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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백성호
관심
“삶이 고통의 바다”라고 여기는 우리에게 “삶은 자유의 바다”라고 역설하는 붓다의 생애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백성호 종교전문기자가 ‘붓다뎐’을 연재합니다. ‘종교’가 아니라 ‘인간’을 다룹니다. 그래서 누구나 읽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종교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사람들은 지지고 볶는 일상의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며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에게 붓다는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가 돼라”고 말합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 돼라”고 합니다. 어떡하면 사자가 될 수 있을까. ‘붓다뎐’은 그 길을 담고자 합니다.
20년 가까이 종교 분야를 파고든 백성호 종교전문기자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예수를 만나다』『결국, 잘 흘러갈 겁니다』등 10권의 저서가 있습니다. 붓다는 왜 마음의 혁명가일까, 그 이유를 만나보시죠.
⑧싯다르타, 아들 낳고 1주일 만에 출가
붓다 이야기를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게 가족이다. 붓다에게는 아내가 있었고, 아들도 하나 있었다. 그들을 뒤로하고 모질게 출가한 사람이 붓다다. 물론 나중에는 붓다의 아내도, 붓다의 아들도 출가해 아라한의 자리에 오른다. 싯다르타의 결혼과 득남, 그리고 출가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인간 싯다르타’가 보인다. 우리가 하는 똑같은 고뇌와 번민을, 2500년 전 싯다르타도 똑같이 했다.
#싯다르타의 배필은 고모의 딸
싯다르타가 19세가 될 때였다. 숫도다나 왕은 왕자의 배필을 정하기로 했다. 왕자가 출가의 뜻을 밝힌 적이 있기에, 왕은 예방 차원에서 서둘러 왕자비를 볼 참이었다. 사카족의 장로 회의 끝에 후보자가 정해졌고, 싯다르타는 직접 가락지를 건네며 야소다라를 배필로 맞았다.
인도 중부의 산치 대탑에 있는 불교 조각상. 아소카 왕 때 조성된 산치 대탑에는 인도 불교의 산 역사가 녹아 있다. 백성호 기자
경전에는 “야소다라는 아름답고 단정한 외모에, 키가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으며, 몸매가 뚱뚱하지도 야위지도 않고, 피부가 검지도 희지도 않다”고 기록돼 있다. 불교 학자들은 싯다르타에게 적어도 세 명의 아내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고대 인도의 씨족 국가에서 왕자가 아내를 여럿 두는 건 흔한 일이었다. 싯다르타의 아내들 중에서 자식을 낳은 이는 야소다라가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야소다라는 남이 아니었다. 고모의 딸이었다. 숫도다나 왕에게는 아미타라는 누이가 있었다. 아미타는 이웃 나라인 꼴리야족에게 시집을 갔다. 그리고 딸을 낳았다. 아미타의 딸 이름이 야소다라다. 당시 씨족 연맹체였던 카필라 왕국에서 친척 간 결혼은 흔한 일이었다.
결혼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꼴리야족은 문무를 겸비한 사위를 원했다. 혹시라도 왕궁에서 안전하게만 살아온 ‘샌님’이 아닌지 염려한 것일까. 배필을 뽑기 위해 꼴리야족은 시험을 치렀다. 그중 하나가 활쏘기 시합이었다. 500명의 청년이 이 시합에 참가했다고 한다. 여기서 눈에 띄는 기록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닌 싯다르타 왕자의 활쏘기 실력이다.
싯다르타의 할아버지는 시하하누다. 무예에 능했다. 생전에 그가 썼던 활이 있었는데, 사당에만 보관돼 있었다. 활이 너무 무겁고 강해서 아무도 시위를 당길 수가 없었다. 활쏘기 시합에서 싯다르타는 할아버지의 활을 꺼냈다. 쇠북까지 뚫어버린 싯다르타의 활쏘기 실력에 야소다라 가문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러니 석가모니 붓다는 뜻밖에도 무예 실력이 뛰어난, 건장한 신체를 가진 인물이었다.
카필라바스투 일대에 있는 불교 유적. 싯다르타는 이곳에서 유년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냈다. 백성호 기자
#아, 속박이 태어났다
나는 카필라 성 안을 걸었다.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풀 위에 남아 있는 벽돌로 된 건물 터는 그 옛날 카필라 성의 위용을 짐작하게 했다. 싯다르타는 여기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다. 싯다르타 왕자는 결국 야소다라와 결혼했다. 야소다라는 아기를 임신했다. 출산일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왕궁 안 연못가를 거닐던 싯다르타에게 소식이 날아왔다. 부인이 드디어 아들을 낳았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싯다르타 왕자는 이렇게 말했다.
라훌라자또 반다낭 자땅!
우리말로 하면 “라훌라가 태어났다. 속박을 낳았다”는 뜻이다.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서 왕자가 내뱉은 한마디는 뜻밖이었다. “속박을 낳았다.” 나는 그 말에서 절박함을 읽는다. 다름 아닌 삶의 문제를 풀고픈 절박함이다. 그게 얼마나 절실했으면 자식마저 걸림돌로 느껴졌을까. 카필라 성의 연못 터를 걸으면서 그의 외마디를 읊조려 보았다. “라훌라자또 반다낭 자땅.”
거기에는 절망이 깔려 있다. 인간의 삶에서 마주해야 하는 생로병사에 대한 절망감이 짙게 묻어 있다. 아들의 출생이 반갑긴 하겠으나, 생로병사에 대한 어떠한 답도 줄 수 없음을 싯다르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과 아들은 똑같이 생로병사의 여정을 거쳐야 하고, 그 속에서 절망을 맛봐야 하리라. 그러니 아들의 출생은 싯다르타가 품고 있는 문제를 푸는 데 걸림돌이 될지언정, 답이 되지는 못했다.
카필라 성의 유적지에서 만난 힌두교 수행자 사두. 유적지 발굴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백성호 기자
#출가자의 냉정함
성철 스님은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유교에서 대(代)를 잇는 일이 얼마나 큰일인가. 그런데도 장손인 성철은 출가를 해버렸다. 출가한 자식은 독신 수도승이니 결혼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대가 끊기고 만다. 수소문 끝에 절까지 찾아온 어머니에게 돌을 던지며 쫓아냈던 일화는 가슴 아프다. 거기에도 성철 스님의 절박함이 있다. 생로병사의 문제를 풀어보겠다는 지향이 있고, 그 지향을 가로막는 걸림돌을 치우겠다는 냉정함이 있다.
싯다르타의 절박함과 성철의 절박함이 크게 달랐을까. 현재 조계종 종정을 맡고 있는 성파 스님의 고향은 경남 합천이다. 합천 하면 해인사다. 그런데도 성파 스님은 해인사가 아닌 통도사로 출가했다. “그때는 교통이 많이 불편했다. 합천에서 양산 통도사로 오는 길도 멀었다. 가능하면 집에서 먼 곳으로 가서 출가할 생각이었다. 집에서 자꾸 찾아오면 수행이 제대로 되겠는가.” 성파 스님도 그랬다. 수행의 길에서 예상되는 걸림돌을 미리 치우려 했다.
고대 인도는 계급 사회였다. 자신이 속한 계급마다 의무가 있었다. 싯다르타 왕자는 크샤트리아 계급이다. 왕국을 꾸려야 하는 왕족이었다. 그러니 왕위를 이을 자식을 낳는 건 싯다르타의 큰 의무였다. 아들이 태어났을 때 싯다르타에게는 두 가지가 동시에 생겨났다. 하나는 속박이고, 또 하나는 의무를 마친 해방이다. 끊기도 쉽지 않고, 따르기도 쉽지 않은 갈림길이다.
인도 산치 대탑에 조성돼 있는 사자상. 아소카 왕 때 세운 이 사자상은 지금 인도의 국가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백성호 기자
싯다르타는 그중 하나를 택했다. 아들 라훌라가 태어난 지 7일째 되던 밤이었다. 핏덩이 같은 자식을 뒤로하고 싯다르타는 궁을 떠났다. 출가였다. 그날 밤에 카필라 궁에서 일어난 사건이 그의 출가에 방아쇠를 당겼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짧은 생각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우리에게는
익숙한 글귀입니다.
이 글의 출처는
초기불교 경전인
『수타니파타』입니다.
붓다의 어록이
많이 실려있는
초기 불교 경전입니다.
붓다는 초기 경전에는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했다. 지금도 인도에서는 연꽃은 길함을 상징한다고 믿는다. 백성호 기자
여기서 말하는
무소는 물소가
아닙니다.
코뿔소를 말합니다.
왜 코뿔소냐고요?
뿔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소나 양이나,
사슴 등은 모두
뿔이 두 개입니다.
그런데
코뿔소는
콧등에 있는
큰 뿔 하나만 있습니다.
그래서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말하는 겁니다.
『수타니파타』에서
붓다가 건네는 비유는
참 다채롭습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는
우리에게도
무척 익숙합니다.
이런 대목도
있습니다.
“커다란 대나무 가지가
뒤엉키듯
처자식을 애착함도
마찬가지다.
들러붙지 않는 죽순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 구절을
되씹다 보면
싯다르타가 출가한
심정이 보입니다.
그가
등지고자 했던 건
사실
처자식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일까요.
다름 아닌
애착(愛着)입니다.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에 집착하는 일이
결국
에고를 키우기 때문입니다.
가족과 함께 불교 성지를 순례하고 있는 인도 사람. 힌두교는 붓다를 숱한 힌두 신 중의 하나로 받아들였다. 백성호 기자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반문합니다.
집착 없이
사랑하는 일이
가능한가라고 되묻습니다.
모든 사랑에는
집착이 따르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은
작은 사랑입니다.
불교에서는
큰 사랑을 말합니다.
그게
어떤 사랑이냐고요?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사랑입니다.
착(着) 없이
사랑하는 일입니다.
붓다는
그런 사랑을
‘큰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싯다르타는
왜 출가했을까요.
애착을 가진
작은 사랑에
절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은
결국
무너지게 마련이니까요.
시간이 흐르고
조건이 바뀌면
언제든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걸 뛰어넘는
큰 사랑을 찾아서
싯다르타는 출가합니다.
그리고
결국 찾게 됩니다.
서로 엉켜있는
큰 대나무 가지에서
벗어나
서로 들러붙지 않는
죽순이 되는 길,
그러면서도
더 크게 사랑하는 길을
결국 찾습니다.
그리고 그걸
자신의 아내와
자신의 아들에게도
건넵니다.
결국
야소다라와 라훌라도
머리를 깎고 출가해
아라한과를 얻습니다.
집착 없이 사랑하는
큰 사랑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싯다르타의 출가를
산스크리트어로
‘마하비닛카마나’라고
부릅니다.
무슨 뜻이냐고요?
‘위대한 포기’라는
뜻입니다.
인도 중부의 산치 대탑에 있는 불상. 초기 불교 시대에 조성한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백성호 기자
작은 사랑을
포기하고
큰 사랑을 얻는
출가.
그래서
‘위대한 포기’라고
부릅니다.
에디터
관심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