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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행에 관한 법
출 21:12-27
12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13 만일 사람이 고의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손에 넘긴 것이면 내가 그를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며
14 사람이 그의 이웃을 고의로 죽였으면 너는 그를 내 제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
15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16 사람을 납치한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17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18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하나가 돌이나 주먹으로 그의 상대방을 쳤으나 그가 죽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가
19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걸으면 그를 친 자가 형벌은 면하되 그간의 손해를 배상하고 그가 완치되게 할 것이니라
20 사람이 매로 그 남종이나 여종을 쳐서 당장에 죽으면 반드시 형벌을 받으려니와
21 그가 하루나 이틀을 연명하면 형벌을 면하리니 그는 상전의 재산임이라
22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쳐서 낙태하게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 낼 것이니라
23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26 사람이 그 남종의 한 눈이나 여종의 한 눈을 쳐서 상하게 하면 그 눈에 대한 보상으로 그를 놓아 줄 것이며
27 그 남종의 이나 여종의 이를 쳐서 빠뜨리면 그 이에 대한 보상으로 그를 놓아 줄지니라
출 21:12-27 / [살인한 자에 대한 법령]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 13 )그러나 일부러 죽인 것이 아니고 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붙인 경우라면 그 사람이 몸을 피할 곳을 내가 정해 주리라. 14) 그러나 누구든지 나쁜 마음을 먹고 흉계를 꾸며 이웃을 죽였을 경우에는 그가 내 제단으로 도망하여 목숨을 부지하려 한다 할지라도 그를 제단에서 끌어내어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라. 15) 어미나 아비를 때린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 16) 사람을 유괴한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잡아 두었든지간에 그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 17) 어미나 아비를 우습게 여기는 자도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 18) [사람을 때린 경우에 대한 법령] 이웃간에 서로 싸우다가 한 사람이 상대방을 돌이나 주먹으로 친 경우에 다행히 맞은 사람이 죽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가 19) 지팡이를 짚고라도 몸을 움직일 수 있으면 친 사람이 처형은 면한다. 그러나 그는 맞은 사람이 누워 있는 동안 생활비를 대주어야 하고 완전히 나을 때까지 모든 비용을 책임져야 한다. 20) 누구든지 남자 노예든지 여자 노예든지 매로 때려 그 자리에서 숨지게 하였을 때에는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 21) 다만 매를 맞은 노예가 하루나 이틀이라도 더 목숨이 붙어 있으면 그 주인이 벌을 받지 않아도 된다. 그 노예는 주인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22) 사람들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를 가진 여인을 밀쳐 낙태시켰을 경우 다른 곳은 다친데가 없다면 그 여인의 남편이 요구하는 대로 반드시 배상해야 한다. 배상액은 재판장의 판결에 따라 결정한다. 23) 하지만 다른 사고가 생겼을 경우,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 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 26) 누구든지 자기 남자 노예나 여자 노예의 눈을 때려서 멀게 하였을 경우 눈을 멀게한 대가로 그 노예를 풀어 주어야 한다. 27) 또 그 남자 노예나 여자 노예의 이를 부러뜨렸으면 그 이를 부러뜨린 대가로 그 노예를 풀어 주어야 한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에 대한 공격(살인, 납치)과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부모),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됐을 때에 대한 형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12-17) 사형에 해당하는 죄에 대해 세 가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의 존엄성(창 9:6)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살인은 사형에 해당되나, 살인에 관해서는 가해자의 의도성이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됩니다. 의도적인 살인은 그가 누구이든(왕상 1:50-53; 2:28-34) 어디로 도망가든지 사형에 처해집니다(14). 그러나 그가 실수나 과실로 사람을 죽였다면, 살인죄가 적용되지 않고, 도피성으로 피해 그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람들로부터 생명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민 35:12; 신 4:41-43; 19:1-13). 부모를 폭행하거나 저주하는 자녀는 사형에 처해집니다. 이는 늙고 힘이 없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부모를 돌보는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인신매매와 종을 삼기 위해 사람을 납치하는 것도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하는 것이기에 사형에 해당됩니다.
신체에 해를 끼친 죄(18-27) 육체적 싸움으로 발생하는 상해에 대해 가해자는, 피해자가 입은 손실과 완치될 때까지의 치료비 등이 포함된 정당한 보상을 제공해야 합니다. 만일 주인이 종을 폭행하여 종이 죽었다면, 종의 죽음과의 상관관계에 따라 주인에게 살인죄가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때에는 주인도 사형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12-14). 또한 주인의 폭행으로 종이 상해를 입어 신체의 일부분이 손상됐을 경우에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26-27). 율법은 노예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주인의 폭력을 제한하고 종의 신분이라도 인간의 존엄성이 보호받아야 함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두 사람이 싸우다 근처에 있던 임신한 여자가 다치는 특별한 상황에 대해서도 처벌규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자는 다치지 않고, 낙태가 되었을 경우에는 재판장의 판결에 따라 그 여자의 남편과 협의하여 합당한 배상을 해야 합니다. 만일 여자가 다쳤다면 동해(同害)복수법이 적용되어 상호성에 따라 적절한 보복이 취해집니다. 그러나 동해 복수법은 보복의 정당성을 제공하기보다는 처벌의 한계를 정하고 복수를 억제하여 사랑과 용서의 정신으로 이끄는 데 있습니다.
적용: 법의 정신은 정당한 처벌 방식을 제시하기 보다는 억제하고, 바람직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습니다. 은혜를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때로는 피해자의, 때로는 가해자의 위치가 될 수 있습니다. 각각의 경우에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부모에게 존경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부모를 공경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상황 여하를 막론하고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엡 6:1).
< 설 교 >
폭행 살인에 대한 규례
출애굽기 21:12-21 / 이상호 목사
하나님은 종에 관한 규례에 이어 여종에 관한 규례와 이제 살인자의 대한 규례를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 규례로 보면 종이 아니라 한 인격체로서 자율에 의한 주인을 섬길 것을 강조 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그 사랑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비록 살인자라 할지라도 정당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민 35:12 "이는 너희가 보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오늘 본문에서도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분명하게 사람을 죽인 사람을 죽어야 된다는 것을 명시하면서 그 조건을 달고 있습니다. 십계명 6계명에서도 '살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1. 그런데 죽지 않을 사람도 있습니다.
계획함이 아닌 즉 고의적이 아니 것 개혁성경에서는 그가 일부러 죽인 것이 아니라 실수로 죽였으면, 내가 너희에게 정하여 주는 곳으로 피신할 수 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입성하여 열두지파에게 땅을 분배하고 6군데를 정하여 피난처를 만들었습니다. (수 20:7-8)
죽지 않을 자에 대하여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신 19:3-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시는 땅의 전체를 세 구역으로 나누어 길을 닦고 모든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하게 하라 살인자가 그리로 도피하여 살 만한 경우는 이러하니 곧 누구든지 본래 원한이 없이 부지중에 그의 이웃을 죽인 일, 가령 사람이 그 이웃과 함께 벌목하러 삼림에 들어가서 손에 도끼를 들고 벌목하려고 찍을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그 이웃을 맞춰 그로 죽게 함과 같은 것이라 이런 사람은 그 성읍 중 하나로 도피하여 생명을 보존할 것이니라 그 사람이 그에게 본래 원한이 없으니 죽이기에 합당치 아니하나 두렵건대 보수자의 마음이 복수심에 불타서 살인자를 뒤쫓는데 그 가는 길이 멀면 그를 따라 잡아 죽일까 하노라" 즉 우발적 사고에 대하여는 도피성으로 피하여 가라는 것입니다.
또 민수기 35:25-28에도 도피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혹 도피성에 도피해 있다고 할지라도 도피성 밖으로 나가서 보복자가 기다리고 있다가 죽이면 자신의 책임이라는 설명도 있습니다.
살인자가 해방 받을 수 있는 길도 잇습니다. (수 20:3-6)"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자를 피할 곳이니라
이 성읍들 중의 하나에 도피하는 자는 그 성읍에 들어가는 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읍의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건을 말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성읍에 받아들여 한 곳을 주어 자기들 중에 거주하게 하고 피의 보복자가 그의 뒤를 따라온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 살인자를 그의 손에 내주지 말지니 이는 본래 미워함이 없이 부지중에 그의 이웃을 죽였음이라 그 살인자는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 또는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는 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자기 성읍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하라 하시니라"
2. 그럼 죽을 자는 누구인가? 14절
14절 "사람이 그의 이웃을 고의로 죽였으면 너는 그를 내 제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두개가 있는데 하나는 고의로(끓다, 끓어오르다, 반항적으로 행동하다, 건방지다, 거만하다, 반항적으로 교만하다) 여기서 고의(짐짓)는 분노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자신을 과시하는 행동 즉 자신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한 살인 복수, 즉 계획적인 살인이 포함됩니다.
이런 사람에 대하여 내 제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내 제단은 하나님의 통치지역이라 할지라도 살인자는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잡아내려 강제로 끌어내어 죽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범죄한 사람에 대한 예외는 없는 하나님의 엄명입니다.
어떤 살인이기에 이처럼 강력하게 말씀하실까요? (신 19:11-13)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이웃을 미워하여 엎드려 그를 기다리다가 일어나 상처를 입혀 죽게 하고 이 한 성읍으로 도피하면 그 본 성읍 장로들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거기서 잡아다가 보복자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할 것이라 네 눈이 그를 긍휼히 여기지 말고 무죄한 피를 흘린 죄를 이스라엘에서 제하라 그리하면 네게 복이 있으리라"
오늘 살인자에 대한 하나님의 규례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그것은 누구에게나 생명은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귀중한 생명을 함부로 헤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실수를 했다고 해서 보복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실수는 실수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의입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원치 않게 누구나 중대한 실수는 할 수 있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의 유족에게는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해 또 살인을 범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주변에 사람들을 통하여 보호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의적인 살인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살인자에 대하여 엄하게 경고하신 것이 바로 제단에서 예배를 드릴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단에 어떤 신분으로 있든지 끌어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심판을 받게 됨을 말씀합니다.(계 22: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이제 우리는 고의적 살인과 실수에 대하여 오늘 본문을 생각하면서 영적으로 한번 생각해봅시다. 만약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예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진짜 내가 진실로 사랑한다면 예수님을 믿도록 해야 되지 않을까요? 예수 믿으라고 말할 때 마다 빈정대고 싫어해도 끝까지 전해야 됩니다. 또 죽음의 목전에서까지도 예수 믿고 천국에서 보자고 유언을 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하여 우리를 먼저 믿게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이 변함없는 예수님의 사랑가지고 생명 있을 동안에 꼭 가족과 이웃을 살리는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반드시 죽일 자(출 21:15-17)21. 배상할 자. 형벌 받을 자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은 특별히 택한 백성들의 그 종이라도 인격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인격을 존중하신 것을 봅니다. 성경 속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시고 산다는 것 자체만으로 얼마나 감사합니까?
특별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시고 또 그에 따른 율례를 주시어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모세를 통하여 자세히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자식이 부모님을 폭행했을 때와 또 사람들 사이에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남녀를 불문하고 납치자에 대한 처벌과 사람사이에 다툼이 일어나 싸움을 하다가 죽지 않고 병상에 누어 일하지 못하게 되면 그에 대하여 말하고 있고 또 집안에 종이라도 쳐서 죽으면 형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 하나님께서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을 생각하면서 성령님의 깨달은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1) 부모님께 폭행을 행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했습니다. 15, 17절
십계명에서도 인간에 대한 첫 계명이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입니다. 부모의 공경은 천륜입니다. 즉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이기에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잘 섬기는 것은 축복의 근원이 되고 사회 질서의 첫 거름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계명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3,500년이 지난 요즈음도 언론 매체를 통하여 간간이 자식의 폭행에 견디다 못해 법에 호소하는 부모들이 나옵니다. 아마 언론에 알려지지 않는 것까지 한다면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님께 폭행을 행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① 부모를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즉 나이 들고 생활력이 떨어지면 그동안 어려부터 사랑으로 베풀기만 했던 부모가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기 때문에 폭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② 술버릇으로 인한 부모 폭행입니다. 잠 23:29-33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상처가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며"
③ 부모의 물건을 훔치고 숨기기 위하여 잠 28:24 "부모의 물건을 도적질하고 죄가 아니라 하는 자는 멸망케 하는 자의 동류니라"
④ 항상 부모님에 대하여 적대감을 가지게 하고 결국 폭행까지 이어지는 것의 뒤에는 존경의 마음보다 섭섭한 마음과 원망과 증오와 성장하는 과정에서의 맺어있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뒤를 조정하는 것은 마귀입니다.
⑤ 이런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그동안 잘못한 것을 회개하고 부모님의 섭섭한 일 마음에 상처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됩니다.
2) 사람을 납치한자(후린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했습니다. 요즈음 어린아이를 납치하여 산체로 호수에 던져 죽이고 그 부모에게 음성을 녹음했다가 돈을 요구했던 사건은 우리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요즘도 매년 우리나라에도 미아들이 3,000명 이상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중에 납치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① 납치는 그 가족들에게 큰 상처를 주고 또한 아이에 성장에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납치를 금하는 것입니다.
② 납치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을 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③ 납치를 중대한 법죄로 보고 죽일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3) 부모를 저주한자('칼랄' 하찮다, 시시하다, 보잘 것 없다, 가볍다, 빠르다)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했습니다. 3,500년 전에 하나님의 법을 가볍게 여기기 시작이 바로 부모를 자신보다 못하게 생각하며 멸시하기 때문에 엄격하게 부모를 저주한자를 죽이라고 있습니다. 부모에게 폭행을 하는 자나 저주한 자의 죄가 가중하기 때문에 죽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엄합니다. 그래서 부모를 함부로 대하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수해서 감정 때문에 과거에 실수했다면 다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이것 때문에 성도로서 기도 응답이 안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배상할 자 : 사람이 싸우다가 한쪽 사람이 돌이나 주먹으로 쳐서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일하지 못한 기간을 변상하라는 것입니다. 연자이나 돌을 들어 죽이면 사형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 속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어른이 될 때까지 온갖 학습과 지식과 경험을 가집니다. 그러나 그 경험 속에 각각 다른 기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할 때 자신의 이상과 맞지 않으면 충돌이 불가피하게 일어납니다.
그렇다고 그 충돌 다시 말하면 싸우는 것은 좋지만 그 결과에 대하여 피차 책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싸우는 두 사람의 가정이 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싸움을 해서 피해가 많은 쪽을 변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들에 삶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공정한 법을 주셨습니다.
5. 주인 자기 집에 남종이나 여종을 매로 쳐서 죽으면 형벌('나캄' 복수하다, 원한을 풀다, 앙갚음하다)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주인이 자신의 종이지만 함부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은 온 인류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일을 시키기 위하여 훈계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훈계로 인하여 매는 칠 수 있지만 생명을 귀중이 여기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3,500년 전에 우리에게 주신 죽일 자, 형벌을 받을 자, 면할 자를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분명하게 부모 공경에 대하여 불순종한 자에 대한 그 예로 부모님께 폭행을 행하는 자, 부모님께 함부로 말하며 저주한 자에 대하여 죽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납치를 중 범죄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 역시 죽이라고 했습니다.
또 주인이라고 종의 생명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의 배경에는 마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새기어 순종하기 위하여 언제나 성령의 지배아래 자신을 지키고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약속하신 복을 받고 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형에 해당되는 죄
출 21:12-17 / 박덕기 목사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 산에서 중요한 언약을 맺었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하셨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제히 응답하기를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고 굳게 맹세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언약에 따라 출 20장에서는 모든 도덕법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십계명이 주어졌고, 21장부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회생활을 할 때 지켜야 할 시민법이 주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민법이 하나님의 택한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법이었다면, 오늘날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천국 시민인 성도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법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도 시민법에서 말씀하고 있는 삶의 원리들을 본받아 살도록 힘써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시민법 중 가장 먼저 주신 법이 히브리 종들에 대한 규례인 것을 지난주일 살펴보았습니다. 모든 히브리 종들은 육년 동안 주인을 섬긴 후 제 칠년이 되면 자유의 몸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이처럼 시민법 중에서 종들에 관한 법을 맨 먼저 규정해 주신 것은, 이 땅에서 소외되고 약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종들에 관한 율례 중 특별히 귀 뚫린 종에 대한 규례를 살펴보았습니다. 어느 종이 단신으로 주인집에 팔려 왔다가 주인의 여종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았는데, 제 칠년 되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처자식을 지극히 사랑한 나머지 주인집을 떠나지 않으려고 할 때는, 송곳으로 귀를 뚫고 영원히 종이 되어 주인을 섬길 것을 맹세하였다고 했습니다.
처자식을 사랑하여 꿈에도 그리던 자유를 포기하고 송곳으로 귀를 뚫어 영원히 종이 될 것을 자처한 노예가 있었다면, 주님 때문에 구원을 받고, 주님 때문에 영원한 자유인이 되고,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알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생각할 때에, 우리가 비록 눈에 보이는 송곳으로 귀를 뚫지는 않았을지라도, 주님을 위해 영적으로 귀를 뚫은 종들처럼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한평생 주님을 섬기며 주님께 충성을 다 바쳐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우리의 영원한 주인이 되시고 생명의 은인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시민법 중에서 두 번째 항목으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에 대한 율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죽인 자와, 부모를 때린 자, 사람을 유괴하는 자, 그리고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도록 율례를 제정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사형에 해당되는 네 가지 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12절에 “사람을 쳐 죽인 자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문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네 가지 범죄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 중에서도 사람을 쳐 죽인 범죄를 사형에 해당하는 첫 번째 범죄로 규정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악한 범죄 중에서도 사람을 죽이는 것이 가장 흉악하고 극악한 범죄로 규정하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사람을 죽인 것이 왜 가장 무서운 형벌인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되며, 하나님께서는 왜 이것을 사형에 해당되는 여러 가지 범죄 중에서도 가장 극악한 범죄로 규정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육체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어떤 존재입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존귀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사악한 범죄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쳐 죽이는 것은 어떤 범죄보다도 가장 흉악한 범죄로 사형이라는 극단적인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살인이 도처에서 행해지고 있습니까? 최근에는 11살 된 초등학생을 성추행하고 그 일이 탄로 날 것을 우려하여 어린 생명을 죽인 후 아들과 함께 사체를 불태워 유기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지난 2003년 한 해 동안 우리나라에서 저질러진 살인 사건만 하더라도 998건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세계 도처에서 저질러진 살인 사건은 얼마나 많겠으며, 거기다 전쟁과 테러 등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람까지 합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인에 의해 죽어가는 지 모릅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는 살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살인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되고 있는 낙태를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의사의 손을 빌어 뱃속에 있는 생명인 아기를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죽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도 못하고 비명 소리 한번 내보지 못한 채 무수히 많은 태아들이 무참히 살인되고 있는 일은, 선진국 후진국 가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생명을 죽이는 행위는 누구에게도 허락된 일이 아닙니다. 태아의 생명은 법으로도 보호받도록 명시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헌법에서는 태아의 생명을 보장하고 있지만, 모자보건법이라는 다른 법을 통해 이러한 생명을 죽일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비록 여러 조건들이 붙어 있지만, 이 조건들 자체에도 문제가 있으며, 더 큰 문제는 이런 조건에 해당되지 않는 경우에도 다시 말해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은 경우에도, 아무런 가책 없이 생명을 죽이는 일을 의사와 산모들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회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사람의 생명에 대한 존중 사상이 희미해졌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명보다도 돈을 더 소중히 여기고, 자신의 생활을 위해 뱃속의 아이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생명 경시 풍조야말로 오늘날 사회를 갈수록 삭막하고 흉악하도록 만드는 원인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살인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를 잊지 마시고, 낙태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 악한 세상의 풍조를 절대로 본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1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고의가 없이 사람을 죽인 경우나,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에 의해 사람을 죽인 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으로 도망함으로 사형을 당하지 않고 생명을 보존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당시 고대 근동 사회에서 죽임을 당한 자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 자신의 친족을 죽인 사람에게 피의 복수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였으므로, 그로 인해 살인이 살인을 낳은 피의 악순환이 계속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선언에 따라 고의적 살인자가 아닌 실수나 정당방위의 차원에서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을 위해, 처음에는 거룩한 제단이 있는 성소로 지정하셨고 후일에는 가나안 땅에 여섯 곳의 도피성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긴급조치를 통해 무고한 생명이 살해되는 것을 방지하셨을 뿐 아니라, 연이은 복수로 인하여 발생하게 될 살인의 악순환을 예방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이 도피성 제도는 장차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즉 이 땅의 모든 죄인들은 자신들의 죄 값으로 치러야 할 영원한 죽음을 피하고, 자신들의 생명을 본존하기 위해 하나님의 선택하고 지정하신 한 곳으로 신속하게 달려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곳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입니다.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품을 떠나서 그 어디에서도 생명의 안전, 영생의 보장을 받을 수 없습니다. 행 4: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2. 부모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15절에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찌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부모를 치는 죄를 그토록 중한 죄로 보시고, 그러한 죄를 범한 자를 사형이라는 극단적인 형벌에 처하게 하셨을까요? 결론적으로 부모를 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부인하는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명백한 도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부모는 단순히 인간적인 가족 관계에서의 어른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즉 하나님을 대신해서 가정과 자식을 다스리는 존재로서의 부모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권위를 지녔고, 부모의 명령은 자식들에게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런 부모를 때리는 것은 자식으로 하여금 부모에게 순종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으로, 부모가 대변하고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에 대해 도전하는 악행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부모를 때리는 것은 직접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살인죄에 못지않은 큰 죄로 사형이라는 극형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부모를 때리는 패륜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세상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자녀들이 부모의 권위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고, 부모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며 자신의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자초하는 악한 범죄 행위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부모님을 대할 때 항상 공경스런 마음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부모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하고, 그의 권위 앞에서 겸손한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부모들에게 자녀를 양육하고 훈육하며 다스릴 권한을 부여하셨고, 그 권위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일을 통해, 위에 계신 하늘 아버지께 복종하고 순종하는 삶을 배우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에 대한 효도는 하나님께 대한 공경과 연결되는 규례로서, 인간 도덕의 출발점인 동시에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사람을 유괴한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16절에 “사람을 후린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찌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사람을 후렸다는 것’은 사람을 노예로 부리거나 팔아먹을 목적으로 유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처럼 유괴를 사형에 해당하는 큰 죄로 규정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유괴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존귀한 자로 만들어 놓은 인간을, 짐승이나 물건과 같은 비천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유괴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를 이용해 돈을 벌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유괴하는 자에게 사람은 단지 돈을 받고 팔고 사는 짐승이나 물건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을 유괴하는 행위는 인간을 존귀한 존재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지를 짓밟는 신성 모독죄와 같은 범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을 유괴해서 팔아먹는 죄악을 범하는 자가 어찌 극형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유괴범의 극형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사회에 물질주의와 홍금만능주의 사상이 팽배하면서, 사람을 유괴하고 매매하는 일들이 도처에서 수없이 자행되어지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를 유괴해서 몸값을 받으려는 유괴범들과, 여자들을 납치해서 윤락가에 팔아넘겨 돈을 버는 인신 매매 범들, 남자들을 납치해서 견디기 힘든 육체노동 현장에 팔아먹는 자들을 매스컴을 통해서 우리는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로서 사회적 형벌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멸망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고 존귀한 존재입니다. 사람에게는 아무리 비천한 자라 할지라도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귀한 형상이 있고 존귀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존재로 대해야 합니다. 그럴 때 자신도 가장 가치 있고 존귀한 자가 될 것입니다.
4.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17절에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찌니라.”고 하셨습니다. 부모를 때리는 자를 죽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또 다시 부모를 저주하는 자를 죽이라고 명하심은, 부모에 대한 죄가 얼마나 큰 죄인지를 잘 가르쳐 줍니다. 특별히 본문은 말로써 부모에게 지은 죄가 직접 때리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커다란 죄악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부모를 저주하는 것은 부모를 욕하거나 비난하고 멸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낳아 주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보답은 해 드리지 못할망정, 욕하고 비난하고 멸시하는 것은 배은망덕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부모의 권위는 자식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권위를 대신한다는 점에서 곧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배신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죽음의 형벌을 받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부모를 저주한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처벌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자들은 사회적으로는 단지 비난과 멸시를 받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준엄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부모를 멸시하는 자가 잘 되는 것 보셨습니까? 혹 그가 비록 이 세상에서는 준엄한 심판을 받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최후 심판에 있어서는 반드시 준엄한 형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로서 항상 부모님의 은혜를 기억하여 보답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는 부모님의 은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은 항상 육신의 부모님과 영의 부모님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여,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그 은혜에 감사하며, 그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고 더 큰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회생활을 할 때 지켜야 할 시민법으로서 사형에 해당되는 네 가지 죄악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2)부모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3)사람을 유괴한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4)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사형제도 폐지론에 대한 목소리가 점점 커져 가고 있습니다. 사형 제도는 선진화된 사회 속에서는 있을 수 없는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제도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기독교는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합니까?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사형 제도를 하나님께서 타락한 세상에 주신 질서의 하나로 여겨왔습니다. 기독교회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전통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일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형 문제에 대해 견해가 바뀌면서 요즈음 기독교회 안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사형 제도의 폐지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사랑이 더 많은 사람들인가 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또 다른 사실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20여명의 생명을 무참히 살해했던 유영철과 같은 흉악범의 생명이나 인권만 중요하고, 그들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이나 가족들의 인권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까? 만일 그러한 흉악범의 손에 자신들의 사랑하는 처자식이 무참히 살해당해도 그들은 계속 살인범의 생명의 존엄성이니 인권 존중이니 해서 사형을 반대할까요?
진실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사람의 생명을 어느 누구보다 존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살인한 자들을 향하여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 9:6)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범이 되고, 많은 사람을 죽이면 영웅이 되는 것이 타락한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내 생명이 중요하면 다른 사람의 생명도 똑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을 경시하고 함부로 살상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참으로 단호히 응징하여 살인죄가 성행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 역사상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자들은 영웅의 반열에서 반드시 삭제를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을 무고하게 죽인 권력자들이나 통치자들 역시 인류의 양심 법정 도덕 법정에서 반드시 정죄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또 다른 점에서 우리는 오늘 말씀에 대해 적용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음주 운전 같은 것은 간접적인 살인죄나 마찬가지인 줄 알아서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러한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불량식품이나 인체에 치명적인 농수산물을 재배 또는 판매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태아 살해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시간 우리는 살인과 관련해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옛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대하여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우리 모두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육체적인 살인은 물론 형제에 대하여 노하고 미워하는 마음의 살인도 하지 않고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생명을 대하는 법
출 21:12-36 / 임덕순 목사
어떤 음식은 맛으로 먹고 어떤 음식은 몸에 좋으니까 먹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드실 음식은 화려한 맛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무서운 내용입니다. 그러나 철분이 가득하여 영혼에 좋은 음식입니다.
요즘 우리사회에 나타나는 무서운 현상 가운데 하나는 사람의 생명을 아주 무가치하게 생각하고 너무나 쉽게 생명을 해친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붙들린 한 청년은 20명이 넘는 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잘라서 버렸습니다. 그가 죽인 사람은 대부분 부자 노인이든지, 전화를 받고 사람을 만나는 여자라든지, 길에서 좋지 않은 물건을 파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이런 사람들은 사회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악이 되니, 그런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잘못 배운 결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는 사형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합니다. 사형제도 폐지론자들은 사형수의 생명은 귀히 여기는 척 하면서 희생당한 사람의 생명은 경시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우리사회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십니까? 요즘 아이들은 잔혹동화에 빠져 있답니다. 잔혹동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백설 공주는 숲 속을 헤매다가 무척이나 아름다운 집을 발견했습니다. 그 집의 주인은 일곱 난쟁이들이었습니다. 그 집이 탐이 난 백설 공주는 도끼로 일곱 난쟁이들을 토막 내서 죽였습니다.’ ‘나는 내 옷 속에 있던 도끼를 찾아 도망을 못 가게 오빠 헨젤과 엄마의 다리를 싹둑...” 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잔혹동화라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섬짓하지 않습니까? 동화의 아름다운 이야기와 ‘해피엔딩’이 유혈이 낭자한 무시무시한 결말로 탈바꿈했습니다.
어떤 엄마는 중학교 1학년인 딸이 친구에게 빌렸다는 ‘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라는 책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신데렐라, 백설공주 등 널리 알려진 동화가 사실은 잔혹하고 끔찍하다며, 이들의 원전을 소개한 일본 작가의 책인데, 근친상간과 잔인한 형벌을 담은 줄거리는 엽기의 극치랍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학교에서 그런 책을 돌려보는 게 유행이고, 돌려 읽기에만 만족하지 않고 더 자극적인 ‘나만의 잔혹동화’를 경쟁적으로 만들어 인터넷에 올린답니다. 네이버, 다음 등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는 잔혹동화를 만들어 올리는 동호회가 수십 개에 달하고, 창작 게시물은 2000개가 넘는답니다.
인격이 한창 형성되는 시기에 잘못된 자극을 추구하다 보면 성인이 된 후에 공격적 성향을 지니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것을 즐기면서 자란 아이들이 자라면 사람 생명을 얼마나 하찮게 여길지 두렵습니다.
고의적인 살인과 과실치사에 대하여.
지난 주일에는 종을 부리는 자세에 대하여 말씀하신 내용을 배웠는데 오늘 본문은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한 죄에 대하여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여섯째 계명에서 살인하지 말라고 엄명하신 바 있습니다.
그러나 살인이라는 것이 워낙 다양한 경우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좀 더 자세하게 예를 들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엄마가 집을 어질지 말라고 말해도 아이들은 어지는 것 같이,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음에도 살인자는 생깁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여 살인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구체적인 방안이 없으면 혼동에 빠지므로 하나님은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경우별로 어떻게 대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사람이 그 이웃을 짐짓 모살하였으면 너는 그를 내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 (12, 14)
하나님은 절대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지 말라고 엄명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 외에는 사람의 생명을 누구도 빼앗을 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사형 제도를 금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형제도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독재자가 자기의 정적에게 누명을 씌워서 죽이는데 사형 제도를 악용하는 것을 시정되어야 하지만 사형제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기독신문이 본 교단 목사님들 100명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사형 제도를 존속하는데 25명이 찬성하고 56명이 반대했으며, 19명이 모르겠다고 답했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뒤로 제쳐놓고 자기 의견을 말하면 안 됩니다.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인 살인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살인자가 혹시 성전에 들어가서 제단 뿔을 잡고 있을지라도 끌어내어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위기에 처한 사람이 성전으로 들어가서 제단 뿔을 잡으면 살려주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인 사람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성전에 들어가서 제단 뿔을 붙잡는다 할지라도 용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라는 말은 어떤 경우에도 살인자를 용서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원조는 노아 홍수 후에 하나님이 노아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사람이 왜 남을 죽여서는 안 되는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모든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셨는데, 하나님이 당신을 닮은 특별한 존재로 지으셨기에 사람의 생명은 특별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과 교류하는 영혼과 언어가 있고, 선악을 분별하는 도덕과 양심이 있으며, 세상과 자신을 이해하는 지성이 있고, 도구를 만들고 자연을 다스리는 통치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짐승에게는 없는 것으로 하나님이 가지신 능력들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이고, 거의 하나님만큼 존귀한 존재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데, 내게 주어진 생명은 길이가 얼마나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젊어서 죽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나이가 많아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인간은 하나님이 생명을 거두시는 날까지 이 세상에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목숨이라도 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생명은 자기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귀중한 남의 생명을 해칩니다. 가장 빈번한 이유가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남을 죽이고 그가 가진 것을 빼앗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한 때문에 남을 죽이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남을 죽이면 자기 일생은 완전히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순간의 욕망이나 분노를 참지 못해서 한평생을 망칩니다. 그런 일이 없게 하려고 하나님이 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살인을 했지만 살 수 있는 예외규정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은 전혀 살인할 의사가 없었는데 사고로 사람을 죽게 만든 경우가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계획함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 손에 붙임이면 내가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니라.”(13)
사람이 밭에 있는 돌을 주워서 버렸는데 마침 그 옆에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입니다. 옛날에는 나무를 벨 때 도끼가 제일 좋은 도구였습니다. 도끼로 나무를 찍다가 도끼날이 자루에서 빠질 수도 있습니다. 빠진 날이 날아가서, 맞은편에서 나무를 베고 있던 친구의 머리를 때려서 그 친구가 죽는 경우가 발생했다면 이런 경우는 도끼 자루를 점검하지 아니한 잘못은 있지만 계획적인 살인은 아닙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과실치사가 됩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의 가족이 볼 때는 너무 억울하고 분합니다. 그래서 가해자를 죽이려고 쫓아갑니다. 그럴 경우에 과실치사를 저지른 사람이 도망가서 피할 수 있는 장소와 제도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도피성입니다(민35:). 도피성은 요단강 동편과 서편에 각기 세 군데씩 여섯 군데에 있었는데, 누구든지 어디서든지 신속히 피난할 수 있기 위해 여러군데 배치해두셨습니다. 과실치사를 한 사람이 도피성으로 도망하면 그를 철저히 보호해 주어야 했습니다. 이 도피성은 언제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인간의 피난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만약 그 사람이 그리로 피하지 않고 다른 데로 갔든지, 혹은 그리로 피했다가도 거기서 나와 돌아다니면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외에는 죄인의 피난처가 없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 사람은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 성에서 나오지 말아야 했고 대제사장이 죽은 뒤에만 나와서 자기 생활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으면 이전의 모든 죄가 사면되게 하셨는데, 이것은 인류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 대신으로 죽으시면, 인류를 죄에서 완전히 사해 주실 것을 예표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책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과실로” 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손에 넘긴 것이면” 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고의가 아니라 실수로 사람이 죽는 일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의 가족은 그 사람을 원수로 생각하고 보복하려고 덤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저 사람의 손을 통해서 죽게 하셨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그 충격과 슬픔은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이럴 때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부정하게 되고 가해자를 찾아가서 보복하고 싶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이럴 때 고의가 아니라면 하나님이 데려가셨다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내 눈앞에는 가족이 없어졌지만 하나님이 데려가셨다. 내 가족은 지금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면 가족도 잃고 신앙도 잃고 가해자에게 보복을 해서 자기의 앞날도 잃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지금은 죄로 인해서 우리 영혼이 비참할 정도로 파괴되었고, 선한 구석이 별로 남아 있지 않지만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가를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아무리 분노가 치미는 상황을 만나도 절대로 감정으로 남의 생명을 해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생명의 소중성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 경우의 상해죄에 관하여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여러 경우를 예를 들어서 설명해 주셨는데
첫째는, 자기 부모를 치는 경우입니다.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15) 아주 단호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부모를 공경해야 할 특별한 책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모라는 그릇에 담아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자식이 자기 부모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은 하나님을 향해 폭력을 휘두른 것이 됩니다. 사람이 제 부모를 쳤다면 그 부모가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살인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제 부모를 치는 사람, 하나님께 대하여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남의 생명을 아끼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살려두면 큰일 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사형에 처하라고 하십니다.
부모는 아버지는 가정의 머리이고,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이며, 모든 재산과 권위의 제공자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나를 만든 출산자요 양육자입니다. 그런 부모를 치는 자는 사람 되기를 이미 포기한자며 앞으로 어떤 악을 행할지 모르니 살려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사회에서도 존속을 치는 경우는 더 엄하게 다스리지만, 하나님의 법은 훨씬 더 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7절에는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지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부모를 구타하는 것만 아니라, 부모를 저주하는 것도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자기 부모에게는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장인 장모나 시부모에게 욕이나 저주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모를 우습게 알기를 넘어서 저주한다는 것은 치는 것보다 더한 죄악입니다. 이런 자식을 살려두면 하나님의 공의와 세상의 화평이 깨집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부모에게 어여삐 보여서 부모의 칭찬과 축복을 받으며 살아가야합니다. 노아는 아들 함에게 저주하여 그 후손만대가 저주아래 살고 있고, 유다는 아버지 야곱에게 복을 받아서 홀이 영원히 그를 떠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통로입니다. 제 부모에게 사랑을 받는 자식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인신매매나 유괴범에 관한 법입니다.
16절에는 “사람을 납치한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사람을 유괴하고 납치하는 일은 남의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하려는 태도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미끼로 해서 자기 이익을 챙기는 일은, 용서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을 유괴하고 여자를 납치하는 일들이 빈발하는데, 이런 짓을 하는 사람은 모두 사형에 처하고 불쌍히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목숨이 중요하면 남의 목숨도 중요한 줄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는 몇 푼을 얻겠다고 남의 생명을 빼앗는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다. 인신매매 하는 사람을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죄를 용서하면 그 사회가 망가지기 때문에 근절시키라는 것입니다. 흑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잡혀 미국에 노예로 팔렸습니다. 그 결과로 미국이 얼마나 큰 갈등을 겪습니까? 죄는 끊지 않으면 화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노예의 생명에 관한 법입니다.
“사람이 매로 그 남종이나 여종을 쳐서 당장에 죽으면 반드시 형벌을 받으려니와 그가 하루나 이틀을 연명하면 형벌을 면하리니 그는 상전의 재산임이라.”(20-21)
주인이 종을 때려서 즉시 죽은 경우는 살인죄가 되므로 주인이 반드시 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맞은 종이 며칠 앓다가 일어나면 주인은 형벌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종은 주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일에 게으르거나 신분을 망각한 종이 주인에게 벌 받는 것은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종을 때려서 그 몸을 상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약 주인이 때려서 종의 한 눈을 실명케 하거나, 이 한 개를 빠지게 하였을 때, 주인은 그 잘못에 대한 배상으로 그 종을 놓아서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주인은 그 종의 노동력을 산 것이지 그 생명을 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은 영구적으로 확정된 신분이 아니라 일시적인 신분이고, 종의 생명도 똑 같이 존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방인의 법은 달랐습니다. 이방인들은 종의 생명도 주인의 것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달리 말씀하십니다. 생명은 노예의 주인은 종의 노동력의 주인일 뿐이므로 종의 생명을 죽이는 죄는 용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종을 통하여 노동력을 제공받는 대신에 종의 신체와 신변에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 잘 믿는다는 사람들이 기업을 한다고 하면서 자기만 생각하고 종업원들을 착취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업을 통해 얻는 이익으로 가장 먼저 자기 종업원을 돌보는 사람이어야 진짜 신자입니다.
넷째는, 상해에 관한 배상법입니다.(18-32)
1)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상대방을 상하게 했을 경우(18-19). 싸우다가 한명이 돌이나 주먹으로 맞았는데 죽지 않고 며칠 앓다가 살아난다면, 친자가 다친 자를 치료시키고 배상해 주어야 합니다. 이 법은 오늘날의 배상법의 근거가 됩니다. 여기서는 싸우다가 다친 것만 아니라 일 하다가 다친 경우도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몸이나 그 무엇이든지 손상을 입혔을 경우에 그것을 배상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22-25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하게 한 경우인데, 아직 태어나지 아니한 태아도 하나님은 사람으로 취급하고 계십니다. 태아를 상하게 했을 때는 아이 아버지의 청구대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야 합니다. 고의로 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생명의 피해를 입었으므로 아버지의 청구대로 배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피해자가 신앙과 양심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에 따라서 청구액이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에 재판장이 기준을 두어 판결하게 하고 재판장의 판결대로 배상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낙태 말고도 다른 해가 있다면, 그것은 합당하게 배상해야 합니다.
그것을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 지니라.”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는 무슨 법인가요? 이것은 보복이나 앙갚음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정당하게 대가를 치르라는 것입니다. 남의 생명을 죽였으면 자신도 죽어야 하고, 남에게 손해를 끼쳤으면 정당하게 배상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법의 정신은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것이며, 누구의 생명이라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로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생활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본인들의 자전거 : But 개인뿐이고)
우리가 생각 없이 행동하고,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남을 해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도 남에게 피해를 끼치면 해를 받을 것을 생각하고 서로 자기 책임 다하고 주의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두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는데,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행동하라는 말씀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 아니라 남을 돕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거룩한 의무입니다. 그럼에도 부지중에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당연히 정당한 배상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정당한 보상을 받고 보호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언제나 우리를 위한 법입니다. 하나님이 법을 주시지 않았다면 무법천지가 되었을 것이고, 오늘도 정부가 없다면, 무법천지에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국가가 제정한 법도 하나님이 주신 법으로 받아 지켜야 합니다. 국법이 왜 하나님이 주신 것인가는 다음 주일에 말씀드리겠습니다.
2) 가축으로 인해 끼친 손해에 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28- 32).
예를 들어 어떤 집의 소가 지나가는 사람을 받아서 죽게 했으면 이것은 사고입니다. 그때 사람을 죽인 소는 반드시 죽여야 하고, 그 고기는 먹지 말아야 하며, 그때 소의 임자는 벌을 면할 수가 있습니다.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부터 소가 사람을 받는 습관이 있어서 놀랜 사람들이 주인에게 여러 차례 경고를 했는데도, 주인이 소를 단속하지 않아서 사람을 받아 죽였을 경우, 소와 주인을 다 함께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책임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나운 개를 키우는 사람은 이 법을 주의해야 합니다. 소 주인이 죽었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 남은 가족이 배상을 또 해야 합니다. 책임을 맡은 사람이 그 책임을 감당하지 않으면 가혹하게 추궁을 당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는 집에서 기르는 짐승에 대하여 말씀했지만, 사실 우리 안에는 더 무서운 짐승이 한 마리씩 들어있습니다. 평소에는 얌전한 것 같은데 일단 깨어나면, 이 짐승은 아무나 들이받고 아무나 해치고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이 맹수는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이요 혈기요 정욕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무엇에 약한지 압니다. 이성에 약한 사람이 있고 돈에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혈기에 약한 사람이 있고 말 때문에 문제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다스려 짐승처럼 남을 해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또한 만일 내 소가 남의 종을 받아 죽였을 경우에는 그 종의 주인에게 은 30세겔을 내야했습니다. 종의 몸값은 은 30세겔이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계시가 숨어 있는데, 우리 예수님이 가롯 유다에게 은 30에 팔리셨습니다. 구약시대에 죄인이 사함을 받는 방법은, 죄인이 자기의 죄를 뉘우치며 자기 대신에 죽을 제물을 사서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이 짐승을 잡아 제단에 드림으로 속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대신 팔려가서 십자가의 제단에서 희생하심으로 우리 모든 인류의 죄 값을 해결해 주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히8:-10). 우리가 받은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귀중한 생명을 주셨고, 그에게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시면서 그 자유에는 책임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는 책임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책임이 있고 어머니는 어머니의 책임이 있습니다. 사장은 사장으로서의 책임이 있고 경비는 경비로서의 책임이 있습니다. 모두가 자기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해서 남을 보호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만드신 창조주이시고, 또한 우리를 멸망에서 구원하신 구원자이십니다. 우리 생명은 이중으로 은혜를 입었습니다. 생명을 선물 받았을 뿐 아니라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답게, 남의 생명과 소유를 보호해 주면서 세상에 소금과 빛으로 만민에게 복을 나눠주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으로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폭력에 관한 규례
출애굽기 21:12-27 / 손재호 목사
오늘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언약법전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종에 관한 규례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오늘 말씀은 폭력에 관한 규례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12-17절에서는 사형에 관한 규례를 말씀하고 있고, 18-27절은 신체적 피해에 관한 규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 가지 범죄자들 곧 살인과 부모 폭행과 사람을 유괴한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합니다(12-17). 먼저, 살인 자에 대한 규례를 보겠습니다. 12-14절을 보면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만일 사람이 계획함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 손에 붙임이면 내가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며, 사람이 그 이웃을 짐짓 모살하였으면 너는 그를 내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찌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먼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합니다. 십계명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말씀하시는 것은 살인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큰 구원을 체험한 자들도 살해의지가 다 들어 있기에 이러한 금지명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생명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모든 살아있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말합니다. 그 속에 자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왜 살인하지 말라고 하는가 물어보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살인하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면서 진멸전쟁을 하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까? 그래서 초대 기독교사에 보면 마르시온과 같은 자도 나오는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바울의 후계자라고 하면서 구약의 하나님은 폭력과 보복의 신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말하는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하나님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다르다고 합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구약을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모든 인간이 정말 하나님의 형상이라서 살인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인간이 처음 창조될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범죄 이후에도 과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27절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됩니다. 범죄 한 이들이 과연 하나님의 형상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간단하게 영어로 보면 이미지입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이미지를 담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미지가 범죄 이후에도 계속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무엇입니까?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고 한 유혹을 받아서 선악과를 따 먹은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이미지가 아니라 아예 하나님이 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범죄 이후에도 과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5:1-3절을 보면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아담이 일백 삼십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는데 3절에 보면 아담이 셋을 낳고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자기 모양 곧 아담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아담은 범죄 이후에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니 아담의 후손은 흙에 속한 형상입니다. 아담이라는 말 자체도 흙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숨결이 들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을 흙으로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생령이 되었다고 했습니다(창 2:7). 이렇게 ‘하나님의 생기’를 ‘하나님의 숨결’, ‘하나님의 영’이라고 번역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떠나버리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냥 흙입니다. 하나님의 입김이 사람과 함께 할 수가 없어서 떠나면 육신이 되는데 즉 짐승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말씀이 창세기 9:6절에 나옵니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고 했습니다(창 9:6). 범죄 한 아담의 후손이며, 노아 홍수 이후인데도 피를 흘리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지었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범죄 이후에도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지 우리는 노아 언약과 연결해서 봐야 합니다. 노아 언약은 정결한 짐승의 희생제물을 받으시고 언약을 주십니다(창 8장).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희생의 제물로 인한 은혜의 언약 안에 있어야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 이후로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면 구약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까?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의 그림자만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은혜의 언약 안에서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을 보여주어야 하기에 이스라엘 안에서는 살인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은혜의 언약을 깨는 자들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들은 가차 없이 사형에 처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출애굽도 하고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게 됩니다. 그런데 같은 동료를 쳐 죽인다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사형에 처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절 말씀을 다시 보면 “만일 사람이 계획함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 손에 붙임이면 내가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고의로 죽인 것이 아니라 과실로 죽인 경우가 있습니다. 곧 하나님이 사람을 그 손에 붙일 수 있습니다. 이 경우는 살인죄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 가해자는 앞으로 하나님이 지명하실 도피성으로 도피하라고 합니다. 신명기 19:1-10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열국을 멸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땅을 네게 주시므로 네가 필경 그것을 얻고 그들의 각 성읍과 각 가옥에 거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 가운데서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시는 땅의 전체를 삼구로 분하여 그 도로를 닦고 무릇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케 하라. 살인자가 그리로 도피하여 살만한 경위는 이러하니. 곧 누구든지 본래 혐원이 없이 부지중에 그 이웃을 죽인 일, 가령 사람이 그 이웃과 함께 벌목하러 삼림에 들어가서 손에 도끼를 들고 벌목하려고 찍을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그 이웃을 맞춰 그로 죽게함 같은 것이라. 이런 사람은 그 성읍중 하나로 도피하여 생명을 보존할 것이니라. 그 사람이 그에게 본래 혐원이 없으니 죽이기에 합당치 아니하나 두렵건대 보수자의 마음이 뜨거워서 살인자를 따르는데 그 가는 길이 멀면 그를 따라 미쳐서 죽일까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네게 명하기를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라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대로 네 지경을 넓혀 네 열조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신 땅을 다 네게 주실 때 또 네가 나의 오늘날 네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항상 그 길로 행할 때에는 이 셋 외에 세 성읍을 더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림이 없게 하라. 이같이 하면 그 피가 네게로 돌아가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참조. 신 4:41-43). 도피성에서 재판을 받아서 고의가 아님이 입증이 되면 그 성의 제사장이 죽을 때 까지 그는 그 성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제사장이 죽으면 나갈 수가 있습니다. 고의가 아닌데 죽임 당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이 됩니다. 그러나 14절을 다시 보면 고의로 살해한 경우는 제단의 뿔을 잡은 자라도 끌어내어 죽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그 이웃을 짐짓 모살하였으면 너는 그를 내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찌니라”(14).
둘째는, 부모를 폭행한 자에 대한 규례입니다. 15절에 보면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17절에도 보면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도 반드시 죽이라”고 합니다. 왜 이것이 이처럼 엄중한 죄가 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동양의 효 사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부모는 하나님의 언약의 전달자 입니다. 신명기 6:1-9절을 보면 “이는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하신바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할 것이니.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케 하기 위한 것이라.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의 수효가 심히 번성하리라.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찌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부모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자녀와 손자들에게 평생에 여호와를 섬기도록 곧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부지런히 말씀을 가르치고 강론하는 것입니다. 집에 있을 때도, 길을 갈 때도, 누울 때도, 일어날 때도, 주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을 전하는 부모를 치거나 저주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치고 저주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후리는 자에 대한 규례입니다. 16절에 보면 “사람을 후린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찌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후린 자는 사람을 납치한 자를 말합니다. 사람을 납치한 자는 그 사람을 팔았든지 아니면 자기의 수하에 두었든지 그는 반드시 죽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을 유괴하거나 납치하여 협박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특히 사람을 납치하여 무인도에 팔아먹는 일이 우리 사회에 이슈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납치하여 팔아먹고 자기수하에 두는 이런 일들이 왜 이스라엘이라는 언약공동체에 일어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라고 명하셨습니다. 곧 약자들을 보호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안식일도 안식년도 희년도 주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매 삼년마다 평소의 십일조 외에 십일조를 더 하여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돕게 하셨습니다(신 14:28-29). 그런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긍휼이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인신매매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 땅에서도 이런 범죄자들이 나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자신의 몸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칩니까? 아니면 그저 공부 잘하고 세상에서 성공하기만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후자라면 하나님의 긍휼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또한 사형에 해당하는 공범자들인 것입니다.
18-19절을 보면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하나가 돌이나 주먹으로 그 적수를 쳤으나 그가 죽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가 지팡이를 짚고 기동하면 그를 친 자가 형벌은 면하되 기간 손해를 배상하고 그로 전치되게 할찌니라”고 했습니다. 유인들 간에 싸움이 일어나서 상대방을 돌이나 주먹으로 쳤는데 그가 죽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가 지팡이를 잡고 일어나면 그를 친자가 형벌은 면하되 그 기간의 손해를 배상하고 그가 완치하도록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고의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22절에 보면 사람이 싸우는 중에 임신한 여인을 쳐서 낙태가 일어났다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 벌금을 내게 합니다.
20-21절을 보면 “사람이 매로 그 남종이나 여종을 쳐서 당장에 죽으면 반드시 형벌을 받으려니와 그가 일일이나 이일을 연명하면 형벌을 면하리니. 그는 상전의 금전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남종과 여종에 대한 규례입니다. 이 당시에 노예는 주인의 재산입니다. 임의로 처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이고 살리는 것도 별 제제가 없이 진행되는 그런 시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종에게 조차 주인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합니다. 주인이 종을 때리다가 당장에 죽으면 반드시 형벌을 받게 합니다. 주인이 종을 교화하기 위하여 때릴 수는 있지만 죽일 의도를 가지고 때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6-27절을 보면 주인이 종을 때리다가 신체상의 상해가 나면 그 대가로 종에게 자유를 주게 합니다. “사람이 그 남종의 한 눈이나 여종의 한 눈을 쳐서 상하게 하면 그 눈 대신에 그를 놓을 것이며, 그 남종의 한 이나 여종의 한 이를 쳐서 빠뜨리면 그 이 대신에 그를 놓을찌니라”(26-27). 아주 파격적인 종에 대한 예우입니다. 이런 법을 주신 것도 이스라엘로 애굽에 종이었다가 하나님의 긍휼로 나온 것임을 기억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23-25절을 보면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찌니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은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으로 잘 알려져 있는 본문입니다. ‘생명은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린 것으로’라는 이 말씀을 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은 과도한 복수를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되로 받으면 말로 갚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과도한 복수를 금하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의 악함을 인하여 주어진 법입니다. 마치 이혼증서를 주고 이혼하라고 한 것도 인간의 악함을 인하여 주어졌듯이 인간의 복수심이 얼마나 끝이 없는지를 아시기에 이런 법을 주신 것입니다. 이런 법이 없다면 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에서도 힘 있는 자는 과도한 복수를 할 것입니다. 창세기 4:23-24절을 보면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말합니다. 자신은 상처를 입었는데 자기에게 상처를 입힌 자를 죽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가인을 위하여 벌이 칠 배인데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의 벌을 받아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인이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할 것이니 보호를 요청합니다. 하나님께서 표를 주시면서 가인을 죽이는 자는 그 벌을 칠 배나 더하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죄인인 다른 사람들이 가인을 죽일 자격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런데 가인의 후손인 라멕은 하나님의 법도 아닌데 스스로 법을 만들어 자기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상처를 입었다고 소년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가해를 하는 자는 벌을 칠십칠 배를 받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 쫓겨난 인생의 자기 보호 본능이며, 다른 사람은 다 죽이더라도 자기는 홀로 살아남으려고 하는 인간의 죄악된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동태복수법을 율법으로 주신 것은 인간의 악함으로 인하여 과도하게 복수를 하려는 그 복수심을 제어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율법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해석하셨는가 하는 것을 보고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5:38-42절을 보면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내용은 율법에 명시된 동태복수법조차 무력화 시켜버리시고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합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명시적인 율법의 조항도 너희가 그렇게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해석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요 18:36). 다른 세상이 준비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나라를 예수님이 선포하시고 또 그 나라를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모든 복수를 끊어버리시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다 받아내시는 자리가 바로 십자가 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십자가로 다 이루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의 산상수훈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에게 이런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