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은 2019. 9. 19. 수요일.
서울 송파구 잠실지역의 하늘이 흐린 듯하며, 날씨가 서늘하다. 가을날씨가 이어진다.
아침부터 피곤하여 밥 먹고는 자리에 눈을 붙인 뒤 깨어난 뒤 벽시계를 보니 13 : 30.
마음은 서울 성동구 답십리역 인근에 있는 하늘병원에 가기 시작했다.
며칠 전, 둘째사위의 왼쪽 무릎 인대가 파열되었고, 그저께인 월요일에 전신마취로 수술을 받았다.
왼쪽다리를 꼿꼿하게 세워야 하기에 거동이 무척이나 불편해 했다.
작은딸이 11층 병동과 자기네 아파트로 번갈라 오고 가야 했다.
간밤에는 자기네 집에서 젖먹이 아들과 함께 잔 뒤에 아침에 유아원에 맡기고는 병원으로 되돌아 갔을 게다.
어제 오후에 충남 태안읍에서 올라온 사위의 부모님이 밤새 자기 아들을 돌봐주었을 터.
오늘 내내 피곤한 나.
요즘에는 낮잠을 전혀 자지 않았는데도 오늘은 마음이 먼저 지쳐서 잤다.
잠 깬 뒤에 보니 아직도 집안에서 맴도는 아내.
내가 보챘다. 딸네로 가서 유아원에 가 있을 젖먹이를 보살펴 줘야 한다고.
유아원(유치원생보다 더 어린 아이)는 오후 네 시경이면 부모네가 와서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가야 한다고 한다.
작은딸이 병원에서 나와서, 유아원에 들러서 아이를 집으로 데려올 터.
그 이후에는 내 아내가 아이를 밤새껏 돌봐야 할 터.
아이가 별로 울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
나는 할 일이 없다. 병원에 들러서 사돈네 대신에 사위를 돌볼까?
이런 생각을 말했다가 아내한테 지청구나 거듭 먹었다.
'사위는 장인이 있으면 무척이나 불편해 할 거예요. 오줌 누려면 그거(성기) 장인하테 보여주겠어요? 자기네 부모는 자식을 수발할 수 있지만 장인은 힘 들 거예요. 가지 마세요.'
맞는 말일 게다.
수술을 받은 사위는 속옷을 입지 않고 병원복을 입었는데 이게 빤즈(팬티)형태가 아니라서 사타구니가 훤히 드러나는 구조였다. 오줌을 눕거나 대변을 보려면 살덩어리가 노출되기 십상일 터.
급히 점심밥을 먹고는 옷을 입는 나한테 아내가 물었다.
'당신 왜 옷 입어요?'
'나도 작은딸네 아파트로 갈려고.'
'오늘밤 딸네에서 자려고요? 그럼 함께 잡시다.'
'아녀. 거기 들른 뒤에 병원에 가려고...'
비좁은 아파트 안에 갇혀야 하는 게 싫었다.
딸네를 들른 뒤에 병원으로 가서 사돈네한테 저녁밥 한 끼를 사드려고 생각이었는데...
'그럼 나는 내일 아침에나 병원에 들러야겠네.'
'당신이 왜 오냐고요?
(병원에 가지 말라는 뜻)
'그려?, ....'
나는 졸지에 소용가치가 없는 사람이 되었기에 입었던 외출복을 벗고는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내 나이는 집나이 일흔두 살.
이제는 가치가 별로 없는 인생 퇴물.
갑자기 힘이 축 처진다.
아내는 바깥으로 나가기 전에 큰아들이 보낸 핸드폰 문자를 보여주었다.
송파구 거여동 신축아파트 30평 당첨이 되었는데 계약해야 할지 말아야 할 지를 망설인다는 내용이다.
돈이 없기에 빚 내야만 3년 뒤에 입주한다고 한다. 아들은 18 ~20평 아파트도 힘들어 할 터.
30평은 빚 8억 원을 내야만 소유가 가능하다고 한다.
자식의 형편이나 내 능력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내용이기에 나는 아뭇소리도 하지 않았다.
서민한테는 그림의 떡. 富가 富를 낳는 법.
무기력한 내가 또 비참해진다.
아파트 현관문을 밀고 나가는 아내가 한마디 툭 던졌다.
'자식 결혼시키면 걱정이 줄어드는 줄로만 알았네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자꾸만 걱정거리가 생기네요.'
아내의 말이 맞다.
아내와 나한테는 자식이 넷. 딸 둘과 큰아들은 결혼했고, 작은아들은 미혼이다.
작은아들이 결혼하게 되면 또 걱정거리가 늘어날 터. 나이가 있으니 결혼을 뒤로 미룰 수도 없고...
지친다. 그냥.
퇴직한 지도 벌써 만11년도 더 지났다.
나날이 무기력해지는 요즘이다.
나는 퇴직한 지가 벌써 만11년도 더 넘었다.
직장을 벗어난 다음날부터 서해안 산골마을인 고향으로 내려가 그때까지 혼자 살던 꼬부랑할머니가 된 어머니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어린시절에 이웃 남포면 용머리(용두리)바닷가에서 산골마을로 이사온 동네.
이사 온 집에서 평생을 살던 어머니였다. 당신이 자랐고, 한 마을에서 결혼한 뒤에도 그 집에서 살고 있기에 시골집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다. 또, 차 멀미를 지독하게 해서 자동차를 타고 멀리 나가는 것을 힘들어 하셨다.
어머니는 세상이치에 사철했을까?
'서울에서 하나뿐인 아들과 함께 내가 살면 며느리와 갈등이 생긴다. 나하고 네 아내하고 둘이 싸우면 너는 누구 편들래?'
나한테 이런 질문을 하고는 시골집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시골에서 사는 게 마음 편하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가 혼자 살면서 가꾸는 텃밭은 어머니가 꼬부랑할머니가 되어갈수록 면적이 자꾸만 줄어들었다.
내가 퇴직한 뒤에서야 내려갔을 때에는 어머니가 가꾸던 면적은 이제는 두어 평이나 됄까?
쌈 채소 등 푸성귀가... '이빨도 시원찮은 할머니가 된 어머니가 그거 가꿔서 무엇을 할 것인데?'
텃밭 세 자리에는 잡목과 잡초로 가득 찼다.
수십 년 만에 귀향한 내가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텃밭 세 자리를 가꾸기 시작했다.
포클레인 중장비로 산뽕나무, 아카시나무 등 잡목을 캐냈고, 과수원을 조성하려고 감나무, 모과나무, 대추나무, 석류나무 등 과일나무 묘목 400그루 쯤 심었고, 내 취미생활로 꽃나무와 키 작은 식물도 가꾸기 시작했다.
농작물 소득과는 하등 상관이 없게끔 농사 짓는 체를 했다.
심고, 키우고, 증식하고, 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다.
5일장에서, 대천장에서 묘목을 사고, 화초를 얻어다 심으면서 밭일 하는 게 무척이나 신이 나며 재미가 있었다.
나날이 커가는 과일나무, 정원수, 자꾸만 늘어나는 키 작은 화초들.
이들을 활용한 발효식품(발효주)를 만들고(앵두주, 모과주, 왕보리수주, 무화과주 등)
그런데 아쉽게도 그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더욱 늙어서 치매기가 한창 진행 중이고, 또 한쪽 몸이 마비되어서 어기적거리기 시작했다.
나날이 더욱 심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게 또 있었다.
어머니의 부상.
체구가 작고 깡마른 몸이라서 그럴까. 평생을 일속에서 파묻인 삶이라서 그럴까. 어머니는 자꾸만 움직이려고 했고, 바깥으로 나돌아다니려고 애를 썼다. 나날이 어둔해지는 걸음. 자칫하면 모로 쓰러졌다. 통나무 쓰러지듯. 또 다치고, 피가 나고...
나는 정신없이 어머니 옷을 갈아입힌 뒤 차 태워서 멀리 떨어진 대천시내 큰 병원으로 달려야 했다.
보령아산병원 중환자실에서 장기간 입원해야 했기에 어머니 임종이 가까워질 무렵에는 나도 병원에서 24시간 머물렀다. 병원 구내식당에서 밥 사 먹고, 잠은 중환자보호 대기실에서 대기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어느새 농사를 포기했다.
2015년 2월 말에 어머니를 고향 앞산 서낭당 뒤편 산에 묻어야 했다.
1982년인 삼십여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무덤 한 쪽을 파낸 뒤에 합장했고, 삼우제를 지낸 뒤 처자식이 사는 서울로 되돌아왔다.
서울 잠실에서는 내가 할 일이 없다.
등신이나 되어서...
날마다가 공휴일, 휴일, 쉬는 날, 노는 날이였기에 시간 보내려고 사이버세상으로 들어왔다.
개인 카페에서 남의 글을 읽고, 나도 잡글 보태기 시작했다.
컴퓨터 모니터 화면을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잘 쓴 글도 있고, 못난 글도 있다.
이렇게 고쳤으면 하는 글에는 내가 댓글도 달고...
나는 남의 글에 이따금 댓글 단다.
그런데 댓글 달았다가 엉뚱한 제3자가 나한테 보낸 덧글을 보고는 짜증이 난다.
글 쓴 이가 아닌 제3자가 나한테 지적하고, 꼬챙이질을 하는 게 이제는 싫어진다.
글 쓴 이가 아닌 타인이 나를 제지하는 꼬라지이기에.
'왜, 당신이 뭔데, 무슨 자격으로, 무슨 권한으로?'
반발심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틀린 단어가 없고, 오탈자가 없는 글 쓰자는 게 잘못이여?'
아무런 직책, 직위, 권한, 능력도 없는 나를 내려다 본다.
오늘 밤에는 밥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시간이 없다면서도 쌀 씻어서 밥 짓고, 호박된장국을 끓여 놓은 아내.
마트에서 사 온 바나나가 냉장고 위에 올려져 있고, 쌀튀밥으로 만든 과자도 있다.
내 간식거리.
오후 18 : 15.
저녁햇살이 아파트 뒷쪽으로 오래 전에 사그라졌고. 멀리 보이는 관악산 철탑 부근에나 햇볕이 났다.
점점 사그라지겠지.
그 너머로 그 너머로 서해안고속도로로 가는 길이 있다.
내 마음은 자동차를 운전하여 서해안으로 내고 가고 있다.
시골집에 가 보았자이다. 텅 빈 집, 낡은 함석집이다.
1957년. 내 열 살 때 대전 사는 아버지가 대전의 목수와 함께 와서 몇 달간 지은 함석집.
60여 년이 더 지났기에 지금에는 오죽이나 낡았을까?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텅 빈 집이나 되었기에 산새들이나 함석지방 처마에 날아들고, 또 새를 노리는 들고양이나 들락거릴 게다.
함석지붕 처마 아래에 내다놓은 커다란 물통(300리터) 여러 개 안에는 빗물이 가득 찼을 게다.
그거 퍼다가 텃밭 나무 뿌리에 부어주면 좋으련만...
빗물이 가득 차서, 비가 내릴 때마다 철철 넘쳐서 수채구멍으로 흘러나갈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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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작동이 또 불량이다.
글 쓰는 도중이 컴이 멈춘다. 무한정. 별 수 없이 전원 스위치를 눌러서 강제로 끈 뒤에 다시 부팅하면...
지금껏 썼던 글은 모두 사라지게 마련.
이 글을 쓰는데 벌써 3회나 글이 없어졌다.
답답하다. 왜 또? 누가 장난친 거여?
첫댓글 최선생님 집안에 중심이고
기둥이십니다.
늘 건강하고 힘차게 사세요.
가벼운 마음으로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가족 화목하고 다복하세요.
작은 사위 부상이 빨리 회복하기 기도합니다.
.
이제는 아니여요.
대전 사는 할아버지, 아버지는 경주최씨 종친회에서 무척이나 활동했지요.
손자이자 아들인 나는... 주머니가 가벼워서 종친회에는 일체 나가지 않았지요.
시골부자였던 그들에 비하여 나는 가난한 사람으로 전락했지요.
그저 평범하게 조용히 살았기에...
무기력한 나를 탓할 뿐.
1751년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가거지(可居地)로 나오는 곳이지요.
산속에 있어서 피난할 수 있는 곳.
어린나이로 객지로 나와서 살았던 나...
지금은 고작 옛생각이나 하지요. 무기력하고 무능하게 보낸 세월이군요.
잡글이나 긁적거리면서 세월을 보냅니다.
예전 시골 안사랑방에 시조꾼들이 벅실, 대전 일본집에서도 시조꾼들이 벅실...
@최윤환 최선생님 겸손한 말씀이
세요.
유능하고 청렴한 공직자 출
신에 엘리트 정치학도시잖
아유.
법학과 정치학에 깊은 지식
인이시잖아유.
안정된 공직자 출신 연금
생활하고 서울 부자촌의
중산층 엘리트 출신입니다.
부럽습니다.
@최윤환 다 사라지고.
그들의 손자, 아들인 나는... 그저...
건달농사꾼이 되었다가 이제는 그것조차도 포기한 채 서울에서만 빌빌거립니다.
오늘은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에도 나가지 않았네요.
오늘은 공연히 지치기에...
어제는 작은딸의 시어머니를 뵈었지요.
지방에서는 알아주는 시인. 시집 여러 권을 냈지요.
저는 산문집 한 권조차도 내지 못한... 글쓰기 공부 더 한 뒤에 한 권이라도 냈으면 합니다.
남의 글을 보면서 덕분에 나도 글쓰기 공부를 더 하니까요.
세상만사는 바람 잘 날 없이 돌아갑니다.
요즘 우리나라 시국도 어수선합니다.
정치판 돌아가는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못 볼 지경이지요.
서로 자기 편만 잘났다고 떠드는 것 보면.......
화해와 토론과 대화의 정치는 대한민국에서 오래 전에 물 건너 갔지요.
희노애락은 어느 집에나 있게 마련입니다.
젊은 사위가 다쳐서 수술을 했군요.
작은 따님의 시어머니께서 시인이라고 하셨는데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예.
다음에서 '오인숙 시인' 이란 문구로 검색하니 사진/이미지도 제법 뜨네요.
1948년생. 인천출신. 기독교 신자.
민주주의는 토론과 대화이지요.
그게 잘 안 되면 타협해야겠지요. 서로 상생하는 방향으로.
민주주의는 어느 일방이 강압적으로 밀어버리는 것이 아니지요.
각자마다 처해진 환경, 조건 등으로 이해가 엇갈리기에 100% 만족은 없습니다.
약 2/3쯤만 맞으면 좋으련만 그것도 사실은 힘이 들지요.
그래서 저는 민주주의는 51 : 49라고 말하지요.
배가 좌우로 기우뚱 기우뚱 하면서 앞으로 나가는 것처럼요.
서로 배려하는 그런 타협이었으면 합니다.
타협한 뒤에는 이에 승복해야겠지요.
더 큰 국익을 위해서...
공감합니다
자식이 많으면 늘 힘들고 어렵지요
자식... 겨우 넷인데 뭘요.
잘 되는 자식도 있고, 잘 안 풀리는 자식도 있고...
모두 신의 뜻이겠지요. 자신의 책임이기도 하고요.
자식들이 성격이 올곧아서 큰 탈은 없었지요.
욕심도 별로 내지 않은 채 세상을 더불어 살려고 하대요.
앞으로도 남한테 미움받지 않고 살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