개,천불동계곡(양폭대피소,귀면암),비선대,소공원,B지구 상가(설악산 관리사무소)
▶ 산행거리 : 19.0km(시간 여유가 있어 이곳저곳을 들르느라 산행거리가 늘었다)
▶ 산행시간 : 11시간 30분(04 : 00 ~ 15 : 30)
▶ 교 통 편 : 다음매일산악회(29명) 버스로 가고 옴
▶ 구간별 시간
00 : 30 – 복정역 1번 출구
04 : 00 – 오색(남설악탐방지원센터), 산행시작
05 : 00 – 끝청봉 남릉, OK쉼터, 남설악탐방지원센터 1.7km, 대청봉 3.3km
05 : 35 – 설악폭포
07 : 17 – 대청봉(1,708.1m), 휴식( ~ 07 : 28)
07 : 54 – 중청봉 삼거리
08 : 18 – 소청봉(1,609.6m)
09 : 15 – 희운각대피소, 아침식사( ~ 09 : 35)
10 : 24 – 신선대 가는 길 슬랩 난간 끄트머리
10 : 50 – 무너미고개
11 : 48 – 양폭대피소, 휴식( ~ 12 : 02)
12 : 55 – 귀면암
13 : 31 – 비선대
15 : 05 – 소공원, 설악동탐방지원센터, 버스 종점
15 : 30 – B지구 상가(설악산 관리사무소), 산행종료, 버스출발(18 : 00)
19 : 18 – 가평휴게소( ~ 19 : 28)
20 : 18 - 복정역
2. 아침 첫 햇살 받는 끝청과 가리봉
▶ 대청봉(1,708.1m)
설악산 대청봉이 간신히 개방되었다. 지난 주말에 개방하였으나 주중에 폭설이 내려 설악산 전 구간을 통제하였다
가 2월 9일 04 : 00부터 대청봉만 다시 개방하였다. 이 개방에는 여러 산악회의 읍소(?)가 한몫했다고 한다. 산악회
들이 설악산국립공원에 4일 설 연휴기간 내내 통제할 거냐고, 제발 대청봉만이라도 개방해달라고 사정하였다 한다.
설악산 전 구간이 아니더라도 몇 개 구간을 개방하였더라면 나로서는 산행코스를 선택하는 데 퍽 고민했을 텐데 그
럴 필요가 없어졌다. 외길 구간이다.
대승령이나 귀때기청봉, 끝청봉, 공룡능선 등 주요 구간은 아마 올 겨울시즌에는 개방되기 어려울 것 같다. 가서 보
니 눈이 너무 깊어 일반 등산객이 다닐 수 있도록 눈길을 뚫는다는 게 가망이 없어 보였고, 오는 3월 4일부터 5월 15
일까지는 봄철 산불조심기간으로 출입을 통제하니, 굳이 개방하려고 애쓸 필요가 있을까 싶다. 오늘 무박으로 설악
산 대청봉을 가는 산악회는 다음매일과 좋은사람들, 반더룽 등 3개다.
오늘 우리를 안내할 북한산이 산행대장님은 오색 남설악탐방지원센터는 새벽에 언제라도 자유로이 출입할 수 알았
던 모양이다. 버스기사님은 설악산을 간다고만 알아서 설악동이려니 하고 갔고, 산행대장님은 버스기사님이 오색을
들머리로 하는 줄 알겠거니 하고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한잠 자고 일어나니 설악동 주차장이다. 버스기사님에
게 왜 여기로 오셨느냐며 오색으로 가자고 하고, 일행들에게는 산행시간이 30여분 늦어지게 되어 미안하다고 사과
하였다.
그러나 이게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난데가 아닌 쾌적한 버스 안에서 04시에 남설악탐방지원센터 철문이 열릴 때까
지 보낼 수 있었으니 말이다. 남설악탐방지원센터에 도착하자 진작 온 많은 등산객들이 철문이 열리기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대청봉에서 일출을 보게 되면 더욱 좋을 것이 아닌가. 그 시각에 맞추자면 04시에 산행을
시작하는 것이 적당하다. 철문이 열리자마자 내딛는 첫 걸음부터 깊은 눈길이다. 넓던 등로는 한 사람만이 지날 수
있도록 눈길이 뚫렸다. 길게 줄이어 간다. 앞사람을 추월하기 어렵다. 내 걸음이 아닌 남의 걸음으로 간다.
그러나 정체는 10분에 불과하였고, 1시간 30분 후에 설악폭포를 지날 때부터는 혼자 가는 산행이 되고 말았다. 가파
른 오르막 곳곳에는 쉼터를 마련해놓았으나 눈이 깊어 제구실을 하지 못하니 그 입구에서 잠시 서성이다 다시 가곤
한다. 긴 오르막은 끝청봉 남릉 마루턱인 OK쉼터에서 한 풀 꺾인다. 사면을 돌고 지능선을 넘고 다시 사면을 돈다.
오른쪽 캄캄한 사면 아래 관터골 계류 물 흐르는 소리가 어둠 속 적막을 오히려 더 적막하게 한다.
데크계단이나 지계곡 건너는 다만 눈길이다. 데크계단 오르막과 내리막은 가파른 설벽으로 변했다. 아무리 귀기우
려도 폭포 소리는 들리지 않는 설악폭포라는 지점을 지나고 긴 설벽을 오른다. 앞사람이 낸 발자국 계단을 오른다.
눈 속에 코 박고 오르다 고개 들면 멀리 앞선 사람의 헤드램프 불빛을 별빛으로 착각한다. 내 헤드램프가 벌써 지쳤
다. 어제 밤 집에서 나올 때 새로이 산 AAA 건전지 3개를 넣었는데 두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힘을 잃었다. 비상용
소형 손전등을 꺼내어 길을 밝힌다.
설악폭포 상단 능선이다. 바람은 불지 않지만 대기가 차디차다. 아침에 설악산 기온을 검색하니 영하 11도라고
했다. 체감온도는 그보다 훨씬 더 낮을 것 같다. 잠시 가쁜 숨을 돌리려고 등로 약간 비킨 그나마 눈이 얕은 노거수
잣나무 아래에 서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내 인기척에 깜짝 놀란다. 전봇대 가로등인 줄 알았단다. 밑에서 올려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1,300m 고지인 제2쉼터를 지나면 가파름은 상당히 수그러든다.
3. 여명, 일출 5분전
4. 여명, 일출 3분전, 점봉산이 고도처럼 보인다.
5. 일출 직후 화채봉
6. 왼쪽 멀리는 금강산. 그 앞에 희게 보이는 산은 향로봉
7. 가리봉과 서북능선, 오른쪽 뒤는 귀때기청봉
8. 중청봉
9. 일출
10. 일출 직후 점봉산
11. 멀리는 방태산 연봉
12. 화채봉
13. 중청봉과 소청봉
14. 능선 가운데가 소청봉
동녘 하늘은 길게 붉은 띠를 둘렀다. 대청봉 일출시각은 07시 24분이다. 아직 멀었다. 해무를 뚫고 나오려면 더 늦을
것이다. 걸음을 늦춘다. 대해 한가운데 희끄무레한 고도는 점봉산이다. 사면 길게 돌아올라 대청봉이다. 너덜 같은
돌들이 눈에 묻힌 설원이다. 대기가 워낙 차서 사진 찍기가 무척 힘들다. 털장갑을 끼었지만 셔터 누르는데 손이
엄청 시리다. 07시 20분이 지나고 반공에 해가 솟는다. 금세 눈부시다. 사방에 뭇 산들이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다.
아, 금강산이다. 북쪽 멀리 흰 눈을 이고 있는 그 연봉이 보인다. 그 앞은 향로봉이고 또 그 앞은 황철봉, 상봉, 신선
봉. 산악인 손경석(孫慶錫, 1926~2013)은 ‘빛깔있는 책들’ 시리즈 『설악산』(대원사, 1993)의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설악산(雪嶽山)은 금강산(金剛山)의 그늘에 가리어 있었다. 그래서 일찍이 산 이름은 알았지만 구석구석 찾는 사
람이 드물었다. 교통이 편한 금강산은 삼국시대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한때 한계산(寒溪山)으로도 부르던 설악
산은 접근하기가 너무나 어려웠었다. 금강산은 기차를 타고 철로를 통해 쉽게 갈 수 있었으나 설악산은 영(嶺) 두메
산골 준첩한 산길을 타야만 했었다. 조국 광복 뒤 38선은 금강산을 막아버렸다. 그리고 설악산마저 38선 이북 땅이
되었다.
6.25.뒤 설악산이 수복된 것은 1953년이다. 곧 설악산이 남한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1954년 이래 전혼(戰魂)이
감도는 설악산을 찾게 되었다. 어쩌면 염원의 금강산을 그리면서 설악산을 찾는 사람들이 몰렸을지 모른다. 다듬어
진 수려함이 금강산이라면 설악산은 자연 그대로의 장엄함이 있었다. 그곳에는 결코 금강산에 못지않은 화려함마저
있었다. 그래서 설악산 기암 괴석의 경관에는 금강산 같은 이름마저 붙게 되었다. 실상 금강산 버금가는 경관이
구석구석에 있음을 알고 닮은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대청봉에서 버틴 시간이 겨우 10분 남짓이다. 그래도 내가 오래 버틴 셈이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살을 도려내기
라도 하는 듯이 날카롭다. 너도나도 너무 춥다며 그만 내려가자고 서둔다. 날이 맑은 날에도 이러한데, 이사빈 시인
이 ‘눈이 내리는 겨울엔 설악산으로 가자’라고 하는 건 사뭇 낭만적이다. “대청봉 차가운 눈보라에 파묻혀/주머니 하
나 없는 눈사람이 되어/그곳에서 며칠쯤 세상 등지고 살아 보자”라니. 시인이 실제 겨울날 대청봉에 올랐을까 하는
의문이 강하게 든다.
눈이 내리는 겨울엔 설악산으로 가자
대청봉 한 귀퉁이 야불딱 어디쯤에서
하얗게 쏟아지는 눈발 맞으며
세상 근심 모두 다 떨어뜨려 버리고
곱사등마냥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는
질기디,
질긴 고독도 떼어 내 버리자
더러는 두고 온 것들 생각에
아쉬움과 미련이 점철되어 오겠지만
떠나왔다는 것만으로 족하고
아름다운 행복임을 감사하며
대청봉 차가운 눈보라에 파묻혀
주머니 하나 없는 눈사람이 되어
그곳에서 며칠쯤 세상 등지고 살아 보자
(……)
대청봉을 내리면서 둘러보는 경치도 장관이고 대관이다. 첫 햇살 받는 봉봉이 화려하기 그지없다. 가리봉의 준절함,
공룡능선의 장중함, 금강산의 아득함, 화채봉의 엄중함 등이 몇 걸음 가다 멈추고 보고 또 보게 한다. 마치 스펙터클
한 아이맥스 영화인 듯 몽중환상인 듯한 경치다. 중청대피소 자리에서 잠시 눈과 숨을 고른다. 대피소 건물은 철거
하였고 다른 시설을 짓느라 터를 고르는 중이다. 끝청봉 가는 갈림길은 막았다. 눈이 적어도 1m 이상은 쌓였다.
이정표의 상부 방향표시판만 눈 위에 남았다.
중청봉 오른쪽 사면을 길게 돌아 주릉에 오르고 귀때기청봉과 공룡능선, 그 너머의 마등봉, 황철봉을 발로 줌인한
다. 눈을 돌릴 때마다 고개를 들 때마다 주변 경치가 변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햇빛 조명 때문이다. 용아능선은 어떤
모습일까? 눈비비고 자세히 내려다보니 산그늘에 그 현란하던 정교함이 뭉개졌다. 아이맥스 영화는 다시 시작된다.
향로봉, 금강산이 한층 가깝다.
16. 소청봉 동쪽 사면
17. 공룡능선
18. 끝청봉과 가리봉(뒤)
19. 앞은 끝청봉, 그 뒤는 가리봉, 오른쪽 뒤는 귀때기청봉
20. 가운데가 소청봉, 멀리 뒤는 칠절봉(?)
21. 아침 첫 햇살 받는 끝청봉과 가리봉
22. 맨 뒤부터 금강산, 향로봉, 황철봉, 마등봉
26. 왼쪽은 끝청봉
27. 왼쪽은 화채봉
▶ 희운각대피소
소청봉. 소청대피소 가는 길은 몇 사람이 지나갔다(소청봉에서 오세암, 백담사 가는 코스는 2월 11일 04 :00 기준
추가로 개방되었다). 우리는 아직은 외길인 희운각대피소로 간다. 소청봉에서 희운각대피소 가는 길 1.3km는 사면
도는 몇 미터를 제외하고는 봅슬레이 경주장으로 변했다. 아예 엉덩이에 부착하는 플라스틱 깔판을 준비해온 사람
들도 있다. 가파른 설벽이라 처음에는 약간 겁이 나지만 두어 번 미끄럼 타고 나면 아주 재미 들린다. 종종 나오는
철계단도 설벽이라 순식간에 내리고 만다.
그러는 중에도 등로 벗어난 바위에 발자국 계단 딛고 올라서 한층 가까워진 공룡능선을 바라보곤 한다. 희운각대피
소는 새로이 단장하였다. 마당에 눈길을 세 가닥 뚫었는데 거의 키에 차는 눈 속이다. 취사장이 꽉 찼다. 나도 틈 비
집고 구석에 자리 잡는다. 늦은 아침밥 먹는다. 여태 물 한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시루떡과 빵, 과일을 싸왔다. 탁주
는 국공 몰래 노란 양재기가 아닌 컵에 따라 마신다. 국공이 CCTV로 우리를 관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보온병에
담아온 더운물로 봉지 커피 타 마시고 일어난다.
혹시 공룡능선은 누군가 갔을까? 누군가 갔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공룡능선 마등령까지는 너무 먼 눈길이고 신선
대는 오르고 싶다. 거기서 공룡능선의 겨울을 다시 보고 싶다. 희운각 대피소에서 신선대까지 0.8km이다. 지금 시
간이 09시 35분이고 산행마감시간이 18시이니 넉넉하다. 전망대 올라 만물상 둘러보고 무너미고개로 내린다. 공룡
능선으로 누군가 갔다. 한 사람 발자국이다. 큰 숨 한 번 몰아쉬고 나서 그 발자국을 뒤쫓는다.
그 발자국이 허벅지가 차도록 빠진 데에서는 별 수 없이 나도 빠져 허우적거린다. 설악산을 잘 아는 사람의 발자국
이다. 아무 흔적 없는 설원에 공룡능선 등로를 정확히 간다. 그 발자국도 힘들지만 이를 쫓는 내 발자국도 힘들다.
그 발자국 정체를 알아낸다. 한 차례 사면 길게 돌아내리고 골짜기 건너 사면을 오르는 중이다. 젊은 청년 홀로 산꾼
이다. 반가워서 인사 건넨다. 설악동에서 혼자 왔다고 한다. 대청봉을 오르려니 우선 소청봉 눈길을 오를 자신이 없
어 신선대나 갔다 오자 하고 나섰단다.
나는 신선대에 올라 공룡능선의 겨울을 보고 싶어서 왔노라고 하니 자기도 그렇다고 한다. 눈을 자근자근 다진 다음
발을 내디딘다. 그래도 푹 빠진다. 한 발 한 발 그러하니 시간이 꽤 걸린다. 가파른 설벽은 고약하여 제자리걸음하기
일쑤다. 그예 힘이 빠지고 잠시 기운을 보충한 다음 다시 시작한다. 오히려 철 난간이 있는 슬랩을 오르기 쉽다. 발
이 확실하게 암벽에 닿아서다. 어려운 곳은 철 난간이 끝난 곳이다. 2~3미터 더 올라야 능선마루다. 자칫하면 눈사
태를 만들어 절벽 아래로 구를 수도 있다. 눈 속 헤집고 더듬어 어렵사리 올라선다.
땅과 하늘의 방랑자인 헤르만 불(Hermann Buhl, 1924~1957)도 낭가 파르바트에서 한때 그랬다.
“정상에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기로 했다. 나는 정상을 생각하지 않았다. 도대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렇
게 해서 몇 시간이 지나갔다. 나는 걷고 또 걸었다. 그러고 오로지 위만 보고 수 미터 앞만 본다. 위에 도달해서 더
이상 오를 수 없을 때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산행을 통해서 목표를 눈앞에 두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
는 습관을 붙여 왔다. 돌아서거나 기권하는 것은 결국 약한 탓이며 이런 것이 내게는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는
좀 달랐다. 지치고 지친 몸을 앞으로 내모는 것은 어떤 이해하기 힘들고 저항하기 어려운 힘이다.”(헤르만 불, 김영
도 옮김, 『8000미터 위와 아래』, 수문출판사, 1997)
신선대가 보이지만 아득하다. 거기까지 0.4km나 될까. 더 갈 자신이 없다. 허벅지에 쥐가 난다. 건설이 아닌 약간
습설인 눈 속에서 발을 빼자니 허벅지가 아프도록 쥐가 난다. 저기까지 가자면 꼭 무슨 사단이 일어날 것만 같다.
그 사람에게 이런 사정을 설명하고 뒤돌아선다. 저 앞 정상을 앞두고 뒤돌아서는 것도 용기다. 전혀 억울하지 않다.
잘한 결정이다. 철 난간 슬랩 내리고 골짜기 건너 오를 때다. 설벽이 4m쯤 될까. 방금 전에 내려올 때와는 딴판이다.
잡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스틱도 소용없다. 헛걸음이 잦고 눈 속에 묻힌다. 몇 번 허우적거리니 허벅지가 뒤
틀리도록 쥐가 난다. 아예 드러누워 다리를 주무른다. 문득 조난이 먼 데 있지 않다는 것을 실감한다. 나는 휴대전화
를 버스 안에 두고 와서 외부와 연락할 수단이 없다. 다행히 바람은 없고 날씨가 맑다. 신선대 간다는 그 사람이
머지않아 뒤돌아올 것이니 든든한 담보다. 그런 조건이 없이 만약 바람이 불어대는 등 날이 궂고 기온이 급강하하면
어떻게 될까? 눈 속에서 빠져나오기는 힘들고 마침내 지치고 말면 어떻게 될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내
정신은 맑고 차분하다.
교목은 관목으로 변했다. 눈 속 헤집어 그 가지를 찾아내어 붙잡는다. 나뭇가지를 힘껏 당겨 올라서려는데 그 가지
가 부러지고 눈 속에 처박히고 만다. 성급했다. 나뭇가지를 느긋이 잡아당긴다. 살금살금 한 발 한 발 옮긴다. 성공
이다. 다만 손이 흠뻑 젖었을 뿐이다. 털장갑을 갈아 끼기 세 번째다. 이제는 무너미고개를 가기가 아까보다 훨씬 더
수월하다. 무너미고개에서 국공과 만난다. 왜 출입통제된 거기서 오시느냐고 한다. 신선대를 갈까 하고 조금 가다
눈이 깊어 더 못 가겠어서 뒤돌아오는 중이라고 하자, 잘하셨다고 한다. 국공에게 칭찬을 받을 때가 있다니.
28. 귀때기청봉
30. 앞에서부터 소청봉, 공룡능선 1,275m봉, 마등봉, 황철봉, 그 오른쪽 뒤는 상봉
31. 가리봉과 주걱봉
32. 앞에서부터 소청봉, 공룡능선 1,275m봉, 마등봉, 황철봉, 그 오른쪽 뒤는 상봉
35. 앞에서부터 공룡능선 1,275m봉, 마등봉, 황철봉, 그 오른쪽 뒤는 상봉
36. 앞에서부터 공룡능선, 마등봉, 황철봉
▶ 천불동계곡, 소공원
천불동계곡으로 내리는 길도 사납다. 눈이 습설로 변해 아이젠에 뚱뚱하게 달라붙는 통에 걷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
니다. 몇 걸음 가다 털어 내곤 하는데 귀찮아서 아이젠을 벗어버렸더니 걸핏하면 넘어진다. 계곡 길은 심한 오르내
리막이 없고 걸음이 편하니 주변 경치를 둘러볼 여유가 생긴다. 설악산은 사시사철 장려하고 올 때마다 장려하다.
두고 가는 경치가 아깝고 저 산모퉁이 돌면 또 어떤 펼쳐질까 궁금하다. 천불동계곡 건너는 다리가 설릉으로 변했
다. 난간까지 눈이 똥똥하게 쌓였다.
천당폭포는 겨울잠을 곤히 자는 중이다. 코 고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 아래 양폭대피소가 한가하다. 양광 가득
한 마당에 의자 붙은 탁자가 비었다. 휴식한다. 여기서도 국공 몰래 탁주 독작한다. 더 맛있다.
김삿갓과 공허선승(空虛禪僧)이 금강산에서 나누었다는 시화(詩話)가 생각나는 그런 계곡 길이다.
月白雪白天地白 달도 희고 눈도 희고 천지가 다 희다.
山深水深客愁深 산도 깊고 물도 깊고 나그네 수심도 깊다.
산자락 돌다가 데크계단 길게 오르면 귀면암 쉼터다. 배낭 벗어놓고 가쁜 숨을 고른다. 귀면암은 잔도에서 뒤돌아
볼 때 그 모습이 분명하다. 계곡도 볼거리다. 계곡 너덜은 군집한 설봉들의 미니어처로 보인다. 황철봉이나 귀때기
청봉의 너덜도 이럴까 궁금하다. 틀림없이 보기 드문 장관일 것이다. 데크계단 오르고 산모퉁이 돌아 장군봉이 보이
면 비선대가 가깝다. 장군봉은 듬직한 남아의 모습이고 그 옆 유선대는 늘씬한 미녀의 모습이다. 금강굴 가는 길은
열렸을까? 거기서 보는 공룡능선 쪽이 가경이라 들르려고 마음먹는다.
그러나 금강굴 가는 길은 통제다. 눈으로 가늠해보고 비선대 무지개다리 건넌다. 적벽을 수렴 걷고 좀 더 자세히 보
려면 등로 옆 바위에 올라야 하는데 눈이 깊어 그만 둔다. 소공원 가는 길 3km. 여느 때는 정작 험로로 지루했지만
오늘은 전후좌우가 다양한 설경이라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 여기도 폭설이 내렸지만 나무들이 그에 단련되어서인지
지난주 명지산에서처럼 부러지지 않았다. 신흥사 청동대불을 지나고부터 많은 사람들이 붐빈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 권금성이나 올라 대청봉과 공룡능선을 전망할까 하고 매표소에 다가간다. 1시간 후에 케이블카
를 탈 수 있고, 요금은 15,000원이다. 거기 가지 않을 이유를 만든다. 거기 갔다 오면 시간이 빡빡하겠고, 무엇보다
지금 시간이 15시 20분이니 전경이 역광이라 실루엣으로만 보일 것이다. 물론 설악은 실루엣도 아름답지만 그걸 보
기에는 약간 아깝다. 돌아선다. 먼발치에서나마 울산바위를 보자 하고 비룡교를 건넌다. 해끔한 그 모습이 반갑다.
소공원 주차장. B지구 상가(설악산 관리사무소) 가는 버스는 30분 후에나 있다. 거기까지 거리는 2km 남짓이다.
걸어간다. 다행히 인도는 걸어 다닐 수 있도록 눈길을 냈다. 버스보다 먼저 B지구 상가에 도착한다. 일행 대부분 산
행을 마쳤다. 북한산이 대장님은 당초 예정보다 일찍 서울로 갈 수 있겠다 싶어 개개 일행을 전화 걸어 점검했는데
여자 두 분이 비선대가 조금 남았다고 한다. 어쩌면 18시에도 출발하기 어렵겠다. 음식점 난로 옆에 둘러앉아 술추
렴한다.
38. 왼쪽이 공룡능선 1,275m봉, 그 뒤는 세존봉
39. 공룡능선
42. 범봉
43. 신선대, 저기를 가다가 말았다. 눈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허벅지에 쥐가 났다.
44. 범봉
45. 신선대 옆 만물상
46. 희운각대피소 주변 설사면
47. 맨 아래는 양폭대피소
48. 비선대 위 장군봉, 그 뒤 왼쪽은 유선대(遊仙臺)
49. 적벽과 장군봉(왼쪽)
50. 쌍천. 돌 위에 눈이 소담스레 쌓였다
51. 비룡교 건너서 바라본 울산바위
첫댓글 한겨울에 저렇게 오래 걸어셨으니 쥐가 날만도 합니다.
덕분에 멋진 설악을 구경하네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는 삭았나 봅니다.
하늘재 님이 어찌나 설악산 자랑을 하시던지, 욕심 좀 냈습니다.^^
기어이 서락에 드셨구여
단일 코스라 갈등은 읍네요
외길 한 코스라 얼마나 홀가분하던지.
설악의 겨울은 시즌 아웃입니다.
그렇게 가고 싶어 하시더니 소원풀이 하셨네요 ㅋㅋ 올겨울처럼 이렇게 단일코스만 개방한적이 없었던거 같습니다. 눈이 많이 오긴 했어요 ㅋㅋ
몇해전인가 신선봉 가다가 저도 포기했어요. 다리에 쥐가 날만 합니다. 사진보시면 ㄷㄷ
그랬군요.
잘못하다가는 눈 속에 파묻혀 죽겠더라니깐요,ㅠㅠ
쥐가 날 정도로 설악의 눈길을 즐기셨군요. 부럽네요.
산은 겨울산 그중에도 설악산입니다.^^
설악에 눈이 많군요. 올 겨울에 공룡이나 한번 가볼려고 헀는데 꽝입니다. 겨울 설악의 이모저모를 잘 보고 갑니다.
올 설악 겨울시즌은 끝난 것 같습니다.
신선대에서 공룡능선을 바라보는 것조차 어려울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