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9일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루카 6,1-5
뻐꾸기를 키우는 새가 어떻게 쉴 수 있겠는가?
오늘 복음은 안식일에 관한 내용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비벼 먹는 것을 보고는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라고 묻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물음은 곧 ‘구원’에 관한 물음입니다.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6일간의 일을 마치시고
7일째 쉬신 시간입니다.
아담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이렛날 쉽니다.
우리도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나에게 영혼을 구원하라고 일을 시키신 분 안에서 쉬는 것을 말합니다.
그분은 우리 모든 영혼을 창조하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실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마치 노아의 방주처럼 당신의 일을 하는 제자들을 보호하십니다.
그분의 집 안에 있으며 그분에게 자기 뜻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집에서 그분께 순종하는 새로운 아담들입니다.
영화 ‘비바리움’(2019)은 인간이 왜 고생은 하는데 안식이 있을 수 없는지를 고찰하는 내용입니다.
이야기는 함께 첫 집을 구입하려는 젊은 부부인 젬마와 톰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영화 초반부에 뻐꾸기 새끼와 그가 밀쳐내 떨어져 죽은 다른 새들의 새끼들이 나옵니다.
한 아이가 왜 뻐꾸기는 자기 집을 만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젬마는 그것이 자연의 섭리라고 대답해줍니다.
그리고 떨어진 두 마리의 새끼를 묻어줍니다. 어미는 자신보다 덩치가 큰 뻐꾸기 새끼에게 음식을 물어주며 지쳐갑니다.
이것은 인간이 어떤 법칙에 사로잡히면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인간의 비참함을 보여줍니다.
젬마와 톰은 부동산 중개소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조금 이상한 세일즈맨 마틴을 만납니다.
그는 욘더라는 새로운 개발 주택지를 보도록 초대합니다.
도착하자마자 마틴은 사라집니다.
그들은 욘더를 떠나려고 할 때 어느 방향으로 운전해도 탈출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항상 같은 집인 9번으로 돌아옵니다.
결국 그들은 연료가 떨어져서 그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합니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은 안에 아기가 들어 있는 상자와 “아이를 키우고 석방되라”라고 적힌 메모를 발견합니다.
그들은 이 이상하고 부자연스러운 곳에 갇혀 자기 아이가 아닌 아이를 키워야 하는 상황에 부닥칩니다.
아이는 부자연스러울 만큼 빠른 속도로 성장합니다.
98일째가 되면 아이는 아이보다 어른처럼 행동하고 소름 끼치고 당황스러운 방식으로 톰과 젬마의 소리와 행동을 모방합니다.
톰은 땅이 가짜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탈출구를 찾기 위해 앞마당을 파기 시작합니다.
젬마는 차에 들어가 지난날의 향수에 빠져듭니다. 결국 소년은 이상한 부동산 중개업자 마틴의
복제품으로 성장합니다.
톰은 땅을 파다 지쳐 죽고 맙니다.
아이는 톰을 비닐에 싸서 톰이 파 놓은 땅에 던져버립니다.
분노한 젬마는 소년을 죽이려 하지만 도리어 압도당하고 결국 부상으로 사망합니다.
소년은 역시 젬마도 구덩이에 던져 묻습니다. 이후 그는 여행 가방을 싸고 부동산 사무실로 돌아와 늙어 죽은 마틴의 이름표를 달고 미래의 톰과 젬마처럼 될 순진한 커플들을 맞이합니다.
‘비바리움’은 인간이 동물을 사육하며 감시하고 실험하는 곳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주체적으로 살아간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무언가를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를 희생합니다.
여기에서 뻐꾸기 새끼, 혹은 마틴이라는 톰과 젬마가 키운 아기는 자기 안의 자아입니다. 탈출기에서는 파라오가 될 것입니다.
그 시스템 안에서는 안식이 없습니다.
그것들에게 이용당하고 죽게 됩니다.
누구나 어떤 시스템이나 법에 지배받습니다.
내가 있는 욘더라는 곳은 내가 지배받는 자아의
시스템입니다.
결국 나는 새로운 법의 시스템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그 시스템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됩니다. 그 방법이란 무엇일까요? 뻐꾸기 새끼에게 지배받는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길은 뻐꾸기 시스템을 이길 수 있는 누군가에게 길러지는 것밖에 없습니다.
인간에게 길러진다면 자기 새들을 죽이는 뻐꾸기를 가만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집에 머물려면 인간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 제자들은 예수님의 법을 따르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뻐꾸기의 시스템을 벗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그분 뜻에 따라서 그분 집에 머물지 않으면 안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이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여전히 그들은 자아의 시스템 안에서 안식을 찾으려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벌써 하느님의 집에 머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뜻을 주님께 강요하고 있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주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이라야 안식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나의 뜻 자체가 나의 안식을 빼앗습니다.
마치 파라오처럼 나를 종살이시킵니다.
오직 주님의 뜻만이 그 뱀의 압제에서 나를 쉬게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안식을 누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어떤 뜻을 따르느냐가 어느 집에 머무느냐를 결정합니다.
어느 집이건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뱀의 집에 살면서 안식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따르는 법, 곧 욕구가 내가 사는 집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9일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루카 6,1-5
그 어떤 형식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예수님!
한 사람의 그릇된 행동이나 사회적 일탈 행위 앞에 법 집행은 엄정해야 마땅합니다.
때로 구금되어 수사를 받기도 합니다.
재판을 받아 톡톡한 대가를 치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상 참작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지속적인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부인이 참다 참다 폭발한 경우라든지, 극심한 가난이나 오랜 병수발로 인해 야기된 사건 등등.
언젠가 굶주리는 자녀들을 보다 못한 젊은 엄마가 대형 마트에서 식자재를 몰래 가져 나오다가 들킨 일이 있었는데, 소문을 전해 들은 지역 주민들의 선처 호소가 이어졌고, 그 가정을 돕기 위한 모금 운동이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법행위를 습관적으로 저질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공동선을 위해 제정된 가장 기본적인 규칙이나 법에 대한 철저한 준수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 인간이 처한 극도로 고통스러운 상황 앞에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지니는 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료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사실 유다인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안식일 법이 제정된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한 법, 사람의 영적 육적 건강을 위한 법, 사람을 사람답게 살도록 만든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 법 규정이 점점 불어나고, 가지를 치고, 세분화되면서, 나중에는 사람을 위한 안식일 법이 사람을 힘들게 하는 법, 사람을 꼼짝달싹 못 하게 옭아매는 법이 되고 말았습니다.
안식일 규정의, 정신에 따르면, 안식일 당일날, 주중 계속된 과중한 업무에서 손에 떼고, 몸과 마음을 편히 쉬면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는 더없이 좋은 것입니다.
원한다면 강변길을 따라 마음 편히 산책을 하거나, 좋아하는 운동도 원 없이 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시장도 보고 요리도 해서 나눠 먹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그 잘난 안식일 규정에는 그 모든 것들이 다 금지되어 있습니다.
몇 걸음 이상 걸으면 절대 안 됩니다.
운동을 물론 절대 금지입니다.
요리를 한다거나 텃밭을 가꾸는 것도 안됩니다.
그저 하루 온종일 대리석으로 된 석상처럼 가만히 있어야만 했습니다.
이게 무슨 법이며, 무슨 웃기는 짬뽕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비인간적이고 형식적인 안식일 규정을 보란 듯이 산산조각 내십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반대 받는 표적이 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그 어떤 형식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분이십니다.
갖은 법이나 규정에 앞서 한 인간 존재를 더 중요시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당신 앞에 서 있는 한 인간 존재가 이런저런 규정에 매여 힘겹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충만히 살아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9월9일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 6,1-5: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을 잘못 알고 있음을 지적하신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밀밭을 지날 때 일어난 일을 전하고 있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1절)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2절) 주님께서는 율법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고 또 그렇게 훈련을 시키셨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께서 율법을 어기셔도 놀라지 않았다. 안식일에도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에는 서슴없이 하시는 것을 늘 보았기 때문이다. 그분은 안식일에도 병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셨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데리고 가셨다는 것은 그들을 풍성하게 익은 곡식들 사이로 데리고 가신 것이다. 안식일과 풍성한 결실을 본 이삭은 큰 신비를 의미한다. 땅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았고, 하늘 씨가 뿌려진 밭은 풍성한 결실을 보았다. 인간 구원에 굶주린 제자들이 놀라운 활동으로 밀 껍질을 벗기고 알곡을 거두듯이, 그 몸에서 믿음의 빛을 향한 마음의 열매를 거둔 것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줄 알았지만, 예수께서는 새로운 은총의 선물을 주셔서 율법의 나태를 은총의 수고로 바꾸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1사무 21,1-6을 인용하여 이에 대해 응답을 하신다. 그 내용은 다윗과 그 일행이 보통 사람들은 먹을 수 없는 지성소의 떡을 먹었지만, 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죄가 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다윗과 그 일행의 배고픈 상황은 율법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 관례에 매지 않는다는 것이다. 율법의 준수보다도 현실적으로 더 절박한 인간적 요구를 채워주는 것이 우선이다. 인간이 있고 나서의 율법이지,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율법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율법 때문에 정상적인 인간의 필요가 희생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율법 그 자체를 지키는 것보다, 율법에 담겨있는 근본정신을 잘 깨달아야 한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우선 인간을 위한 사랑이 담겨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을 잡아 끌어내지 않겠느냐?”(마태 12,11)라고 책망하시면서 인간을 무시한 율법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법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고 율법이 있다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이 이미 “안식일의 주인이다.”(5절) 하신다. 율법의 근본정신을 올바로 실천하는 우리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