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장 32 - 34절
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 말씀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이렇게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북쪽 갈릴리 지역과 남쪽 예루살렘 지역을 수없이 오고가시면서 끊임없이 복음을 증거 하셨는데 이번 예루살렘 방문이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방문이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이 총 16장까지 되어 있는데 10장부터 16장까지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 이후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마가는 예수님의 생애 뒷부분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고난과 죽음을 맞이하셔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 서서 가셨다는 것입니다. 전혀 두려움 없이 오히려 당당하게 가장 앞선 자리에 서서 나아가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수많은 적들과의 싸움에서도 이길 수 있었던 비결 중에 하나는 이스라엘의 장교들은 절대 “돌격, 앞으로” 이런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신은 뒤에 있고 부하들만 앞으로 내 보내는 명령 대신, “나를 따르라.” 이런 명령과 함께 앞장 서 나아가기 때문에 부하들의 사기가 높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가장 큰 무기가 군인들의 사기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사기가 높다보니 수많은 전쟁 속에서도 승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뒤따르는 제자들과 무리들은 상반된 모습이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그들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문에서 정관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특정된 사람, 바로 제자들을 말하는 것이고 따르는 자들은 불특정 다수, 곧 예수님을 따랐던 백성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고 죽임 당하실 것을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놀랐고, 백성들은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놀라고 있던 제자들을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해 주셨는데 이 ‘데리시고’라는 단어는 ‘곁으로’라는 단어와 ‘취하다’라는 단어의 합성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놀라고 있던 제자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곁으로 부르시고 그들이 더 이상 놀라지 않도록 그들의 몸과 마음을 취하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고난당하시고 죽임 당하실 분은 예수님이시고 누구보다 위로를 받아야 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는데 그런 분이 오히려 제자들을 곁으로 불러서 위로해 주시고 힘을 실어 주셨던 것입니다. 놀라고 두려워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이고 은혜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감사하고 기뻐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게 되면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는 것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산헤드린 공회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로마가 세운 분봉왕의 통치를 받고 있던 시대였지만 유대인들의 실권을 쥐고 있던 무리들은 바로 산헤드린 공회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총 72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에게는 사형을 선고할 권한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 앞에서 사형 선고를 받게 될 것을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산헤드린 공회에 사형 선고의 권한은 있었지만 사형을 집행할 권한은 없었습니다. 로마 정부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데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이방인이었던 헤롯이나 빌라도였기 때문에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던 것이고 그 예언의 말씀대로 그대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을 다 아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장 서 가실 정도로 당당하셨는데 그 이유는 삼 일만에 살아날 것을 아셨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확신! 이 믿음이 있으면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조차도 이길 수 있고 그 앞에서도 당당해 질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주신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덤벼드는 사람은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부활의 확신이 있으면 예수님처럼 우리도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 중에 오뚝이라는 장난감이 있습니다. 오뚝이는 아무리 밀어서 넘어뜨리려고 해도 다시 원상복귀를 하기 때문에 절대 넘어질 수 없는 장난감이었습니다. 아무리 힘이 세고, 남을 넘어뜨리기 좋아하는 사람도 오뚝이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부활의 능력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에 우리 또한 고난당할 때도 있고 때로는 능욕과 침 뱉음과 채찍에 맞는 경우도 있겠지만 우리도 예수님처럼 당당하게 그리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들을 누가 감히 건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놀라고 두려워했던 제자들이나 사람들과 다르게 예수님의 당당함, 강하고 담대함은 바로 이런 믿음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런 은혜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잠언 24장 16절 말씀에 보면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오뚝이의 은혜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실패를 실패라고 말할 수 없고, 넘어짐을 넘어짐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미지의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데 괜한 두려움 때문에 주저하고 망설이는 부분들이 있다면 먼저 부활의 믿음을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능욕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고, 채찍에 맞을 지라도 다시 살아나게 하실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하게 되면 오늘 하루도 강하고 담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나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산헤드린 공회원들 앞에서 예수님을 증거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런 믿음의 담대함을 가지고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하루는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시고, 부활의 능력을 주시고, 부활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면서 살면 되고, 오히려 강하고 담대하게 살면 됩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고 그런 은혜와 복과 기쁨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고 베풀면서 착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