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장막
신사도운동,
특히 IHOP은 특별히 ‘찬양과 중보기도’(하프와 보울)와 24시간의 기도를 ‘다윗의 장막’으로 적용시킨다. 물론 찬양과 기도가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들은 이 ‘하프와 보울’을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어떤 상태”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즉 하프는 찬양을 상징하고 보울은 기도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계
5:8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그들은
계5:8의 거문고가 하프(Harp)이고 금대접(Bowl)은 기도를 뜻한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기도는 금대접이 아니라 향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대접(Bowl)은 무엇인가를 담는 용도 외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계16장의 “하나님의 진노를 쏟는 대접”도 동일한 ‘Bowl’ 이기 때문이다. IHOP에서 보울이라는 단어를 특별한 임재상태의 개념으로
본다면 계16장의 보울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석을 할 것인가?
이와
같이 성경을 풍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원래 이단들의 상용수법이다.
본문은
하프와 보울이 어떤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이신 예수께서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것과 함께, 예수께서 성도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중보자임을 뜻하는 내용이다.
또한
이러한 용어가 ‘다윗의 장막’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가?
교회가
작아서 오케스트라가 없거나, 혹은 몇 명의 성가대가 부르는 찬양은 하나님이 받아주시지 않는가? 골방에서 드리는 조용한 기도는 하나님이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시는가? 또 주일학교 유치부 어린이들의 고사리 손으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이 외면하시는가?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기도에 시간 제한이 있는가? 몇분을 기도하면 안받아주시고, 24시간/1주일/365일을 기도하여야만 받아주시는가? 과연 기도를 드리는
시간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기도 외에 또다른 조건이 있어야만 하나님이 기도를 받아 주시는가? 기도를 끊임없이 하여야만
하고, 일렉트릭 사운드의 기타와 드럼으로 찬양을 드려야만 기도를 받아주는가?
과연
현란한 전자 악기로 연주하는 찬양 속에서 24시간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기도하는 ‘다윗의 장막의 영의 기도’만을 하나님께서 기뻐 열납하시는가?
특히
청년들은 항상 자극적인 용어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으므로, 이러한 신사도운동에 쉽게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쉽게 빠지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찬양이다.
IHOP이
주장하는 것은 소위 ‘다윗의 장막’이다.
즉
다윗의 장막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윗의
장막에 대해서 그들이 특별히 인용하는 아모스9:11-12를 살펴보고, 그 구절을 인용한 사도행전15:16-17을 살펴보자. 그들이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항상 전체적인 내용이 아닌 부분적인 몇구절뿐이며, 성경이 말하는 내용과 전혀 다른 해석일 뿐이다. 성경구절을 인용한다고 하여
성경적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암
9:11-12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행
15:16-17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과연
본문이 종말적으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회복한다는 뜻인지 살펴보자.
사도행전
15장 본문을 전체적으로 읽어보자. 유대인들 중에서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몇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왔다. 그들은 기독교인이면서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오늘날과 같이 믿음 외에도 율법적 행함이 필요하다고 하는 혼합적 율법주의자들이다.
행
15:1-2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를 포함한 몇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질문을 하기로 하여 보낸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예루살렘공의회는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다.
행
15:10-11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그리고
결론적으로 야고보가 정리를 한 것이 바로 성경본문이다
행
15:15-21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예수의
동생이자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로 알려진 야고보는 아모스 구약 성경구절을 인용하고 있었는데, 이 구절에서 “다윗의 장막에 대한 회복”이 언급된
것이다.
즉
쉽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주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며 더 이상 구약의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 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라는 최소한 율법적인 규정만을 지키라고 전하는 이유는 바로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그 글(율법)을 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4가지의 규정만을 지키라고 전달하는 이유는 두가지인 것이다.
(1)
이방인들로부터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자를 괴롭히지 않기 위하여
(2)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유대인들이 있기 때문에
즉
이방인과 유대인을 위하여 최소한의 규정 4가지를 전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본문을 다시 살펴보자
암
9:11-12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행
15:16-17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아모스는
‘그 날’(In that day)이라고 기록하였으나 누가는 야고보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이후에’(After this)라고 본문을 바꾸어 놓았다.
왜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구약본문을 바꾸었을까?
마소라
히브리 구약본문과 70인역은 모두 ‘그 날에’(In that day)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은 ‘이 후에’(After
this)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옛적과 같이 세우고"는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로 바뀐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즉
사도행전에서 야고보는 아모스의 예언이 신약에서 이미 성취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율법의 행위로 얻는 구원은 예수를 믿는 은혜로 이미 바뀐 것이다.
야고보는
허물어진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우고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낸다는 아모스의 예언을 인용하여, 유대인의 율법주의의 배타적 구원관이 무너졌으며,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다시 세워진 믿음과 은혜의 구원관으로 전환됨을 강조하기 위하여 본문을 인용한 것이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이후에 유대인들 중에서 일부 남는 자롤 포함하여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이방인들이 기업을 얻게 되어진다는 것이며,
율법론적인 구원관이 무너지게 되며, 은혜와 믿음으로 얻는 구원관으로 회복되어진다는 것이다.
구약
아모스선지자를 통한 예언이 이 날에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즉
신사도운동에서 ‘다윗의 장막’을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으로 해석하여 다시 종말론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이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오류이며,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다.
만약에
구약적인 다윗의 장막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자는 이상한 의미가 되어버린다.
[공동번역]
그 뒤에 내가 다시 돌아와 무너진 다윗의 집을 다시 지으려니 허물어진 곳을 다시 고치고 그것을 바로 세우리라.
[표준새번역]
이 뒤에 내가 다시 돌아와서, 무너진 다윗의 집을 다시 짓겠으니, 허물어진 곳을 다시 고치고, 그 집을 바로 세우겠다.
[현대인의성경]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무너진 다윗의 집을 다시 세우겠다. 내가 폐허된 곳을 재건하고 세워서
[KJV]
After this I will return, and will build again the tabernacle of David, which is
fallen down; and I will build again the ruins thereof, and I will set it up:
[NIV]
"'After this I will return and rebuild David's fallen tent. Its ruins I will
rebuild, and I will restore it,
그
이후 신약성경은 ‘장막’이라는 단어가 많이 언급되지 않는다.
고린도후서와
베드로후서에는 ‘사람의 몸’을 곧 장막이라고 비유하였고(고후5:1, 5:4, 벧후1:13-14), 히브리서는 장막을 변역된 옛 언약의 성소로
비유하였으며, ‘예수’를 크고 온전한 장막(히9:11)으로 비유하였다. 그리고 계시록에서 장막이 언급되는데, 계시록의 장막은 구약에서 언급되는
‘다윗의 장막’이 아니라 ‘하나님의 장막’이며 곧 천국이 장막이 되는 것이다.
계
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구약의
장막은 Tent for meeting God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었다. 구약에서는 제사장이 제사 당사자를 위하여 대신 하나님을 만났던
장소이었다. 또한 예수그리스도가 크고 온전한 장막이 되심에 따라 옛 장막은 찢어지고, 신약에서 장막은 곧 사람의 몸이었다. 그 곳이 바로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국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있는 곳이므로 별도의 장막이 필요하지 않게 된다. 주 하나님과 예수가 계신 곳이
곧 성전이기 때문이다.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21:22)
아직도
다윗의 장막을 회복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다윗의
장막은 더 크고 온전하신 예수라는 장막이 오신 이후에 이미 무너졌고, 그 장막은 예수님의 도래와 함께 다시 세워졌으며, 장차 천국에서 하나님의
장막이 되어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될 것이다. 구약의 예배와 찬양이 다시 회복되어야할 이유도 없다.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 다윗의 장막이
다시 회복되어야 하는가?
IHOP과 신사도운동의 단체들이 현란한 일렉트릭 악기로 음악을
연주하면 다윗의 장막이 회복되는가?
구약의 희생제사적인 예배를 다시 회복하여야 하나님이
임재하시는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다윗의 장막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과연 성경적인가?
출처]
다윗의 장막이 회복되어져야
하는가?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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