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분별하여 조각 내지 말라
우리가 경을 들여다보고 책을 읽고 법문을 듣는 이 모든 일들이 어디까지나 말입니다.
‘불’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물을 태워버리는 작용을 하지만
우리가 ‘불!’하며 외친다고 해서 말하는 사람의 혓바닥이 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처럼 우리가 지금까지 해 온 것은 ‘불’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태껏 불교 공부를 한다고 하면서 ‘불’이라는 말만 했지,
혓바닥이 타는 것을 체험하지는 못했습니다.
내 자신의 똘똘 뭉친 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언제나 말에서 그치고 말 뿐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믿어지지 않는 일, 실제로 혓바닥이 불에 타는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수(隋)나라 말기에 중국 익주의 심본현 왕자리-라는 동네에 성이 구씨(具氏)인 선비가 있었습니다.
구씨 선비는 평소에 금강경을 즐겨 외워 깊은 이치를 터득했습니다.
어느 날 선비는 마을의 동쪽에 있는 들판에 서서 하늘을 향해 손가락으로 글씨 쓰기를 멈추지 않았고
이상하게 여긴 동네 사람들이 까닭을 물었습니다.
“선비 어른, 하늘을 향해 무엇을 쓰고 있습니까?”
“금강경을 쓰고 있노라.”
“왜요?”
“천상의 사람들이 이 경을 읽고 공경심(恭敬心)을 내도록 하기 위함이야.”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그 누구도 그 말씀을 이해하거나 믿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뒤부터 비가 와도 그 자리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으므로
들에 나갔던 사람들이 소나기를 만나면 그 자리에서 비를 피하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2~30년의 세월이 흐른
당나라 고조(高祖)의 무덕연간(武德年間, 618~628)에, 인도에서 온 스님이
그 동네를 지나가다가 구씨 선비가 글씨를 썼던 곳에 이르러 끊임없이 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스님, 거기에는 부처님도 없고 탑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공중을 향해 그토록 열심히 절을 합니까?”
동네 사람의 질문에 오히려 스님은 의아해하며 물었습니다.
“모두가 이 동네에 사시는 분들이시오?”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절을 하는 까닭을 모르십니까?”
“예, 왜 절을 하십니까?”
“이 자리에는 금강경이 쓰여-져 있어 언제나 천상(天上) 사람들이 와서 공양을 올리고 예배를 올립니다.
그런데도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다니 참으로 안타깝구려.
절대로 이 자리를 더럽히지 않도록 하십시오.”
스님이 떠나간 뒤 동네 사람들은 그 자리에 깨끗한 정자를 지어 신성시하였으며
그 정자에 있으면 가끔 인간 세상에서는 들을 수 없는 매우 아름다운 풍악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허공에 쓴 글씨가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지워지지 않고 천인(天人)들의 공양-처가 되었다는 것!
이처럼 우리 눈으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흔히 일어납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우리가 여태껏 해 온 것처럼 말로만 공부해서는 될 일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경전 하나를 공부하더라도 밑뿌리가 빠지도록 공부해야 합니다.
허튼 꾀를 부려서는 안 됩니다. 오직 똘똘 뭉친 나의 정성으로 지극 정성의 힘으로 공부하면
나에게도 이런 기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기적에 대해 덕을 보겠다는 차원이 아니라.
내가 나의 기적을 만들고 내가 만든 기적 속에서 내가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자꾸 말에 끌려가고 이름에 끌려다니고 모양에 끌려다닙니다.
하지만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내 정신을 또렷하게 차리고 내가 가야 합니다.
내 밥은 내가 먹어야 내 배가 부릅니다.
곁에 사람이 밥 먹는 것을 하루 종일 쳐다보고 있어도 내 배는 불러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랜 버릇 때문에 곁의 사람에 의해 자꾸 끌려다니고 있습니다.
홀로 서는 것이 조금 힘이 들지라도 내 정신을 차려서 한 걸음 한 걸음 공부 해나가면
부처님 경전을 지니고 공부하는 데서 얻어지는 불가사의한 공덕을 나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극으로 가는 신심, 즉 지극 정성의 신심이라야 이런 기적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우리처럼 얄팍하게, 혓바닥으로만 하는 척하면 헛-공부를 할 뿐입니다.
법계의 큰일은 물론이요, 부처님의 경전 하나를 믿고 지니는 것도 지금의 우리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목숨까지 바쳐놓고 할 만큼 되어야 합니다. ‘부처님을 믿는다.‧부처님을 따른다.’라고 하는 말만으로는 안 됩니다.
마지막에 가서는 목숨하고 바꾸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만한 차원까지 가야 무슨 영험이 나타납니다.
우리의 얄팍한 신심이 아니라 법계와 한 덩어리가 될 만큼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면 우리도 옛 어른들처럼 기적 같은 공덕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어떤 병이든 어떤 일이든 우리의 정성이 극에 달하면 다 극복할 수 있고 다 이룰 수 있습니다.
문제는 거기에다가 우리의 욕심이나 망념 등의 딴 물을 묻히는 데 있습니다.
분별의 물을 묻히고 집착의 물을 묻히기 때문에 기도나 공부가 이루어지지 않게 됩니다.
옛 어른들의 말씀대로 부처님을 믿고 그대로만 해나가면 다 이루어집니다.
염불하거나 기도하거나 화두를 들 때도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내 마음‧내 마음’을 흔들어 가면서 수행합니다만
불교의 진정한 공부는 분별심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내 마음’이라고 하는 분별심(分別心)으로 하는 공부는 망상을 피우고 있는 상태일 뿐,
진짜 공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분별심이 아닌 진심(眞心)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화두를 들 때만 분별심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염불이나 주문을 외울 때도 분별심을 가지고서는 안 됩니다.
대우주는 한 덩어리인데도, 우리는 자꾸 조각을 내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자꾸만 ‘내 마음이다, 내 몸이다.’ 하면서 조각을 내는 생각 자체가 틀렸습니다.
‘극락이다.’ 하면서 지금 현실 세계와는 다른 어떤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입니다.
대우주의 출발점은 빛깔도 소리도 모양도 냄새도 없습니다.
그대로 한 덩어리로 굴러가는 것일 뿐, 생길 때부터 김 아무개는 이렇게 생겼고
극락은 이렇게 생겼고 열반은 이렇게 생겼다는 조각을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분별심으로 자꾸 조각을 내고 있습니다.
불교 자체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조각조각 내는 쪽으로 이해하면 원점에서 자꾸 멀어집니다.
마찬가지로 불교 공부를 지어나갈 때도 내 마음을 조각조각 내지 말아야 합니다.
조각을 내고 분별하는 망상심(妄想心)의 세계는 진리의 세계와 점점 멀어져 가기 때문입니다.
조금도 동요됨이 없고 조각나지 않은 대우주 자체의 본연 그대로를 확신하고서,
그 속에서 흔들림 없이 살아야 합니다.
옛 어른들의 말씀에 ‘불교 공부는 낯 씻다가 코 만지기보다 더 쉽다’고 했습니다.
즉 ‘법을 깨친다.‧진리를 체험한다.’라는 것이 내 얼굴을 씻다가 코를 만지는 것보다 쉽다는 이야기입니다.
내 얼굴을 씻으면서 내 코를 안 만지고 씻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얼굴을 씻다가 코 만지기보다 더 쉬운 것이 도 깨치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자꾸 분별심을 내고 조각조각 나누다 보니
대우주 전체를 이해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수도가 냄새나고 더럽다고 해서 건드리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두면,
나중에 하수도가 터질 때 엄청난 피해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비록 더럽고 냄새난다고 하더라도 하수도는 지금 청소를 해놓아야 뒷날에 걱정이 없는 법입니다.
지금 이 일이 싫다고 해서 덮어 놓으면,
뒷날 하수도가 막혀 사고가 날 때는 지금의 몇 배의 노력과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힘들더라도 불교에 연(緣)이라도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사람의 몸을 받았다가 다음 생에 다시 사람이 되는 일은
손톱 위에 올라가는 흙만큼이나 드물다고 했습니다.
손톱 위에 흙을 올리면 얼마나 올라가겠습니까?
반대로 지금 사람의 몸을 받았다가 다시 사람의 몸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은
우리가 밟고 다니는 땅덩어리 전체의 흙만 하다고 했습니다.
다음 생에 사람의 몸을 얻어 온다는 일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불교 공부도 그렇습니다. 한없이 어렵고도 힘든 공부가 불교 공부입니다.
그렇지만 이생에 사람 몸을 받았고 거기에다가 불교와 연을 맺은 불자가 아닙니까?
이 얼마나 귀하고 귀한 인연입니까? 우리는 이 인연을 잘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옛 어른들의 말씀대로라면 낯 씻다가 코 만지기보다 쉬운 것이 진리를 깨치는 일이라 했습니다.
이 말씀에 담긴 깊은 뜻을 잘 새겨서, 부디 내 마음을 조각조각 내지 말고 똘똘 뭉치고 뭉쳐,
정성으로 공부를 지어나가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우룡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