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여름에 무늬를 더하다
비누 냄새
“내게 필요하고 분명 바람직했던 침묵 속에서도
늘 방해하려는 위협이 숨어있다.
그래도 나는 내가 절실히 원했던
‘아무것도 없음’ 속에서 무언가를 찾았다.”*
어딘가 한 곳에 붙박이면 편협 편견이 따라붙는다지만
어제 밥 먹던 곳에서
어제 하던 생각과
어제 한심했던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는데
어제의 밥 아니고
어제의 생각 아니고
어제의 한심 아니라면,
일생 한 작업실에서
몇 개의 정물만을 두고
단순하기 짝이 없는 작업을 한
모란디의 장소를 볼 때
집중과 집약은 다른 이야기가 되겠다
지치지 않고 향하던 구심력
이건 통째 생의 일이라
천 개 경우는 수가 나왔을 것
비웃지 마, 낡은 작업대는 은산과 철벽
햇빛이 적요의 선과 면을 그어주면서
그 방, 그 그림자, 그 물병, 그 고요
허무가 울면서 돌아간다
열이 오르면 세수를 하고 다시 작업을 이어갈 때
어제 밥 먹던 곳에서
어제 하던 생각에서
어제 한심한 방식에서
비누 냄새가 났을 것
혹은 숲 냄새일까
오전에는 에티오피아와 케냐, 오후엔 디카페인으로
자기 안의 상태를 추출하면서
나의 소극성도
장소가 아니라 나를 바꾸는 홀가먼트 방식이길 원했다
오마주도 좋아
그 가운데 틈새시장은 얼마나 요긴했는지
물이 똑똑 떨어져 패인 집중은 대해보다 심해를 생각했을 것이다
만화경은 하나로 우주를 경험하게 하지
그러는 사이 정물이 사라지고 배경이 정물이 되는 동안
아픔들은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다
배가 고팠던가
누구도 그곳을 보았다 말하지 않으면서
조금 웃는 그런 나라의
정오
* 『순례자의 그릇-조르조 모란디』, 필립 자코테, 마르코폴로
천 번이라도 아프리라 나는,
아무도 오고 가지 않은 나라에도 봄이 와 쑥국을 끓였다. 콩가루 푼 국물을 떠먹다가 갑자기 찌르듯 오는 서러움이 있어 허공을 보는데 봄은 끄떡없다고 청회색 꼬리 긴 물까치가 휘휘 날았다. 비현실의 한 장면이 정물처럼 떠 있는 정오였다.
상당수의 작품이 정물인 모란디의 그림을 다 넘길 때쯤 어느새 정물이 사라지고 배경이 주체가 되는 기이함이 있었다. 내가 사라지고 커서 깜빡이는 화면만 남을 미래처럼. 주객은 원래 한 몸이었다니 모란디가 제시한 치환은 두두물물의 상응이었을까.
반복과 정지, 운동과 고요는 그렇게 들끓고 함께 잠든다. 아무것도 없는데 모든 것이 있고 많은 것을 포함하나 전부를 소진한 그의 세계. 있음과 없음의 무의지가 놀라워 나는 세수를 하고 와서 다시 그림을 보았다. 그림에서 비누 냄새가 났다. 숲 냄새인가.
실제로 향수 중에 forest 향이 있는데 숲의 향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의문이 생긴다. 숲은 실제를 능가해 시원의 정서에서 나오는 향이거늘. 조향사들은 꿈에서도 냄새를 맡는다고 하는데 나는 조향사가 아니지만 꿈속, 함박꽃 가득 핀 꽃밭에서 훅 끼쳐오는 향을 맡은 적 있다. 꿈에서의 향처럼 숲의 향은 그런 것 아닐까.
모란디 역시 규정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기억과 기억 너머의 자리에 두는 것이 좋겠다. 아름다움은 다 취하지 않고 남겨둘 때 풍부해지니까. 나 역시 이 방식으로 여기까지 온 것으로 안다. 봄이 오면 다시 쑥국을 끓일 것이다. 그리고 찌르듯 다녀가는 어떤 서러움 있다면 얼마든지 오라. 나는 천 번이라도 아프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