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 없이 내주다
중공군(中共軍)이 군우리(軍隅里)에서 미 제2사단을 궤멸(潰滅)시킨 후 성천군(成川郡)을 향해 남하(南下) 중임이 확인(確認)되자 미 8군 사령관 워커는 평양(平壤)을 포기(抛棄)하기로 결심(決心)했습니다.
공식적(公式的)으로는 1950년 12월 1일부터 철수(撤收)가 개시(改試)되었지만, 이미 많은 부대(部隊)들이 남(南)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사실 말이 후퇴(後退)지 불과 20일 만에 200km 떨어진 38선까지 도망(逃亡)한 것이었는데,
기동 장비(機動裝備)가 낙후(落後)한 중공군이 추격(追擊)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평양 철수 당시 수많은 북한 주민들이 남행을 감행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번 제2차 공세(攻勢)에 임한 중공군의 입장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은 유엔군이 평양(平壤)-원산(元山)을 연(連)하는 선(線)에서 강력히 저항(抵抗)할 것으로 예상(豫想)했습니다.
아군(我軍)의 격렬(激烈)한 반격(反擊)을 우려한 마오쩌둥(毛澤東, Mao Zedong,1893. 12. 26~1976. 9. 9)이 숙천(肅川)-순천(順天)선 이북(以北)에서 일단 쉬면서 부대를 정비(整備)한 후 평양으로 진격(進擊)하도로 명령(命令)했을 정도였습니다.
사실 12월 1일에 이르러 중공군은 너무 지쳐있었고 모든 것을 소모(消耗)한 후 재보급(再普及)도 전혀 받지 못한 상태(狀態)였습니다.
↑참전 초기에 생포된 중공군. 이들도 많이 지쳐있었습니다
만약 미 8군이 중공군의 우려(憂慮)대로 평양 북방(平壤北方)과 원산(元山)을 연하는 선에 방어진지(防禦陳地)를 구축(構築)하고 압도적(壓倒的)인 해공군(海空軍)의 도움을 받아 강력(强力)히 저항(抵抗)했다면,
1.4후퇴는 없었을지 모릅니다.
직선(直線)으로 200여 km인 청천강(淸川江)-원산을 연하는 선(線)은 한반도 전체(韓半島全體)로 볼 때 저항선(抵抗線)을 구축하기 가장 좋은 위치(位置)입니다.
하지만 전쟁 당시 양측(兩側) 모두 불리할 때 이곳을 주(主)저항선으로 이용하려는 어떠한 시도(始賭)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미 8군은 저항을 포기하고 남으로 후퇴했습니다
결론적(結論的)으로 유엔군은 싸워보지도 않고 단지 놀라서 도망가고 중공군(中共軍)은 반대(反對)로 지쳐서 공격(攻擊)을 멈춘 상황(狀況)이었습니다.
중공군이 시야(視野)에서 보이지 않자 유엔군도 일단 38선에서 후퇴(後退)를 멈추었고 이로써 전쟁은 결국 석 달 전의 상황으로 되돌아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중공군의 2차 공세는 단지 지도상(地圖上)의 점령지(占領地)만 놓고 볼 때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참전(參戰)해 가장 혁혁(赫赫)한 전과(戰果)를 올린 공세(攻勢)가 되었습니다.
↑중공군의 개입부터 1.4 후퇴 직전까지의 전선 상황도
한편 미 8군이 38선으로 철수(撤收)하고 중공군이 원산을 점령(占領)하자 함경도(咸境道)에 있던 미 제10군단(軍團, 국군 제1군단 포함)은 순식간 고립(瞬息間孤立)되었습니다.
유엔군은 흥남항 외곽(興南港外廓)에 총 길이 12km의 강력한 저항선(抵抗線)을 만들고 인근(隣近)에 전개(展開)시킨 항공모함(航空母艦) 7척, 전함(戰艦) 1척, 순양함(巡洋艦) 2척, 구축함(驅逐艦) 7척, 로켓함 3척이 퍼부어대는 엄청난 화망(火網)으로 중공군의 접근(接近)을 거부(拒否)시키면서 아군을 순차적(順次的)으로 철수시키기로 결정(決定)했습니다.
↑중공군을 차단하기 위해 16인치 함포로 사격 중인 BB-63 미주리(USS Missouri)
12월 12일, 피해(避害)가 가장 심한 미 해병 제 1 사단(美海兵師團)을 시작으로 철수(撤收)가 개시(開始)되었습니다.
중공군은 미 제10군단을 일거(一去)에 격멸(擊滅)할 수 있는 호기(好氣)였으나 장진호(長津湖) 일대에서 미 해병 1사단과 겨루다가 대부분 소모(消耗)되었고 남은 전력도 유엔군의 강력한 함포 사격(艦砲射擊)과 공중 폭격(空中爆擊)으로 만들어진 장벽(障壁)을 넘을 수 없었습니다.
흥남 철수에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은 오히려 다른 곳에서 나타났습니다.
바로 부두(埠頭)에 몰려든 피난민(避難民)이었습니다.
↑ 1950년 12월19일 한 한국인 가족이 유엔군을 소개하는 배를 타기 위해 함경남도 흥남 해변에서 기다리고 있다
↑1950년 10월, 16인치 함포로 청진을 포격하고 있는 미주리함. 1951년 2월 3일, 미주리함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과 영부인 프란체스카
↑마지막 철수선 배거가 출항하면서 폭파되는 부두
↑ 1950.12.12.흥남부두, 아래 : 레너드 라루선장과 피난민들을 가득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호 선상, 59명 정원 메레디스 빅토리호(상선)에 1만4천명의 피난민을 태우고 물도 약도 없이 3일간의 항해 끝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크리스마스이브인 12월 24일, 국군과 유엔군이 흥남에서 철수함으로써 지난 10월 1일 38선을 돌파(突破)하여 북(北)으로 내달려간 아군(我軍)은 불과 85일 만에 38선 이남(以南)으로 모두 내려오고 통일(統一)의 꿈은 사라져 갔습니다.
달콤했던 북진(北進)은 새롭게 등장(登場)한적(敵)에 의해 완벽(完璧)하게 좌절(挫折)되었습니다.
그런데 냉정(冷情)하게 이러한 실패 과정(失敗科程)을 복기(復期)하면 우리의 성급(性急)함과 만용(蠻勇)도 그런 결과(決科)를 만드는데 크게 한몫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