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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8 묵상글 ( 부활 제2주간 토요일. - ‘거침없는 기쁨’을 찾기를 .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강론글 : 아직 / 06:52 추가
* '거침없는 기쁨 ' - 호명환 신부님 첫째글 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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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8. 부활 제2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4.18 05:56
- 우리 인생 길에서 뒤집히는 일이 생긴다면
오늘 복음은 제자들끼리 호수를 건너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주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십니다.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저는 오늘 이 말씀에서 ‘아직’에 초점을 맞춰봤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아직 제자들에게 가지 않으셨을까요?
오늘 복음 요한복음은 공관 복음과 달리
제자들이 왜 자기들끼리 떠났는지
주님은 왜 같이 떠나지 않으셨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고 함으로써 애초부터
제자들끼리만 가게 할 생각은 없으셨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함께 가실 생각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같이 가시지 왜 제자들끼리만 가게 하신 걸까요?
물론 주님께 말씀드리지 않고 자기들끼리 떠났을 수도 있고,
닥칠 일을 생각지 못하고 다시 말해서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만만하게 생각하고 자기들끼리 떠났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나중에 보게 되듯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마땅합니다.
우리 수도 공동체나 가정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없이 우리끼리 서로 합을 잘 맞추면 되리라고 생각하고
어디를 떠나 어디로 갔다면 우리 공동체도 풍비박산 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런 것이라면 주님께서 이것을 알고도 내버려 두신 것일 겁니다.
자기들끼리만 떠나는 것을 막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막지 않고 내버려 두신 겁니다.
인생의 어둠이랄까 어두운 밤이랄까 이런 것을 겪어보라고,
집안이 몰락하고 생사가 오가는 체험을 해보라고,
그런 가운데서 있는 힘 다 써 기진맥진하게 되고
극도의 두려움도 체험해보라고 내버려 두신 겁니다.
두려움은,
두려움 중에서 극도의 두려움은,
그것도 피할 수 없는 극도의 두려움은
하느님을 체험하게 하고 그래서 마침내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피하지 않고 극도의 두려움을 직면하기만 하면
분명히 하느님을 체험하고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극도의 두려움을 마주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마주하지 못하는 저를 주님께서 언젠가 극단으로 모실 것입니다.
나병 환자를 그렇게 두려워하던 프란치스코를 주님께서 직면하게 하셨듯이,
가나안을 향해 가던 광야에서 불평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불 뱀에 물려 죽게 되자
구리 불 뱀을 만들어 매달아 달고 우러러보게 하셨듯이 저도 직면하게 하실 때
그때 제 입에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비는 오늘 저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길에서 배가 뒤집히는 그런 일이 생긴다면
풍파 때문에 뒤집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안 계시기에 뒤집힌다는 것을 깨닫도록 가르침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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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8. 부활 제2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내면으로의 정신의 이주(Inward migration)!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의 시선이 어디에 머무느냐에 따라, 세상은 추함으로 가득할 수도 있고, 은총의 아름다움이 충만할 수도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관상과 해방, 그리고 활동
내면으로의 정신의 이주(Inward migration)
2026년 4월 17일 금요일
Brian McLaren은 묵상과 공동체가 어떻게 그를 하느님 나라의 가치에 따라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는지를 성찰합니다:
제가 뉴스에 중독되어 살던 시절, 세상의 추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묘한 쾌감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건강하지 못한 불길을 키우는 일이었습니다. 도덕적 우월감, 원망, 두려움, 절망, 내적 황폐, 그리고 ‘우리 대 그들’이라는 적대적 분열…. 이러한 것들이 제 안에서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우리가 만들어내는 내적 현실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것이 추하든 아름답든, 거짓이든 참이든 말입니다. 이러한 내적 현실은 우리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결국 외적 행동에 영향을 줍니다. 우리는 마음속 세계를 바깥 현실과 닮게 만들어 갑니다. 따라서 우리의 시선이 어디에 머무느냐에 따라, 세상은 추함으로 가득할 수도 있고, 은총의 아름다움이 충만할 수도 있습니다.
알렉시스 라이트(Alexis Wright)는 호주의 원주민 작가입니다. 그곳 원주민인 그녀는 "세상의 종말"이 이미 수세기 동안 원주민들에게 계속되어 왔음을 이해합니다. 그녀는 식민 지배자와 피지배자 모두가 식민적 사고방식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유를 향한 첫걸음은 우리의 정신을 탈식민화하거나, 세속적 가치에 얽매이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규정하는 바"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내적 힘을 키울 수 있습니다. 그녀는 이러한 해방을 "마음의 주권"[1]이라 부릅니다….
정신의 주권에 이르는 여정은 내면으로의 이주를 필요로 합니다. 겉으로는 여전히 국가와 문화, 경제와 문명 안에 살고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그로부터 피난민처럼 내적으로 물러나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마음 깊은 곳으로 물러나 내적 여정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알렉시스 라이트가 "내적 이주"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저는 예수님께서 자주 말씀하셨지만 잘 이해되지 않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표현에 대해 새로운 통찰력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내면에(가운데) 있다."(루카 17,21)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네 골방에 들어가라."(마태 6,6)고 하시는데, 그곳은 의식의 가장 깊은 방, 곧 우리의 내적 성소로서 우리로 하여금 다르게 생각하도록 해 주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참되게 우리의 소망과 갈망을 식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이 내적 이주, 곧 영적 이주를 어떻게 하는지를 배우게 되면, 같은 길을 걸으면서 자유와 정신의 주권을 발견한 이들을 찾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마태 18,2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들어 보아라. 나는 너희의 수가 그리 많지 않음을 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추함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음을 안다. 그러나 나는 너희는 아름다움이 충만한 다른 이야기를 배우고 있다는 것도 안다. 너희는 내가 물리적으로 현존하여 아름다운 이야기를 너희에게 들려주지 않아도 된다. 너희 스스로 그 아름다운 이야기를 서로에게 전해 줄 수 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여 세상 안에서 나의 길을 살아간다면, 너희는 저항의 작은 세포가 되고, 변혁의 전초기지가 되며, 아름다움이 움터나는 씨앗의 터가 될 수 있다."
이 위험한 시대에 제가 상상할 수 있는 제도 종교의 가장 좋은 미래는 이것입니다. 과거의 향수에 머물며 그 안에 갇히도록 돕는 대신, 신앙 공동체는 사람들을 "내적 이주"의 길로 이끌어 정신의 주권을 회복하게 해야 합니다. 세상 속 추함이 점점 더 커져가는 현실 속에서도, 신앙인은 아름다움을 키우고, 보고, 만들고, 맛들이도록 부르심 받고 있는 것입니다. 내면에서 아름다움을 음미하는 이는 결국 외적인 행동에서도 아름다움을 드러내게 됩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그렉 보일 신부님의 묵상(The meditation)은 제 마음을 깊이 울렸습니다. 특히 이 구절이 그렇습니다: “도덕적 탐구는 우리를 도덕적으로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서로를 멀어지게 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제 도덕적 탐구를 내려놓고, 온전함과 사랑의 충만함, 그리고 거침없는 기쁨의 여정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거침없는 기쁨(Defiant joy)’!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입니까!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침없는 기쁨을 추구해야 합니다. 저는 지금 암센터로 걸어가는 길, 수술 당일 병원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 휠체어가 아닌 제 발걸음으로 수술실에 들어가는 길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거침없는 건강(Defiant health)’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거침없는 기쁨’을 찾기를 고대합니다!
—Lea M.
References
[1] Alexis Wright, from “The Inward Migration in Apocalyptic Times,” Emergence Magazine (October 26, 2022).
Brian D. McLaren, Life After Doom: Wisdom and Courage for a World Falling Apart (St. Martin’s Essentials, 2024), 214, 215, 216–217.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Annie Quick, untitled (detail), 2025, photo, Albuquerque.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맨발로 땅에 닿아 서 있는 것은 고요한 수도자의 몸짓을 의미합니다. 즉각적인 반응은 그 힘을 잃고, 대신 관상적 응답이 솟아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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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그리스도로 변모해 가는 여정!
제자들이 밤에 갈릴래아 호수에서 풍랑에 휘말렸을 때, 그들의 마음속에 떠오른 연상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 그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놀라움과 공포에 사로잡힌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에서 "나다!"의 그리스어 원문은 ἐγώ εἰμι(에고 에이미), 즉 "나는 있는 나다"라는 뜻으로, 이는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을 계시하실 때 사용하신 "나는 있는 나다"를 떠올리게 합니다. 구약성경 전체에 흐르는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하느님의 바다에 대한 권능입니다. 이 권능으로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해방되었고, 홍해를 건너 구원을 체험했습니다. 요한 복음사가 역시 이러한 연상을 독자에게 불러일으키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이 이야기가 전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주님께서는 가장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오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상식과 이성이라는 "견고한 땅" 위에 앉아 이 이성과 상식이라는 세상적인 나침반에 의지합니다. 물론 그것은 정상적이고 필요한 태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넘어, 인간의 계산과 논리를 초월하여 역사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사실도 우리는 분명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주님은 언제 어디서든 우리 곁으로 오시는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것이 만물 위에 군림하시는 당신의 주권을 드러내시는 특별한 계시의 사건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동시에 이는 예수님께서 어둡고 거센 바다로 상징되는 악마와 어둠의 세력에 대한 승리를 극적으로 보여주시는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만나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여 있는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권고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드신 후 하신 말씀, 즉 "용기를 내어라. 내가 이미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라고 하신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그 첫 아침에도 여인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인간의 원수인 죄와 죽음을 이기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서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불안하고 힘겨워하고 두려워할 때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에게 두려움을 떨쳐 낼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어 의식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삶을 우리 주님께 온전히 열어드려 어둠의 세력이 공격해 와도 주님께 전적인 신뢰와 믿음을 두어 두려움과 초조함, 불안에 빠지 말라는 초대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주 어떤 불확실함이나 두려움, 시련 등에 빠지게 될 때 우선은 세상적인 논리나 계산, 인간적 능력 등에 의지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물론 우리도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힘에 협조하여 마음을 다지고 행동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또 하느님께서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사건들을 통해 당신의 일을 하신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받아들여야 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우리가 어떤 힘에 토대를 두고 마음을 다지고 행동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의 논리나 계산과 같은 세상적인 힘에 토대를 두는지, 아니면 온 우주를 당신 사랑의 권능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느님의 힘에 토대를 두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의 유혹과 혼란 속에서 넘어지고 또 넘어지더라도, 다시 또다시 이 하느님의 사랑과 섭리에 토대를 두려는 노력(수양)을 끊임없이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로 변모해 가는 여정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여정에 들어서는 것이 예수님께서 니꼬데모에게 말씀하신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토대가 세상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낭패를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갈등, 서로간의 불화와 단절, 인간성을 잃어가는 우리 사회의 모습 등은 이런 낭패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촉구하십니다.
"온전히 하느님 사랑에 우리 삶의 토대를 두라!"고요....
얼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것이 바로 "참된 믿음"인 것입니다!
봄이 오니 어김없이 새벽 소쩍새 노랫소리가 들립니다.... 우리 주님은 불안과 두려움 속에 있는 우리 곁을 어김없이 찾아와 주시는 분이시라는 진리를 확언해 주는 듯한 노랫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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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8.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다섯 번째 표징으로,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시는 장면입니다. (앞 장면인 ‘5천명을 먹이신 이야기’가 출애굽의 만나의 기적을 떠올리게 한다면, ‘풍랑이 이는 호수를 건넌 이야기’는 홍해를 건넌 사건을 기억하게 해 줍니다. 또한 ‘5천명을 먹인 이야기’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미리 보여준다면, ‘풍랑이 이는 호수를 건넌 이야기’는 죽음을 제압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떠나온 제자들의 ‘호수’에는 어둠이 짙습니다. 배는 이미 뭍에서 10여리쯤 떨어졌고 이미 어두워졌는데, 큰 바람이 불어 물결이 높게 일었습니다. ‘밤’은 어둠의 세력이고 ‘큰 물결’은 죽음의 세력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서, 곧 어둠과 죽음의 세력을 정복하시고 배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이는 갈대바다를 건넌 이야기와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파스카 축제와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욥기>에서 하느님을 “바다의 등을 밟으시는 분”(욥 9,8)라 일컬었듯이, 호수 위를 걸어오며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시면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마치 <탈출기>(3,14)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나다”라고 계시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구원하는 하느님이다”라고 당신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때야, 제자들은 눈이 열리고 예수님을 배 안으로 맞아들이려고 하였지만, 배는 “어느새”(6,21) 이미 그들의 목적지에 가 닿았습니다. 배가 뭍에 가까이 왔기 때문에 가 닿은 것이 아니라, 호수 한복판에서 풍랑에 시달리던 배가 제자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자 “어느새” 목적지인 카파르나움에 도착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짧은 장면 안에서 세 번에 걸쳐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곧 물 위를 걸으심으로 권능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이요, “나다”라고 당신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시는 하느님이요, 풍랑 속의 배를 “즉시” 뭍에 이르게 하시는 구원자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은 오늘도 풍랑과 어둠의 바다를 건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분께서 우리를 무사히 건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는 이미 ‘건너와’ 파스카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 어떤 풍랑과 좌절 속에서도 언제나 돛대를 높이 세워, 성령의 바람을 타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흔들리지 않고는 나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아니 흔들릴 때라야 오히려 앞으로 나아감을 알기에, 흔들림 속에서 주님께 믿음으로 의탁하고 성령의 바람을 타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주님!
오늘도 끊임없이 항해 하게 하소서.
항구에 평온히 정박해 있기보다
어두움을 헤치고 풍랑을 뚫고 가게 하소서.
비록 흔들릴지라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흔들림 속에서 믿음과 의탁을 배우게 하소서.
오늘도 성령의 바람을 태워 가야할 곳으로 저를 인도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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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8.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집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두 개의 원이 겹치면 그 가운데에 공통되는 부분이 생깁니다.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어느 순간 만나서 하나가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 그런 교집합을 보았습니다. 킬린(Killeen)의 한인 공동체를 다녀왔습니다. 그 공동체에는 10년 동안 한국인 사제가 없었습니다. 한국어 미사도 없었고, 한국어 고백성사도 쉽지 않았습니다. 한국어로 신앙을 나누는 사순 특강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교우들이 오후 1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함께했습니다. 고백성사를 보고, 미사를 봉헌하고, 사순 특강을 들었습니다. 다섯 시간이 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그 시간에는 신앙에 대한 갈망과 정성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중용’ 23장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작은 것에 정성을 다하면 참됨이 생긴다. 참됨이 드러나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을 움직이면 변화가 일어나며 마침내 세상이 변화된다.” 신앙은 결국 정성에서 시작됩니다. 본당에서도 특강이 있었습니다. 보통 특강은 한 시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신부님은 묵주기도, 강의, 성시간을 함께 하셨습니다. 네 시간이 넘는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성체 강복을 해 주시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안수해 주셨습니다. 바쁜 현대 사회는 빠른 것을 좋아합니다. 신앙에도 ‘빨리빨리’가 있습니다. 짧은 기도, 짧은 강의, 짧은 미사. 편리하고 좋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깊은 울림이 부족합니다.
이번 특강에는 깊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정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중요한 결정을 합니다. 공동체가 커지면서 해야 할 일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나누는 일, 재산을 관리하는 일, 공동체를 돌보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이렇게 해서 부제들이 선발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교회의 첫 번째 협력 사목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것을 농담처럼 ‘땜빵 사목’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교회의 지혜였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집중하고 다른 이들은 공동체를 돌보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고 제자들의 수가 많이 늘어났다.” 교회는 이렇게 성장해 왔습니다. 교구는 공동체를 조직하고 이끌어 왔고, 수도회는 교구가 미처 돌보지 못하는 영적인 갈망을 채워 주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수도회에는 재속회가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영적으로 목마른 사람들이 모여 함께 기도하고 신앙을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생각해 보면 교회의 역사는 정성을 다하는 사람들의 역사였습니다. 정성을 다해 기도하는 사람 정성을 다해 미사를 봉헌하는 사람 정성을 다해 신앙을 나누는 사람 그 정성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바다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신앙은 빠른 속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깊은 만남에서 옵니다. 정성스럽게 드리는 기도, 정성스럽게 드리는 미사, 정성스럽게 나누는 신앙, 그곳에서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리고 그 음성은 우리의 삶을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변화시킵니다. 중용의 말처럼 정성은 사람을 움직이고 사람이 움직이면 세상이 변화됩니다. 오늘 우리의 작은 정성이 우리 가정과 공동체를 변화시키고 마침내 이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한 곳으로 만들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정성 위에 은총을 더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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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8.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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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망의 끝에서 손잡아 주시는 주님! 갈릴래아 호수는 마치 사람 심장 모양을 닮았는데, 호수 가운데를 열십자(+)로 그어보면 수직선 부분, 즉 남북으로는 대략 17~18킬로미터, 수평선 부분, 곧 동서로 대략 11킬로미터입니다. 이곳을 갈릴래아 호수라고 부르는 것은 갈릴래아 지방 북동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릴래아 호수에 담긴 물은 이스라엘 최북단에 위치한 도시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 너머 헤르몬산 쪽에서 유입됩니다. 갈릴래아 호수에 채워진 물은 요르단 강을 거쳐 사해로 흘러가게 되지요. 호수가 꽤나 컸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이 호수를 갈릴래아 바다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호수에는 다른 이름이 두 개 더 있는데, 하나는 겐네사렛 호수입니다. 겐네사렛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프를 뜻하는데, 호수가 하프 모양을 닮았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또 다른 이름으로 신약성경 시대에는 티베리아스 호수라고 불렸습니다. 이 명칭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기에 로마를 다스리던 티베리우스 황제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존 킬갈렌 저, 최고의 성지 안내자 신약성경, 바오로 딸 참조) 둘레가 대략 51킬로미터나 되는 갈릴래아 호수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형제 같은 어부 출신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먹고 살아오던 생활의 터전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이 곳 갈릴래아 호수에서 생업에 종사하다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했습니다. 저는 딱 한번 이 갈릴래아 호숫가를 거닌 적이 있습니다. 젊은 사제 때의 일이었습니다. 한 선배 신부님께서 성지순례단 지도신부로 가시기로 예약이 되어 있었는데 갑작스레 중요한 일이 생겨 ‘땜방’으로 이스라엘을 갔었지요. 갈릴래아 호수를 처음 대면했을 때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참으로 독특한 매력을 지닌 호수였습니다. 신비스럽기조차 했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체취가 남아있는 곳이어서 그런지 참으로 그 느낌이 묘했습니다. 고요한듯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쳤습니다. 얼마나 호수가 컸으면 잔잔한 파도가 일었습니다. 가끔씩 밀려오는 파도와 산들바람이 해변을 어루만지면서 동시에 제 영혼까지도 부드럽게 어루만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자들은 저녁 무렵에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 카파르나움이라는 도시로 건너가기 위해 배를 탔습니다. 해도 떨어졌겠다, 빨리 도착하기 위해 제자들은 열심히 노를 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서른 스타디온 정도 나아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갑자기 큰 바람이 불고 물결이 높게 일기 시작했습니다. 호수에서 무슨 파도냐고 의아해하실지 모르겠는데 갈릴래아 호수에서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헤르몬 산에서 내려오는 찬 기류와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기류가 갈릴래아 호수에서 만나기라도 하면 상당히 높은 파도가 일곤 했습니다. 서른 스타디온 스타디온은 그리스 길이 단위입니다. 한 스타디온은 192.5미터입니다. 서른 스타디온이라면 약 5.7킬로미터 정도 됩니다. 육지로부터 꽤 떨어진 거리였기에 깊이도 꽤 깊었을 것입니다. 날도 이미 저물어 칠흑처럼 캄캄했을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기도 그렇고 뒤로 돌아가기도 그런 애매한 곳에서 역풍을 만난 제자들은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그때 누군가가 물위를 걸어 제자들의 배 쪽으로 가까이 왔습니다. 제자들은 유령인가 싶어 혼비백산했겠지요. 아마도 제정신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목숨도 여기도 끝이로구나, 생각하던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을 건네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절망의 끝에서 낙담하고 있는 우리, 이제 끝이로구나, 하며 포기하는 우리, 죽음의 두려움 앞에 떨고 있는 우리 앞에 홀연히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과 똑같은 말씀을 건네실 것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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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만물의 주님, 온 세상의 임금님’이신 분입니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요한 6,16-21).”
1)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던 일에 연결되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4-15).”
‘기적의 빵’을 먹은 사람들은 그 기적에 ‘열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기적의 의미는 생각하지 않고 배불리 먹었다는 것만 생각해서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그 분위기에 휩쓸렸던 것 같습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호수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신 다음에 군중을 해산시키셨습니다(마태 14,22; 마르 6,45).
제자들과 군중을 곧바로 ‘분리’시키신 것입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군중 심리에 더 이상 오염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즉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들과 군중을 분리시키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가지 않으시고 ‘제자들만’ 보내신 것과 그들이 호수에서 바람과 파도를 겪게 하신 것은, 정신을 차리라는 ‘사랑의 회초리’ 같은 것이었고, 그리고 ‘성찰의 시간’을 가지라는 뜻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메시아를 원하는지, 또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을 때 무슨 마음으로, 무엇을 바라면서 응답했는지를 다시 잘 성찰해 보라는 ‘무언의 가르침’이었을 것입니다.
2) ‘제자들이 호수에서 풍랑을 만나서 고생한 이야기’와 이 이야기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두 이야기는 분명히 상황도 다르고, 뜻도 다릅니다.
제자들이 큰 풍랑을 만나서 고생할 때, 예수님께서는 바로 옆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마태 8,23-24).
그 이야기에서 ‘큰 풍랑’은 교회와 신앙인들이 겪는 고난과 시련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께서 주무시고 계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옆에 계시는데도 안 계신다고 오해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이야기’에서 제자들이 겪은 맞바람과 파도는 그들 내면의 심리 상태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실 수도 있다는 생각, 그리고 자기들도 예수님 옆에서 고위직을 차지할 수 있다는 기대감 등으로 들뜨고 흥분한 상태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옆에 안 계신 것은, 그들의 마음이, 또는 그들의 믿음이 참된 신앙에서 멀어져 있었고, 흔들리고 있었음을 상징합니다.
3)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가신 것은,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신 일, 즉 당신이 ‘만물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계시하신 일입니다.
‘만물의 주님’이라는 말은, ‘온 세상의 임금님’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온 세상의 임금님이신 분께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만을 위한 임금이 되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믿음 없는 일이기도 하고, 무례한 일이기도 합니다.
20절의 “나다.”는, 원문으로는 탈출기 3장 14절에 있는 “나는 있는 나다.” 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당신의 ‘신성’을 계시하신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무서워하지 말라는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나타나실 때 자주 사용하시는 말씀이고, 그래서 이 말씀도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신 말씀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라는 제자들의 신앙고백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마태 14,33).
4) 메시아의 나라를 인간 세상의 왕국과 같은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8,36).
메시아의 나라는 이 세상에 건설되지만,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방식’으로 건설됩니다.
그 방식은 십자가 수난과 부활입니다.
메시아의 나라를 인간 세상의 왕국과 같은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현세에서 누리는 부귀영화로 오해합니다.
그 오해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과 같습니다.
단식기도를 하시는 예수님을 사탄이 유혹할 때,
사탄은 자기에게 경배하면 세상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유혹했습니다(마태 4,9; 루카 4,6-7).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만 경배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그 유혹을 간단하게 물리치셨지만, 신앙인들을 향한 사탄의 유혹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믿음과 희망을 끊임없이 스스로 성찰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정말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출세인가?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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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8. 부활 제2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6,16–21
해가 저물자 제자들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넙니다.
바람이 거세게 불고 물결이 높아집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십니다.
제자들은 두려워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배는 곧 목적지에 닿습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 장면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이
풍랑이 없는 삶이 아니라
풍랑 속에서도 주님이 가까이 오시는 삶임을 보게 합니다.
두려움은 파도 때문만이 아니라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마음에서 생깁니다.
그러나 “나다”라는 한마디가
공포의 논리를 끊고
평화를 시작하게 합니다.
친절/선행 주간의 오늘,
우리가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행은
먼저 그를 ‘잠잠하게’ 만들려는 해결책이 아니라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할 수 있는
함께 있음의 평화입니다.
풍랑 속의 사람은
설명보다 동행을 먼저 필요로 합니다.
암브로시오의 길에서
복음은 이렇게 번역됩니다.
주님이 배에 오르시듯,
우리는 누군가의 두려움 속으로
친절이라는 방식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선행은
그 친절을 오늘의 구체적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주님,
제 삶의 풍랑 속에서
당신의 “나다”를 듣게 하소서.
제가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에게
판단이 아니라 친절로 다가가
함께 있음으로 평화를 전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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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8. 부활 제2주간 토요일. 굿뉴스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Mark Choi 님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1&id=2131497&menu=4770
■ The Great Race of the Korean Peninsula?!
The Great Race of the Korean Peninsula: A Thesis on Political Evolution?!
By Marco
Page 1 / 12 — Introduction: Reinterpreting the Political Landscape Through Allegorical Fable
Aesop's fable of the tortoise and the hare is far more than a moral lesson for children. It is a living mirror reflecting the dynamics of contemporary Korean politics. This essay analyzes the decades-long race between 'Garam,' the blue-shelled tortoise, and 'Naru,' the red-furred hare, competing on the grand stage of Korean democracy. In this unforgiving race where past victories offer no guarantee of future survival, we must read not merely a contest of speed, but the deeper architecture of structural change.
Page 2 / 12 — Chapter 1: Garam's Historical Narrative and Democratic Legitimacy
Garam, the blue-shelled tortoise, is a runner who steadily climbed the steep hill toward democracy, enduring the full weight of authoritarian pressure. Through wave after wave of political persecution, he built the trust of citizens through the strategic assets of consistency and moral clarity. Each slow but purposeful step became a historical milestone, carrying within it the aspirations of the era and the will for reform. By ultimately overtaking a rival drunk on complacency, Garam secured a transformative victory and established himself as a symbol of Korean democratization.
Page 3 / 12 — Chapter 2: Garam Holds Steady — But There Is No Room for Complacency
A cold-eyed look at the current phase of the race reveals that Garam is performing beyond most expectations. The prevailing analysis had predicted collapse in the face of Naru's fierce challenge, yet Garam continues to maintain its stride on the bedrock of deep public trust. But this is precisely where the greatest danger lies. The relief of holding up better than anticipated dilutes the urgency of innovation and breeds the illusion that old strategies remain sufficient. The moment strong performance erases the imperative for change, Garam's shell becomes a burden once again.
Page 4 / 12 — Chapter 3: Naru's Reality — A Diagnosis of the Struggle
Naru's current position, by contrast, is stark. The fact that a runner celebrated for natural speed and agility is now floundering in this race cannot be dismissed as a mere temporary slump. Rather than genuinely internalizing the lessons of past defeat, Naru appears to have returned to the track having changed only the tactical language, while leaving the structural substance largely intact. The public senses this distinction with precision. Without authentic redirection rather than simply faster feet, Naru's struggle risks hardening from a temporary setback into a structural stagnation.
Page 5 / 12 — Chapter 4: The Roots of the Struggle — Anatomy of a Structural Failure
The reason Naru is floundering does not lie in surface-level strategic missteps. The roots run far deeper. First, Naru still relies on the outdated formula that speed itself equals competitive advantage — but in the post-digital-transformation era, speed alone is no longer a differentiating asset. Second, Naru's message fails to reach the lived deficits that citizens actually feel, hovering instead in the abstract. Third, the authentic narrative of self-reckoning and renewal needed to lift the shadow of distrust left by a history of defeat remains conspicuously absent. These three structural deficiencies are the fundamental reason Naru is treading water in place.
Page 6 / 12 — Chapter 5: The Necessity of the Leap — Why Naru Must Rise to the Same Level
Naru's leap is not required merely for Naru's own survival. It is a structural imperative for the health of Korean politics as a whole. In a race where Garam runs alone, the tension of innovation dissipates, and an unchecked lead incubates a new form of arrogance. Only when Naru shakes off its current struggle and rises as a genuine competitor at the same level as Garam does this race become a true contest in which each runner sharpens the other. The absence of a worthy rival ultimately poisons even the winner.
Page 7 / 12 — Chapter 6: The Conditions for Naru's Leap
Naru's leap requires three preconditions to be met. First, the causes of past defeat must be redefined not at the tactical level but at the level of values — not merely asking what went wrong, but freshly establishing what the race is being run for. Second, digital agility and data-driven pragmatism must be elevated beyond mere tools into a public philosophy fit for a new era. Third, Naru's vision must be retranslated into concrete language that connects with the texture of people's daily lives. Only when these three conditions are in place can Naru transcend its current struggle and be reborn as a genuine competitor running alongside Garam.
Page 8 / 12 — Chapter 7: Geopolitical Competition and the 'Island Nation' Variable
This race does not end at the borders of the peninsula. Beyond the horizon looms a vast maritime power and, at its forefront, the Land of the Rising Sun. For generations, this island nation has shaped regional order through advanced systems and technological capability. While Garam runs alone and Naru struggles to find its footing, external competitors will quietly but swiftly widen the gap in national competitiveness. Internal attrition is, in effect, a concession to the outside world.
Page 9 / 12 — Chapter 8: Productive Competition and the Correlation with National Competitiveness
To surpass or stand as an equal to that island nation on the world stage, the productive competition between Garam and Naru is an indispensable prerequisite. Only when Naru leaps as quickly as possible to Garam's level, and the two runners begin to stimulate and temper each other, can Korean politics enter a mature stage that sets the global standard. Not the lone sprint of one runner, but the fierce co-evolution of two — that alone can elevate this nation to the next level.
Page 10 / 12 — Chapter 9: The Road Ahead for Garam
What Garam needs is not self-consolation over its current strong showing. The period in which Naru is still floundering is, paradoxically, the most dangerous time of all — for it is precisely when the absence of a genuine challenger allows the tension of innovation to go slack. At this very moment, Garam must pose three questions to itself: What new social contract can it offer future generations beyond the moral legitimacy of the past? Does it possess a new competitive language that reaches beyond that legitimacy? And is it prepared to stand at a higher place when Naru finally makes its leap? A tortoise that rests on its performance without answering these questions will not fall to a sleeping hare — it will fall to a hare that has woken up.
Page 11 / 12 — Chapter 10: The Opening of a New Race and Political Maturity
The race has begun anew. Garam leads, but runs in an awkward solitude where true competition has not yet commenced. Naru struggles — but if that struggle is the genuine pain of self-renewal, it may be the eve of a great leap. The true main event of this race begins the moment Naru rises from its floundering to stand at Garam's level. Only then will Korean politics be able to run the real race of maturity — one in which each runner elevates the other.
Page 12 / 12 — Conclusion: The History to Be Written by the New Protagonists of the Peninsula
The intersection of Garam's unexpected resilience and Naru's painful struggle marks the true inflection point of Korean politics today. Garam must not grow comfortable, and Naru must not delay. On the day both runners finally race at the same level, spurring each other forward, this contest transcends a struggle for power and becomes a narrative of national evolution. The great history of evolution to be written by the new protagonists of the Korean peninsula will open its first chapter with Naru's le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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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8.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7:04 추가.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 온 세상의 임금님’이신 분입니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요한 6,16-21).”
1)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던 일에 연결되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4-15).”
‘기적의 빵’을 먹은 사람들은 그 기적에 ‘열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기적의 의미는 생각하지 않고 배불리 먹었다는 것만 생각해서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그 분위기에 휩쓸렸던 것 같습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호수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신 다음에 군중을 해산시키셨습니다(마태 14,22; 마르 6,45).
제자들과 군중을 곧바로 ‘분리’시키신 것입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군중 심리에 더 이상 오염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즉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들과 군중을 분리시키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가지 않으시고 ‘제자들만’ 보내신 것과 그들이 호수에서 바람과 파도를 겪게 하신 것은, 정신을 차리라는 ‘사랑의 회초리’ 같은 것이었고, 그리고 ‘성찰의 시간’을 가지라는 뜻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메시아를 원하는지, 또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을 때 무슨 마음으로, 무엇을 바라면서 응답했는지를 다시 잘 성찰해 보라는 ‘무언의 가르침’이었을 것입니다.
2) ‘제자들이 호수에서 풍랑을 만나서 고생한 이야기’와 이 이야기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두 이야기는 분명히 상황도 다르고, 뜻도 다릅니다.
제자들이 큰 풍랑을 만나서 고생할 때, 예수님께서는 바로 옆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마태 8,23-24).
그 이야기에서 ‘큰 풍랑’은 교회와 신앙인들이 겪는 고난과 시련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께서 주무시고 계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옆에 계시는데도 안 계신다고 오해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이야기’에서 제자들이 겪은 맞바람과 파도는 그들 내면의 심리 상태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실 수도 있다는 생각, 그리고 자기들도 예수님 옆에서 고위직을 차지할 수 있다는 기대감 등으로 들뜨고 흥분한 상태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옆에 안 계신 것은, 그들의 마음이, 또는 그들의 믿음이 참된 신앙에서 멀어져 있었고, 흔들리고 있었음을 상징합니다.
3)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가신 것은,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신 일, 즉 당신이 ‘만물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계시하신 일입니다.
‘만물의 주님’이라는 말은, ‘온 세상의 임금님’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온 세상의 임금님이신 분께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만을 위한 임금이 되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믿음 없는 일이기도 하고, 무례한 일이기도 합니다.
20절의 “나다.”는, 원문으로는 탈출기 3장 14절에 있는 “나는 있는 나다.” 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당신의 ‘신성’을 계시하신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무서워하지 말라는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나타나실 때 자주 사용하시는 말씀이고, 그래서 이 말씀도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신 말씀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라는 제자들의 신앙고백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마태 14,33).
4) 메시아의 나라를 인간 세상의 왕국과 같은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8,36).
메시아의 나라는 이 세상에 건설되지만,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방식’으로 건설됩니다.
그 방식은 십자가 수난과 부활입니다.
메시아의 나라를 인간 세상의 왕국과 같은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현세에서 누리는 부귀영화로 오해합니다.
그 오해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과 같습니다.
단식기도를 하시는 예수님을 사탄이 유혹할 때,
사탄은 자기에게 경배하면 세상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유혹했습니다(마태 4,9; 루카 4,6-7).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만 경배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그 유혹을 간단하게 물리치셨지만, 신앙인들을 향한 사탄의 유혹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믿음과 희망을 끊임없이 스스로 성찰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정말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출세인가?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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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8. 부활 제2주간 토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5:50 추가.
요한 6,16-21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바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적은 양의 음식으로 수많은 군중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표징을 보여주시자, 많은 이들이 그분을 자기 임금으로 삼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그들을 피해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그러는 사이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따로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 반대편으로 건너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곧 날이 어두워져 밤이 되었고, 잔잔했던 호수에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했지요. 그 바람은 북쪽에 있는 헤르몬 산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과 서쪽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따스한 바람이 서로 만나 부딪히며 생긴 거센 ‘돌풍’이었습니다. 이 돌풍에 한 번 휩쓸리면 배가 파도에 밀려 전복되거나, 배에 물이 들어차 가라앉을 수 있었기에 제자들은 죽음의 공포에 얼굴이 사색이 되어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모습을 지켜보시던 주님께서 호수 위를 건너 그들 곁으로 다가가십니다. 그들을 거센 풍랑에서 구하시기 위함이었지요. 그런데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오시는 그분 모습을 보고 오히려 더 큰 두려움에 빠집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못알아봐서 놀란 게 아니라, 사람이 물 위를 걷는 일이 자기들의 이성과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 지 몰라 두려워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마라”며 그들의 산란한 마음을 보듬으십니다. 이에 제자들이 마음 속 두려움을 걷어내고 그분을 자기들이 타고 있는 배 안에 모셔들이려고 하자 배는 ‘어느 새’ 그들이 가려고 했던 호수 건너편에 가 닿았다고 요한 복음사가는 전하고 있지요.
오늘 복음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제자들 곁으로 다가가기는 하시지만 풍랑을 가라앉혀 주시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제자들이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마음 속 두려움을 걷어내고, 그분을 자기들이 타고 있는 배 안에 모셔들이려고 하자 “어느 새”, 즉 그들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금새 자기들이 가고자 했던 목적지에 다다랐지요.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겪는 세상의 거센 풍랑을 멈춰주시지 않고, 그 풍랑 속에서 구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 앞에 놓인 십자가를 없애주시지 않고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십자가 고통과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한 치 앞도 안보이는 걱정과 두려움이라는 심연 속에서 삶이라는 호수를 지나 저 반대편에 있는 하느님 나라로 건너가는 ‘파스카’의 항해를 계속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고통과 시련이라는 거센 풍랑을 만나게 되겠지요. 그러나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와 ‘한 배’를 타시기 위해 우리 곁으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주님의 모습이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워도 믿음으로 그분을 내 마음 안에 모시고 순명으로 따르면, 우리는 ‘어느 새’ 하느님 나라라는 목적지에 다다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내 삶이 거센 풍랑에 흔들린다고 두려워 말고, 그 흔들림 속에서 믿음과 희망이라는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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