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겨 앉지 않는 새
이탄
우리 여름은 항상 푸르고
새들은 그 안에 가득하다.
새가 없던 나뭇가지 위에
새가 와서 앉고,
새가 와서 앉던 자리에도 새가 와서 앉는다.
한 마리 새가 한 나뭇가지에 앉아서
한 나무가 다할 때까지 앉아 있는 새를
이따금 마음속에서 본다.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앉지 않는 한 마리의 새
보였다 보였다 하는 새.
그 새는 이미 나뭇잎이 되어 있을 것일까
그 새는 이미 나뭇가지일까.
그 새는 나의 언어(言語)를 모이로
아침 해를 맞으며 산다.
옮겨 앉지 않는 새가
고독의 문(門)에서 나를 보고 있다.
(시집 『옮겨 앉지 않는 새』, 1979)
[작품해설]
이 시는 자아 성찰을 통해 존재의 내면을 탐구하여 실존적 깨달음을 추구하고 있는 이탄의 대표작이다. 이탄은 참신한 감각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자기 괴리(自己乖離)의 현실 세계를 다양하게 인식하고 형상화하고 있는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새들’은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일상적 인간들을 뜻하며, ‘한 마리 새’는 실존적 삶을 자각한 존재로 시인 자신을 의미한다. 한편 ‘새들이 가득한 푸르른 여름’은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이 모여 있는 현실 세계를 표상한다.
일상적 인간인 ‘새들’은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날기도 하고, 한 가지에 여러 마리가 앉아 싸우기도 하는 등 마치 자신들이 누리는 이 미망(迷妄)의 세계가 가치의 모든 것인 양 향락을 구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감각적 세계의 유한적 자유일 뿐, 존재의 근원적 조건을 벗어나서 누리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인식한 ‘한 마리의 새’인 시인은 ‘하늘’이라는 무한한 공간 중 극히 일부의 공간일 뿐인 ‘나뭇가지’에 존재하면서, 향락적인 일상의 삶을 영위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가지에 매달려 ‘나뭇잎’으로 변화하는 존재의 탈바꿈은 바로 존재의 자기 초월을 의미하는 동시에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나뭇잎의 조락은 죽음을 의미하지만, 떨어진 나뭇잎이 땅에 묻혀 새순이 되어 돋아나는 것은 부활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조재의 초월을 이루는 열쇠는 바로 ‘고독의 문’으로 형상화된 자아 성찰이다. 마지막 구절에서 ‘옮겨 앉지 않는 새가 / 고독의 문에서 나를 보고 있다’고 표현한 것이 바로 그것을 말해 준다. 이렇듯 이 시는 자기 존재에 대한 깊은 인식을 통해 일상적 삶을 극복하고, 나아가 삶과 죽음까지도 초월하고 싶어하는 시인의 철학적 삶의 자세가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작가소개]
이탄(李炭)
본명 : 김형필(金炯弼)
1940년 서울 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 졸업
196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바람 불다」가 당선되어 등단
1964년 『신춘시』 동인
1968년 제3회 월탄문학상 수상
1984년 제16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시집 : 『바람 불다』(1967), 『소등(消燈)』(1968), 『줄풀기』(1975), 『옮겨 앉지 않는 새』(1979), 『대장간 앞을 지나며』(1983), 『잠들기 전에』(1986), 『미류나무는 그냥 그대로지만』(1988), 『꽃은 깊은 밤 홀로』(1988), 『약속』(1988), 『철마의 꿈』(1990), 『반쪽의 님』(1996), 『청노루의 꿈, 목마름의 시』(1997), 『혼과 한 잔』(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