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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9. 묵상글 ( 부활 제3주일. - 나는 부활의 동반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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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9. 부활 제3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4.19 00:23
- 나는 부활의 동반자?
여러분은 인생의 동반자가 있습니까?
결혼하신 분이라면 배우자가 동반자이겠지요.
그리고 영원한 친구들이 동반자이겠습니다.
이참에 나는 인생의 동반자가 있는지 생각해봤는데
너무 많아서 그런지 아니면 제가 인생을 잘못 살아서 그런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다고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의 동반자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부활의 동반자는 있습니까?
제 생각에 진정한 인생의 동반자는 부활의 동반자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을 때까지 부부나 친구로서 인생의 동반자이긴 하지만
오늘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주님께서 부활의 동반자이신 것처럼 동반자일까요?
죽을 때까지 인생의 동반자도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부활의 동반자가 더 필요하고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부활의 동반자란 이 세상 사는 동안에도 부활을 살게 해야 하고,
죽고 난 뒤에도 부활을 살도록 동반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주변의 많은 사람을 살리려고,
또는 기죽은 사람의 기를 살려주려고 지금껏 살아왔지만
그저 사랑의 본능으로 그랬을 뿐
부활의 동반자이어야 한다는 의식은 부족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부활의 동반자를 생각게 된 것입니다.
이 복음을 그렇게 여러 번 읽고
이 복음을 가지고 Emmaus Leadership(엠마오 지도력)을 많이 강의했으면서도
내가 부활의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처음 생각게 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더 늦지 않고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겠지요?
그리고 지금이라도 주님의 부활 동반법을 제대로 배우고 실천해야겠지요.
주님의 부활 동반법은 제 생각에 이렇습니다.
첫째는 절망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또 주님의 길을 포기한 사람에게 주님처럼 다가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백 마리 양의 비유에서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와 같은 것입니다.
무관심하지 않음은 물론 분노 때문에 사랑을 거두지 않고 찾아가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님처럼 다가갈 뿐 아니라 계속 동반하는 것입니다.
그가 마다할지라도 또 그의 반응에 내가 실망할지라도 포기치 않는 것입니다.
셋째는 동반하면서 주님처럼 동감을 잘해주는 것입니다.
사실 그가 동반을 마다하거나 반응이 신통치 않은 것은 그의 탓도 있겠지만
내가 그의 얘기를 들어주고 동감해주기보단 조급하게 설득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동반과 동감만 잘할 뿐 아니라 감동도 줘야 합니다.
주님처럼 잘 들어주고 동감해줌으로써 신뢰도 쌓고
들을 마음을 갖게 해준 다음에는 하느님 말씀으로 감동을 줘야 합니다.
내 말을 들으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듣고 깨달으라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지금까지 자신이 너무 인간적으로 생각했음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말씀으로 감동을 준 다음에는 주님의 몸과 피를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몸과 피를 같이 모시는 성찬례까지 같이 해야
우리는 부활의 동반을 완성할 수 있는데 이 과정이 너무 어렵다고 생각되어
기가 질려 포기할 수도 있을 것이기에 우리는 절대로 조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호흡으로 치면 긴 호흡을 하고,
여행길로 치면 먼 길을 가려는 마음으로 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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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9. 부활 제3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관상과 사랑 가득한 행동 - 열다섯 번째 주간 실천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진리는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하고, 그 사랑은 평화의 은총을 지속적으로 낳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관상과 해방, 그리고 활동
관상과 사랑 가득한 행동
2026년 4월 18일 토요일
리처드 신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활동과 관상을 위한 센터]에서 우리는 자비로운 실천이 단순한 의지나 노력에 머무르지 않고, 관상적이고 분열을 넘어서는 의식 안에 뿌리내리도록 추구합니다. 하느님과 이웃 그리고 피조물과의 일치를 체험할 때, 정의와 치유의 행위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우리가 더 온전한 세상을 이루고자 노력할 때, 관상은 우리의 행동에 비폭력적이고 사랑스러운 힘을 길게 이어주는 은총이 됩니다.
시민권 운동가 존 루이스(John Lewis: 1940–2020)는 많은 이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높은 성덕을 지닌 공적인 인물이 오랫동안 더 깊은 인정을 받지 못했을까요? 그의 말씀은 관상적 실천을 위한 기도처럼 들립니다:
리처드 신부는 다음과 같은 격려의 말을 전합니다:
(큰 사랑과 큰 고통을 체험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관상의 수행은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새롭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것은 무의식 깊은 곳에 닿아 기도하는 방식으로, 그곳에 숨겨진 우리의 모든 상처와 분노, 그리고 우리가 깊이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게 하여 우리를 변화시 줍니다. 오직 고요한 기도의 형태만이 사람을 오래도록 선하게 변화시키며, 타인을 위한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그러니까 관상은 큰 사랑과 큰 고통 속에서 얻는 단기적 지혜를 지탱시켜 주고 더 깊게 해주는 은총의 길인 것입니다. [2]
References
[1] John Lewis with Brenda Jones, Across that Bridge: A Vision for Change and the Future of America (Hachette Books, 2017), 208.
[2] Richard Rohr, interview with Romal J. Tune, “Richard Rohr on White Privilege,” HUFFPOST (January 15, 2016; updated December 6, 2017).
Richard Rohr, “Grounding Compassionate Action,” Daily Meditations, December 27, 2020.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Annie Quick, untitled (detail), 2025, photo, Albuquerque.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맨발로 땅에 닿아 서 있는 것은 고요한 수도자의 몸짓을 의미합니다. 즉각적인 반응은 그 힘을 잃고, 대신 관상적 응답이 솟아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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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의 관건은 우리가 그분과 참으로 만나고자 하는 의지 문제에 달려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이 주님을 만난 사건은 부활의 대표적인 체험 중 하나입니다. 이 이야기는 루카 복음서만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름 없는 두 제자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들로 인해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스승이신 예수님을 따랐지만, 예수님은 죄인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굴욕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죄인의 추종자"라 불리고, "하느님을 모독한 자의 제자"라 불리는 것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몇몇 여인들이 빈 무덤을 보았다는 소식은 그들의 혼란을 더 크게 만들었습니다. 삶은 그들에게 가혹하게 다가왔고, 마음은 어둠에 잠겼으며, 희망은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실망과 낙담 속에 "집"인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라는 마을로 걸어갔습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 엠마오라는 마을은 방향이 없는 어떤 곳, 목적이 없는 없는 삶의 혼돈을 비유해 주는 어떤 은유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여태껏 엠마오라는 마을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것인 거고요....
그러나 이 슬픔의 걸음은 곧 인생을 바꾸는 체험으로 변했습니다!
고통과 슬픔의 순간은 주님의 깊은 사랑을 만나는 순간이 되고, 낙심의 상황은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체험하는 기회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걸으시며 성경을 풀어 설명하시고, 마침내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실 때,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루카 24,30-31)
그들의 슬픔은 사라지고, 애통은 기쁨으로 바뀌며, 절망은 희망으로 변했습니다. 이 체험은 반드시 나누어야 했습니다. 이 체험은 반드시 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이제 다른 제자들에게로 "달려갔습니다!"
루카 복음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단 한 명의 제자, 클레오파스만을 이름으로 밝힙니다. 그렇다면 굳이 다른 이들이 늘 그렇듯 두 번째 제자가 또 다른 남자라고 단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어쩌면 그 제자는 클레오파스의 아내, 곧 한 여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옛날 옛적"의 동화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남녀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믿음의 삶에서 우리를 잡아채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게 하는 삶의 다양한 어려움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의 첫 번째 특징은, 예수님에 대한 희망이 좌절되었다고 해서 마냥 마비된 채 머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사건이 있은 지 사흘째 되는 날, 그들은 이미 길 위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는 삶을 이어가려고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잊은 것도 아니고, 부활하셨다는 소문을 무시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길을 걸으며 그들은 예수님을 기억했고, 그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상 속에서 때로는 실망을 느끼고,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따르는 것의 가치를 의심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하루를 시작하고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듯, 우리도 길 위에서 그분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도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이 길에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말입니다.
제자들은 서로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낯선 이의 모습으로 다가왔을 때도 그들은 계속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성경에 대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적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에 대한 정보, 대화, 신학적 진술, 성경의 훌륭한 해설조차도 믿음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이보다 더 깊은 그 무엇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계속 길을 걸으며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분의 설명을 통해 성경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믿음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믿음은 단순한 우리가 머리로 받아들이는 정보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근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구체적인 만남(인격적 만남)이어야 합니다.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은 그 만남으로 나아가도록 돕고, 우리가 그 이해 안에서 성장하도록 이끌지만, 그 자체가 예수님과의 실질적인 만남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까지 그분과 만나기보다는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로 신앙의 여정을 해 왔기 때문은 아닐까요?! '내'가 직접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는데, 그러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삶의 다양한 상황 속에서 우리 삶의 여정을 함께 걸으시면서 당신을 만날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일깨워 주십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는 당신 자신을 나누어 주시는 성체성사 안에서 당신과 우리의 만남이 어떤 것인지를 보게 해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빵을 떼어 나누실 때"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길에서 함께 걸었지만 믿지 못했고, 대화를 나누었지만 믿지 못했으며, 말씀을 들었지만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식탁에서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축복하시며 떼어 나누어 주실 때, 그들의 눈이 열려 그분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매번 성체성사 안에서 당신을 온전히 내어 주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여전히 그분과의 만남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어려움을 느끼고 있을까요? 이렇게 당신을 내어 주시는 예수님이 그저 또다른 형식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우리가 이 성체성사 안에서 당신을 온전히 내어 주시는 분을 보려고 깨어 의식하고자 한다면 그분은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과 만났는데도, 아니 주님과 하나 되었는데도 어떻게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주님을 만나려는 의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 삶에 도움을 받으려고는 하지만, 그분과 참으로 만나고 그분과 하나 되고자 하는 열의가 없는 것이겠지요....
우리가 그분을 참으로 만나고자 한다면 우리는 성체성사에서는 물론이고 구체적인 삶에서 당신을 이해하도록 도우시며 우리를 몸소 찾아와 주시어 우리와의 친밀한 관계성 안에서 우리의 이해를 도와주시는 주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만나고자 하는데 주님께서 우리의 의지를 꺾으시겠습니까?! 아니겠지요!
그러니 그분과의 만남의 관건은 우리가 그분과 참으로 만나고자 하는 의지 문제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참되게 만나게 된다면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이 만남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자 할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이 만남을 이야기로 나눌 뿐 아니라, 예수님처럼 적극적으로 우리 존재 자체를 다른 이들과 나누는 삶에 들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복음의 기쁨]에서 강조하시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에 관한 구절을 나누며 오늘 복음 묵상을 마치겠습니다.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있든 바로 지금, 이 순간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그분과 만나려는 마음, 날마다 끊임없이 그분을 찾으려는 열린 마음을 가지도록 권고합니다. 그 누구도 이러한 초대가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시는 기쁨에서 배제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길로 나서는 이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우리는 그분께서 언제나 그곳에,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이 바로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릴 때입니다. '주님, 제가 잘못 생각해 왔습니다. 저는 수없이 주님의 사랑에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기에서 주님과 계약을 새롭게 맺고자 합니다. 저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주님 저를 다시 구원하여 주소서. 구원하시는 주님의 품 안에 다시 한번 저를 받아 주소서.' 우리가 길을 잃을 때마다 주님께 돌아갈 수 있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거듭 이렇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데에 결코 지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데에 지쳐 버립니다."(복음의 기쁨 3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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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9. 부활 제3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부활 3 주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오순절 날에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한 설교의 일부입니다. 이 설교에서 베드로는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고”(사도 2,24), 예수님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주신 분”(사도 2,28)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주신 분”(사도 2,28)이십니다. 오늘 <화답송>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나이다.”(시 16,11 참조)
<제2독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약 30년이 지난 후, 베드로가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서간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주셨습니다.”(1베드 1,21)
<복음>은 예수님 부활의 모습을 드러내주시는데,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엠마오로 가고 있는 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희망을 잃고, 슬픔과 절망에 빠져 이전의 자신들의 삶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15-16).
혹 우리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눈이 가리어”라는 말은 우리가 아무리 알아보려고 해도 하느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보게 해주시지 않으면 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을 건네십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루카 24,17) “무슨 일이냐?”(루카 24,19)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요한 20,25)
그렇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고,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을 믿었던 일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앎과 새로운 믿음을 받아들여야 할 때입니다. 곧 ‘그분이 죽었다’는 앎에서 벗어나고, 그분께 걸었던 믿음이 무너져버린 일에서 벗어나고, 다시 알아듣고 새로이 믿어야 할 때입니다.
이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이렇게 말합니다.
"21세기의 문맹자는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고, 잊고, 다시 배우지(learn, unlearn, and relearn) 못하는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이미 ‘배운 것’, 이미 ‘아는 것’을 비워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말씀’을 통해 깨우쳐주십니다.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루카 24,27),
그들은 “마음이 타오르게”(루카 24,32) 되었으나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지는 못한 채 말합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루카 24,29).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식탁에 앉으셔서, 빵을 들어 떼어 나누어주시며”(루카 24,30 참조) 사랑으로 응답하십니다. 그 깊은 사랑이 그들의 어둠을 비추시니,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31). 이는 마치 ‘말씀의 전례’로 마음이 타오르고, ‘성찬의 전례’로 말씀이신 분을 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께서 “빵을 떼실 때에”(루카 24,35) 그분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떼어내다’는 단어는 ‘분리하다’, ‘파괴하다’, ‘으스러뜨리다’라는 의미의 동사라고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으스러뜨리고 부수심으로 당신의 진면목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니 신비, 곧 부활의 신비를 보는 눈은 이 ‘떼어냄’, ‘부수어짐’, ‘으스러뜨림’에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부활도 우리의 생명을 으스러뜨리고 부술 때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곧 우리가 부서지고 으스러뜨려질 때, 우리는 그분 안에 숨겨져 있는 우리의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나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콜로 3,1-3)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꼭 붙드시고, 참으로 감동적으로 우리를 동행하십니다. 깊고 깊은 우리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스스로 그분의 손을 빠져나가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걷는 이 길에서 당신 ‘말씀’으로 마음이 타오르고, 마음의 눈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과 부활생명을 보는 눈이 열려, 어려움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뿜어 나르는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루카 24,16)
주님!
곁에 함께 걸으시건만,
당신을 알아 뵙지 못한 저를 용서하소서!
길동무가 되어 주시건만,
곁에 없는 것처럼 무시하였음을 용서하소서!
이제는 뼈 속 깊이 계시고 심장에 살아계시며,
발등에 등불이신 당신으로 타오르게 하소서.
함께 걸으시는 당신의 인도를 따라 걷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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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9. 부활 제3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공감(empathy)과 연민(sympathy)’이라는 말에 관해 강의를 들었습니다. 둘 다 긍정적인 의미가 많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공감은 폭력과 전쟁의 수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던 군중도 공감했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심판했던 대사제와 율법 학자도 공감했습니다. 부정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고 했던 사람들도 공감했습니다. 독일의 나치즘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공감을 통해서 정권을 잡았고, 2차 세계 대전이라는 비극과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을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과 미국은 공감했기에 선전포고도 없이 이란을 공격했습니다. 무고한 사람이 죽어야 했고, 유가의 급등으로 세계 경제에 큰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공감의 특징은 나와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율법 학자는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의 고통과 아픔에는 공감하지만, 멀리 있는 나라에서 고통받고 아파하는 사람에 관해서는 공감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뉴스로 듣지만,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이 납치되어 미국의 법정에 서는 것을 크게 공감하지 않습니다. 이란에서 폭격으로 무고한 여학생이 170명이나 죽었지만 역시 크게 공감하지 않습니다. 저와 너무 멀리 있기 때문입니다.
공감이 사랑과 자비라는 옷을 입으면 연민(sympathy)이 됩니다. 하느님이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신 것은 연민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것은 굶주린 사람을 바라보았던 예수님의 연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시고,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해주시고, 중풍 병자는 일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연민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연민’의 마음을 알려주십니다.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연민’의 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돌아온 아들의 비유도 아버지의 ‘연민’을 이야기하십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도 ‘연민’의 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의 율법을 잘 안다고 하는 레위는 ‘연민’의 마음이 없어서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하고 자기의 길을 갔습니다. 하느님께 제사를 드린다고 하는 사제는 ‘연민’의 마음이 없어서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하고 자기의 길을 갔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율법도 잘 모르고, 제사를 드리는 방법도 몰랐지만 ‘연민’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여관으로 데려가서 치료해 주었습니다. 돈이 필요하면 다녀와서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에게 묻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율법 학자가 말합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예전에 미국의 ‘타임'지는“ 20세기의 끝에서 가장 위대한 연설 4개”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 연설입니다. “역사상 위험이 최고조에 이른 시간에 자유 수호의 역할을 부여받은 세대는 몇 되지 않는다. 나는 그 책임을 피하지 않고 환영한다. 나의 동료인 미국인들이여, 조국이 자신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자신이 조국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어라.” 두 번째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취임 연설입니다. “우리가 오로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자체이다.” 세 번째는 처칠 영국 총리의 연설입니다. “나치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프랑스 땅에서건 대양에서건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네 번째는 마틴 킹 주니어 목사의 연설입니다. “내게는 예전 노예의 아들과 노예 소유자의 아들이 형제처럼 함께 식탁에 앉을 수 있는 꿈이 있다.” 공감을 넘어서 사랑과 자비의 옷을 입은 연민의 마음이 느껴지는 연설입니다. 저 자신을 돌아보면 시류에 편승해서 공감한 적은 많습니다. 하지만 사랑과 자비의 옷을 입어 ’연민‘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부족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부활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에서 여러 번 넘어지셨지만,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것이 바로 연민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절망 속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슬픔과 좌절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에서 낯선 한 사람이 함께 걸어옵니다. 그분은 성경을 풀어 주시고 하느님의 계획을 설명해 주십니다. 그리고 빵을 떼어 나누는 순간 그들은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봅니다. 그때 그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절망 속에 있던 제자들의 마음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희망이 다시 피어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힘입니다.
지금 들과 산에는 꽃이 피고 있습니다. 나무에는 새순이 돋고 있습니다. 자연은 봄이 왔음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러나 신앙의 봄은 자연이 아니라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시류에 따라 공감하는 삶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의 옷을 입은 연민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 안에서 부활이 시작됩니다. 부활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사건이 아닙니다. 부활은 우리의 마음이 다시 살아나는 사건입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보고 외면하지 않을 때, 누군가의 눈물을 보고 손을 내밀 때, 누군가의 상처를 보고 함께 걸어 줄 때, 그때 우리는 이미 부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시류에 따라 공감하는 사람으로 머무르지 말고 사랑과 자비의 옷을 입은 연민의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때 우리의 삶의 길에서도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걸어가실 때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하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의 삶 속에서 부활은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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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9. 부활 제3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부활하신 주님꼐서는 성전 안에도 계시지만, 시장 한 가운데도 현존하십니다! 엠마오 소풍 길에 만난 형형색색의 꽃들, 어찌 그리 눈부시고 화사하던지요. 나이 탓인지, 여리여리하고 청초한 것들을 보면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끔찍하게 먹어버린 제 나이를 생각하며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꽃길을 걸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길고 혹독한 겨울을 잘 견뎌낸 우리에게 또 다시 찬란한 눈요기를 선물로 주시는구나. 이런저런 매일의 고통을 잘 이겨낸 우리에게 위로의 선물로 화사한 봄날을 보너스로 주시는구나. 엠마오 길에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는 꽤 긴 여정을 그분과 함께 걸었지만, 시종일관 그분을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주실 때야 마침내 ‘눈이 열려’ 그분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네 인생 여정 안에서 참으로 중요한 순간이 있으니, 바로 우리들의 눈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눈이 열린다는 것은 새로운 시선, 새로운 시각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그간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게 될 때 우리 인생은 얼마나 풍요로워지는지 모릅니다. 그때 우리는 고통이 기쁨으로, 슬픔이 은총으로 변화되는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초라하고 누추한 우리네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뵌 제자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존재 방식은 이제 종전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입니다. 엠마오 제자들과 함께 길을 걸으시고, 식사를 같이 하셨지만, 어느 순간 홀연히 사라지십니다. 그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짠하고 눈앞에 나타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여기도 계시지만 지구 반대편에도 계십니다. 성전 안에도 계시지만, 시끄러운 시장 한 가운데도 현존하십니다. 저 멀리 위에도 계시지만 내 마음 깊숙한 곳에도 자리하십니다.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함께 길을 걸으시고, 대화를 통해 이것 저것 자상히 가르쳐 주시고, 빵을 떼어주시고, 그러나 또 다시 사라지시고...참으로 묘하신 하느님, 신비의 절정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 한 가지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 우리 앞에 확연히 나타나십니다. 다시 말해서 매일 우리가 거행하고 참여하는 성체 성사 안에서 꾸준히 당신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성체성사가 좀 더 잘 준비되어야겠습니다. 좀 더 경건하고 깨어있는 태도로 임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체성사를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다가오시고, 영성체를 통해 우리 눈이 열려 주님을 뵈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크신 하느님께서 매일 내게 다가오신다는 것,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내 인생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신다는 사실, 생각만 해도 행복합니다. 하느님께서 다정한 친구의 모습으로 매 순간 내 옆에서 함께 걸어가신다고 생각하니 이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듯합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어느 다른 하늘에 존재하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때로 부족하고 비참한 오늘 우리의 일상 안에 현존하십니다. 티격태격하는 우리들의 인간관계 안에 현존하십니다. 이번 주말도 많은 피정객들이 저희 집을 찾아주셨습니다. 한팀이 나가고 나니, 바로 또 한팀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찾기 힘들었던 부활 예수님께서 저희를 찾아오신 형제자매들 안에 떡하니 현존해 계셨습니다. 오늘 우리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굳건히 현존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발견하고, 선포하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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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9. 부활 제3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생활묵상 : 과연 개떡과 찰떡이 찰떡궁합이 될 수 있을까?
묵상글 제목으로 원래는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 남편이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간단하게 변형했습니다. 자매님과 이야기하다가 이런 제목이 생각나 묵상한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게 개인이든 단체이든 말입니다. 개인이 개인으로 만나도 뭔가 만약 서로 통하는 게 없다면 그 만남은 정말 곤욕스러울 수 있습니다. 비근한 예로 주일에 친교의 목적으로 레지오 단원들과 차모임을 해도 그럴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간혹 이야기를 하시는데 이게 아주 지루할 경우가 있습니다. 대개 다른 분들도 그렇게 느끼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궁합으로 이야기하면 그렇게 이야기하시는 분과 다른 분들과 쉽게 융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물과 기름처럼 말입니다. 요즘 저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꿈에서조차도 생각하지도 못할 일이 일어나면서 느낀 게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힘의 위력을 말하고 싶습니다. 아직까지는 잘 모르지만 이때의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도 사랑이지만 단순히 신앙 안에서 형제간에 이루어지는 사랑을 말합니다.
사랑이라는 건 국어사전에 나오는 단어의 정의처럼 정의하기에는 힘든 부분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생각과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건 하나로 정의하기 힘든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원래 찰떡궁합처럼 사랑도 그렇게 돼야 사랑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양쪽이 찰떡이 되어야 할 겁니다. 그렇게만 되면 좋은데 꼭 그렇게 만날 수가 잘 없다는 게 현실입니다. 이게 가장 이상적이긴 한데 그렇다면 이런 게 아니더라도 찰떡궁합처럼 될 수 없을까 하는 묵상을 해봅니다. 전혀 없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개떡과 찰떡이 만나 찰떡궁합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찰떡이 개떡을 먼저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개떡이 개떡 같은 소리를 하는 건 당연합니다. 이때 찰떡은 그 소리를 개떡으로 이해를 하겠지만 그 소리를 찰떡으로 이해를 해야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찰떡으로 이해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사랑입니다.
그 소리가 개떡 같아도 개떡이 아닌 찰떡으로 이해를 하는 것이죠. 꿈보다 해몽을 잘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몽을 하기 위해서는 그 해몽을 오로지 개떡의 입장에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개떡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서로가 사랑을 한다고 하려면 그냥 서로의 입장에서만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려고만 하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도 사랑을 한다면 그건 정말 천생연분일 수 있을 겁니다. 보통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특수한 경우는 예외로 하고 보통의 경우에도 천생연분이 되려면 결국은 어느 한쪽이 희생을 해야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희생은 개떡이 찰떡이 되는 경우가 아니고 찰떡이 개떡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개떡이 찰떡이 되는 건 희생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찰떡이 개떡이 된다는 건 자존심도 내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겁니다. 자존심을 내려놓는다는 게 바로 개떡을 사랑으로 품어안는 것입니다. 결국은 찰떡궁합이라는 건 서로가 찰떡이 되어야 하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아도 될 수 있는 건 원래는 찰떡궁합이 아니더라도 하나가 희생으로 그걸 품으면 개떡궁합도 찰떡궁합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찰떡궁합도 희생과 사랑이 전제된다면 개떡궁합도 찰떡궁합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사랑만 있다면 불가능은 없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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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9. 부활 제3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24,13–35
두 제자가
무너진 마음으로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
희망의 언어를 잃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주님이 곁에 오시지만
그들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주님은 묻고, 듣고, 설명하십니다.
정답을 강요하지 않고
그들의 속도를 따라 걸어 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빵을 떼어 나누시는 순간,
그들의 눈이 열립니다.
주님은 사라지시지만
그들의 마음은 다시 불탑니다.
성 예로니모는 교회에 이렇게 가르칩니다.
말씀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눈은
감정의 흥분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길러진 시선이라는 뜻입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본 것은
갑작스런 기적 감각이 아니라,
길 위에서 들은 말씀과
식탁에서 떼어 나눈 빵의 기억이
하나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성체가 연결될 때
눈이 열립니다.
오늘 3주 평화/인내 주간의 복음은
우리에게 “빨리 회복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지친 제자에게
즉시 승리를 주지 않으십니다.
대신
함께 걸어 주시고
천천히 해석해 주시며
마침내 식탁에서 평화를 주십니다.
• 평화는 “갈등이 끝났음”이 아니라
주님이 함께 걸으심을 다시 믿는 마음입니다.
• 인내는 “참아내는 고통”이 아니라
길 위에 끝까지 남아 함께 걷는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는 묻습니다.
나는 요즘 누구와 함께 걷고 있는가?
혹은 혼자 내려가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은 오늘도
“내가 너와 함께 걷고 있다”는 방식으로
평화를 시작하십니다.
주님,
제가 낙심한 길에서
당신을 알아보지 못할 때에도
당신이 제 곁에 오시어
함께 걸어 주심을 믿게 하소서.
말씀과 성체 안에서
제 눈이 다시 열리고
평화와 인내로 오늘을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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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9. 부활 제3주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
저는 개인적으로 성체 성가 중에서 좋아하는 성가는 원선오 신부님이 작곡한 「엠마우스」입니다. 『서산에 노을이 고우나. 누리는 어둠에 잠겼사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이 노래는 가톨릭 성가집에 수록되어 있지 않아 잘 부르지 않지만, 오늘 복음의 내용을 잘 표현한 성가입니다.
오늘 복음의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우리의 거울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스승이신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결정적인 신앙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 하는 사람인가’에 대한 신원과 정체성의 위기를 맞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강도는 지금껏 살아온 삶과 관련되어 있다고 봅니다. 행복의 기쁨이 크면 그만큼 불행의 슬픔도 큽니다. 분명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래아에서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 동안 수많은 치유와 기적들을 보고 듣고 만지면서 참으로 행복했던 날들을 보내잖아요? 그런데 자신들의 기대와 예상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충격 그리고 두려움에 휩싸여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처럼 인생의 위기는 지나온 삶의 탄력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더더욱 위기의 순간에는 확신할 수 있는 것, 신뢰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어떤 사람도 없게 됩니다. 모든 것이 투명했었는데, 그런 제자들 앞에 갑작스레 닥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을 겪으면서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투명해졌습니다. 그로 인해 제자들은 좌절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아마도 그런 상태야말로 죽음의 순간이며 부활과 먼 상태였습니다.
그런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엠마오로 향해 여행을 떠났습니다. 길을 가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클레오파이고,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무명의 다른 한 사람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인 ‘나와 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은 깊은 절망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은 영적인 맹목의 상태였습니다. 그런 상태에 놓여 있었기에,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24,16) 예수님께서 그들과 동행하고 계셨지만, 영적인 맹목 상태에 있었기에 제자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였고,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흔히들 사랑하면 눈이 멀어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그 무엇도 사랑보다 눈이 밝지 못합니다. 눈이 먼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지요. 집착이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자기의 행복에 꼭 필요하다고 잘못 믿어버린 나머지 거기에 매달리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집착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행복의 대상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갖게 만들어 냅니다. 이런 제자의 상태를 마르꼬 16,12에는, “그 뒤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시골로 가고 있을 때 예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으나 그들이 기대하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음으로, 알아보지 못하였다는 표현이죠. 우리 또한 제자들과 동일한 상태는 아닌지요? 예수님은 우리네 삶과 인생길에서 우리와 함께 늘 동행하고 계시지만, 늘 우리가 기대하는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길을 걸어가면서 지금 만나는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는 우리가 세상을 타인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면서 만나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중요성, 소중함을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또한 깊은 슬픔의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24,17)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경험적으로 슬픔과 눈물은 타인의 존재와 위로를 느낄 수 없게 만듭니다. 우리의 감정과 상처가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이죠. 저의 경우엔 어머니의 죽음의 체험은 저에게도 동일하게 하느님의 현존과 위로를 느끼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 또한 그리스도 추종의 길을 멈추어 우왕좌왕하고 갈팡질팡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슬픔의 상태에서 깨어날 때, 우리는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실망의 상태였습니다. (24,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흔히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라는 말처럼 상대적으로 기대가 크면 그 충격도 정비례해서 크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지나친 기대는 실망을 낳습니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나자렛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기대나 요구는 세상적인 차원에서, 현세적인 측면에서 당장의 이득을 바라고 기적을 예수님께 요구하셨지만, 예수님은 더 높고 영원한 것을 주시기 위해 거부하였고, 그로 인해 실망한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까닭도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며 거부하고 배척하고 죽이려는 게 인간의 나약함이고 어리석음일지 모릅니다.
또한 그들은 불신앙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24, 22-24)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역시 부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받아들일 만한 믿음이 없었고 결국 스스로 불신앙의 상태로 전락하고 말아버렸죠. 그러기에 사도 바오로는 2코4, 7. 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체념과 인내로 모순과 슬픔을 견디어 내도록 초대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성령께 마음을 열고 그분의 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영적 상태에 있는 제자들에게 먼저 다가오시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신 다음, 성경 말씀을 풀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는 다른 관점에서 치유의 단계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에게 찾아오십니다. (24,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제자들이 주님을 먼저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은 늘 가까이 오시어 우리의 반응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알아볼 수 없는 우리의 맹목을 보시고 주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워하셨을까요? 하지만 탓하지 않고 먼저 가까이 오심으로 은총은 시작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의 문제를 들어주십니다. (24,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라는 질문은 그들의 불안을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문제를 지닌 사람은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어찌하면 좋을지를 알고 싶고, 자신의 처지를 이해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귀를, 시간을 내주는 것입니다. 일어난 일이 곧 제자들의 문제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문제 핵심을 꿰뚫어 보고 계셨습니다. 문제는 억압하거나 회피함으로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그렇게 하면 문제를 더 악화시킵니다. 모든 인간은 위기와 사건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대화는 인간에게 주어진 최선의 사랑법이며 선물입니다. 사랑은 결심이며, 그 결심은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려는 노력입니다. 세상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제자들의 이야기를 먼저 들으신 다음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십니다. (24,25) 아직도 귀가 막혔고 눈이 먼 제자들은 처음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 까닭은 그들의 선입견, 고정관념 때문이고, 곧 그들이 아직도 영적 귀머거리이고 영적 장님이었다, 라는 사실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깨우치려고 성경 말씀을 풀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설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그렇게 해주십니다. 성경은 사건의 해설이 아니라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입니다. 요한복음 5, 39절은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성경을 읽음으로 우리는 영생을 체험하고 그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들은 성경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고, 수용할 수 있는 여백이 생길 때까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마음의 여유와 여백은 차츰 눈이 보이고, 귀가 열리면서 어어 이게 아닌데 하며 마음이 뜨거워질 때 변화는 기적처럼 일어납니다. 기다리는 사랑은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변화하도록 아픔을 나눕니다.
절망에 빠진 자는 스스로 원해서 청할 때 자신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들을 수 있을 때,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할 방안을 찾게 됩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24,29) 타인을 수용하고 초대할 때 이미 문제는 사라집니다. 자기 집착이나 집중보다 타인을 집중할 때 문제 해결을 위한 실마리가 풀리게 됩니다. 또 초대받은 자가 초대하는 존재로 바뀌게 됩니다. 즉, 주님이 바로 우리의 주인이시지만,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에게 집중할 때 주인은 우리 자신이 될 뿐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집중에서 벗어나 예수님께 집중하면서 늘 ‘주님께 저희와 함께 머물러 주십시오’, 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인생의 참된 주인으로 주님을 모실 때 주님께서는 당신 사랑을 나누어주시고, 빵을 떼어 나누어주시는 예수를 봄으로 우리 또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엠마오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과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예수님을 알아보고 난 뒤,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할 수 있었고 자신들의 체험을 알리기 위해 떠나왔던 형제들에게 되돌아갔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가 처음 떠나왔던 삶의 자리, 갈릴래아로 되돌아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해야 합니다. 부활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굳게 하고 체험한 바를 나누고 증거하며, 생명을 얻고 또 얻게 합니다. 기쁜 소식 곧 부활 체험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마음을 밝게 하고 따뜻하게 합니다. 그래서 위기와 절망에서보다 더 높게 도약할 수 있는 은총이자 생명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주 예수님, 저희에게 성경을 풀이해 주시고, 저희와 함께 묵으시며 빵을 떼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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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9. 부활 제3주일. 키엣 대주교님.
믿음과 희망의 길, 엠마우스로 가는 길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나누는 이야기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두 제자와 함께 긴 길을 동행하십니다. 스승과 제자가 함께 걷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길을 걸으며 주님에 대하여, 구원에 대하여, 그리고 무엇보다 성경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느껴지는 사랑과 힘은 제자들이 비록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미 위안과 사랑을 느끼고 다시금 믿음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키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분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 함께 머무르시기를 부탁드렸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빛이시기에, 주님이 떠나시면 우리의 삶은 어둠에 묻히고
주님은 사랑이시기에, 주님이 떠나시면 우리의 삶은 너무도 외롭습니다.
주님은 희망이시기에, 주님이 떠나시면 우리의 삶은 의지할 곳을 잃고 방황합니다.
주님을 알아본 순간, 엠마오의 길은 기쁨과 믿음, 사랑, 그리고 희망으로 변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고 손으로 만져보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기쁨으로 넘쳐납니다. 부활하신 주님, 그것이 바로 믿음과 사랑과 희망입니다.
하느님의 권능은 참으로 크고 놀랍습니다.
누가 그것을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분의 계획은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모든 것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헤아릴 수 없이 깊습니다.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신 하느님께서는 오랜 계획을 세우시고, 외아들을 내어 주셨고 그 아드님은 사랑 때문에 목숨을 내어 놓을 만큼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참으로 크고 무한합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시편 8,5)
엠마오의 길은 우리 인생 여정과도 같습니다.
우리의 삶을 엠마오의 여정으로 만들어 가십시오. 주님과 함께 걸으며 기쁨을 느끼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희망을 갖고 주님과 함께 머물며 위로를 받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그 믿음과 사랑, 희망을 모든 이에게 전한다면 더 많은 사람이 함께 참된 행복에 이를 것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지금 나의 삶의 여정 속에서 나는 참으로 주님과 함께 걷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을 곁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한 채 혼자라고 느끼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 지 조용히 돌아보십시오.
2. 나는 삶의 어두움과 외로움 속에서 주님께 “저희와 함께 머무르십시오”라고 진심으로 청해 본 적이 있습니까? 지금도 주님을 내 삶에 머물게 하려는 갈망이 내 안에 살아 있습니까?
3. 주님을 만난 기쁨과 위로, 그리고 희망을 나는 내 안에만 간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은총을 이웃과 나누며 살아가고 있는지 깊이 성찰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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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9. 부활 제3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기도 열심히 하시고요, 미사에도 빠지지 마세요. 그래야 주님과 함께 지금을 잘 살 수 있습니다.”
“저도 잘 알아요. 그런데 지금은 여유가 없어요.”
지금 삶이 너무 힘들어서 오랜만에 성당 나오셨다는 분과의 대화입니다. 사실 이렇게 답하시면 답이 없습니다. 지금 병에 걸리셨기 때문입니다. 이 병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이 병에 걸리신 분이 참 많습니다. 바로 ‘그런데 병’입니다. 계속 ‘그런데’를 외치게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병입니다. 이 ‘그런데 병’은 삶 안에서도 이렇게 이어집니다.
“이 책 읽어 보세요. 정말 좋아요.”, “그런데 책 읽을 시간이 없어요.”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낯을 많이 가려요.”
“운동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너무 바빠요.”
“많이 웃어야 해요.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요.”, “그런데 웃을 일이 없잖아요.”
‘그런데 병’은 변화를 거부합니다. 따라서 ‘그런데’ 대신 ‘어떻게’를 많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며 자기의 변화를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런데 병’을 앓고 있는 제자들을 봅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뒤로하고 엠마오로 예순 스타디온(11km)가 넘는 씁쓸한 도피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이 가려져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잘못된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할 정치적 메시아로 기대했지만, 십자가 죽음으로 그 기대가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나 몇몇 여자가 전한 부활의 소식을 듣습니다. 하지만 계속 절망 속에 있습니다. 그들은 “그런데 돌아가셨잖아요.”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통해 당신의 십자가 수난이 실패가 아니라 영광으로 들어가기 위한 하느님의 필연적인 계획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이 주님의 말씀으로, 차갑게 식었던 제자들의 마음은 다시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병’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미사 때, 말씀의 전례로 뜨거워지지 않습니까?
날이 저물어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은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 되시어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떼어 나누어” 주십니다. 최후의 만찬과 동일한 이 행위 안에서 마침내 제자들의 영적인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봅니다. 이제 ‘그런데 병’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찾게 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날이 저물어 어둡고 위험한 밤길임에도 즉시 일어나 돌아간 것입니다. 절망 안에서 엠마오로 도망갔던 제자들이 마음을 바꿔 이제 기쁨의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제1독서를 보면,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해주셨던 ‘성경 풀이’를 베드로 사도가 예루살렘 군중들에게 그대로 재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관자이시기에 결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 없었던 것”(사도 2,24 참조)이라고 완벽하게 논증합니다.
제2독서는 엠마오의 제자들이 가졌던 현세적 해방의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진정한 영적 해방의 대가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를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1베드 1,19 참조).
우리도 주님께 자기 삶의 고통을 없애주고 현세적인 축복만을 내려달라는 ‘빗나간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자기에게 맞지 않는다면서 ‘그런데’만을 외치면서 함께 걷고 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계속 ‘어떻게’를 말하고 생각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눈이 열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이 빵을 떼어 나눠주실 때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봤던 것처럼, 미사를 통해 말씀을 듣고 마음이 타오르며 영성체로 눈이 열리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데 병’에 걸려서 엠마오로 도망가서는 안 됩니다. 이제 절망과 두려움 속에 있는 나의 이웃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셨다.”(루카 24,15 참조)라며 자기 삶으로 주님의 기쁜 소식을 증언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사랑보다 더한 사랑으로 사랑했다(에드거 앨런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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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9. 부활 제3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10:50 추가
영원한 도반, 예수님
“우정의 여정, 성체성사적 삶”
“주님, 당신이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고,
당신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하리이다.”(시편16,11)
수도원 하늘길을 걸을 때 마다,
수없이 되뇌이는 고백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하늘님 그리울 때, 보고 싶을 때
하늘길
하늘 향해 쭉쭉뻗은 메타세콰이어
<하늘의 사신> 가로수들
사열받으며
하늘보고 하늘 기운 숨쉬며
하늘 품위 되찾고 하늘의 왕자되어
하늘님과 함께
가슴펴고 힘차게
나는 듯 걷는다
이 기쁨, 이 행복에 산다”
주님의 충실한 사도, 레오14세 교황의 아프리카 4개국 순방 사목 순례 여정중 어제는 알제리-카메룬에 이어 세 번째 방문국은 앙골라였습니다. 역시 풍요롭고 유익한 가르침이 선사되고 있습니다.
카메룬에서 마지막 강론 요지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삶의 폭풍을 잠재우고 두려움 없이 나가도록 우리를 돕는
다.”
앙골라를 향한 기내에서 인터뷰시 한 대목입니다.
“나는 가톨릭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아프리카에 있다, 트럼프와 토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not to debate Trump).”
앙골라에 도착직후 앙골라 지도자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젊은이들의 비전이나, 노인들의 꿈을 억악하지 마십시오.”
어제와 그저께 양일간 자캐오의 집에서 단체피정 미사중 영성체후 성가 177장을 요청해 3절까지 힘차게 간절한 마음으로 불렀습니다. 들을 때 마다 감동에 눈물나게 하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가입니다. 아무리 들어도 싫증을 모르는 3절까지 가사중 오늘 강론과 연관되어 3절만 인용합니다.
“그 만나 먹은 백성들은 죽었을지라도, 이빵을 먹는 자들은 영원히 살리.
약속한 땅이여, 오 아름다운 대지여, 영원히 머무를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
이빵을 먹는 자는 그복지 얻으리, 아 영원한 생명의 빵은 내 주의 몸이라.”
참으로 모두가 한마음으로 열정적으로 부르는 모습도 감동적입니다. 성가중 “그리스도의 몸!”에 각자 고유의 목소리로 “아멘!” 응답하고 성체를 모시는 모습도 참 아름다운 감동을 줍니다. 어제 읽은 다음 기사가 오늘 강론 주제에 결정적 영향을 줬습니다.
“AI, 신의 탄생, 인간의 종말; 초지능 완성되면, 모두 죽는다! AI 질주 시대, 재점화된 경고; 현재 정부와 기업, 국민을 막론하고 최대 화두중 하나는 인공지능이다. 여기에는 인공지능 전환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이루는 가에 따라 국가와 사회, 개인의 미래상이 달라질 것이라는 생존의 절박함이 깔려 있다. 인공지능 세계 3강을 목표로 질주하고 있는 한국 사회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믿는 이들에게 답은 하나입니다. 우선적인 것이 영원한 도반, 예수님과 우정의 여정에 충실한 성체성사적 삶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며 답은 “AI”기계가 아니라, 언제나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과 우정이 깊어지면서 온전한 참나의 실현입니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는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이 상징하는바 우리 삶에서 주님과 우정의 여정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할 것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Behold, I am with you always, untill the end of the age.)
이보다 더 든든한 구원의 약속은 없습니다. 영원한 도반 예수님과 함께 평생 언제나 아버지의 집을 향한 우정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몇가지 생활 수칙을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공부하십시오!
무엇보다 말씀 공부, 하느님 공부, 예수님 공부입니다. 그리고 기도 공부와 실행입니다. 평생 치열히 가열차게 공부해야 합니다. “놀라”가 아니라 “공부하라” 연장되는 날들입니다. AI 시대 참으로 절박한 공부입니다. 이 공부의 모범이 베드로 사도입니다. 베드로가 공부 대상인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오순절 설교에서 명쾌하게 밝혀줍니다.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하느님의 오른쪽으로 들어 올려지신 그분께서는 약속된 성령을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다음,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는 것처럼 그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수제자였던 베드로의 예수님 공부가 참 깊습니다. 시편16,8-11절 까지 렉시오디비나 하여 아버지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베드로의 공부 결과는 다음 말씀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여러분은 나그네살이를 하는 동안에는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지내십시오. 여러분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 은이나 금처럼 없어진 물건이 아니라, 흠없고 티없는 어린양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아는 지름길 공부가 예수님 공부입니다.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의 고백처럼 우리와 늘 함께 계시는 영원한 도반 주님께서 최고의 선생님이 되어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길이신 주님께서 “길에서 태어나 길을 가다 길에서 죽을” 우리들과 늘 함께 계시면서 끊임없이 깨우쳐 당신을 알게 하시고 날로 당신과의 우정을 깊게 하십니다.
둘째, 전례를 특히 미사전례를 사랑하십시오.
주님과 영적 우정의 여정은 성체성사적 삶과 함께 갑니다. 성체성사가 우리 삶의 꼴을 만들고 더욱 성체성사적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의 전 삶은 성체성사로 수렴되고 성체성사 은총은 전 삶으로 확산됩니다. 수렴-확산의 리듬과 더불어 성체성사적 삶은 깊어지고 주님과 우정도 깊어집니다. 오늘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 구조도 전반부는 말씀전례, 후반부는 성찬전례, 그대로 미사전례를 반영합니다. 특히 다음 부분은 성찬례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눠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 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사라지셨다.’
얼마나 놀라운 체험인지요! 주님은 늘 겸손히 숨어 현존하시며 함께 하시다가 성체를 모실 때 눈이 열려 당신을 알아보게 하십니다. 바로 이 미사전례의 은총으로 우리 모두 광야 인생 순례 여정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셋째, 환대에 충실하십시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가 주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겸손한 사랑, 환대의 사랑 덕분이었습니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 정말 주님의 제자답습니다. 말그대로 환대의 모범입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그리고 이어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보는 성찬례의 축복입니다. 우리는 미사전례를 통해 주님을 환대하고 주님은 당신의 성찬전례에 참석한 우리를 환대하시니, 바로 우리의 주님 환대와 주님의 우리 환대가, 즉 환대와 환대의 만남이 참으로 은혜로운 미사전례입니다. 찾아 오는, 만나는 모든 사람이 주님의 현존입니다. 주님을 맞아들이듯 환대의 사랑으로 맞아들일 때 놀라운 축복입니다. 참으로 살아 있는 성체, 살아 있는 주님의 현존의 사람을 환대하여 맞아들일 때 비로소 성체성사의 완성입니다.
우리 삶은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 우정의 여정이자 성체성사적 삶입니다. 참으로 삶의 여정에 절실한 삶의 수행 셋이 <공부>요 <미사전례>와 <환대>에 충실함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영원한 도반이신 당신과 우정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미국의 시인 엘리어트는 그의 대표작 <황무지> 시에서 엠마오 도상의 주님을 다음처럼 노래합니다.
“항상 우리와 나란히 걷는 제 3의 인물은 누구일까 ?
세어 보면 오직 그대와 나뿐인데,
그러나,
저 하얀 길을 내다보면
언제나 우리와 나란히 걸어가는 또한 사람이 있다.
갈색 망토를 휘감고,
머리를 싸 맨 채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고,
미끄러지듯 걸어가는 그것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항상,
우리 곁을 걸어가는 그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우리의 영원한 도반, 이 거룩한 미사전례중 모시는 주님이십니다.
“빵을 나눌 때,
제자들은 주 예수님을 알아보았네. 알렐루야.”(루카24,3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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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9. 부활 제3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진신 님
■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 준다.
성격이 맞지 않는 것은 결혼의 이유가 아닌가. 그것을 그대로 이혼의 이유로 삼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남편과 아내의 성격이 맞지 않다니, 참 말도 잘한다. 원인을 밝히자면 남편과 아내는 생판 남이니 성격이 맞지 않는 것은 처음부터 분명한 일이 아닌가. 맞지 않으니까 서로 자신에게 없는 것이 상대에게 있는 것에 끌려 결혼해서 함께 살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 나는 강아지로소이다, 이노우에 히사시
짧은 생을 살며 알게 된 하찮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장점은 단점에 속하고. 단점은 장점에 속한다는 겁니다. 흔히들 장점만 있는 사람도 없고, 단점만 있는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만 어떻게 보면 상통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장점이 마음에 들어서 친구, 연인, 부부 등의 관계가 되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생각보다 장점이 주는 행복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익숙해지면 상대방의 기본값이라는 생각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장점이 평범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후에는 단점으로 인한 불만과 서운함을 토로하게 됩니다.
역설적이지만 단점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장점이 평범하게 느껴지고 종국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단점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안에 있는 장점을 보물처럼 귀하게 여길 수 있지만 단점을 사랑하지 못한 사람은 보물을 찾을 수 없으므로 귀하게 여길 수가 없고, 단점만 눈에 들어오는 겁니다. 장점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그걸 찾기 위한 과정에서 보이는 단점에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보물을 찾을 수만 있다면야, 그 과정에 어떤 역경이 있더라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장점과 단점은 긴밀한 관련이 있으며 개별의 문제가 아닙니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인간관계에서는 절대적으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인즉슨 상대방의 단점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타인의 빛나는 장점을 누릴 수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마 6,14-15)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 준다. (잠언 10,12)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콜로 3,13)
은에는 도가니, 금에는 용광로 사람은 그가 받는 칭찬으로 가려진다. (잠언 27,21)
제가 일하면서 마구 쓴 엉성한 글이라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눈을 열어 주시길 청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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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공유할 묵상글(강론글)로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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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9. 부활 제3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10:40 추가.
<“그들은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루카 24,28-35).>
1) 다른 이야기들과 비교하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이야기’에서 특이한 점이 한 가지 보이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는 당신의 부활 소식을 사도들에게 알리라고 지시하셨고(요한 20,17), 사도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에는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루카 24,47-48).
그런데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는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으셨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설명해 주셨을 뿐입니다.
두 제자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라고 증언한 일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시키셨기 때문에 한 일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그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을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선 두 제자는, 메시아의 수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실망하는 신앙인들을 상징하는(또는, 대표하는) 인물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일은 모든 신앙인에게 ‘부활 신앙의 은총’을 주기 위해서 나타나신 일입니다.
2)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메시아의 수난을 설명해 주신 것은, 사실상 부활을 설명해 주신 것이고, ‘십자가 수난과 부활은 하나의 사건’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려면 먼저 예수님의 죽음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인류 구원을 위한 일이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에게 바로 그것을 설명해 주셨고, 그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설명 덕분에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았고, ‘큰 실망’에서 벗어났습니다.
“깨달은 다음에는?” 진리를 깨닫고 믿었다면,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 기쁨을 얻었다면, 그 다음에 할 일은 ‘증언’입니다.
두 제자가 명시적으로 지시받은 것이 없는데도 자신들의 깨달음과 믿음과 기쁨을 증언한 것은, 복음 선포는 원래 그렇게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무슨 지시를 따로 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셨으니까 수행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기쁘니까’,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 자신이 원해서 하는 일, 그것이 복음 선포입니다.
복음 선포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전해 주는
일이면서 동시에 복음 선포 자체가 ‘기쁜 일’입니다.
3) 그러면 사도들에게는 왜 복음 선포를 ‘지시’하셨을까?
아마도 그것은 사도들의 ‘공적 직무’에 관련된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막달레나가 한 일도 사도들의 공적 직무에 연결된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사도들의 사도’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4)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을 초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초대한 것이 아니라, 누구인지 모르는 낯선 나그네를 초대했습니다.
그 일에서 다음 말씀들이 연상됩니다.
“(너희는)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5.40).”
“형제애를 계속 실천하십시오.
손님(나그네)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나그네)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하느님을, 또는 주님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1-2).”
‘사랑 실천’은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위한 지름길입니다.
5)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겪게 되고, 크게 실망할 때도 있는데, 만일에 그런 때에 신앙생활을 중단하거나 포기하면 그것으로 끝나버리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기도하고 노력하면, 누구든지 그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은, 아마도 분명히 포기하지 않고 둘이 함께 기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 라는 예수님의 약속을(마태 18,20)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말씀을 들려 주셨고, 받아먹을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빵을 떼어 주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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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9. 부활 제3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0:45 추가.
루카 24,13-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오늘 부활 제3주일 복음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를 찾아가시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뵙고 영적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이 미사에 참여하여 영적으로 성장해가는 우리 모습과 닮아 있지요. 그래서 오늘은 복음말씀을 미사의 각 부분과 연결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제일 먼저 ‘입당’입니다. 입당은 말 그대로 주님께서 머무르시는 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는 단지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내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주님께로 옮기는 것이지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세속적인 성공이라는 관점으로 주님을 보았기에 그분의 십자가 죽음을 보고 슬픔과 절망에 빠졌지만, 이를 주님의 관점으로 보면 절대 실패가 아닙니다. 주님은 힘과 권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능력이 아니라 희생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나의 믿음, 나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아버지를 향한 주님의 믿음이, 우리를 위한 그분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깨닫기 위해서는 나에게 일어나는 일을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만 보고 판단할 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의도와 뜻이 무엇인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나의 뜻을 모두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두번째는 말씀의 전례입니다. 하느님의 뜻 안으로 들어가려면 먼저 그분 뜻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겠지요. 그 방법은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남의 이야기’로 읽으면 그 어떤 깨달음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하느님께서 나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신 일들이라 믿고 읽어야 그 말씀을 내 안에 받아들이고 따르는 데에 ‘마음이 굼뜨지 않게’ 되지요. 또한 성경을 읽을 때에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를 생각하면서 읽어야 엉뚱한 길로 빠지지 않게 됩니다. 그 핵심주제는 총 세가지 입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겪으신 뒤에야 당신 영광 속에 들어가신다는 것. 둘째, 모세오경에서 시작하여 요한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기록은 공통적으로 하느님 뜻에 철저히 순명하여 고통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심으로써 마침내 참된 영광을 누리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것. 셋째, 그러니 당장 눈앞에 드러나는 현상이나 결과만 보고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 믿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 주님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이 점을 깨우쳐주셨고, 이런 깨달음을 통해 두 제자의 마음은 비로소 성경에 담긴 참뜻을 알게 된 감동으로, 더 나아가 자기들이 깨달은 그 말씀을 어서 빨리 삶 속에서 실천하고 싶은 열망으로 뜨겁게 타오르게 되었지요.
그런 뒤에 주님께서는 두 제자와 함께 조촐한 식사 자리를 마련하십니다. 세번째 단계인 성찬의 전례입니다. 그 자리에서 두 제자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자기들에게 나누어주시는 모습을 보고 “눈이 열려” 그분이 예수님이심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의 눈이 열린 것은 식사 때가 아니었습니다. 숙소까지 예순 스타디온, 약 11.2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걷는 동안 내내 계속되었던 “말씀의 전례”를 통해 하느님 말씀에 담긴 참된 의미를 깨닫고, 그 말씀을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였기에 눈이 열린 겁니다. 주님은 하느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시는 분이시기에, 그분의 현존을 알아보려면 하느님 말씀에 대한 이해와 수용이 선행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지요. 두 제자의 마음이 하느님 말씀에 대한 감동으로,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열망으로 뜨거워져있지 않았다면 ‘말씀이신 그리스도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성찬의 전례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면, 그 주님이 성체를 통해 내 안에 들어오시는데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만큼 평소에 성경 말씀을 가까이 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니, 성경 말씀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며 실천함으로써 마음의 눈을 주님께로 활짝 열어야 합니다.
마지막 단계는 파견입니다. 성찬의 전례를 통해 겨우 자기들과 함께 계신 분이 주님이심을 알아보게 되었는데, 그러자마자 주님께서는 두 제자 앞에서 홀연히 사라지십니다. 주님께서 그들 곁을 영영 떠나버리신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두 제자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요. 주님은 눈으로 볼 수 없어도 언제나 내 안에 함께 계신다는 것을.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기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신 것은 자기들에게만 주어진 ‘특혜’가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주님의 부활을 증거해야 할, 그리고 말과 행동으로 주님 말씀을 선포하고 실천해야 할 중요한 ‘소명’이 맡겨진 것이라는 점을… 그래서 그 길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열 한 제자에게 자기들이 겪은 ‘부활’을, 자기들이 보고 듣고 느낀 주님 모습을 전하게 됩니다. 그 점은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미사를 마치면서 사제를 통해 하느님의 ‘강복’을 받는 것은 천주교 신자라서 ‘특혜’를 받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미사 안에서 듣고 깨달은 주님 말씀을 사람들에게 널리 선포하라는, 주님의 몸을 받아모신 복된 사람답게 세상 안에서 행동과 삶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며 살아가라는 중요한 소명을 잘 수행하라고 힘을 주시는 것이지요. 그러니 그 소명을 충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한밤 중에 밖에서 위험에 처할까봐 염려되어 자기들과 함께 묵자고 붙들었던 두 제자처럼,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과 자비를 작고 약한 이들에게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 안에 계시는 주님을 알아보고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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