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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에 관한 법
출 21:1-11
1 네가 백성 앞에 세울 법규는 이러하니라
2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섬길 것이요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될 것이며
3 만일 그가 단신으로 왔으면 단신으로 나갈 것이요 장가 들었으면 그의 아내도 그와 함께 나가려니와
4 만일 상전이 그에게 아내를 주어 그의 아내가 아들이나 딸을 낳았으면 그의 아내와 그의 자식들은 상전에게 속할 것이요 그는 단신으로 나갈 것이로되
5 만일 종이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하면
6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을 것이라 그는 종신토록 그 상전을 섬기리라
7 사람이 자기의 딸을 여종으로 팔았으면 그는 남종 같이 나오지 못할지며
8 만일 상전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여 상관하지 아니하면 그를 속량하게 할 것이나 상전이 그 여자를 속인 것이 되었으니 외국인에게는 팔지 못할 것이요
9 만일 그를 자기 아들에게 주기로 하였으면 그를 딸 같이 대우할 것이요
10 만일 상전이 다른 여자에게 장가 들지라도 그 여자의 음식과 의복과 동침하는 것은 끊지 말 것이요
11 그가 이 세 가지를 시행하지 아니하면, 여자는 속전을 내지 않고 거저 나가게 할 것이니라
출 21:1-11 / [히브리 남자 노예의 권리] 네가 백성들에게 선포해야 할 법령은 다음과 같다. 2) 너희가 히브리 남자를 노예로 샀을 경우에는 최대한 6년 동안만 일을 시킬 수 있다. 7년째가 되는 해에는 몸값을 요구하지 말고 그를 풀어 주어야 한다. 3) 그가 홀몸으로 들어왔으면 홀몸으로 풀어 주고 장가를 들어서 왔으면 그의 아내도 같이 풀어 주어라. 4) 그런데 주인이 그 노예에게 장가를 들게 하여 자식들을 낳았을 경우에는 그 아내와 자식들은 주인의 소유인 까닭에 노예만 홀몸으로 나가야 한다. 5) 그렇지만 그 노예가 분명하게 `나는 주인님과 나의 처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혼자 나가서 자유로운 몸이 되지 않겠습니다.'하고 말한다면 6) 주인은 그 노예를 하나님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를 문짝이나 문설주에 바짝 세워 놓고 귓바퀴를 송곳으로 뚫어라. 그러면 그는 죽을 때까지 그 주인의 노예가 된다. 7) [히브리 여자 노예 보호 법령] 어떤 사람이 자기 딸을 노예로 팔았을 경우에는 남자 노예들처럼 7년째 되는 해에도 자유로운 몸이 되지 못한다. 8) 그 여인을 아내로 삼으려고 사왔는데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에는 몸값을 받고 내보내라. 또한 결과적으로는 그 여인을 속인 것이므로 이방인에게 여인을 팔 수는 없다. 9) 만일 그 여인을 며느리로 삼으려고 할 경우에는 자기 딸과 똑같이 대우해 주어야 한다. 10) 또한 그 주인이 다른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더라도 먼저 여인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다 대주어야 하며 잠자리를 같이하는 일도 그쳐서는 안 된다. 11) 이 세 가지 의무를 주인이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그 여인에게 몸값을 요구하지 말고 풀어 주어야 한다.
모세를 통해 고대 근동 사회에 일반적이었던 노예 제도 속에 적용되어야 할 율법이 먼저 제시되고 있습니다.
백성 앞에 세울 법규(1)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며, 택하신 백성들의 구별된 삶을 위한 지침이 됩니다. 따라서 법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보여주며, 이방인과 구별된 삶이 되고,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남자 종에 관한 법(2-6) 사람은 빈부나 계급에 관계없이 누구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기에 각 개인의 생존권과 존엄성이 존중되어야 합니다. 율법은 노예에게도 이것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인 중에 가난하여 빚을 갚지 못할 때(레 25:35, 39), 또는 훔친 물건을 배상할 능력이 없을 때(출 22:3) 종이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종이 되었다고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종은 6년 동안 주인을 위해 생활하다 일곱째 해에 자유가 보장되었습니다(2). 몇 가지 조건에 따라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자유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3-4). 만일 종이 가정을 보존하고 생계유지의 어려움을 피하고자 한다면 그는 영구적으로 종으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종이 “내가 내 주인과 아내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다”라고 하면 주인은 그를 현관으로 데리고 가서 문설주에 대고 종의 귀를 뚫음으로써 그 종은 영구적으로 주인에게 속하게 됩니다.
여자 종에 관한 법(7-11) 경제적 압박을 겪는 부모는 딸이 미성년자일 때 결혼을 전제로 딸을 팔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건은 딸을 사는 사람이 직접 아내를 맞이하거나 그의 아들에게 주기 위한 경우에만 가능했습니다. 만일 남자가 아내로 맞이하기를 포기한다면, 적절한 보상을 한 후에 돌려보내야 했습니다. 결혼에 대한 약속을 깬 것이기에 속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합당한 배상이 이루어집니다. 만일 남자가 여자를 아들에게 주기 위해서 샀다면, 딸처럼 대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한 남자가 또 다른 여자를 아내로 삼을 경우 첫 번째 아내에 대한 정당한 의무를 다해야 하고(10),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남자는 여자를 조건 없이 자유롭게 해야 합니다. 여자 종에 대한 법규에는 여자 종에 대한 최소한의 인권과 자존감,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고 있습니다. 또한 여자 종은 남자 종처럼 6년이 지나면 자유롭게 한다는 규정이 없는데, 이것은 사회에서 경제권이 거의 없고, 사회적 약자였던 혼자된 여자들에 대한 보호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적용: 율법은 경제적·사회적·약자들에 대해 이방 사회와는 달리 인간적 존엄성과 자존감을 보장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은 약자들에 대해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연약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힘입어 현재의 왜곡됨 또는 연약함으로부터 더 이상 부패하지 말고 전심으로 온전함에 이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 설 교 >
귀 뚫은 종의 의미
출애굽기 21:1-6 / 이상호 목사
뿌리라는 영화에 보면 흑인들을 팔고 사는 노예의 제도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노예 시장에서는 흑인들을 사람인데 사람 취급을 하지 아니하고 물건처럼 다룹니다. 그래서 노예를 팔 때 노예 상은 이 사람은 치아가 튼튼해서 일을 잘 할 수 있고, 이 사람은 건강한 여자이기 때문에 아이를 잘 생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아이를 잘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은 종을 많이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건강한 남자라고 하는 것은 일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노예를 소개하고 값을 부르면 필요한 사람들이 흑인들을 종으로 사가는 시장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인권이 완전히 다 무시된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생각할 때 먼 옛날에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현대판 노예 시장도 있어요. 요즘도 사람들을 돈 몇 푼에 잡아 철창 속에 가둬 놓고 돈벌이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기사를 읽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 본문은 이러한 노예 제도에 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노예제도를 찬성하고 노예제도를 허용하시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핏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주셨던 종제도는 현대인들이 만들었던 노예제도하고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이런 종 제도를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느냐 하나님께서 종 제도를 허락하신 것은 이혼하는 법을 허용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원래는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결합시켜서 가정을 만들었을 때 절대 헤어지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너희가 나누면 안된다. 그래서 한번 결혼하면 평생 살아야 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에도 이혼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두 가정 당 한 가정이 이혼하는 추세에 우리가 도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미국에서나 있었던 이야기였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이혼하려고 하면 이혼 증서를 여자에게 써 주고 이혼을 하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뜻으로 종 제도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노예제도를 거의 폐지할 수 있을 만큼 엄격한 율법을 적용했습니다. 가령 예를 들면 노예가 종살이했다가 도망치잖아요. 그러면 붙잡아 갖고 억지로 되돌려 보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현대판 노예제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도망치면 끝까지 쫓아가서 잡아 옵니다. 그러나 율법에서는 도망간 종은 붙잡아 오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또 그런 사람을 보면 붙잡아 주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법입니다. 그래서 이런 규정을 볼 때 그러면 누가 종살이 하겠느냐. 종살이 하다가 도망치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종으로 남아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는 정 반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종되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빚을 못 갚았을 때 종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빚을 많이 졌는데 갚으라고 해서 못 갚잖아요. 그러면 그 빚만큼 사람이 가서 종살이를 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옛날에는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종살이를 하겠다고 부자집에 종으로 들어가는 경우입니다. 부자집에 종으로 들어가면 먹을 것도 주고, 입을 것도 주고, 집도 제공 받으니까 그냥 종이 되겠다고 가서 나를 종으로 삼아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종이 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빚을 져서 종이 되는 사람이거나 혹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종이 되는 사람이 있는데, 문제는 6년까지만 종을 부리고 7년째는 무조건 자유를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7년째 되는 해는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 그냥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의 집에서 가고 싶으면 가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7년이 됐는데 나는 계속 종하겠다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종이 나갈 자유가 있지만 나가고 않고 계속 주인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생겼을 경우에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종이 되겠다고 하는 사람을 데리고 재판장 앞에 가서 먼저 이야기합니다. 나는 이 주인의 평생의 종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의사를 밝힌 다음에 종이 되겠다는 그 종을 데리고 문설주에 귀를 대고 귀에 구멍을 뚫습니다. 그러면 귀 뚫은 종이 되어서 그 주인의 평생 종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 여자들이 귀를 많이 뚫잖아요. 가끔 남자들도 귀를 뚫는 분이 있는데 귀 뚫는 의미를 알고 귀를 뚫으시기 바랍니다. 왜 여자들이 자꾸 귀를 뚫으려고 할까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제일 먼저 따먹은 사람이 하와잖아요. 아담은 선악과를 먹다가 양심이 껄려 목에 그 씨가 걸렸는데 여자는 거리낌도 없이 싹 먹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최초로 불순종했던 사람이 하와거든요. 그러니까 하와의 후손들인 여자들이 귀를 뚫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저는 이제 평생 귀 뚫은 종으로 하나님을 떠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귀를 다 뚫는 것입니다. 종이 귀를 뚫는 것은 7년째는 나가서 자유할 수 있지만 계속적으로 이 주인집에 남아 평생 종이 된다고 할 때 귀를 뚫습니다. 이렇게 귀를 뚫은 종은 사고 팔 수가 없습니다. 평생 귀를 뚫은 그 집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또 그 주인집을 떠날 수도 없습니다. 주인과 더불어 평생 살다가 죽는 종이 귀 뚫은 종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귀를 뚫은 종은 왜 귀를 뚫는가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주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5절,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다” 주인을 사랑해서 귀를 뚫는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종의 귀를 뚫는 것은 평생 종으로 부려 먹기 위해서 강제로 종을 억압 해 뚫는 것이 아닙니다. 귀 뚫은 종이 되는 것은 본인이 스스로 자원해서 귀를 뚫고 주인의 평생 종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7년째 자유인이 되고 나가면 자유롭게 살 수 있지만 귀를 뚫어서 평생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귀 뚫는 것은 억지로 뚫는 게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 생활을 할 때 억지로 믿음 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원하는 예배, 자원하는 봉사, 자원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시고 자원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큰 역사를 이루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갈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졌던 사람이 있어요. 본인은 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데 남이 갖다가 자기에게 십자가를 져주니까 억지로 십자가를 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도대체 내가 왜 예루살렘까지 와서 십자가를 지려고 왔나하면서 원망 불평하면서 갈보리 산을 올라갔습니다. 구레네 시몬이 이렇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갔다고 하니까 어떤 분들은 시몬처럼 억지로 신앙 생활하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억지로 드리는 것은 기뻐하지 않아요. 가령, 새벽 기도를 쉽게 하는 분도 있구요. 어렵게 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렵게 하는 분들은 왜 어렵게 하는지 아세요? 하기 싫은 것 억지로 하려고 그러니까 어렵습니다. 목사님 눈치 봐서 하고 또 무슨 일 때문에 하고, 어떤 형편 때문에 하려고 하니까 지옥같은 것입니다.
세상 남자들이 좋아하는 것 있습니다. 여하간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행처럼 좋아하는 것 있습니다. 찻간에서도 하고 기찻간에서도 하고 집에서도 합니다. 명절 때가 이제 곧 돌아올텐데 성도 여러분들 정신차리시기 바랍니다. 왜 그렇게 그것을 좋아하는지 노는 문화도 없어서 그런 탓도 있지만 어쨌든 정신을 못 차려요. 불신자건 믿는자든 동양화 나오는 그림을 보면 정신을 못 차려요. 그리고 날 밤을 새는지도 몰라요. 밤이 2시가 돼도 3시가 돼도 그냥 눈이 벌개 가지고 밤새도록 합니다. 솔직한 이야기로 밤새도록 해 봐야 남는 것도 없습니다. 그것 해 가지고 돈 많이 버는 줄 아세요? 떼 돈 버는 것도 아닙니다. 밤새도록 해 봐야 왔다 갔다 하다 보면 남는 것도 없고, 그냥 허리만 아프고 온 몸이 쑤시는데도 열심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이렇게 하면 다 칭찬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자원해서 열심히 하면 다 은혜가 될 줄로 믿습니다.
가정에서 자녀를 키울 때에 아버지 사랑과 어머니 사랑이 다릅니다. 집에서 부부가 자식을 생산해서 낳잖아요. 그러면 아이가 어렸을 때는 칭얼거리기도 하고 낮 밤이 뒤 바뀌어서 울기도 하잖아요. 그러면 누가 끌어안아요. 남편이 먼저 끌어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를 울지마 울지마 하며 달래 봅니다. 아기가 울지마 한다고 말 귀를 알아듣습니까? 그래서 계속 울잖아요. 한참 울다 보면 에이 신경질 난다고 아이를 팽개칩니다. 남자들은 아이가 보채면 계속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은 엄마는 그렇게 안해요. 애가 울잖아요. 울고 보채는 아이를 끌어 않고 밤새도록 씨름하며 잠을 설칩니다. 그러면서 아이를 끌어안고 우는 아이 달래 주고 기저귀도 갈아줍니다. 우리 어머니들이 다 해 본 일이에요. 남편과 아내가 왜 다른지 아세요. 남편은 자기 뱃속에서 낳은 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둘이 협조해서 만들었는데도 자기가 열 달 동안 고생해서 낳은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이가 밤새도록 보채면 명분이야 좋습니다. 내일 직장도 나가야 되고 해야 될 일도 많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똑같이 고생해서 만들어 놓고 부인은 자기가 낳은 자식이기 때문에 끌어안고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의 사랑이 다르다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은 수고를 하고 우리를 낳았어요.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더 깊이 깨달아지면 깨달아 질수록 억지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게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나오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평생 예수님의 종이 되겠습니다 하고 귀를 뚫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제 귀를 뚫고 평생 주님과 함께 동거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은혜를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종이 주인과 더불어 살면서 은혜 받은 것이 별로 없다. 그러면 이 종이 그 주인을 위해서 귀를 뚫겠습니까? 이 주인과 평생 살겠다고 귀를 뚫겠어요. 절대 귀를 뚫을 리가 없어요. 귀를 뚫었다고 하는 것은 주인과 더불어 살면서 그 주인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 주인과 살면 앞으로도 많은 은혜를 받을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귀를 뚫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하십시오. "큰 은혜를 받아야 귀를 뚫는다." 그래서 6년 지나 7년째 자유할 수 있는 길이 주어졌지만 스스로 포기하고 평생 종이 되겠다고 귀를 뚫은 것은 은혜를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은혜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9장 2절에 사도 바울은 귀 뚫지 않은 종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은혜를 받습니다. 어떻게 은혜를 받느냐 하면 다메섹으로 올라가는데 큰 빛이 바울에게 비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팍 꼬꾸라졌어요. 이때 바울이 두 가지 질문을 했는데 “주여 뉘시오니이까” 당신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기를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사울이 이전까지는 그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 인물인 줄 몰랐어요. 그래서 바울은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지 예수님은 안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자기가 핍박하는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을 깨닫고 난 다음에 두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무엇을 할까요” 하나님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받은 은혜가 무엇일까? 그 은혜는 자기가 그렇게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가두었는데도 자기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받은 첫번째 은혜입니다. 나 같이 못된 인간을 주님이 불러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러주신 은혜에 바울은 감격했습니다. 오늘 여기 앉아 있는 우리 하나님의 사랑하는 종들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불러 주셨기 때문에 여기에 온 것입니다. 여기 여러분 제발로 왔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어떤 전도자의 인도를 받아 여러분들이 여기에 왔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하나님이 오게 하지 아니하면 올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이 10분의 1밖에 안됩니다. 나 같이 못된 짓 하고 돌아다니고 탕자같은 자를 불러주셨다고 하는 생각을 하니까 너무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잘 나서 하나님이 불러주신 것 아닙니다. 여러분이 똑똑해서 하나님이 불러 준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능력이 있어서 불러 준 것도 아니에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은혜로 불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 받은 것을 생각할 때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만나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나 주셔야 우리가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만나고 싶다고 만나지는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이 여러분들 부르면 쉽지만 여러분 대통령 만나러 가 보세요. 만날 수 있나. 여러분이 어떻게 대통령을 만날 수 있습니까? 면회도 안돼요. 청와대 문 앞까지는 갈 수 있을지 몰라도 들어갈 수는 없어요. 우리가 하나님께 나올 때 하나님이 문을 열어 주시고 오라 하셔야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셔야 됩니다. 만나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감사해요. 하나님께서 바울을 다메섹에서 만나 주셨어요. 하나님이 만나 주시는 은혜에 바울이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바울을 불러 주시고 일감도 주셨다는 것입니다. 너는 내 일을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장관 자리 주면서 부르면 여기 있는 분들 아마 다 달려갈 거예요. 일감 주는 게 얼마나 감사합니까? 아이구 나 보고 왜 교육부 장관하라고 하십니까? 아이구 나 보고 왜 외무부 장관을 하라고 하십니까? 난 그런 것 못합니다. 여러분, 능력이 없어서 못하겠다고 거절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 감격할 것입니다. 대통령이 나를 부르시다니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불러서 주님의 일꾼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하고 도망쳤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지난날의 잘못했던 모두 용서해 주시고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면 네 양을 먹이고 내 양을 치라고 일감을 주셨어요. 얼마나 감사해요. 베드로를 다시 써 주셨어요. 베드로처럼 받은 바 은혜가 크다고 생각할 때에 귀를 뚫게 됩니다. 우리는 큰 은혜를 이미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물과 피를 쏟아 주신 그 은혜보다 더 큰 은혜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늘 생각하셔야 되요. 십자가를 통해 받은바 은혜에 감격해서 예수님을 위해 귀 뚫은 종이 되기를 나는 원합니다.
3. 주인과 동거하기 위함입니다.
귀를 뚫은 종은 주인과 평생 같이 살 수 있습니다. 귀를 뚫은 종은 예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귀 뚫은 종은 사단의 모든 결박에서 놓임 받고 자유함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완전히 자유한 가운데 주님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귀 뚫은 종은 두 주인을 섬기지 않습니다. 오직 주인만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를 뚫지 않았을 때에는 마귀도 섬길 수 있고, 세상도 섬길 수 있고 우상도 섬길 수 있습니다. 귀를 뚫는다고 하는 것은 내가 이제 평생 이 주인을 위해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귀 뚫은 종은 이제 내 것이 필요 없게 됩니다. 주인 것이 다 내것이요 내 것이 다 주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과 모든 것을 함께 누리는 은혜를 얻게 됩니다. 귀 뚫은 후로는 아무리 좋은 곳이 있어도 떠날 수도 없지만 떠나지도 않는 종이 바로 귀 뚫은 종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두 종류의 종이 있습니다. 귀를 뚫은 종과 귀를 뚫지 않은 종입니다. 하나님은 귀 뚫은 종에게는 세 가지 중요한 은혜를 주십니다.
(1)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귀 뚫은 종에게는 이전의 공개하지 않았던 비밀스러운 것을 알게 하십니다. 귀 뚫은 종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입니다. 귀 뚫지 않았을 때는 주인이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귀 뚫은 종에게는 모든 것을 다 말 해 줍니다.
(2) 주인과 더불어서 식탁에 함께 앉아서 음식을 나누게 됩니다. 주인과 함께 한 식탁에서 은혜를 나누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3) 주인의 모든 것을 맡는 자가 됩니다. 주인이 모든 것을 맡아 감당하는 종이 귀 뚫은 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 앞에 받은 바 은혜가 크기 때문에 더 나아가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던 그 하나님과 우리가 평생 동행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귀를 뚫은 종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노예제도와 사형제도
출 21:1-17 / 피영민 목사
서론
출애굽기 21~23장은 ‘언약의 서’(Book of the Covenant)라고 합니다. 줄여서 ‘언약서’라고도 하는데, 출애굽기 24장 7절에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언약서는 이스라엘의 ‘시민법’(Civil Law)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민사, 형사, 종교법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언약서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21장 1절부터 22장 15절까지는 노예제도와 사형제도, 그리고 손해배상제도와 같은 민•형사상의 범죄들과 그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둘째로 22장 16절부터 23장 19절까지는 영육을 문란케 하는 죄, 약자 보호, 또는 종교적인 의무 소송과 절기에 관한 법, 여러 가지 특정 분야에 대한 법이 기록되어 있는데, 주로 종교에 대한 법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마지막 셋째는 23장 20절부터 33절까지로 언약을 지키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는 격려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법을 잘 지키면 복을 주시겠다고 격려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의 어떤 법에 이것을 잘 지키면 복을 주겠다고 격려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과 언약을 맺고 이렇게 격려해 주십니다. 그래서 언약서는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눠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약서의 내용은 한 마디로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주신 십계명이 인간 사회 생활 가운데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언약서의 내용이 인간 사회 속에 일어나는 모든 민사, 형사, 종교적인 문제를 다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모든 것을 다루었다면 아마 출애굽기 21장만해도 분량이 큰 법전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요한 경우를 선택적으로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주신 십계명이 인류 사회에 어떻게 적용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도덕법이 사회생활에 적용되는 원리와 그 원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 것인지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신정통치’(Theocracy) 국가입니다. 하나님이 국가를 직접 다스리시고, 온 국민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공동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구약시대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등장한 모든 정치적인 나라도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미국, 영국, 한국도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신정통치 국가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이슬람 국가들은 알라 신이 나라를 통치한다고 주장할지 몰라도 지금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신정통치 국가가 없습니다. 신약시대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참된 교회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6절에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이스라엘’(Israel of God)은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시민법에 나타난 법의 정신은 현대 국가에 적용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에 영적으로 적용해야 할 법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적으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정신은 시민 사회에서도 여전히 존중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1차적으로는 하나님의 교회와 모든 성도들에게 영적으로 적용되는 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공의’(Justice)와 ‘긍휼’(Mercy)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고, 동시에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언약서에 기록된 노예제도와 사형제도를 보면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이 현저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Ⅰ. 노예제도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
노예제도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은 어떤 것일까요? 어떤 사람은 성경에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구절이 있다고 하며 매우 악한 책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은 주장입니다. 이스라엘의 노예제도는 19세기의 흑인들을 사고팔았던 무자비한 노예제도와는 완전히 성격이 다른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19세기의 노예제도는 제국주의자들이 약한 나라를 침공해서 식민지로 삼고 그들의 인권을 유린하여 인간취급도 하지 않은 채 사고 팔았던 아주 악한 제도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종은 누가 붙잡아서 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종이 되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종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왜 종이 되겠습니까? 굶어 죽을 형편이 되니까 종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굶어 죽는 것이 좋습니까? 머슴살이라도 하는 것이 좋습니까? 저 같으면 차라리 종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종은 가난 때문에 스스로 부자 집의 종으로 들어가는 경우를 의미합니다. 종이 되는 것이 자유로운 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빚을 지고 갚지 못해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로 자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종이 된 이후에 그의 부자 친척이 종으로 팔린 그를 위해 팔려갈 때 지불했던 돈을 다시 갚아주면 그 종의 주인은 그 종을 해방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면 그 종은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돈을 대신 물어주는 부자친척을 ‘기업 무를 자’라고 했고, 이처럼 종에서 해방시켜 주는 제도를 ‘구속’(Redemption)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죗값을 대신 치러주시고, 해방시켜 주시는 구속의 은혜를 구약성경은 이처럼 그림과 같이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노예는 구속해 줄 부자 친척이 없는 경우라도 6년을 일했다면 7년째는 아무 조건 없이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종으로 들어올 때에 단신으로 들어왔으면 단신으로 나가고, 아내와 자식들이 있으면 처자식과 함께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7년이 되기 전 이스라엘에 50년마다 찾아오는 희년이 왔을 경우, 꼭 6년을 채우지 않아도 자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종은 첫째로 자발성이 그 동기이고, 둘째로 기한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6년이 그 기한이었고, 7년째는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종은 사실상 ‘연한을 계약하고 노동하는 근로자’(Indentured Servants)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노예제도는 가난으로 죽을 형편의 동족을 살려주는 일종의 사회보장제도인 것입니다. 사회보장제도라고 해도 국가가 모든 부담을 갖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이 있는 경우 굶어 죽지 않게 일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상당히 발전된 제도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언약서에 기록된 시민법을 보면 종에 관한 제도가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약한 사람들에게 지대한 관심과 배려를 갖고 계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약자들에게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BC 18세기에 바벨론의 함무라비라는 왕이 법전을 만들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며 그 법전의 조항들을 살펴보았는데, 총 282개의 조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함무라비 법전에서 노예제도와 관련된 조항이 어디쯤 위치하는 지 알고 계십니까? 함무라비 법전에서 노예제도와 관련된 내용은 맨 마지막 5개 조항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 282번째 조항은 “노예가 주인에게 ‘당신은 나의 주인이 아니다’라고 말하면 노예의 귀를 잘라 버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의 노예는 귀를 보면 그 종이 주인에게 몇 번이나 대들었는지를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바벨론의 법은 노예제도를 맨 마지막에 두었고, 하나님의 법은 종과 관련된 제도를 가장 앞에 두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약한 자들, 소외된 자들, 종들에 대해 얼마나 큰 관심과 배려를 가지고 계셨는지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 시내 산에서 법을 주셨는데, 온 우주의 창조주가 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종이 될 때에 ‘그가 단신으로 들어왔는지’, ‘결혼을 하고 들어왔는지’, ‘종이 된 이후 아내를 얻게 되었는지’와 같이 지극히 작은 일에도 세세하게 관심을 갖고 돌보셨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또 하나님은 종이 7년째 자유를 얻어 주인의 집에서 나가게 되더라도 또 다시 가난으로 인해 굶어 죽지 않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신명기 15장 13~14절에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공수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시행되고 있는 퇴직금 제도까지 생각해주셨습니다. 6년을 일하고 7년째가 되어 나가게 될 때에는 후히 주어 먹고 살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자비로운 하나님의 모습입니까?
신명기 15장 18절에도 “그가 육 년 동안에 품군의 삯의 배나 받을 만큼 너를 섬겼은즉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6년을 일했지만 일을 굉장히 잘했으니 더 하면 좋겠다고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무조건 7년째가 되면 자유롭게 해 주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의 권리만 인정해 주신 것이 아니라 주인의 권리도 합리적으로 보장해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21장 4~6절에 “상전이 그에게 아내를 줌으로 그 아내가 자녀간 낳았으면 그 아내와 그 자식들은 상전에게 속할 것이요 그는 단신으로 나갈 것이로되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 하면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 귀를 뚫을 것이라 그가 영영히 그 상전을 섬기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남종이 6년 동안 일하면서 주인으로부터 한 여종을 얻어 아내로 삼아 자식을 낳고 가족을 이루게 되었다면 그 종의 아내와 그 자식들은 여전히 주인의 소유였습니다. 그래서 7년째가 되었을 때, 그 남종이 혼자 자유를 얻기보다 처자식과 함께 주인을 섬기고자 하면 주인은 그 남종을 데리고 재판장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재판장은 문설주에다 그 종의 귀를 대고 송곳으로 귀를 뚫어주었습니다. 그러면 그 종은 영영히 주인의 종으로 살게 된다는 표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영히 주인의 종이 된다고 해도 그 주인의 아들, 손자에 이르기까지 종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주인이 죽으면 해방이 되는 것이고, 또 희년이 오면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이 가족을 갈라놓는 악한 제도를 말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 종의 주인의 권리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주인에게도 소유권이 있는 것입니다. 원래 그 종에게 준 여종은 주인의 소유 아닙니까? 그러니까 종에게 인격적 선택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주고, 또 아울러 주인의 소유권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처자식을 버리고 혼자 자유를 얻겠다고 나가는 남자는 아내와 자식을 붙여줘 봐야 먹여 살리기 어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자에게는 차라리 처자식을 주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그 주인이 데려다 먹여 살리고 양육하고 보호하는 편이 훨씬 나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법들은 결코 반인륜적이거나 잔인한 법이 아닙니다. 모두 은혜롭고 자비로운 법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 것인지 잘 알 수 있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여성이 종이 된 경우에 대해 더욱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역사적으로 여성들과 아이들은 가장 학대를 많이 당한, 약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성들도 일반적인 종인 경우에는 6년을 일하고 7년째가 되면 자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신명기 15장 12절에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육 년을 너를 섬겼거든 제칠년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21장 7절은 무슨 말씀입니까? “사람이 그 딸을 여종으로 팔았으면 그는 남종 같이 나오지 못할지며.” 왜 출애굽기에서는 나오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그 여종이 주인의 첩이 된 경우입니다. 여종이 일반적인 종이 아니라 주인의 첩이 된 경우, 주인이 남편이기 때문에 자유를 얻지 말고 남편과 함께 살라는 것입니다.
여종이 주인의 첩이 된 경우에는 주인의 첩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모두 누리게 하였습니다. 당시 첩이 된 여종에게는 세 가지 권리가 있었습니다. 21장 10절에 “만일 상전이 달리 장가를 들지라도 그의 의복과 음식과 동침하는 것은 끊지 못할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인은 첩에게 의복을 사 줘야 하고, 음식을 공급해야 하며, 동침을 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주인의 첩으로서 모든 권리를 다 인정해 줘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약 이 세 가지 권리를 주지 않으려면 첩이 된 여종에게 자유를 허락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주인이 첩을 삼았는데, 말로만 들었던 그 모습과 전혀 다를 경우 이방인에게 팔지 말고 같은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팔라고 하셨습니다. 이방인에게 팔면 7년째 해방될 수도 없고, 첩으로 삼을 수도 없으니 이방인에게 팔지 말고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팔아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종이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이 여종을 첩으로 삼고자 했는데, 나이가 너무 어린 경우 아들에게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아들은 장가를 가서 여종을 아내로 삼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종을 아들에게 준 경우에는 그 여종을 딸처럼 대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1장 8~11절에 “만일 상전이 그를 기뻐 아니하여 상관치 아니하면 그를 속신케 할 것이나 그 여자를 속임이 되었으니 타국인에게 팔지 못할 것이요 만일 그를 자기 아들에게 주기로 하였으면 그를 딸 같이 대접할 것이요 만일 상전이 달리 장가를 들지라도 그의 의복과 음식과 동침하는 것은 끊지 못할 것이요 이 세 가지를 시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속전을 내지 않고 거저 나가게 할 것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전이 살다 보니까 아내 외에 여종을 첩으로 얻었는데 또 하나를 더 얻고 싶을 때, 원래 첩에게 공급해 주던 세 가지 권리는 끊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시내 산에 모세를 불러 말씀하고 계시는 중인데, 이토록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쓰고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분이신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애굽의 노예제도에는 이런 자비로운 내용이 없었습니다. 히브리인의 남아가 태어나거든 나일 강 하수에 던지라고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여성의 권리는 인정되지 않고 학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바로 애굽의 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애굽의 노예제도와 이스라엘의 종 제도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노예제도에서는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로운 분이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노예 제도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은 사회의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공의와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성품입니다. 이런 정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약시대의 하나님 나라 백성인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정신입니다. 우리는 약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너희가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나를 찾아와 돌봐주었고, 내가 헐벗었을 때에 옷을 주었고,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다”고 말씀하시자,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우리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형제 중에 가장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내게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마가복음 9장 35절에도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첫째가 되는 방법이 중요한 것입니다. 첫째가 되는 방법은 끝에 있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가서 약한 사람들을 섬기고 돌보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첫째가 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노예 제도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이 얼마나 공의롭고 자비로우신 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Ⅱ. 사형제도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
이스라엘 국가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할 네 가지 범죄 제목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고의적으로 살인을 범한 자는 반드시 죽여야 했습니다. 출애굽기 21장 12절에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둘째로, 부모를 때리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셋째로, 유괴한 자(사람을 수하에 둔 자)는 반드시 사형을 시켜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유괴는 살인죄와 똑같이 취급되었습니다. 16절에 “사람을 후린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 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넷째로,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했습니다. 17절에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방 국가에서 고의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종교시설로 들어가 몸을 피하면 국가권력도 함부로 하지 못하고 살아남는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법에는 이렇게 고의적으로 살인한 사람이 설사 하나님을 섬기는 단으로 피했다 할지라도 반드시 끌어내어 사형에 처할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고의적인 살인이 아니라 과실로 사람을 죽인 경우에는 죽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피해 살아갈 수 있도록 처소를 마련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도피성 제도입니다. 도피성은 요단강을 기준으로 동편에 세 곳과 서편에 세 곳이 있었습니다. 이 곳에 피해 있는 사람들은 국가권력이나 피해자의 가족들도 그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공의가 시행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자비가 보석처럼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고의적인 살인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사형을 하라고 엄명을 하셨을까요? 그 근거가 되는 구절이 창세기 9장 6절입니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고의적인 살인죄에 대해서 사형을 부과하신 이유는 살인한 자가 그 사람을 죽일 때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멸시했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말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법은 특수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국가만의 법이 아닙니다. 사람을 죽인 자를 반드시 죽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노아에게 주신 법입니다. 창세기 9장 6절의 배경은 노아시대입니다. 그러니까 이 법은 노아의 후손인 온 인류에게 주신 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법은 현대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형법 250조 1항에도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나와 있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살인한 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멸시하는 자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또 오늘날 한국 사회에는 유괴사건이 참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어두운 골목을 혼자 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필리핀에서도 한국 사람들이 수십 명이나 유괴를 당해 행방을 알 수 없는 비극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특히 서울에서도 유괴범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을 유괴하는 이유는 장기를 적출해서 팔려고 하는 목적이 있다고 합니다. 아주 극악무도한 자들입니다.
사람을 살해한 자에게 사형을 부과해야 하는 것은 노아에게 주신 법이고, 이스라엘 국가의 법이며, 이것은 이스라엘 국가만의 법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해야 할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러나 사형제도의 근본적인 목적은 복수가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죽일 수가 있습니까?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멸시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형시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형제도의 근본목적은 복수가 아닙니다. 인간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보존하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타락한 존재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을 무시하는 자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의 통로가 되는 부모님도 존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부모를 저주하고 학대하는 자는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는 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물론 이 법을 우리 한국사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부모를 저주한 자에게 사형을 언도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하겠습니까? 이 법을 현대 사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해야 마땅하다는 정신은 성도들이나 혹은 불신자들이나 인간사회에서 마땅히 강조되어야 할 정신입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제 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입니다. 이 말은 반대로 하면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땅에서 잘 될 수 없고 단명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저주하고 때리는 자를 절대로 잘 되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잠언 3장 17절에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모에게 불효한 사람은 까마귀와 독수리가 많이 날아다니는 동네에 다니시면 안 됩니다. 그것들이 눈을 공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만큼 부모를 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만큼 약한 사람들을 돌보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면서도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그림처럼 나타난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 우리가 마땅히 죽어야 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죗값을 갚아주신 사건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어야 할 죗값을 다 물으셨고, 하나님의 공의는 완벽히 시행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것은 예수님의 죄 때문이 아니라 나의 죄 때문이라고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죄 용서함을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는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결 론
오늘 말씀을 통해 살펴본 모든 법률들을 오늘날 대한민국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이런 정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심을 기억할 때, 우리 성도들은 약자를 보호하고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고 부모를 존중하라고 명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주의 법을 배우고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종을 대하는 법
출 21:1-11 / 임덕순 목사
지난 주일까지 배운 십계명은 하나님나라의 헌법 전문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리고 21장부터는 헌법의 세부적 내용인데, 오늘은 종을 대하는 법입니다. 당시에 사람이 남의 종이 되는 경우는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방세계는 계급사회였기 때문에 종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스라엘에는 그런 타고난 종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빚을 지는 등의 이유로 돈에 팔려가는 경우가 있고, 전쟁에서 패배하여 포로가 되는 경우에도 종이 되었습니다(왕하5:2, 25:18-21, 신15:15).
사람이 어떻게 해서 되었든지 일단 노예가 되면 노예시장에서 팔리게 되는데, 누가 와서 노예가 진 빚을 갚고는 자기 노예로 사갑니다. 그러면 노예는 자기를 산 주인을 위해서 죽도록 일을 해야 했습니다. 대개는 하루 일을 하면 얼마 씩 쳐서, 빚이 얼마니까 얼마동안 일하면 빚이 다 갚아질 수 있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노예가 된 사람은 주인 집에서 먹고 자면서 일했으므로, 주인은 그가 일한 품값보다 먹고 자는 것을 더 비싸게 계산해서, 결국 노예는 빚이 점점 더 늘어날 뿐이지 빚을 다 갚고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길은 없었습니다. 요즘도 여자가 사창가에 팔려 가면 아무리 돈을 벌어도 옷값이니 화장품값이니 밥값이니 해서 빚을 더 뒤집어 씌워서 영영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당시에는 당연히 그랬을 것입니다.
1. 6년만 종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6년 이상은 종이 되게 할 수 없다고 명하십니다.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섬길 것이요,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될 것이며.”(2)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가장 복되고 잘 사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면, 그 어디에서라도 성공하도록 그들을 책임지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게으르고 불성실하게 살아서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하면 살림이 망하고 빚도 질 수 있으며, 종으로 팔려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도 살림을 잘못하면 종으로 팔려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일단 종으로 팔려 가면 6년 동안 주인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7년째가 되면 주인은 값없이 그 사람을 놓아 주어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같은 이스라엘 사람을 영구히 노예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 히브리인을 노예로 부리는 법의 첫째 조항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규정해 주셨을까요?
첫째는, 동족의 불행을 이용하여 자기의 유익을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노예가 된 사람은 이유가 어떻든 불행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남의 불행을 이용해서 덕을 보려고 합니다. 망한 사람을 노예로 사서 값싸게 일을 시켜 먹고 빚을 더 늘어나게 해서 영원히 부려먹습니다. 어떤 사람은 남의 회사가 망하기를 기다렸다가 그 회사의를 싼값에 사서 되팔아서 돈 버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M&A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처럼 너도 어려움 당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라고 하십니다. 6년 뒤에는 반드시 풀어주라는 것은 그런 이유입니다.
둘째는,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에는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기회를 주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땅에 흉년이 몇 년간 지속되면, 그동안은 빚으로 살 수밖에 없고, 그러고 나면 그 빚을 갚기 위해서 종이 되어야 했습니다. 옛날에 우리 한국 사람이 빚을 지면 사우디아라비아에 갔습니다. 그 더운데서 몇 년을 고생하면서 돈을 모아서 그동안 진 빚을 청산하고 다시 새 출발을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기회마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노예제도가 바로 그런 성격의 것이었습니다. 빚을 짊어진 사람은 6년 동안 남의 종이 되어 빚을 청산하고 다시 새 출발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율법은 공의와 자비가 겸비한 법입니다. 자기가 진 빚을 공짜로 탕감 받는 법은 부지런한 사람만 희생되게 하는 불의한 법입니다. 한번 노예가 되면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소망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6년의 고생을 통해서 값을 치르고, 다시 출발할 수 있게 하신 법은 참으로 공의롭고 자비가 가득한 법입니다.
남의 종이 되는 상황이 영구히 지속되면 사람이 천해집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계급이 생깁니다. 당시는 노예와 자유라는 계급이 존재하던 시대이지만 하나님은 그런 계급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천한 인간을 따로 지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잘못해서 빚을 지고 종이 되면 6년 정도는 고생을 해서 책임도 지고 정신도 차리도록, 임시적으로 종살이를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7년째가 되면 반드시 해방시켜 주게 했습니다. 아무리 많은 빚을 진 경우에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언젠가는 인간이 자기 죄 값을 갚지 못해도 값없이 구원을 받을 때가 올 것임을 암시합니다.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도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 값을 갚아주심으로 죄와 사망의 얽매임에서 자유를 얻게 될 날이 올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페이지마다 하나님의 긍휼의 복음이 숨어 있습니다.
셋째, 이것은 오늘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의 성격을 보여주는 의미도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도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육체적인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연단이요 징계이지 영원한 형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에게도 고난을 주시고 연단을 하시지만, 그 고난이 절망이 되게 하시는 분은 결코 아닙니다. 고난 중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바로서면 하나님은 다시 자비를 베푸십니다. 성도가 아무리 고난 중에 있다 할지라도 그가 영원히 천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버리신 것도 아닙니다.
히브리 노예를 6년간만 종이 되게 하시어 그를 영구적으로 비참한 상태에 있지 않게 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에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지금 너무 힘드십니까? 희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종이 6년이 차서 이제 종이 돌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빚을 다 갚은 것도 아니고, 품삯을 받을 자격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신15:13에 “그를 놓아 자유케 할 때에는 공수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무리 중에서와 타작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그에게 줄 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종살이 한 사람이므로 품삯을 받을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이 너에게 은혜를 주셨으니 너도 종을 후대하라는 말씀입니다.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를 도울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이것이 공평하신 하나님의 법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사람은 부부관계, 부자관계 노사관계 등,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데,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따르면 모든 관계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만 그렇지 않으면 모든 관계가 파탄 납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기업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는 노조라고 합니다. 지난주에 현대자동차가 연초부터 또 파업을 해서 온 국민을 걱정스럽게 했는데, 회사는 이번에는 노조의 잘못된 관행을 고치겠다고 강하게 나왔고, 국민들과 울산 시민들은 기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회사는 결국 다시 노조의 요구를 들어주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시민들이 현대 자동차를 불매운동하자고 나서는 판입니다. 옛날에는 사람을 사서 부리는 사장이 노동자에게 횡포를 부리고 착취 했는데 요즘에는 노동자가 사장을 힘들게 합니다.
현대자동차와 경쟁관계인 일본의 도요다 자동차는 1950년에 파업을 하고는 그 후 50년이 넘도록 파업하지 않고 노사화합을 하고 있고, 2000년 이후 해마다 엄청난 이익을 내고 있는데도 도요다 직원들은 회사에 자기들의 임금을 동결해 달라고 요구했고, 남은 돈으로 더 좋은 차를 만드는 연구에 써서 우리 회사가 계속 세계 1등 하게 해달라고 한답니다. 걸핏하면 공장을 중단하면서 파업이나 일삼으면서 도요다보다 훨씬 더 많은 월급을 받는 현대가 이 도요다와 경쟁이 되겠습니까? 참 한심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경영하는 회사는 성경적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입사를 합니다. 믿지 않는 회사는 직원들이 술을 마셔야 하고, 때로는 주일에도 근무를 하라고 하고, 양심에 꺼리는 일을 시키는 일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독교 회사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 실망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이 회사도 회사이니까 이윤을 내야 하는데, 회사를 교회처럼 생각하고 열심히 일하려고 하지 않고 남만 헌신하기를 요청합니다. 직원들은 사장이 목회자처럼 해주기를 바라고, 사장은 직원들이 선교사처럼 몸으로 헌신해 주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 됩니까? 그러니 결국은 서로가 상처와 배신감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기업을 경영하거나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실례들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직원으로 고용할 때에나 남의 회사에 직원으로 취직해서 일 할 때에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유념해야 합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고용증대와 세금납부와 산업발전에 기여하는 것만으로 사업하는 보람을 삼을 수 있어야 하며, 직원을 종으로가 아닌, 살피고 책임져 주어야 하는 사람으로 보아야 합니다. 직원을 돈 버는 수단으로 삼아서 이익을 남기는 것이 목적이기 보다, 그 사람들을 보살펴 직장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기독교적 사업관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셔서 직원을 고용하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직원을 대하여야 하고, 혹시 내가 잘못되어 남의 직원이 될 경우까지를 생각해서 직원을 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의 회사에 직원이 된 사람은 사장을 형으로 생각하되, 형네 사업이니까 나는 슬슬 일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형님의 사업이 잘되도록 내가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으로 자기 일처럼 해주어야 합니다. 신약의 바울서신에는 주인과 고용인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하여 여러 번 강조했습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라.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엡6:5-9) 하나님은 사장과 직원의 하나님이십니다.
2. 귀를 뚫은 노예
요즘 남자들 중에서도 귀를 뚫어서 귀걸이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원래 구약시대에 귀걸이를 하는 남자들은 대개 이스마엘 대상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장사하기 위해서 사막을 가로질러 다니는 사람들인데, 몸에 많은 것을 걸치고 달면 좋은 줄 알고 주렁주렁 달고 다녔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 귀를 뚫은 사람은 당연히 노예였습니다. 어떤 노예가 귀를 뚫었느냐?
3절에, “그가 홀몸으로 왔으면 홀몸으로 나갈 것이요, 장가들었으면 그 아내도 그와 함께 나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종이라 하더라도 사랑하는 가족과의 단란한 생활을 보장하라는 것이고, 가족 관계는 영구한 관계이지만, 종 된 것은 임시적인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종이 홀몸으로 들어왔는데 주인이 아내를 주어서 그 아내가 자식을 낳았을 경우에는, 아내와 자식들은 상전에게 속하고 남자 종만 혼자 나가라고 했습니다. 당시는 장가갈 때에 여자의 부모에게 모할 이라는 결혼비용을 내야 했습니다. 종인 남자는 장가갈 때 돈이 없어서 주인이 그것을 대신 내 주었는데, 그것을 갚을 수가 없으므로 자기만 나가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법적으로 아내와 자식을 포기하고 나가서 얼마든지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내와 자식을 놔두고 가야 하게 된 종이, 가만히 생각하니 차마 가족을 놔두고 떠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인을 찾아가서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다."(5)고 말 하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주인은 그를 재판장에게 데려가고, 재판장이 종의 의사를 확인한 뒤에, 그를 데리고 와서 집의 문설주 기둥에 대고 귀를 뚫게 했습니다. 주인의 집 문설주에 핏자국을 남게 하고, 자기의 귀에도 구멍을 내서 나는 영구히 주인의 종이 되었다는 것을 표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이 사람은 종류가 다른 종이 됩니다. 이 사람은 돈의 노예가 아니라 사랑의 노예였습니다. 사랑 때문에 스스로 종이 된 사람이 귀를 뚫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표식은 비천한 노예라기보다 귀한 노예라는 표식이었습니다. 이들은 비록 노예였지만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헌신의 삶을 사는 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귀를 뚫는 고통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이 있었습니다. 요즘 남자들이 그런 것을 알고나 귀고리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적으로 우리의 남편 되신 그리스도께서, 종으로 세상에 남게 된 신부인 교회를 사랑하셔서, 혼자 자유로울 수 있는 하늘의 영광 보좌를 내어 버리시고 낮고 천한 종의 자리에 오셔서 나무에 못을 박히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예고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히2:13, 요11:51- 52, 히2:7, 9:28)
그 노예의 가족의 입장에서 볼 때는 어땠겠습니까? 기한이 다 차서 남편이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남편은 이 지긋지긋한 노예생활을 다시는 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린 자식이 있다면 그도 잘은 모르지만 언젠가 아버지가 자기를 떠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불안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빠가 귀에 상처가 나서 돌아왔습니다. 그러면서 다시는 떠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아내와 자식은 그런 아버지가 얼마나 자랑스럽고 고마운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이 그녀에게 당신 남편에게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 어디냐고 물으면 아마 틀림없이 “귀의흉터”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에게서 가장 귀한 부분이 어디입니까?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손입니다. 그 손의 상처는 주님이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으신다는 약속의 상처인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사람이 젊었을 때는 이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똑똑하면 똑똑할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출세를 원하며 높은 자리를 쫓아갑니다. 기회만 있다면 언제든지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달려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너무 귀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이 너무 귀해서 얼마든지 더 크게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맹세하고 주님의 종이 되기로 작정합니다. 부자 되는 것, 성공하는 것, 유명해 지는 것을 다 포기하고 자기 자유의사로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 귀를 뚫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오늘 우리나라에는 훌륭한 교회도 많고 훌륭한 교인들도 많은데, 은혜가 말라갑니다. 교회가 퇴보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도 귀를 뚫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두 자기 권리와 편의만 추구하고 헌신하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우리교회에 귀를 뚫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어야 그 교회가 좋은 교회, 행복한 교회가 됩니다. 누가 한가람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귀를 뚫으렵니까?
싸르트르의 ‘자유의길’ 이라는 작품 속에는 철저하게 매이기를 싫어하는 한 젊은이가 있습니다. 그는 매이기 싫어서 결혼도 하지 않고 어떤 여자와 동거합니다. 어느 날 여자가 임신을 했습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계속 유산하라고 권유합니다. 이유는 결혼이나 아이에게 매이기 싫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현대인들이 원하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가 가치가 있을까요? 자랑스러울까요? 귀에는 뭔가를 주렁주렁 달았지만 아무것에도 매이기 싫어하는 것이 오늘 젊은이들이 추구하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다릅니다. 자기의 자유를 다른 사람을 위하여 반납하고, 사랑하는 일을 위하여 귀를 뚫고 헌신할 수 있는 자유가 그리스도인이 가진 자유입니다.
3. 여종의 경우
7-11은 여종에 관한 규례입니다. 사람이 빚에 쪼들리다가 할 수없이 자기 딸을 종으로 파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남의 종이 되었다면, 여종은 남종처럼 7년 만에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여종을 일을 하게 하려고 판 것이 아니라 그 집의 아내로 팔았기 때문입니다. 남의 아내가 된 여자가 어떻게 나갈 수 있겠습니까? 지금도 중국에서는 탈북 여성들이 나이 많은 중국 한족들에게 백만원에 아내겸 종으로 팔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그를 기뻐하지 않아서 상관치 아니하면, 즉 아내 대우를 하지 않고 버리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그녀를 돈을 받고 다시 팔수가 있으나, 본국인에게만 팔고 이방인에게 팔아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방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사서 인권을 유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는 유대인이 종이 된 경우를 말씀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이방인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민족이 되기를 원하셨지 그들의 노예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이웃에게 복을 나누어주고 칭찬과 존경을 받으면서 살기를 원하시지 남들에게 업신여기고 짓밟히는 삶을 사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존경 받으며 복을 나누어주며 사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떠난 삶은 실패와 고난이 예정되어 있을 뿐입니다.
만일 주인이 그녀를 자기 아들에게 아내로 주었다면, 그녀를 자기의 딸 같이 대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비록 돈에 팔려 종으로 와서 살고 있지만 남의 여자를 데려와서 자기 아들에게 주었으면 자부 대우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를 사온 주인이 그녀를 두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들었다면 그녀를 버려서는 안 되고 필요한 것들은 공급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만약에 그것을 주지 않으려면 몸값을 받지 말고 석방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의 말씀들은 종을 대하는 법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인도적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얼마나 귀히 여기시가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인권을 귀중하게 여기시는지 아십니까? 하나님 당신이 만드신 당신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닮았고, 당신을 대신하여 세상에서 살아갈 사람들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비록 잘 못해서 빚으로 남에게 팔려가 종이 될 경우가 생길지라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존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셨기에 죄로 인해서 영원히 망할 우리를 살리려고 당신이 직접 인간 세상에 찾아오셔서 십자가에 대신 죽으시고 우리를 살려내신 것이 아닙니까? 인간의 존엄성이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인간이 비록 죄 아래 있는 존재이고, 무능해서 빚을 질수 있고 동료에게 팔려갈 수도 있는 존재이지만, 주님은 그들을 천하게 여기지 않으셨고, 도리어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찾아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부요, 자기의 권력, 자기의 성취감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을 이용하지만, 주님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의 권력, 자기의 지위, 행복을 포기하시고 우리대신에 죽어주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똑같습니다. 종으로 팔려온 사람이 나중에 종을 부릴 수도 있고, 돈이 있어서 남을 종으로 부리는 사람이 나중에 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빚져서 남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존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것은 꼭 담당해 주라는 명령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들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오늘의 법은 종을 어떻게 사용하고 대우하는가 하는 문제를 가르치는 법인데, 바탕에는 하나님이 얼마나 인간을 귀하게 여기시는가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자기유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목적으로 여기는 사람, 사람을 사랑하고 도와서 그 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그것을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바치셨고, 우리에게도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되라고 우리를 당신의 일군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본분입니다.
사람이 우리의 구원과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을 알고, 그의 법을 즐거움으로 순종하는 생활을 하면 어디에 가도 형통하고 무슨 일을 해도 대접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대우하시는 사람답게 말씀에 순종하여 사명을 다하는 사람이 됩시다.
귀 뚫은 종
출 22:1-11 / 박덕기 목사
출 20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기본법인 십계명과 여호와 종교의 순수성을 위한 규례들이 주어졌고, 이제 21장부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회라는 공동체 생활 속에서 지켜야 할 여러 가지 구체적인 율례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율례를 소위 시민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민법은 구체적인 내용보다 그 법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에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보통 시민법은 한 나라의 백성을 다스리는 권력자가 백성들의 삶을 통제하기 위해서 제정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그 법을 제정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이스라엘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분문의 시민법은 신정정치의 신정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민법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백성이 지켜야 할 법이라면, 오늘날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천국 시민인 성도들에게도 유효한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도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삶의 원리들을 본받아 살도록 힘써야만 합니다. 특별히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 히브리인으로 종이 된 자들에 대한 율례를 담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회생활을 할 때 지켜야 할 구체적인 법으로 가장 먼저 종에 대한 율례가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무엇보다도 히브리 종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셨음을 가르쳐 줍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하나님께서 히브리 종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히브리 종들이야말로 가장 불쌍하고 소외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유인으로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지만, 종들은 자유도 없이 주인의 뜻에 따라 살아야만 하며, 주인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하소연할 곳도 없고,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먼저 그들이 주인에 의해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고, 경제적으로 생존의 위협을 받지 않도록 율례를 세우신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부자들이나 권세자들을 사랑하시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돌봐야 할 사람들이 종들이었기 때문에 가장 먼저 그들을 위해 율례를 제정하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관심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 된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지고 행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되고 어려움에 처해 생존마저 위협받고 있는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계실 때 가난한 자들에게 먼저 찾아 가셨고, 심지어 사회에서 비난받는 세리와 창기들의 친구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도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 마땅히 예수님의 이러한 자세를 본받아야 합니다. 지금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힘없고 가난하여 남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나,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며 소외되고 외로운 삶을 살면서 우리들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들을 향해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베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외되고 힘없는 사람들을 향해 관심과 사랑을 베푸는 일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교회 ‘주바라기’ 회원들의 활동에 더 깊은 관심과 더 많은 성도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2절에 보면 히브리 종을 사면 육년 동안 상전을 섬길 것이지만, 제 칠년에는 값없이 나가 자유의 몸이 되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 종이 육년 동안 그 주인을 섬겼으면, 칠년 째에는 반드시 자유롭게 풀어주라고 명령하신 것은, 육년 이란 기간은 경제적인 이유로 종이 되었던 사람이, 상전에게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빚을 충분히 갚을 수 있을 만한 기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빚이 얼마건 간에 한번 종으로 삼으면 죽을 때까지 주인이 마음대로 부려먹을 수 있는 이방인들의 관습에 비하면, 종이지만 그의 노동력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인정해 주는 공의로운 명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노동에 대해 언제나 정당한 대우를 해 줄 것을 요구하고 계시며, 하나님 자신도 사람이 행한 대로 보응하심으로 정당한 대우를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상을 보면 노동한 만큼의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고용인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을 고용해 일을 시키면서도 어떻게 하면 임금을 적게 지불할까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린이와 여자들을 착취하여 심하게 부려먹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노동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심각한 범죄 행위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비록 지금 당장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음으로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아무리 많은 재물을 쌓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거둬 가시면 그것은 한 순간에 날아갈 수도 있으며, 심지어 그 재물은 그 사람을 멸망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 자들의 억울함을 아시고, 그에게로부터 그 죄를 물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타인을 고용해서 일을 시킬 때에는 어떤 경우라도 정당하게 대우하고, 노동한 만큼의 대가를 반드시 지불해야만 합니다.
3, 4절을 보면 종이 제 칠년에 자유를 얻어 해방될 때, 그가 혼자 왔다면 혼자서 그리고 이미 결혼하여 종이 되었다면 아내도 함께 나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만일 종으로 있는 동안에 주인의 여종과 결혼하여 자녀를 낳았다면, 자녀와 자식들은 상전의 소유가 되어 데리고 나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인간적으로만 보면 가족간에 생이별을 하게 만드는 비정한 율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이런 율례를 만드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종의 어려운 처지를 헤아리시는 분임과 동시에, 주인의 정당한 권리도 보호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종이 정당한 노동을 치르고 제 칠년에 자유함을 얻을 권리가 있다면, 주인도 자신이 준 여종을 아내로 맞아 자식을 낳은 종에 대해 그의 아내와 자식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부자나 가난한 자 또는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라는 이유만으로 어느 한편만을 편애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것과 전혀 상관없이 양자의 권리에 대해 아주 공평하게 처리하십니다. 이에 반해서 세상은 어떻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자의 이해가 엇갈릴 때 상대편의 입장을 고려하기보다, 먼저 자신의 입장과 권리를 보장받는 데 최대의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래서 노동자와 고용주간에 분쟁이 생겼을 때, 서로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 챙길까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못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라도 서로 자신의 입장과 권리만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과 권리도 인정하고 보장해 주는 데 동일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세상에는 분쟁이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남의 입장과 권리를 인정할 때 우리의 입장과 권리도 인정받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입장과 권리를 인정해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5, 6절을 보면 모든 히브리 종이 제 칠년에는 반드시 자유인이 되는 것과 달리, 영원히 종이 되는 경우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인이 준 여종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은 경우에는, 제 칠년에 해방이 될 때 부인과 자식들은 두고 혼자 나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 부인과 자식을 너무 사랑하여 헤어지기 싫은 경우에는, 스스로 주인에게 청하여 재판장에게로 가 문설주 앞에서 송곳으로 귀를 뚫고 영원히 주인의 종이 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남편이 아내와 자식들을 너무도 사랑하여 자유의 몸으로 풀려나가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송곳으로 귀가 뚫리는 아픔을 감수하면서 일평생 종으로 남기를 자처하는 장면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만 하여도 애틋하고 감동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이것보다 더 큰 희생도 마다하지 않은 분이 계십니다.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빚에 의해 종이 된 분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랑하는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스러운 보좌를 버리시고 천한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송곳으로 귀를 뚫리는 아픔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손과 발이 못 박히고 옆구리가 창에 찔리는 고통 속에 마침내 죽음을 당하시는 큰 고통을 치르셔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고통과 희생을 당하시면서 까지 구원하시고자 하신 사람은 자신의 가족이나 친척도 아닌, 바로 죄로 인해 죽을 수박에 없었던 벌레보다 못한 우리들이었습니다. 부인과 자식이 아니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우리,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위해 그 귀한 영광을 버리고 그토록 엄청난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의 사랑보다, 이 세상에 더 크고 놀라운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은 그런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으며, 또한 그분을 위해 자신을 얼마나 희생하고 있습니까? 혹 그런 예수님을 배반하고 세상을 더 사랑하며, 자신이 가진 것을 아까워함으로 예수님께서 달라고 하신 때 아무것도 드리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신 예수님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에 감격하는 마음으로 항상 예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 자신의 삶을 아낌없이 드림으로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에 보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7-11절을 보면 히브리인이 여종에 대한 율례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히브리인 여종은 제 칠년이 되어도 자유하지 못하며 타국인에게도 팔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또 아들에게 주기로 하였을 때에는 딸같이 여기게 하고, 여종을 취하였다가 나중에 다른 곳에 장가가게 될 경우에는 그 여종의 권리를 보장해 주고, 그것도 아니면 속전 없이 자유를 주게 하였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 사회에서 여종은 주인의 성적인 노리갯감이 되기 쉬었고, 싫증이 나면 마음대로 팔아치우는 물건과 같이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이방 풍속과 달리, 여종에게 인격적인 대우를 해 주도록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비록 여종이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팔려와 종이 되었지만, 상전과 같은 동족이며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나 경제적인 능력이나 사회적인 신분의 차이 등과 상관없이, 자신의 모든 백성들을 동일하게 대하시고 존귀하게 여기심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백성을 똑같이 사랑하시고 귀히 여기시듯이, 사회적 신분에 관계없이 성도 간에 한 형제 의식을 갖고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7절을 보면 여종은 팔년이 되어 자유를 얻는 남종과 달리 해방이 되지 못하게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남녀를 차별하신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여자를 차별 대우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율례는 당시 경제적인 이유로 팔려 간 여종 중에서도 특별히 주인이 첩으로 취한 경우에만 해당되는 율례입니다. 그 여성이 비록 종이라 할지라도 이미 주인의 첩이 되어 부부의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다른 종들처럼 자유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여종의 권리를 빼앗은 것이 아니라, 주인과 첩이 된 여종간의 부부 관계를 주인 편에서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것을 방지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율례는 하나님께서 부부 관계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인과 첩인 여종과의 관계도 이렇게 소중히 여기시는데, 하물며 정식으로 혼인한 부부 관계는 얼마나 더욱 소중히 여기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부부의 관계를 참으로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한번 맺어진 부부 관계는 죽을 때까지 바뀔 수 없습니다. 사실 부부 관계는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께서 맺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함부로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부부 관계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음행한 연고가 아니라 사소한 성격 차이나 재산 문제가 더 큰 이혼의 원인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미국 같은 경우는 결혼한 부부 네 쌍 중에 한 쌍이 이혼을 하고, 재혼한 두 쌍 중에 한 쌍이 또 다시 이혼을 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미 이혼으로 인한 결손 가정의 증가가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대두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된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정해 주신 부부 관계를 소중히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심지어 남편과 아내를 샀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꿀 수 있는 가구와 같이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결코 이와 같이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부부 관계야말로 세상에 어떤 것보다 소중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가장 귀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를 위하고 불쌍히 여기며 사랑해야 합니다. 때로는 의견이 서로 맞지 않고 그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인내하며 소중한 부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가 양보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이 정해 주신 부부 관계를 힘써 아름답게 유지할 때, 성도들은 세상 가운데 구별되어 빛으로 드러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은 히브리인 종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해 주신 여러 가지 규례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주인이나 처자식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자유를 포기하고, 문이나 문설주에다 귀를 대고 송곳으로 귀를 뚫는 종에 대한 규례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이제부터 영구히 그 집안에 소속된다는 표식이요, 그 집 주인의 영원한 종이 된다는 서약적 의미가 담긴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한 번 귀를 뚫은 종은 그 시점부터 죽어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계속해서 주인을 섬기며 봉사하는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요즈음은 귀고리 장식을 하려고 일부러 귀를 뚫는 여성들도 많이 있기 때문에 송곳으로 귀를 뚫는 아픔 정도야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종살이 하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소망은 자유함인데, 그토록 소중한 자유를 포기하고 자원하여 귀를 뚫고 종이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처자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 외에 다른 아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흑인들을 노예에서 해방시킨 유명한 링컨 대통령이 전쟁을 끝내고 닷새 후에 워싱톤 시내 포드 극장에 연극을 보러 갔다가 암살자의 총을 맞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시신을 링컨의 고향인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에 안치시키기 위해 워싱톤 볼티모어 역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그의 유해가 백악관 앞 펜셀바니아 애비뉴 길을 지날 때였습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길가에 도열해 있던 무리 중에 링컨의 영구차가 지나가려 하자 한 흑인 신사가 자기 앞에 있던 아들을 번쩍 안아들고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아들아 잘 보아라, 저 분이 너를 위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거야. 결코 잊지 말아라. 저 분의 죽음으로 너와 내가 자유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이란다."
우리가 전에는 다 마귀의 종이요 죄와 사망의 노예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우리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종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귀를 뚫은 아픔 정도가 아니라 두 손과 양 발에 못을 박히고 옆구리는 창에 찔리는 고통을 겪으시며 대신 죽기까지 하시고, 우리를 마귀와 죄와 사망의 종살이에서 건져 영원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무엇 때문에 그렇게 큰 희생을 치르셨습니까? 그것은 우리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 외에 다른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아프리카의 노예 시장에서 한 노예가 팔려 나왔습니다. 그 곳을 지나가던 선교사님이 그를 불쌍히 여겨 값을 치르고 그 노예를 샀습니다. 그리고 쇠사슬을 풀어 주면서 “당신은 이제 자유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노예가 선교사님을 계속 따라 옵니다. 선교사님이 다시 “당신은 이제 완전한 자유인입니다. 부디 행복하게 사십시오.”라고 했더니 그 노예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전에는 눈에 보이는 사슬에 묶여 끌려 다니는 노예였지만,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선교사님의 사랑의 사슬에 포로 된 노예입니다. 앞으로 일평생 선교사님을 섬기며 살겠습니다.”
처자식을 사랑하여 자유를 포기하고 송곳으로 귀를 뚫어 영원한 종을 자처한 노예가 있었다면, 주님 때문에 구원을 받고, 주님 대문에 영원한 자유인이 되고,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알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비록 눈에 보이는 송곳으로 귀를 뚫지는 않았을지라도, 주님을 위해 영적으로 귀를 뚫은 종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한평생 주님을 섬기며 주님께 충성을 다 바쳐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우리의 영원한 주인이 되시고 생명의 은인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스스로 종이 된 사람들
출 21:1-6 / 홍문수 목사
오는 8월 15일은 광복 61주년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일제의 압제와 속박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은 감격의 날입니다. 해방 후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축복하셔서 세계 경제 10위권에 근접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가 피선교국에서 선교국으로, 그것도 세계에서 선교사를 두 번째 많이 파송한 선교대국(1만2천명 선교사를 파송한 국가)이 되었습니다. 최근 나라 안팎으로 심란하고 복잡한 일들이 많지만, 그래도 이 작은 나라가 이마만큼 발전되고 지탱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신기합니다.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애국가 가사 그대로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각 개인이 광복의 기쁨을 십분 누리려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광복을 넘어서 ‘영적인 광복’을 이뤄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광복의 핵심은 자유입니다.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아무리 정치 경제적으로 자유를 얻어도 만일 ‘영적인 자유’를 얻지 못하면 각 개인의 인생은 참으로 행복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 우리에게 있어야 할 ‘영적인 광복’에 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되어 출애굽 한 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구약성경을 읽을 때 참고가 되도록 율법에 관해 잠시 정리해 드립니다. 율법은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정한 법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대로 따라야 할 규정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율법을 읽다 보면 내용도 어렵고, 오늘 우리의 실정과 부합되지 않는 게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이 나오면 애를 먹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율법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요 우리의 신앙과 삶에 큰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냥 지나쳐버리면 큰 손해를 보게 됩니다. 지금 말씀드리는 것을 잘 정리해 두시면 구약의 율법을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구약의 율법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도덕법, 제사법, 사회법 등입니다.
(1) 도덕법(Moral Law) : 십계명(출애굽기 20장)으로 대표되는 율법인데 시대와 상황을 초월해서 모든 인간이 지켜야 할 법도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은 우리가 철저히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율법을 지킴으로 우리가 바른 길을 걸어가고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제사법(Ceremonial Law) : 구약 시대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규정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레위기 등) 그런데 이런 것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되었습니다. 십자가 죽음이 우리의 속죄를 완성한 것입니다. 더 이상 구약의 제사가 필요 없습니다. 다만 그 의미를 깨달음으로 구원의 은총을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3) 사회법(Social Law) : 이스라엘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그 시대 상황에 맞게 법률을 만든 것입니다. 이것 역시 그대로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회법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우리 삶의 현장에서 그 정신을 살려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사회가, 우리 개인이 복되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출애굽기 21:~23:) 오늘 본문 말씀이 곧 사회법(or 시민법) 규정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 어떤 내용입니까?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 존재하던 노예제도에 관한 규정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노예제도도 없고, 당연히 이 규정대로 실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안에 담긴 원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인권 존중’입니다. 혹자는 하나님이 노예제도를 허용하신 데 대해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노예제도는 하나님의 성품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노예제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게 아닙니다. 당시 고대 이방 나라에서는 노예가 하나의 물건 취급을 받았고, 평생 주인에게 속박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 노예의 경우는 충분히 인격적인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 시대로서는 사회의 경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고, 일종의 고용제도였습니다. 이방 나라의 노예제도와 비교해 볼 때 하나님이 사랑과 공의의 정신으로 규정해 놓으신 훌륭한 법률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내용을 보십시오. 2절 보면, 히브리 종이 6년 일하면 제7년째는 해방됩니다. 이방 나라에서는 평생 소유물로 취급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노예, 종이 되는 케이스는 큰 빚을 졌거나 경제적으로 망해서 남의집살이를 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인격적인 대우를 받도록 규정하셨습니다.(레25:39~40 종, 노예로 부리지 말고 형제나 품꾼으로 대우) 그리고 6년 일한 후에는 아예 해방을 시킵니다. 또 해방시킬 때는 많은 선물을 줘서 그 이후의 생활 대책을 세워 줍니다.(신15:13~14 참조) 요즘으로 말하면 퇴직금을 충분히 주는 겁니다.
한편 주인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경제적 손실을 보면 안 되니까 3절~4절에 뭐라고 규정합니까? 혼자 들어왔으면 혼자 나가고, 그 주인집에 있는 동안 아내나 자식을 얻었어도 주인에게 남겨 두고 나가도록 규정합니다. 이것은 주인의 재산권을 보장하는 의미입니다.
형평성을 유지하려는 조치입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5절~6절입니다. 만일 종이 제7년에 해방되는데, 주인이 너무 좋고 가족과 함께 살고 싶으면 특별한 계약을 맺을 수 있습니다. 나가서 사는 것보다 주인집에 눌러앉아 계속 살면 좋겠다고 판단이 되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 때 서약의 표시로 귀를 문설주에 대고 송곳으로 뚫습니다. (종의 표시로 이방 나라는 조금씩 달랐습니다. 고대 카르타고는 귀고리를 걸어두었고, 고대 바벨론에서는 이마에 불로 지져서 문신을 새겨 넣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오늘날은 장식의 의미지만 당시에는 평생의 노예 표시를 하는 잔인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그 주인의 종으로 영원히 있는 겁니다. 그러나 대우가 훨씬 좋아지고 가족의 일원으로 대우해 줍니다.
하나님은 이런 율법 규정을 통해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경제 질서를 유지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스스로 종이 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 설명해 주시는 겁니다.
이방인 주인은 나쁜 주인입니다. 그 속박에 있으면 고통입니다. 저주입니다. 멸망입니다. 반면 이스라엘 주인은 좋은 주인입니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계속 종이 되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주종 관계는 속박의 관계가 아닌 사랑의 관계가 됩니다. 그 사람으로서는 오히려 참 자유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생활이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자유 하면 무조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완전한 자유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완전한 자유, 절대 자유는 오직 하나님에게 고유한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는 제한적인 자유요, ‘하나님 품 안의 자유’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 자유의 중요한 원리를 배우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영적인 광복’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종인데, 범죄함으로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 대신 마귀에게, 죄에게, 세상의 헛된 것들에 종노릇을 하게 된 겁니다. 한 마디로 영적인 속박 상태로 전락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영적 속박 : 마귀의 종, 죄와 사망의 종
인간은 의존적인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의존하는 존재입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 속에서 생존하도록 창조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물고기의 자유는 ‘물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만일 그것을 벗어나면 해방은 해방인데 ‘멸망하는 해방’입니다. 자유는 자유인데 ‘죽는 자유’입니다. 그러니까 물고기의 참 자유는 물 안에 제한된 자유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유인인데,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에게 자유를 가져대 주는 대신 오히려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마귀와 죄에 속박을 당하는 ‘종’의 상태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 저리 끌려 다니며 멸망 길로 가게 됩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원죄를 이어받은 인간은 마귀에게 종노릇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귀는 욕망을 자극하며 죄를 짓게 만듭니다. 그래서 일단 죄를 지으면 더욱 깊은 속박에 빠지게 됩니다. 종내는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이와 같은 죄의 권세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8:34 “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우리가 흔히 보는 장면입니다만, 범죄자들이 실컷 죄를 짓고 나중에 붙잡히면 얼굴을 가리고 부끄러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했지만 종처럼 끌려가서 했다는 증거입니다. 붙잡히고 보니 후회막심한 겁니다.
인간은 일단 욕망에 사로잡히면 헤어나지 못합니다. 죄의 유혹으로 인해 결국은 범죄하고 마지막 멸망하게 됩니다. 며칠 전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보았습니다. 천하장사 출신 씨름선수가 강원도에 놀러갔다가 술을 마시고 다방 여종업원을 강제로 끌고 가서 성폭행하려다 체포당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기사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천하장사도 욕망 앞에는 별 수 없구나!”
성경에도 이런 예들은 얼마든지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삼손은 천하장사 중의 천하장사입니다. 그런데 블레셋 여인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가 무릎을 베고 희희낙락하다가 머리 깎이고 눈 뽑힌 채 맷돌을 돌립니다. 얼마나 비참한지! 아합왕은 왕이니까 재산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물질의 욕망에 노예가 되어서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하고자 살해합니다.(왕상21:) 그 결과는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였고, 전쟁터에서 죽은 후 그 흘린 피를 개가 핥는 비극적인 모습으로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압살롬은 왕자니까 그 권력으로도 충분히 누리고 살 텐데 권력욕에 눈이 멀어 아버지를 왕좌에서 몰아냈지만 비참하게 죽고 맙니다.
이처럼 인간은 죄성으로 인해 욕망의 종이요 그것으로 인해 범죄하고, 마침내 영원히 죽는 악순환을 거듭하게 됩니다.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러므로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합니다. 그 속박으로부터 풀어줄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그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속박의 원인이 된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신 십자가 그것이 죄와 사망의 사슬을 끊어줄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에게 돌아온 인간의 영적 자유 :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
예수님은 인간은 죄와 사망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 구원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을 거부하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을 오히려 속박으로 오해합니다. 옹색하고 불편한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참 자유가 무엇인지 몰라서 그런 겁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끈 달린 연이 하늘 위로 날아다닙니다. 그런데 늘 불만입니다. 더 높이, 더 멀리 가고 싶은데 ‘끈’ 때문에 더 이상 못 갑니다. 하루는 바람이 몹시 부는데 얼마나 신나는지! 그런데 더 이상 날지 못합니다. 그래서 힘껏 줄을 당겨봅니다. 줄이 뚝 하고 끊어집니다. 연은 쾌재를 부릅니다. 이제야 마음대로 날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웬걸 거센 바람에 팽그르르 돌다가 땅바닥에 곤두박질하고 말았습니다. 연의 자유는 연줄을 끊고 멀리 가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 줄에 달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탕자의 이야기도 이를 증거합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에서 가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멸망의 길이었습니다. 나중에 깨닫고 돌아옵니다. 아버지에게로 돌아옴이 구원이요 참 자유입니다. 눅15:17~20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 ” 자기는 종으로도 족한데, 아버지는 그를 다시 아들로 받아주고 잔치를 베풉니다.
이렇게 죄와 사망의 속박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 그러나 거기서 그치면 문제가 생깁니다. 악한 원수 마귀는 또다시 공격해 옵니다. 다시 종으로 삼으려고 호시탐탐 노립니다. 우리 스스로는 그것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 이후에도 다시 죄의 종으로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가르쳐줍니다. 갈5:1,13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무슨 말씀입니까? 구원 이후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께 적극적으로 종노릇을 해야 죄의 종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종이 됨으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스스로 영원한 종이 됨으로 참 자유를 누리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① 의의 종이 됨으로 : 우리는 의의 종이 됨으로 죄와 싸워 이기고 참 자유를 누립니다. 어떻게 의의 종이 되나요? 말씀에 순종하면 됩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불의와 죄악을 이깁니다. 그때 영적 자유가 있습니다. 시119:165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말씀대로 사는 사람에게 있는 평안! 이것이 영적 자유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성령의 세력과 육신의 욕망이 공존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어도 천국 가기 전까지는 죄의 성향이 남아 있습니다. 그 틈에서 우리가 승리하려면 성령을 적극적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그게 성령 충만입니다. 갈5:16~17 “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어떤 분의 간증문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는 도박의 습관이 있었는데 교회 다니는데도 계속되었습니다. 늘 후회하지만 고쳐지지 않습니다. 어느 날 밤 돈을 다 잃고 야밤에 귀가합니다. 또 부부 싸움입니다. 미안한 생각이 들어 아내 앞에 무릎을 꿇고 빕니다. 다시는 안 하겠다고 ... 하지만 아내는 믿어주지 않습니다. 그러자 홧김에 주방으로 가서 식칼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손가락을 자릅니다. 결심의 증거로 ... 그러나 1주일 후 다시 도박판에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죽고 싶었습니다. 이런 갈등 속에 다행히 그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를 뜨겁게 만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게 됩니다. 그러고 나니까 거짓말처럼 그 못된 습관이 저절로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주님에게 종이 됨으로 다른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원리입니다.
② 사랑의 종이 됨으로 : 우리의 인생을 망치는 것 중의 하나가 증오와 갈등입니다. 세상에 무엇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랑이 부족해서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할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구원받은 후에도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늘 미워하며 다투며 살아갑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만이 승리임을 잘 알지만 안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종이 됨으로 가능해집니다.
네덜란드 출신 코리 텐 붐 여사(「주는 나의 피난처」저자)의 이야기입니다. 나치 치하에서 수용소 생활로 많은 고통을 받은 분입니다. 그는 2차 대전 종전 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는 전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전도 초기 시절 어느 교회에서 집회를 마친 후의 일입니다. 교인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남자 한 분이 뒤에서 기다리다 절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기억하냐고 묻습니다. 기억이 안 난다는 표정을 지었더니 그는 자기가 바로 아무 아무 수용소의 간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여사는 순간 기억이 살아났고 그가 자신의 옷을 벗기고 침을 뱉고 채찍질을 하며 성폭행을 한 사람임을 알에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증오가 끓어오릅니다. 그냥 손을 뿌리치고 욕을 하면서 얼굴에 침을 뱉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성령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예수님이 너도 용서하지 않았느냐고, 그리고 방금 전에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냐고 ... 그 음성을 들은 여사는 괴롭지만 어금니를 질끈 깨물며 그 남자의 손을 잡았습니다. 사랑할 수 없지만, 용서할 수 없지만 주님께 순종한 겁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 마음속에 한없는 감격이 일어납니다. 진실한 용서의 사랑으로 그 남자는 얼싸안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사랑에 순종함으로 우리는 증오와 갈등을 이기고 참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③ 사명의 종이 됨으로 : 우리 인생은 때때로 마귀의 유혹으로 방향을 상실하고 방황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이 주신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에 충성스런 종으로 살면 방황이 끝납니다. 진정한 승리의 기쁨과 자유를 얻게 됩니다.
링컨 대통령 당시의 일입니다. 아마 노예해방이 선언되기 전의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 흑인 노예가 병들어서 일을 잘 못하자 그 주인이 학대합니다. 채찍질을 하고 괴롭힙니다. 지나가던 백인 교수는 너무 불쌍해서 주인에게 흥정해서 두 배의 돈을 치르고 풀어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흑인 노예는 갈 데도 없고 그 사랑에 감동을 받아 자기를 받아달라고 간청합니다. 아무리 가라고 해도 가질 않아 하는 수 없이 함께 삽니다. 노예라기보다는 가족처럼 친구처럼 지냅니다. 그러니까 더 충성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식물학자인 교수는 그 흑인과 함께 태평양 섬에서 탐사활동을 벌입니다. 흑인 노예가 숲을 헤치고 앞서 가는데 뒤따르던 교수가 독사에 물려 쓰러집니다. 독이 온 몸에 퍼져 살 길이 없게 되자 흑인 노예는 입으로 독을 빨아올립니다. 주인은 살렸지만 자기는 죽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죽어가면서 그는 평안한 모습으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여한이 없습니다. 나를 사랑해 주는 주인을 위해 보답하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주님을 위해, 사명을 위해 충성하는 종이 되면 기쁜 겁니다. 그게 자유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사명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는 본래 자유인입니다. 로마시민권자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위해 스스로 쇠사슬에 매인 사신(엡6:20)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는 무한한 자유와 기쁨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광복절은 맞이하고 보내면서 우리 개인과 나라의 영적 광복에 관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주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나 개인도 그렇고 나라도 그렇습니다. 우리나라가 정치적으로 광복이 되었지만 아직 어렵습니다. 앞으로 정치 경제도 잘 하고 외교 안보도 잘 해야 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나라가 계속 번영하고 잘 되는 길은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겁니다. 온 백성이 예수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직하게 살고, 세계선교의 사명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종이 됨으로 참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부디 이런 원리를 잘 실천함으로 참 자유인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여자 종에 대한 규례
출애굽기 21:7-11 / 이상호 목사
설교를 준비하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놀라운 일들을 발견합니다. 과거 3,500년 전에 여자의 신분이나 권위가 없던 시절에 하나님은 그 신분을 인정하시고 부모의 마음으로 딸에 관한 규정을 정해놓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무슨 이유로 사랑하는 딸을 팔았는지 그 내용은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지만 투전하다 돈을 잃어서 팔았는지 아니면 싸움을 하다가 상대방을 상하게 해서 돈을 물어주어야 하는데 물어줄 돈이 없어 서인지 아니면 가난해서 그 가난을 모면하기 위하여 인지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딸을 팔았으면 산사람에게 대하여 어떻게 종을 대할 것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남종 같이 나오지 못 할지며.' 남종과 여종 사이의 차별 대우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여종은 남종을 위하여 돈을 지불하고 주인이 사서 데려옴으로 주인의 재산이 되기 때문에 그 남종의 아내와 자녀 역시 주인의 재산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그렇게 법을 만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종을 주인이라고 해서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규정을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여종을 다른 사람에게 파는 일과 - 타국인에게 팔지 못할 것이요.
타국인에게 팔지 못한다는 말은 바꾸어 말해서 종을 사고파는 상대가 히브리인이어만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신학자 '크노벨'(Knobel)은 '히브리인 종들을 국경 밖에서는 팔지 않았다'라고 해석함으로 본문의 의미를 좀 더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상전의 아들에게 주는 일입니다.
여기 상전의 아들에게 주는 일은 합법적인 결혼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 아들과 결혼하면 딸 같이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이처럼 종으로 왔지만 그 미모와 행실을 보고 며느리 삼았던 일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종이지만 결혼하게 되면 신분이 상승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결혼이 평생에 지속되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이지만 하나님은 그 신분을 보장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 보장이 딸입니다. 여러분 딸은 혈육입니다. 그리고 혈육은 절대 뗄 수 없는 관계를 말합니다. 종의 신분이 아닌 딸의 신분으로 발전되었다는 것입니다.
팔려올 때는 종으로 팔려왔지만 주인의 아들과 결혼하면 이제 딸의 신분으로 보장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우리의 신분을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선조부터 하나님을 잘 섬기는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 못하는 우상에 매여 사는 희망이 없는 우리들에게 성령으로 복음을 받게 하시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약속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부여하셔 우리는 아무런 공로 없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 하나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같은 원리입니다.
세 번째는 상전이 달리 장가들지라도 그의 의복과 음식과 동침하는 것을 끊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약속 딸같이 대하라는 것은 좋은 옷과 먹는 것을 책임져서 생계를 보장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자에게서 잠을 잘 것이 아니라 잠자는 것 까지도 보장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인이 달리 장가들었다고 해도 사실은 이 내용으로 보아 크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잠자리 횟수만 달라지지 크게 신분이나 생활에 구해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비록 종이지만 그 신분이 물건처럼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나라에 많이 행해졌던 일입니다.
남자가 바람을 피워 다른 여자를 얻으면 아내와 자녀들을 나 몰라라 하고 버려두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별 말도 안 되는 생트집을 잡아 자신의 바람을 정당화시키고 본처를 외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종으로 팔려온 여자라면 더 더욱 버릴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일까지도 세심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종이지만 아내로서 그 삶을 보장하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는 하나님이십니까?
네 째로는 이 세가지일을 이행치 않으면 자유해방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이유나 조건 없이 자유로운 몸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무슨 이유든 딸을 종으로 팔았을 때는 많은 절망감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으로 팔려가도 안심하는 법을 하나님은 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이십니까? 여기서 여자 종에 규례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부모들이 극도의 빈곤 중에서 그 딸을 돈 받고 팔아 여종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첩이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럴 경우에도 저들을 잘 돌보라고 하였습니다. 남녀종에 대한 규례는 당시 우양같이 취급받든 종들을 하나님께서 저들을 사랑하사 저들의 인권과 생존을 보호하기 위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전 세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국가나 개인의 빈부에 따라서 또는 학력에 따라서 직분에 따라서 많은 차별이 되는 이 시대에 우리는 과연 하나님께서 이처럼 당시 종은 영구적으로 종이지만 종이 아닌 한 인격체로서 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법을 통하여 전 세계에 살고 있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하나씩 실천하다보니 지금 기독교 국가는 자유주의인 민주주의에 따라서 사람들의 인권을 보장하는 법들을 만들어 사용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례는 전 세계 모든 백성들에게 여성의 인권을 상장시키고 더 나아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은 순종 없이는 그 믿음을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같은 이유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행하며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