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망상 번뇌를 화두로 바꿔라.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는 말은 깨어 있거나 잠들어 있거나
기쁜 일이 있거나 슬픈 일이 있거나 내 감정에 속지 않고 내가 내 주인이 된다는 말이다.
내가 내 주인이 된다는 일은 쉽기로 말하면 참으로 쉬운 일일 수 있고
어렵기로 말하면 참으로 어려운 일 중의 어려운 일이다.
우리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 육신(肉身),
즉 감정의 덩어리로 된 몸뚱이가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 넣어주고
성을 내달라고 하면 화를 불같이 내주는 등
감정이 해달라는 대로 감정의 노예가 되어 사는 시간이 많지,
참마음이 주인 되어서 행동하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다.
팔만 사천 번뇌 모든 욕심과 진심과 어리석은 망상 번뇌가
우리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내 마음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임제 스님은 가는 곳마다 주인 되는 세계를
“수행자가 부처를 구하면 부처를 잃게 되고
조사를 구하면 조사를 잃게 되고 도를 구하게 되면 도를 잃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어떻게 주인 노릇을 해야 하고 내 주인이 어떠한 자세인가를 잘 표현한 세계이다.
모양이 있거나 귀에 들리는 소리가 있거나 무슨 색깔이 있다면 그것은 주인 자리가 아니다.
허공은 중생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다.
허공에는 아무런 모양도 없고 소리도 없으므로
이 조계사 법당은 물론 많은 대중이 다니거나 소리를 질러도 아무런 탈이 생기지 않는다.
만약 허공에 모양이 있거나 색깔이 있다면 우리가 마음 놓고 허공에 의지하고 살 수 없을 것이다.
허공은 먹물을 끼얹어도 물들지 않고 침을 뱉어도 묻지 않는다.
바로 이 오염되지 않는 자리를 주인 된 자리라고 한다.
여러분의 몸 안에서 몸이 썩지 않도록 지켜주는 주인공,
법문을 들을 줄 알고 눈을 뜰 줄 알도록 하는 소소영영한 그 기운이 내 마음의 주인공일진대
주인을 내버려 두고 감정이 하자는 대로, 도적놈이 주인 노릇 하도록 가만두어서는 안 된다.
마음 부처라고 하는 법당에 나 스스로 감정과 욕망과 도적놈을 불러들여
주인 노릇을 하도록 내버려 두는 일은 부처님을 믿는 제자라면 있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주인공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를 냉철하게 돌아보라.
얼마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山堂靜夜坐無言(산당정야좌무언)
寂寂寥寥本自然(적적요요본자연)
何事西風動林野(하사서풍동임야)
一聲寒雁唳長天(일성한안려장천)
산당의 고요한 밤에 말없이 앉았으니
조용하고 조용하여 본래의 모습이다.
서풍은 어찌하여 수풀을 흔드는가.
기러기 한 소리가 장천을 울리도다.
여러분의 눈으로 자기의 눈이 보이는가, 안 보이는가?
“안보입니다.” (대중)
그러면 마음을 갖고 마음을 보면 마음이 보이는가?
“안보입니다.” (대중)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찾으려고 한다.
찾으려고 한다는 것은 찾는 내가 있고 찾는 대상이 따로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자기의 눈으로 자기의 눈을 보지 못하듯이 마음이라는 놈은
찾는 주인과 찾는 대상이 나눠진 상태가 아니고 주와 객이 분리되기 이전 세계이다.
찾으려고 하면 이미 잃어버리는 것이 된다.
그래서 부처를 구하면 부처를 잃게 되고 조사를 구하면 조사를 잃게 된다.
또 도를 구하면 도를 잃는 것이다. 요즘 참선을 하는 사람들은 너무 급하다.
빨리 도를 이루려고 한다. 그런데 도를 그렇게 빨리 얻을 수 있으면 누가 얻지 못했겠는가.
또 “요즘 참선을 하는데, 이러이러한 것들이 보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것을 보길 원하는 마음이 아직 남았으니 보이는 것이다. 그건 그림자지 실상이 아니다.
보고 싶은 마음의 그림자가 밖에 나가서 황금색으로도 보이고 부처님으로도 보이고 그러는 것이니
절대로 현혹되지 말라. 실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이다.
화두가 무엇인가?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는 화두가 있는데, 화두가 ‘정전백수자’ 이 다섯 글자인가?
아니면 조주 스님이 ‘정전백수자’ 하기 전 그 마음속에 숨겨진 뜻[意]인가?
말이 나온 다음 것은 화두가 아니다. 그 말 나오기 전, 조주 스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여러분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닌 상태를 화두라고 한다.
이 화두는 들어가고 나오는 자리가 아니다. ‘공’ 하면 전해질 소리인데 이걸 알아듣는 사람이 흔치 않다.
‘뜰 앞에 잣나무’라는 소리가 나오기 이전 조사 스님의 그 뜻이 화두이다.
의심하기 위한 의심이 아니라 조사 스님들이 이미 보여주었으니 마음의 눈을 떠야 할 것이 아닌가.
눈 뜨는 방법이 의정이요 의심이다.
화두라고 하는 것은 그 뜻이 나와 벽이 허물어져 버린 상태를 보여준 것이니까
내가 찾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나 자신을 대상화하여 버린 것이고 찾으려고 하는 놈과 찾아야 할 대상을 둘로 나눠버린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뜻을 읽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상태로는 백날이 가도 수행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여러분은 자신의 몸뚱이를 나의 소유라고 생각하는가?
“예.” (대중)
아니라면 내가 가져가서 밥도 짓게 하고 더러는 팔아서 불사에도 보태고 할 테니까.
여러분 몸뚱이가 여러분의 소유라면 마음대로 되어야 한다. 그런데 맘대로 되는가? 안 되지?
“예.” (대중)
앞으로 여러분의 소유라고 하지를 말라.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내 것이라고 하는 내 몸뚱이도 마음대로 안 되는데
어떻게 가족들을 내 마음대로 하고 이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기를 바라겠느냐.
이 세상이 마음대로 되고 내 가족이 마음대로 되기를 바라거든 마음을 먼저 길들이라.”라고 했다.
네가 주인이 되면 진실하게 살게 된다고 하신 것이다.
우리가 화두를 들고 싶어도 내 몸뚱이 속에 있는 번뇌 욕망이 (화두가) 들어오게 가만히 놔두는가?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번뇌 망상과 화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망상 번뇌가 일어나면 번뇌 망상을 화두로 바꾸는 것이로구나,
즉 번뇌 망상이라는 지능을 가지고 화두라고 하는 부처를 조성하는 것이니까,
참선법이라고 하는 것은 이 번뇌 망상을 부처로 만드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번뇌가 곧 보리’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화두를 정말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화두 하는 그 시간만큼은 내가 나와 같이 춤을 추는 시간이고 부처와 같이 있는 시간이구나.
일어나는 번뇌 망상을 없애버리고 화두를 하는 것이 아니라 번뇌 망상을 가지고
‘어째서’ ‘왜’ 하고 살피다가 조금 더 나아가면 어째서도 없어지고 왜도 없어지게 된다.
오로지 조주 스님의 의정만 남게 된다 이 말이다.
이렇게 분명한 것이라면 화두 수행에 나를 바쳐야 하지 않겠는가.
화두 참선법은 일생을 바칠 가치가 있다.
자신의 인생 문제는 나만이 해결할 수 있다. ‘참 나’를 찾아 나서는데 무슨 하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
성인은 씨앗 심는 것을 중요시하지만 중생은 결과만 얻으려고 한다.
씨앗을 심지 않으면 결과가 나오지 못한다.
여러분이 ‘어째서’ 하고 의심할 때 그것이 씨앗 심는 것이다. 그 시간은 부처가 된 것이다.
이는 화두가 작용이 된 것이다. 거기에 의심이 가고 잘못될 것이 없는 것처럼 이유를 붙일 필요도 없다.
(컵을 들어 보이며) 이걸 뭐라고 하는가?
“컵이요.” (대중)
이 컵을 몸뚱이라고 하자. 이 컵 안에는 물이 있다. 우리 몸 안에는 어떤 물이 있는가.
망상 번뇌라는 물이 있다. 망상 번뇌는 흙탕물이 되어 우리 몸 안을 계속 돌아가고 있다.
흙탕물이 돌아가듯이 돌아갈 때는 그 안에 찌꺼기가 보이는가? 안 보이는가?
“안보입니다.” (대중)
여러분이 텔레비전을 보거나 다른 사람하고 말할 땐 그 안에 있는 망상 번뇌가 보일 리가 없다.
점점 찌꺼기를 집어넣고 있으니 오히려 더 커질 뿐이다.
그런데 가만히 놔두면 안에 찌꺼기가 가라앉는다.
이때는 지금까지 내 속에 있던 찌꺼기가 보이는가, 안 보이는가?
“보여요.” (대중)
망상 번뇌는 바깥에서 들어온 게 아니라, 내 속에 있으면서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화두는 이 망상 번뇌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가라앉게 해주는데, 대단하지 않은가?
내 속에 있는 이 망상 번뇌를 화두로 바꾸는 이게 공부이다. 이건 딱딱 맞아떨어지는 일이다.
화두 드는 수행자는 왜 ‘뜰 앞에 잣나무’라고 했는지 조사관을 타파하는 것이 목적이다.
화두 조사관을 타파하고 도를 깨닫는 걸 목적으로 해야지,
하는 도중에 뭐가 나타나거나 뭐가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말라.
여러분도 오늘부터는 화두를 등불·스승으로 삼고 화두에 의지해서 망상 번뇌에 속지 않고 살아가 보라.
이 좋은 참선법을 만났으니, 화두에 인생을 바칠 수 있는 씨앗 되기를 바란다.
- 혜국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