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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토종 (홍원염불회) 원문보기 글쓴이: 원왕생
정토법문은 왜 ‘지방입상(指方立相)’의 가르침인가
오늘은 정토법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한 가지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바로
지방입상(指方立相)과
무상이념(無相離念)
이라는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이야기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불교는 공을 말한다.
불교는 상이 없다고 말한다.
집착을 버려야 한다.
그래서 불교의 수행이라고 하면 흔히
무상
무념
무집착
이런 말을 떠올립니다.
어떤 분들은 불교를 이렇게 이해합니다.
“불교는 모든 것을 비우는 수행이다.”
“아무것도 붙잡지 않는 수행이다.”
이 말 자체는 틀린 말은 아닙니다.
불교의 깊은 이치를 말하자면 분명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과연 이것이 범부가 실제로 수행할 수 있는 길인가 하는 점입니다.
1. 불교 수행의 목적은 하나이다
불교에는 여러 수행법이 있습니다.
선종이 있고
교종이 있고
밀교가 있고
정토가 있습니다.
수행 방법은 서로 다릅니다.
어떤 수행은 참선을 합니다.
어떤 수행은 교리를 연구합니다.
어떤 수행은 관법을 합니다.
어떤 수행은 염불을 합니다.
방법은 서로 다르지만
마지막 목적은 하나입니다.
바로
진여(眞如)를 증득하는 것
입니다.
불성
법성
진여
실상
이러한 말들은 표현만 다를 뿐
가리키는 내용은 하나입니다.
그래서 옛 조사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교 수행에서 마지막에 증득하는 진여는 하나이다.
그러나 그 진여에 들어가는
방편과 방법은 서로 다릅니다.
2. 수행에는 두 가지 문이 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수행을 크게 나누어 보면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평등문
이고
다른 하나는
차별문
입니다.
성도문은 평등문입니다.
정토문은 차별문입니다.
성도문의 수행은 평등을 말합니다.
일체만법은 본래 공하다.
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니다.
그래서 성도문에서는
방향을 말하지 않고
형상을 세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방향을 말하면 이미 차별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동쪽
서쪽
남쪽
북쪽
이렇게 방향을 말하면 이미 구별이 생깁니다.
또한 형상을 말하면 차별이 생깁니다.
그래서 성도문에서는 무상, 무념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무상이념無相離念입니다.
3. 그러나 범부의 마음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문제는 여기 있습니다.
범부의 마음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범부의 마음은 항상 상相에서 분별합니다.
좋다, 나쁘다, 내 것, 남의 것
이렇게 분별합니다.
그리고 분별이 생기면 반드시 취사取捨가 생깁니다.
좋은 것은 취하고 싫은 것은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범부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범부는 분별을 떠나기 어렵고
상을 떠나기 어렵습니다.
4. 성도문은 범부의 감정을 거스르는 수행이다
성도문의 수행은 무엇을 요구합니까?
분별을 끊어라, 집착을 끊어라, 아견을 깨뜨려라
이렇게 요구합니다.
그래서 성도문의 수행은 범부의 마음과 정반대 방향으로 가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옛 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범부의 감정을 거스른다.”
그래서 성도문의 수행은 매우 어렵습니다.
입으로는 “분별하지 말라.”
“집착하지 말라.”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마음에서는
분별을 끊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5. 그래서 수행이 이론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수행에서 흔히 이런 일이 생깁니다.
이치는 이해합니다. 공도 알고, 무상도 알고, 무념도 압니다.
그러나 실제 마음은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수행이 이론과 현실이 분리된 상태가 됩니다.
입으로는 평등을 말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분별하고 있습니다.
6. 그래서 부처님께서 정토문을 열어 주셨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또 하나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정토문입니다.
정토문은 범부의 마음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범부의 마음에 수순합니다.
범부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분별하고 취사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정토문에서는 이 마음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7. 염리예토 흔구정토
정토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염리예토
흔구정토
예토를 싫어하고
정토를 구합니다.
괴로움을 버리고
즐거움을 구하는 마음
이것이 바로 범부의 마음입니다.
정토법문은 바로 이 마음에
수순하여 수행을 가르칩니다.
8. 이것이 바로 지방입상이다
그래서 정토법문은 지방입상입니다.
방향을 가리키고 상을 세웁니다.
서방 극락세계라는 방향을 가리키고
아미타불이라는 상을 세웁니다.
그래서 수행이 매우 단순합니다.
서방을 향하고, 아미타불을 부르면 됩니다.
여기에 대해 선도대사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이 관문(觀門) 등은 다만 방향을 가리키고 상을 세워 마음을 거기에 머물게 하여 그 관상의 대상을 취하게 하는 것일 뿐, 상을 떠나고 분별을 떠나는 수행을 밝힌 것은 전혀 아니다.
세존께서는 말법시대의 죄업으로 혼탁한 범부들이 상을 세워 마음을 머무르게 하는 것조차도 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상을 떠나 수행의 성취를 구하려 하겠는가 하는 것을 미리 아신 것이다. 이는 마치 신통이 없는 사람이 허공에 집을 지으려 하는 것과 같다.
이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범부에게 처음부터 상을 떠나라, 분별을 떠나라
이렇게 말하는 것은 실제로 수행이 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범부는 먼저 마음을 한 대상에 머물게 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서방을 가리키고 아미타불이라는 상을 세워 마음을 거기에 머물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방입상의 가르침입니다.
세존께서는 말법시대의 범부들이 깊은 선정에 들어 수행하기 어렵다는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래서 가장 단순하고 가장 확실한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9. 유상에서 무상으로 들어간다
정토수행은 처음에는 유상(有相)입니다.
극락세계의 장엄을 생각하고, 아미타불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정토법문은 상을 취하는 수행이 아니냐.
그러나 정토수행은 단순히 상에 머무르는 수행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상으로 시작하지만
마지막에는 무상(無相)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왕생하면 어떻게 됩니까?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게 됩니다.
십지 보살의 경지를 초월하게 됩니다.
이 점을 담란대사께서 『왕생론주』에서 매우 분명하게 설명하셨습니다.
또한, 얼음 위에 불을 피우는 것과 같아서, 불이 세면 얼음이 녹고, 얼음이 녹으면 불은 꺼진다. 저 하품으로 왕생한 사람이 비록 법성이 곧 무생임을 모르더라도,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힘으로 왕생할 생각을 가지고 저 안락국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면(실제로 ‘생’이 있다고 집착하는 마음으로 치열하게 극락왕생을 구하는 것은, 마치 법성이 본래 무생인 ‘생’의 얼음 위에 불을 지피는 것과 같다), 저 극락국토는 무생의 세계이므로, 실제로 생이 있다고 보는 집착의 불길이 (무생이라는 지혜의 물에 의해) 자연히 꺼지게 된다.
이 비유에서 각각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먼저 얼음은 범부의 생견(生見)을 비유합니다.
범부는 항상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있다.
극락에 가야 한다.
존재가 실제로 있다고 보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견입니다.
그리고 불은 원생심(願生心)입니다.
극락에 가고자 하는 마음,
아미타불을 부르는 마음,
왕생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불입니다.
그래서 범부의 마음을 보면
마치 얼음 위에 불을 붙인 것과 같습니다.
생이 있다고 집착하면서
극락에 가기를 바랍니다.
이 둘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무생의 이치에서 보면
“가겠다”는 마음도 하나의 집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염불은 집착이 아니냐.
그러나 정토법문은 바로
그 집착을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불이 타야 얼음이 녹기 때문입니다.
범부의 원생심이 강할수록
불이 더 세집니다.
불이 세지면
얼음이 녹기 시작합니다.
얼음이 녹으면 무엇이 됩니까?
물이 됩니다.
여기에서 물은 무생의 지혜를 비유합니다.
생견이 녹아
무생의 경지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이 많아지면
그 물이 다시 불을 꺼 버립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왕생을 바라는 마음이 불처럼 타오르지만,
왕생하여 무생의 경지에 들어가면
그 마음마저 자연히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정토수행은
처음에는
아미타불이라는 상이 있고
극락세계라는 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거기에 두고 염불합니다.
그러나 왕생하면 어떻게 됩니까?
극락세계는 본래 무생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태어나면
생이 있다고 보는 집착이
자연히 사라집니다.
그래서 정토법문은
유상으로 시작하지만
무상에 도달하는 수행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상으로 들어가 무상에 이르는 길”
이라는 말의 뜻입니다.
그래서 정토법문은
집착을 두려워하는 법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정토법문은 집착이 없어질까 걱정하는 법문입니다.
왜냐하면 집착이 없으면 불이 타지 않고, 불이 타지 않으면 얼음이 녹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극락에 가고 싶다,
아미타불을 만나고 싶다,
이 마음을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 마음이 바로
얼음을 녹이는 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토행자는 서방을 향하고 아미타불을 부르며 극락왕생을 간절히 발원합니다.
그렇게 염불하다 보면 마침내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맞이하시고
그때 우리는 무생의 세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정토의 길은 범부에게 가장 자비롭고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10. 이것이 가능한 이유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입니다.
불력입니다.
자력 수행은 번뇌를 조금씩 끊고 공덕을 조금씩 쌓고 과위를 조금씩 증득해야 합니다.
그러나 정토법문은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지합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以果地覺 爲因地心
因該果海 果徹因源
부처님의 깨달음을 우리 수행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입니다.
11. 그래서 정토문이 더 고묘하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무상, 무념, 공, 이런 수행이 더 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문은 시작도 어렵고 증득도 점진적입니다.
번뇌를 조금씩 끊고 공덕을 조금씩 쌓고 과위를 조금씩 증득합니다.
그러나 정토문은 다릅니다.
시작은 매우 쉽지만 결과는 매우 높습니다.
왜냐하면 불력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토문은 유상에서 시작하지만 무상에 도달합니다.
12. 정토행자의 수행
그래서 정토행자의 수행은 분명합니다.
예토를 싫어하고 정토를 구하며, 서방을 향해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염불을 하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정토법문이 단지 교리만이 아니라 실제로 왕생으로 이어진 사례가 있습니다.
제가 들은 왕생 사례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2015년 봄, 어느 일요일 저녁이었습니다.
한 불자가 살고 있는 아파트 5층 집에서 내려다보니, 아래 4층 집이 매우 분주했습니다. 구급차가 와 있었고 경찰과 동네 이장까지 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려가 보니, 4층에 사는 사 씨 부인이 며느리와 말다툼을 하다가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방에서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습니다.
가족들이 발견하고 급히 구급차를 불렀지만, 이미 사망한 지 3~4시간이 지나 있었기 때문에 병원으로 옮길 수도 없었습니다. 마침 일요일이어서 검사가 다음 날에야 올 수 있었기 때문에, 경찰은 집 앞에 통제선을 치고 출입을 막아 두었습니다.
이 불자는 4층 계단에서 그 집을 향해 마음으로 망자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이 세상은 괴로운 곳이니 아미타불을 염하고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구하십시오.
그러고는 약 10분 정도 아미타불을 불러 주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 염불을 마친 뒤 다시 그 부인을 위해 회향을 했습니다.
다음 날, 또 그 다음 날에도 집에 돌아올 때마다 염불을 하며 회향했습니다.
며칠 뒤 그 부인의 아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중국 대륙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도 어머니를 위해 염불하라고 권했고 함께 염불을 하며 회향했습니다.
그 뒤 몇 달이 지나 그 아들이 다시 돌아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가 어머니를 꿈에서 두 번 보았고, 외삼촌도 한 번 보았다는 것입니다.
세 번의 꿈에서 나타난 하늘은 모두 말할 수 없이 밝고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첫 번째 꿈에서는 어머니가 한 장엄한 보살과 함께 그 아름다운 하늘 속에서 서쪽으로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꿈에서는 자신이 어머니에게 드릴 약을 달이고 있었는데 허공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네 어머니는 이미 이곳에 왔다. 더 이상 약을 먹을 필요가 없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가 연꽃 위에 서 있는 보살 같은 모습으로 허공에서 내려와 그의 앞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외삼촌의 꿈에서도 비슷했습니다.
어릴 때 자주 놀던 개울가에 있었는데, 하늘에서 한 조각 구름이 내려오더니 그 구름이 그의 어머니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역시 보살처럼 장엄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내 동생을 잘 보살펴 달라.
이 사례를 기록한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부인은 불교를 배우지 않았고, 며느리와 다투다가 자살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살은 업이 매우 무겁고 죽을 때도 고통이 큽니다.
그런데 단지 멀리서 염불을 권하고 잠시 염불하며 회향했을 뿐인데도 왕생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록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미타불의 구제는 참으로 적극적이고 자비로우며 조건이 없습니다.
왕생이라는 일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이행도입니다.
나무아미타불.
염불 백일, 앉아서 왕생한 노보살
대만 의란(宜蘭)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민국 113년, 의란에 아동(阿冬)이라는 85세의 노보살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평생 시장에서 노점을 하며 채식 음식을 팔았습니다. 채식 쫑즈나 미떡 같은 음식을 만들어 팔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체력이 약해지고 척추도 좋지 않아 더 이상 장사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노점을 정리하고 집에서 쉬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집에 있으면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가끔 이웃과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의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근처 절의 스님 한 분이 집에 찾아왔습니다. 법회에 쓸 채식 쫑즈를 주문하려고 온 것이었습니다.
그때 노보살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제 만들지 않습니다. 몸이 좋지 않고 척추도 아파서 장사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말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이제 염불을 하십시오.”
“염불이요? 무엇을 염합니까?”
“아미타불을 염하십시오.”
노보살이 놀라며 말했습니다.
“그렇게 간단합니까? 아미타불만 부르면 되는 겁니까? 경도 읽지 않아도 됩니까? 저는 글도 모르고 경을 읽을 줄도 모릅니다.”
스님이 말했습니다.
“경을 읽지 않아도 됩니다. 아미타불만 부르면 됩니다.”
이 말을 들은 뒤부터 노보살은 매일 집 거실에서 텔레비전 앞 의자에 앉아 아미타불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한 구절, 한 구절 끊이지 않고 계속 염했습니다.
어느 날 딸과 사위가 집에 와서 보니 어머니가 계속 중얼거리며 무언가를 외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딸이 물었습니다.
“어머니, 무엇을 외우고 계세요?”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스님이 아미타불을 부르라고 하셔서 염불하고 있다. 또 아미타불을 부르면 천당에 갈 수 있다고 하셨다. 나도 그곳에 가고 싶다.”
이 노보살은 이전에 불교를 배운 적이 없었습니다. 평소에는 민간신앙처럼 향을 피우고 절만 하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딸은 그래도 염불로 극락왕생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염불을 막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노보살은 매우 정성스럽게 염불했습니다. 텔레비전도 보지 않고 외출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밥 먹고, 씻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하루 종일 염불했습니다.
이렇게 약 백일 정도가 지나자, 노보살에게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딸의 말에 따르면,
“어머니의 말투가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지고 온화해졌습니다. 얼굴 모습도 점점 장엄해졌습니다. 예전처럼 거칠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노보살이 딸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이제 나는 집에 돌아가려고 한다.”
딸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머니, 어디로 가신다는 거예요? 여기가 어머니 집이잖아요.”
노보살이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아미타불을 따라 가려고 한다. 괜찮겠니?”
딸은 어머니가 농담하는 줄 알고 가볍게 말했습니다.
“좋지요. 뭐가 문제겠어요.”
그런데 그 대화를 나눈 지 사흘 뒤의 일이었습니다.
노보살은 평소처럼 거실 의자에 앉아 아미타불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염불을 하다가 그대로 앉은 채 편안하게 왕생했습니다.
그때 곁에서 조념해 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만 염불기에서 흘러나오는 아미타불 소리만 곁에 있었습니다.
노보살은 미리 딸에게 이렇게 말해 두었습니다.
“내가 죽으면 8시간 뒤에 장례업체를 부르도록 해라.”
그래서 가족은 그대로 했습니다.
왕생한 뒤 약 보름 정도 지나 장례식을 했습니다. 그동안 칠재를 지내거나 다른 불사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딸이 절에 가서 스님께 감사 인사를 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하루에 몇만 번씩 아미타불을 불렀습니다. 마지막에는 마음에 탐착도 없고 정신도 맑았으며 병도 없이 고통도 없이 앉아서 왕생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왕생한 뒤 어머니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향기가 났고, 며칠 동안 집 안 가득 향기가 퍼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집에는 꽃도 없었습니다.
장례식이 끝난 뒤에는 어머니가 꿈에 나타났습니다.
딸의 말에 따르면,
“어머니가 온몸이 빛나고 매우 밝고 기쁜 모습이었습니다. 옛날 옷 같은 것을 입고 있었는데 마치 신선처럼 가볍게 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간다.”
그래서 우리는 이 왕생 사례를 들으면서 한 가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 노보살은 특별한 수행을 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평생 수행을 깊이 한 것도 아니고
어려운 교리를 공부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아미타불을 믿고 아미타불을 부른 것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백일 동안 염불을 하고 앉아서 왕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토법문의 힘입니다.
우리 범부의 힘으로는 번뇌를 끊기가 어렵습니다.
마음을 완전히 비우기도 어렵고 상을 완전히 떠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범부에게 처음부터 무상, 무념, 무집착, 이런 수행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우리에게 아주 분명한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서방을 가리키고 아미타불이라는 상을 세워 그 이름을 부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정토법문은 지방입상(指方立相)의 가르침입니다.
범부의 마음을 부정하지 않고 그 마음을 그대로 받아 아미타불에게로 향하게 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선도대사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但使專稱彌陀佛名
必得往生
다만 아미타불의 명호를 전수로 부르면
반드시 왕생한다.
우리는 대단한 수행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깊은 참선을 할 수도 없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성인이 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할 수 있습니다.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입니다.
괴로운 세상을 떠나 극락세계에 가고 싶다고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미타불께서 반드시 우리를 맞이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께서는 이미 중생을 위해 서원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미타불을 찾기 전에 아미타불께서 먼저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정토의 길은 어렵고 먼 길이 아니라 가장 자비롭고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다만 아미타불을 부르면 됩니다.
오늘도 아미타불을 부르고 내일도 아미타불을 부르고
임종할 때까지 아미타불을 부르면 됩니다.
그러면 아미타불께서 반드시 우리 손을 잡고 극락세계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 실시간 방송일 - 2025.11.16
👼 법사 소개 -정전淨傳스님
정전스님은 강원도 건봉사로 출가하여 송광사 강원을 졸업했습니다.
그 후 대만에서 정토염불을 두루 공부하였는데,
대만에서 순수정토법문을 널리 선양하고 있는
혜정법사로부터 선도대사님 법맥의 정토종의 종지를 배웠습니다.
귀국하여 건봉사 만일염불회 지도법사를 역임했으며,
인터넷 염불도량 정토종(홍원염불회)를 운영하며 정토염불 법문과 법회를 하는 한편,
정토서적인 순수한 정토법문, 조념법요집, 정토수행의 나침반, 고향으로 돌아가자, 정토종 개론, 아미타경핵심강기, 정선염불감응록, 제18원 강기 등을 번역 출판하면서 정토종 개창자인 선도대사의 칭명염불 수행전통을 이 땅에 되살리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