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성종실록》 119권, 성종 11년(1480년) 7월 9일 “의금부에서 어을우동(於乙宇同, 어우동)과
간통한 방산수 이난 등을 죄줄 것을 아뢰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어우동과 놀아난 이난(李瀾)과 이기(李驥)는 종친이라 국문할 수도 없었고,
대신 먼 지방 한 곳을 지정하여 그곳에서만 머물도록 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관련된 중신들 모두 심문도 하지 않고 석방하거나 가벼운 처벌로 끝냈습니다.
하지만, 그해 10월 18일 어을우동은 교형(絞刑, 목 졸라 죽이는 형벌)에 처해 죽었지요.
▲ 영화 <어우동: 주인 없는 꽃> 포스터(조이앤컨텐츠그룹 제공)
어우동은 정3품 승문원 지사 박윤창의 딸로 효령대군의 손자인
태강수(泰江守) 이동(李仝)과 혼인하였던 여성입니다.
그녀는 태강수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지만,
아들을 낳지 못하자 남편 태강수는 그녀를 외면하고 기생 연경비에 빠져들었습니다.
이에 어우동은 집안에 들인 은장이를 유혹하여 수시로 간통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태강수 이동이 분노하여 내쫓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종실의 사무를 관장하던 종부시(宗簿寺)에서 태강수가 종친으로서 첩을 사랑하다가
아내의 허물을 들추어 제멋대로 버렸다며 임금에게 고발했는데
이를 보면 어우동이 은장이와 간통했다는 혐의는 아내를 쫓아내기 위한 무고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우동은 이혼한 다음 친정에서 받아주지 않자 따로 거처를 마련하고 계집종과 함께 살았습니다.
당시 쫓겨난 여성은 자결하던지 죽은 듯이 살면서 남편의 처분을 기다려야 했는데
성현의 《용재총화》에 따르면 어우동은 반대로 마음껏 욕정을 해소했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두 종친은 물론 여러 중신들을 희롱했습니다.
조선 시대 반가 여성들은 남존여비(男尊女卑),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남녀차별의 울타리에 갇혀 규방에서 하염없이 세월을 흘려보내야 했지만,
어우동은 이런 남성들의 이중적인 행태를 비웃는 행태를 보였다가 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