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48장 10절 ~ 13절
O 모압은 어릴 때부터 평안하였고, 그는 그의 찌끼를 가라앉히고서 그릇에서 그릇으로 비워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로잡혀가지도 않았으므로, 그의 맛이 그 안에 남아 있고, 그의 냄새도 변치 아니하였도다. 11)
Moab hath been at ease from his youth, and he hath settled on his lees, and hath not been emptied from vessel to vessel, neither hath be gone into captivity: therefore his taste remained in him, and his scent is not changed. 11)
lees ① 앙금 ② 찌꺼기 ③ 쓰레기
고통을 겪는 일이 반복되었던 이스라엘과는 다르게 모압은 계속된 평안속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평안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였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수호신으로 우상 크모스를 인신제사로 섬겨서 왕의 자녀까지 크모스에 불살라 바치며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평안은 그들에게 합당한 멸망의 재앙이 오기까지 방치됨 이었습니다. 우리는 방치된 자들의 형통을 절대로 부러워해서는 안됩니다.
위 말씀에 찌끼가 일어나지 않아서 비워진적이 없어서 맛이 남아있고, 냄새도 변치 않았다는 말씀에 저는 일본이 생각이 났습니다.
한국과 일본은 자신들의 조상의 유산에 대해서 바라보는 시각이 다릅니다. 우리는 조선의 역사를 패배한 역사로 바라봅니다. 식민사관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조선은 역사에서 실패하여 주권을 잃었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선의 유산은 패배자의 유산으로 보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자세가 한국인들의 마음속에서 있습니다.
이와반대로 일본은 그들의 역사가 승리의 역사입니다. 미국에 패배하였지만 일본인들은 핵무기와 같은 것의 등장으로 어쩔 수 없는 패배로 여기고 자신들의 역사의 유산을 보전하고 계승하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지금도 그들의 역사를 보존하기 때문에 일본은 과거 일본의 맛과 그 냄새가 남아있습니다. 조선을 패배로 바라보는 한국은 조선의 맛과 냄새가 전혀없습니다.
이러한 점은 장점과 단점이 있어서 전통과 원칙을 지키는 공정한 일본의 모습과 시대변화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는 일본의 현재의 모습이 있고, 시대변화에 빠르게 적응하여 빠른 발전을 이루었지만 원칙이 무시되고, 자기의 정체성도 잊어가는 한국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이 하나님의 말씀을 일본처럼 외국의 문화로 여기지 않고 진리로 받아들이는 일은 매우 큰 은혜이며, 다행입니다. 사실 우리 민족은 하나님을 잊은 민족으로 침략과 전쟁으로 조선의 찌끼는 많이 드러났고, 조선의 무능력은 그 실체를 드러낸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일본의 도움이 아니라 우리가 패배로 알게된 진짜 조선의 모습일 뿐입니다. 조선이 만약에 일본에게 정복당하지 않고, 태국처럼 왕조가 유지되었다면 조선은 매우 심각한 부조리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그러한 예가 북한입니다. 북한은 김일성일가를 왕족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한국 중국 일본 북한 모두 복음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나라가 부강하고 강한 군사력을 가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가를 이루는 개인들이 살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 보았을때 아시아 국가들도 아직 매우 어려운 상태에 있습니다. 그나마 한국이 가장 진리에 접근하고 깨달은 사람들이 많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빠르게 받아들인 만큼 미국과 서구가 오염된 것도 빠르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필리스티아인들과 모압과 암몬인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교훈입니다. 국가마다 처지는 다르지만 불순종으로 침략당하고 흩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일본은 부강하고 군사력이 강하지만 일본이 지금처럼 계속 고집을 하다가 모압처럼 경고없이 한번에 멸망당할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러기 전에 일본에도 복음을 다시 전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 지금은 필리스티아인들과 모압과 암몬인들의 때와 달리 마지막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라, 그 날들이 오리라. 주가 말하노니 내가 방황하는 자들을 그에게 보내어 그로 방황하게 하고, 그의 그릇들을 비우며, 그들의 병들을 부수리라. 12)
Therefore, behold, the days come, saith the LORD, that I will send unto him wanderers, that shall cause him to wander, and shall empty his vessels, and break their bottles. 12)
방황하는 자들을 보내심은 그들이 침략자로 침략하는 것일뿐임을 의미한다고 느껴집니다. 바빌론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식대로 주변국가를 공격한 것인데 그것이 하나님의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우연같지만 우연은 아닌 것입니다.
그릇들을 비우고, 병들을 부숨은 그들의 전통을 박살내는 일입니다. 이러한 일을 조선은 겪었습니다. 만주족 왕으로 오백년간 섬긴 조선은 그 비굴한 역사속에서도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만주족왕과 성리학이라는 맞지 않는 옷을 입었는데 적응해버려서 오히려 벗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어리석음을 끝까지 유지하였습니다.
성리학 사대부들은 이익을 위하여 쿠데타 군주를 섬겼는데 점차 그것을 신념으로 착각하기 시작하여 오백년을 보낸 것입니다. 그러한 국가가 박살나지 않고 유지된 것은 모압처럼 방치된 것입니다. 조선은 그릇이 비워지고, 가치를 보존하는 병들이 박살났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따랐고,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는 일제의 침략이 복이고, 한국전쟁이 복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한국은 아직도 사대부들의 잘못된 신념을 부양하느라 고통을 겪고 복음도 제한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남은 곳이 바로 북한입니다. 북한의 공산주의는 이해관계에 따른 추종이었는데 이제는 신념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더욱 변질되어 북한은 공산주의라고 부를 수 없는 국가입니다. 김정은왕조국가라고 보여지며, 고종의 조선을 김씨왕조가 일본으로부터 회복하여 계승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집이 그들이 신뢰하는 벧엘로 인해 수치를 당한 것같이, 모압이 크모스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되리라. 13)
And Moab shall be ashamed of Chemosh, as the house of Israel was ashamed of Beth-el their confidence. 13)
모압의 크모스와 이스라엘의 벧엘이 같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벧엘은 야곱이 약속을 받은 곳입니다.
그가 꿈을 꾸었으니, 보라, 사다리가 땅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보라,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며,
보라, 주께서 그 위에 서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주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씨에게 주리라.
창세기 28장 12절 13절
야곱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자기가 베개로 삼았던 그 돌을 들어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다 기름을 붇고
그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니, 그 성읍의 이름이 처음에는 루스라고 불렸더라.
창세기 28장 18절 19절
어떻게 버림받은 자들의 우상과 야곱이 약속을 받은 곳이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일까요?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전에 희생제를 드리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그들의 주, 즉 유다의 르호보암왕에게로 다시 돌아가 그들이 나를 죽이고 유다의 르호보암왕에게로 돌아가리라." 하더라.
이에 왕이 계략을 꾸미고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 백성에게 말하기를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 너희에게 너무 수고스럽도다. 오 이스라엘아, 너를 이집트 땅에서 인도해 내신 네 신들을 보라." 하고
그가 하나는 벧엘에 두고, 다른 하나는 단에 두니라.
이 일이 죄가 되었으며, 백성이 그 하나에게 경배하러 단까지 갔더라.
열왕기상 12장 27절 ~ 30절
야곱이 꿈에서 약속을 받은 벧엘이나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은 오르난의 타작마당인 예루살렘이나 주의 약속을 받은 땅인 것은 같지만 벧엘을 신뢰함은 여로보암왕의 죄가 지속됨을 의미하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분열상태를 지속시키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일이 죄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압인들의 크모스와 이스라엘의 벧엘이 같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왕의 욕심때문에 이스라엘의 국토의 끝의 단에 까지 경배하도록 한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큰 고통과 위험을 안겨주는 일로 여겨집니다. 이는 사람이 율법을 오염시켜 사람에게 지기힘든 짐을 지도록 하는지 드러내는 한 단면이라고도 보입니다.
지금의 성도들이 지키는 주일 성수와 십일조는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단에까지 가도록 한 여로보암의 생각처럼 지기 힘든 짐을 지도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기 힘든 짐을 지는 것은 한다고 해도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지기 힘든 짐을 지느라 하나님의 뜻을 모르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열매로 나타나는 모습은 50년의 교회생활을 하여도 백신을 분별하지 못하고, 신천지의 괴상한 논리에도 속아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감당하여 인내할 수 없습니다. 인내도 올바르게 분별할 수 있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의 마지막때에 잡을 것은 한국교회의 문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