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 김순자(가명, 73세)는 몇 년 전부터 유난히 깜빡깜빡하는 일이 늘고 심할 땐 집 전화번호가 생각나지 않아 곤란했던 적도 있었지만 ‘나이 들면 건망증이 심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가볍게 넘겼다.
2년 전 집 근처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이웃들의 도움으로 귀가한 이후 말수도 줄고 부쩍 우울해하더니, 지인들을 몰라보거나 옷을 뒤집어 입는 등의 문제들이 종종 발견됐다.
가족들이 심각성을 인식하고 병원을 찾았으나 이미 가족들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고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만큼 치매가 중증도에 접어든 후였다.
‘치매는 나이 들어 생기는 노화현상이다?’ 과거에는 치매가 늙어 생기는 몹쓸 병이라는 생각이 팽배했다.
최근에는 치매가 단순한 노화현상이 아니라 치료해야할 병적 현상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노년층의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치매를 조기에 진단하고 치료하려는 욕구가 커지고 있다.
한림대의료원 강동성심병원 치매예방센터는 2005년 10월부터 2006년 7월까지 치매환자 45명을 대상으로 인지기능 검사, 우울척도검사, 일상생활동작검사 등을 실시한 결과 이중 33%인 15명이 치매의 전단계로 알려져 있는 경도인지장애로 진단됐다.
뿐만 아니라 56%에 해당하는 25명이 규칙적인 독서, 신문구독, 서예, 바둑, 피아노 연주 등의 활발한 지적 활동을 하고 있었고, 40%에 해당하는 18명이 주 3회 이상 하루 30분 이상의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 건망증・경도인지장애・치매, 구별 쉽지 않아
경도인지장애(Mild Cognitive Impairment, MCI)는 간단히 말해 건망증과 치매의 중간단계라 할 수 있다.
치매에 비하면 판단력, 지각, 추리능력, 일상생활 능력 등이 대부분 정상이지만, 단순한 건망증에 비해서는 더 자주 무언가를 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노인이 되면 일반적으로 기억력이 감퇴되고 활동 영역에 제한이 생기기 때문에 겉으로 봐서는 단순한 건망증인지 경도인지장애인지 치매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실제로 강동성심병원 치매예방센터를 찾은 45명의 환자들 중 4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환자들에서 식사하기, 계단오르기, 목욕하기를 포함한 일상적인 생활동작이 대부분 가능했다.
경도인지장애의 주요 증상은 금방 있었던 일이나 최근의 일을 잊어버리는 단기기억력 저하가 대표적이며, 이전에는 잘 해내던 일을 갑자기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계산 실수가 잦아지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 나이・교육 수준 감안한 엄밀한 진단 과정 필요
최근 미국의 메이요 클리닉에서 경도인지장애 환자 270명을 10년 동안 추적 관찰한 결과에 따르면, 이들에서 매년 10~15%씩 치매가 추가로 발병했으며 6년 동안 무려 80%의 환자가 치매로 이행했다고 한다.
발병을 줄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초기인 경도인지장애 단계에 정확한 진단을 통해 치매로 이어지는 건망증인지 아니면 단순히 노화로 인한 건망증인지를 확인하고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
모든 증상은 본인뿐 아니라 가족이나 친지들과의 자세한 인터뷰에 의해 확인돼야 하며, 상세한 신경인지기능 검사상 나이 및 교육수준 등을 감안한 진단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정확한 진단이 가능하다.
최근에는 자기공명영상(MRI)이나 양전자방출단층촬영(PET), 단일광자방출단층촬영술(SPECT)을 이용한 뇌 영상이 경도인지장애 환자를 찾아내는 데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사람의 뇌에서 지식과 정보를 저장하고 회상하는 부위를 해마라고 하는데, 이 부위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점 위축되어 기억력 감퇴가 나타난다.
같은 경도인지장애 환자라 하더라도 뇌기능 영상사진을 찍어 비교해 보면, 치매로 발전하는 환자의 해마는 그렇지 않은 환자보다 크기가 줄어들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병의 진행속도 늦추고 삶의 질 유지
아직 경도인지장애에 대해 공식적으로 인정된 치료법은 없다. 현 단계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는, 가능하면 치매로 발전하기 전인 경도인지장애 단계에서 빨리 진단을 하고 병의 진행을 막기 위한 조치를 하는 것이다.
치매치료제로 쓰이는 항치매약물이 경도인지장애에서 치매로 진행되는 것을 늦춰주는 효과가 있고 알려져 있다.
이처럼 일단 경도인지장애로 진단이 되어 조기 치료를 받는다면 약물치료를 통해 합병증을 최소화하여 일정정도의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다.
치매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금연, 적절한 운동 등 건강한 생활습관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가능하면 적극적인 태도와 기분 좋은 마음가짐으로 생활하고 고혈압이나 당뇨병·고지혈증·비만 등 성인병이 있다면 치료를 최대한 빨리 받아 합병증을 막는다.
한림대의료원 강동성심병원 정신과 연병길 교수는 “치매예방을 위해 TV를 시청하거나 신문・잡지 등 독서를 통한 두뇌 활동을 지속하는 것이 좋다”며 “글을 쓰거나 일기를 매일 쓰는 것도 기억력을 유지하는 좋은 방법이며, 취미생활로 세밀한 손동작을 필요로 하는 서예, 자수, 그림그리기 등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조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