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겸 공화당 대선 후보가 '자녀 없는 고양이 여인' 발언으로 곤경에 처해 있는 러닝 메이트 부통령 후보 JD 밴스 상원의원(오하이오주)을 29일(현지시간) 두둔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날 폭스 뉴스 인터뷰에 나서 밴스 의원에 대해 "그가 말한 것은 가족을 좋아한다는 것"이라면서 "그는 아주 흥미로운 가정 환경에서 자라났고, 가족은 좋은 것이라고 느낀다. 그리고 난 그렇게 말하는 것에 어떤 잘못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아울러 자녀가 없는 성인도 부모 만큼 좋은 사람들이라고 언급해 파장을 최소화하려는 의지를 드러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왜 "흥미로운 가정 환경"이라고 말했는지 넷플릭스에 올라온 론 하워드 감독의 영화 '힐빌리의 노래'(Hillbilly elegy, 2020)를 보면 알 수 있다. 밴스의 자서전 '힐빌리의 노래 - 위기에 처한 가족과 문화에 대한 회고록'(2016)을 영화로 만들었는데 밴스의 할머니와 어머니를 연기한 글렌 클로즈와 에이미 애덤스의 놀라운 연기, 나중에 엔딩 크레딧으로 소개되는데 실제 인물과의 완벽한 싱크로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게이브리얼 배소도 밴스의 청년 시절을 완벽하게 소화했는데 워낙 두 여배우의 출중한 연기력에 가려진 느낌이다.
힐빌리는 애팔래치아 산맥의 깡촌 마을에 살아 햇볕에 목이 타 시뻘건 촌뜨기들을 낮잡아부르는 말로, 밴스네는 켄터키주에서 살다가 공장과 광산이 많은 오하이오주 애팔라치아 산지의 미들타운으로 옮겨온 가족이다. 엄청난 대가족이 우글우글 모여 산다. 1980년대부터 국제경쟁력이 떨어지는 미국 공장들이 문을 닫고 주민들이 일자리를 잃어 가난에 찌들고 실직한 남성들이 술과 약물에 중독되고 가정이 파탄에 이르는 상황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이른바 러스트 벨트(Rust Belt)에 사는 가난한 백인 노동자 집안의 전형이다. 마침 밴스의 전기가 발간됐던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나선 트럼프가 중산층에서 빈곤층으로 몰락한 중동부지역 백인 유권자들을 집중 공략함에 따라 이 책도 큰 관심을 모았다. 일간 뉴욕타임스와 아마존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등 전국적인 조명을 받아 영화화하기에 이른 것이다. 넷플릭스가 상당한 자금을 지원해 영화 작업이 속도를 냈다.
책이나 신문방송으로만 겪던 러스트 벨트 사람들이 어떤 좌절과 낙담 속에 트럼프에 열광하게 됐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머리 좋은 손자녀석 하나라도 제대로 공부시켜 사람답게 살도록 도우려는 강인한 할머니에 대한 추억, 전직 간호사로 신산한 삶을 헤쳐나가려다 약물에 중독돼 재활치료를 받아야 하는 어머니와의 용서와 화해, 늘 남자친구 곁에서 애정어린 조언과 응원으로 힘이 돼주는 인도인 로스쿨 동급생이자 현재의 부인 우샤와의 사랑이 담담히 그려진다.
영화는 '흙수저' 주인공이 명문 예일대 로스쿨에 다니면서 대형 로펌에 인턴(보조변호사)으로 취업하기 위해 면접을 보러가야 하는데 어머니를 재활시설에 입소시켜야 한다는 누나 의 연락을 받고 고향 집에 돌아갔다가 동부로 돌아와 면접 보는 과정을 씨줄로, 과거 할머니와 어머니, 가족들과 있었던 일들이 날줄로 엮인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얼빠진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공부를 등한히 하는 밴스를 위해 할머니가 식사를 준비하는 장면이다. 마침 가난한 가정에 음식을 배달하는 남자가 초인종을 누른다. 할머니는 온갖 '죽는' 소리를 해대며 어떻게든 그 남자에게서 음식 한 가지, 과자 한 봉지라도 받아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렇게 고기 조각을 잘라 좀 더 큰 것을 손자 접시에 담아주고 할머니는 어렵사리 뜯어낸 과자 봉지를 손자에게 휙 던져준다. 그걸로라도 배를 채우라는 듯, 더 어릴 적 공부에 1도 도움이 안 되는 가정환경에서도 어렵사리 대수학 문제를 풀곤 했던 소년은 할머니가 자신을 위해 얼마나 희생하고 열심인지 깨닫고 마음을 잡는다.
우리는 2010년대에야 볼 수 있었던 독거노인 음식배달 서비스 같은 것이 1990년대 말에 이미 미국의 중동부 빈곤층 가정에 시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2011년 11월 넷플릭스에 처음 공개됐을 때 우리 관객들은 '미국에 이런 구석이 있는지 몰랐다'거나 '우리 문화와 상당한 거리감' 때문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불평이 적지 않았다. 해서 주로 트럼프 승리의 비결을 궁금해하는 이들의 정치사회적 탐구 목적으로 이 영화를 관람한 느낌이 있다.
2024년 미국 대선이 100일 앞으로 다가온 지금, 트럼프 대통령이나 공화당 캠프가 밴스를 부통령으로 지목한 것이 잘못됐다고 느끼며 후보 교체를 하는 것이 적절한지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흘러 나온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대선 후보에서 물러나고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 확실시되면서 대선 판이 흔들리고 있어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바이든을 공격하려다 오히려 자신에게 화살로 돌아온 고령 리스크, 사법 리스크, 막말 리스크에다 이번 '자녀 없는 고양이 여인' 파문으로 인한 밴스 리스크까지 얹어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밴스 상원의원이 어떤 환경에서 자라나 오늘날 부통령 후보로까지 성장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약점을 어떻게 보완해야 트럼프와 공화당의 대선 승리를 가져올 수 있을까, 트럼프 대통령은 어떻게 밴스의 도움을 얻어 대선 승리를 이끌어야 할지 생각하면서 보면 흥미로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