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나들이
김은희
멀리서 바라보는 산에는 단풍이 군데군데 보였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비에 젖은 낙엽들은 바람의 끝에 매달려 떨고만 있다. 이 비에 더이상의 색깔을 담아내지 못하고 그대로 멈춘 듯하다. 달리는 속도는 도로의 흐름에 따라 자동차 계기판에 보이는 숫자가 100을 오르락 내리락하고 가끔 흘깃 유리창 밖 멀리 가을산을 봤다. 능선을 따라 햇살의 길이만큼 누렇게 가을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지만, 잿빛 하늘아래 언뜻 병풍같은 산봉우리는 둥실 물안개를 감싸안고 느릿하게 움직인다.
가을길을 달리면서 산천이 조금씩 붉게 물들어가는 능선아래 간간이 보이는 사과 과수원은 운전자의 눈동자 보다 빠르게 뒤로 멀어진다. 이내 들어선 수안보는 물이 좋아 역사가 깊은 명천(名泉)으로 왕의 온천이라 한다. 태조 이성계가 피부염 치료를 위해 찾았었으며, 숙종 또한 여기에 와서 요양과 휴양을 즐겼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온천지로 개발된 후 욕객들이 하루에 2만명이 넘게 왔으며 가족여행지로도 성황을 누렸다고 한다. 1970년대만 해도 온천이 최고의 신혼여행지였다. 그러나 지금의 수안보는 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쩐지 을씨년스러웠다. 어쨌든 예전의 그 명성을 되찾을순 없겠지만 궂은 날씨에도 거리에 관광을 온 사람들이 드물게 눈에 띄긴했다.
우리 일행는 풍물시장의 맨끝에 위치한 가게앞에 내렸다. 누군가 뒷뜰에서 꺾어다 놈 직한 소담스런 감 가지가 적당한 위치에 걸린채 우리를 반긴다. 때마침 우산을 접어 물기를 털고 돌아서는 이의 옆모습이 낯이 익다. 불과 몇해 전까지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부부가 지난 봄 무렵부터 직접 키운 나물로 꽃나물빵집을 차렸다. 회원들과 여름내 한번 가봐야지 벼르다가 오늘에서야 나들이겸 맘먹고 나선길에 밤부터 시작된 비가 그칠듯 하더니 이 비도 우리처럼 가을이 궁금 했나보다. 그쪽에서도 우리를 알아보고 반가운 인사를 건낸다. 좁은 공간이지만 아담하니 미리 구워놓은 빵들이 줄맞추어 쟁반 가득 담겨있다.
도착한 시간이 점심때가 되어 예약된 식당으로 향했다. 차분한 작은 마을은 비로인해 검은 아스팔트바닥에 노란색과 하얀색 선이 더욱 선명하게 보이고 도로가에 놓인 국화꽃은 생기가 돈다. 이 식당의 특이한 것이 한상가득 놓인 반찬접시에 나물의 이름이 하나씩 다 새겨져있다. 나물의 가짓수가 많다보니 물어보는 손님들에게 일일이 대꾸해주는 것도 쉽지 않아 생각해 낸 방법이라고 한다. 밥이 나올 동안 접시에 새겨진 이름을 나물과 맞춰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식당을 나와 우리는 온천욕 대신에 아쉬운 대로 족욕체험을 하기로 했다. 무릎 위까지 바지를 걷어 올리고 노천 족욕장으로 들어가 따듯한 물에 발을 담그고 모두 한쪽 방향을 보고 앉았지만 시선은 저마다 각각의 생각 그 끝에 머문다. 인내심의 한계로 빨개진 발을 꺼내 물 가운데 바위에 올려보니 살아온 세월과 걸어온 길에 따라 발모양도 그 사람의 얼굴을 닮아 있는듯 보인다.
돌아가는 길에 노란 은행잎이 최고의 절정인 문광저수지로 향했다. 비가 그친후의 찬공기와 가을냄새가 우리를 환영하는 듯하며 간혹 코끝으로 훅 들어오는 쿰쿰한 은행나무 길에 들어서니 한눈에 끝이 보일듯한 아담한 길이로 비교적 짧게 조성되어 있었다. 줄지어 선 노란 은행나무는 둑 아래의 저수지 물빛에 그대로 비추어 진 풍경이 흡사 방금 도화지에 물감을 꾹 짜서 찍어낸 데칼코마니 기법으로 찍어 놓은 유명화가의 작품 같았다. 새벽에는 수면위로 솟아 오른 고목과 물안개의 아름다운 일출장면을 카메라에 담기위해서 대기하고 있는 그 출사광경이 문광저수지의 또 하나의 진풍경 이라고 한다. 길 뒤편에는 소금랜드가 보인다. 소금을 주제로 한 테마공원이 궁금해서 가까이 가보니 아쉽게 문이 닫혀있었다. 이곳 소금문화관은 아이들이 체험하기 좋은곳이라 하는데 문득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어릴적 이불에 지도를 그려 놓고 민망하여 울음으로 무마하려 하면 어림없이 엄마는 머리에 커다란 키를 씌워 뒷집에 가서 소금을 얻어 오라고 떠밀듯 내 보내셨다. 짖꿎은 아주머니가 소금 한줌을 퍼 주고 요란스럽게 망신을 주신 후로 버릇이 고쳐졌던 것 같다.
찬바람에 낙엽은 춤을 추듯 허공에서 빙빙 돌다가 까르르 선물처럼 내려 앉지만, 이토록 멋진 금빛 낙엽을 노을과 함께 사색없이 그냥 밟는다. 그렇게 가을은 온 동네를 단풍으로 물들이고 짧았던 계절의 아쉬움을 기억하고자 가지에서 나뭇잎을 바닥에 내려놓으면 바람따라 뒹굴다가 미련없이 떠난다. 그리고 남아 있는 가지와 뿌리로 추운 겨울을 견딘 후 나무는 다시 생명의 봄을 준비한다. 어느새 어둑해진 아파트로 들어서니 흐릿한 가로등 불빛아래 비처럼 쏟아지는 낙엽길, 그위에 한 마리의 고양이가 추운 듯 다리를 몸속으로 말아 넣고 앉아 돌아오는 자동차의 불빛이 제법 익숙한 듯 눈맞춤을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