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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0 묵상글 ( 부활 제3주간 월요일. - 우리는 자연 세계의 지혜와 접촉하는 법을 잃었습니다.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강론글 : 아직 / 05:08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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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0. 부활 제3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4.20 04:58
- 음식이 아니라 양식, 식사가 아니라 성사
지난 토요일 복음은 제자들끼리 티베리아 호수를 건너다 풍랑으로 혼나는데
주님께서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시자 즉시 구원받는 얘기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다음 이어지는 얘기로 어떻게 보면 전혀 새로운 국면입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전체적으로 생명의 빵과 생명의 말씀이 주제입니다.
그런데 제일 처음 얘기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얘기이고,
장소는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입니다.
그다음은 제자들이 티베리아 호수 건너편에서 호수를 건너
카파르나움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고생할 때 주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어
구해주시는 얘기이고 그래서 오늘 복음은 카파르나움에서 벌어진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과정에서 있었습니다.
곧 오늘 복음의 군중은 오천 명 먹이실 때의 군중이 아니고,
호수 이편에서 주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얘기를 듣고는
부랴부랴 호수 건너편으로 갔지만 주님이 거기 계시지 않자
다시 부랴부랴 카파르나움으로 주님을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이렇게 주님을 찾아와 언제 이곳에 오셨는지 묻지만
주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라고 하시며 썩어서 없어질 양식 말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라고 냉정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그들은 이렇게 주님께 묻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에 주님께서는 다시 냉정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왜 나를 찾아 호수 이편에서 저편으로 갔다가
다시 저편에서 이편으로 오는 수고를 그렇게 하느냐?
내가 썩어 없어질 빵을 주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그러는데
그러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분임을 믿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자주 하는 얘기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잘 믿는 사람과 잘못 믿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라삐’ 정도로 믿고 있고,
‘라삐’로 믿는 것도 빵의 기적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주님을 찾아와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하고 묻잖습니까?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빵이 아니라 썩어 없어질 빵을 주실 분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을 먹어야 얻을 수 있다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고 이어지는 6장 내내 말씀하실 겁니다.
우리도 음식을 구하지 말고 양식을 찾아야 합니다.
제 생각에 우리말에서 음식은 욕구를 채우는 것이고
양식은 마음의 양식이라고 할 때처럼 생명을 주는 것이라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런데 육신의 음식이 아니라 마음의 양식을 찾음이 좋고,
마음의 양식보다는 영혼의 양식을 찾음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처먹는 것보다는 식사하는 것이 좋고
식사하는 것보다는 성사를 거행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배 채울 것 궁리만 하면서 하느님 일 운운하지 말고,
주님께서 영생의 양식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잘 믿기나 하고
주시는 양식이나 거룩하게 받아먹는 우리가 됨이 더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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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0. 부활 제3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영혼과 자연 세계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는 자연 세계의 지혜와 접촉하는 법을 잃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관상과 해방, 그리고 활동
영혼과 자연 세계
2026년 4월 19일 일요일
리처드 신부는 우리에게 창조 세계의 영혼이 우리의 영혼을 비추어 준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권고합니다:
현대 세상과 탈현대 세상의 인간은 대체로 스스로 만든 세계 안에 머물며 인간이 만든 사상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반응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스스로 지혜롭다 부르면서도 우리는 창조된 세계와 접촉하는 법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우리 자신의 영혼과도 단절되었습니다. 저는 참된 지성과 지혜에 이르기 위해서는 창조 세계와의 실제적이고 살아 있는 연결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저의 영적 아버지이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1182–1226)은 움브리아의 길을 걸으며 수많은 날과 주, 때로는 몇 달을 보내며 창조된 세계로부터 배웠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피조물을 존중하며 동물과 태양, 달, 심지어 날씨와 원소들까지도 형제와 자매라 불렀습니다. 자연 안에서 오랜 시간을 머무르며 그는 인간이 아닌 살아 있는 다른 존재들과 깊은 친교를 이루었고, 창조 세계 역시 영혼으로 충만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거의 모든 입문 의식—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경우도 그러했듯이(마태 3:13–17 참조)—자연 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영혼의 인식과 거울 같은 반영이 없다면, 우리는 창조 세계와 우리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창조된 세계의 영혼과의 깊은 친교가 없다면, 우리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거나 존중하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 대신,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려는 여러 인위적인 방법을 찾지만, 이는 우리가 세상 자체 안에 근본적으로 속한다는 체험을 거짓된 어떤 것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나는 여기 속해 있어. 나는 소중해."라고 말하려 합니다. 물론 그것은 참된 말입니다! 그러나 억지스럽고 인위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그 신성한 목적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 중심에서 중심으로, 인격에서 인격으로, 영혼에서 영혼으로 만날 때 자연스럽게 치유됩니다. [1]
하느님께서 물질을 통해 영을 드러내실 때, 그 물질은 거룩한 것이 됩니다. 물질 세계는 우리가 그 안을 걸으며,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만으로도 하느님을 편히 찬미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예외 없이 하느님의 흘러넘치는 은총의 발현입니다. 그것이 과연 다른 무엇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모든 것을 거룩한 것으로 기뻐할 때, "우리는 우주를 객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주체들의 친교로 경험한다."고 지혜롭게 말한 토사스 베리 신부의 통찰을 체험하게 됩니다. [2]
우리가 어떤 것을 사랑할 때, 우리는 그 안에 영혼을 부여하고, 그 영혼을 바라보며, 그 영혼이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지도록 허락합니다. 어떤 존재의 영혼(anima)을 알기 위해서는 깊은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의 울림이 있기 전까지 우리는 평범한 사물들이 우리를 "구원"하고 모든 존재의 근원과 일치하도록 돕는 의미와 가치, 힘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사실, 나무와 동물 같은 다른 존재들의 영혼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즐길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아마도 자기 영혼조차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영혼은 사랑을 통해 영혼을 알아가며, 그 사랑이란 예수님께서 가장 큰 계명으로 가르치신 바로 그 사랑(마태 22:37–39)인 것입니다. [3]
우리 공동체 이야기
물(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거룩함에 대한 묵상(The meditation)은 제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물은 저의 창조적 상상에 의해 이루어진 세계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런 저의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세상은 깨어진 아름다움에 대한 치유를 중심으로 형성되는데, 그렇기에 그곳에서는 더 많은 존중심이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 세상 안에 하늘 나라를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오직 우리의 눈을 열기만 하면 됩니다.
—Karen B.
References
[1] Adapted from Richard Rohr, The Soul, the Natural World, and What Is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2009). Available as MP3 audio download.
[2] Thomas Berry, The Sacred Universe: Earth, Spirituality, and Religion in the Twenty-First Century, ed. Mary Evelyn Tucker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9), 86.
[3] Adapted from Richard Rohr, A New Cosmology: Nature as the First Bible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2009). Available as MP3 audio download.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iska Vrijburg, untitled (detail), 2017, photo, Netherlands.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우리는 나무와 빛, 사슴을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며 그들을 존중한 다음에야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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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참된 행복은 목적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 속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4장에서 죽게 된 아들을 살려달라는 왕실 관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 4,48).
사실 요한 복음에서의 기적 사건들은 단순히 하느님 자비의 행위라기보다는,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표징으로 제시됩니다. 요한 복음 저자가 이적과 기적이라는 말보다는 표징(표지)이라는 말을 더 선호하여 사용하는 데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표징(표지판)은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표징으로 다른 어떤 것을 찾아가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표징은 표징 그 자체가 아니라 표징이 가리키고자 하는 그 너머를 바라보게 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 깊은 의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 또한 요한 복음의 독특한 주제입니다.
요한 복음은 다른 복음서들보다 한참 뒤에 기록되었는데, 단순히 예수님의 행적을 다시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전승과 다른 복음서들을 통해 알려진 사건들을 더 깊이 묵상하며 그 의미를 드러내려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 저자는 예수님의 기적을 전할 때마다 그 의미를 풀어주는 긴 담화를 덧붙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바로 "생명의 빵" 담화로 이어지고, 눈먼 이를 치유하신 사건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9장)라는 선언으로 연결되며, 라자로를 살리신 기적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장)라는 말씀과 함께 제시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군중을 먹이신 사건 역시 예수님께서 군중의 배고픔을 단순히 채워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더 깊은 영적 갈망을 드러내려는 데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너에게 '물을 좀 다오' 하고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요한 4,10)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4)라고 하십니다.
결국 표징과 기적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길잡이이며,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참된 생명과 영원한 양식을 향해 마음을 열도록 해 주는 주님의 초대장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내면의 더 깊고 높은 본질적 갈망을 추구하도록 초대하시며 권고하십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7).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놀라운 기적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의 배고픔은 채워졌고, 그들의 욕구는 만족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그들은 육체적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분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분을 왕으로 모시고자 했던 것이고요.…
그런데 이런 모습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먹을 것을 주는 이들, 돈을 벌어다 주는 이들, 즉 세상적으로 쓸모있다고 여겨지는 이들이 존경받고 높임을 받는 반면, 노인들, 병자들, 장애인들처럼 물질적으로 기여할 수 없는 이들은 종종 소외되고 무가치하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경향이 세대를 거치면서 더 나쁜 모습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물질의 풍요를 중시하고 내면의 가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경향이 은근히 사람들의 정신과 행위를 통해 무의식 속에서 후대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이런 어두운 모습이 빛(?)으로 둔갑하여 사람들의 정신 속에 파고 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에고의 무의식은 이렇게 우리에게 말합니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라고요.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종종 사람의 "존재"보다 "행위"를 더 높이고, 그 본질보다 그가 하는 일을 더 중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세속적 사고방식의 희생자가 되기를 거부하시고, 또 우리에게 이런 정신구조가 지닌 은근한 어두움이 얼마나 큰 어두움인지를 밝혀 주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을 통해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 6,23).
어떻게 빛이 어둠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 말씀은 우리가 어둠을 빛으로 착각하고 있는 현실을 빗대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더 깊은 차원의 갈망으로 이끌고자 하십니다. 세속적 만족에만 매달리지 않고, 참된 행복, 즉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갈망을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서 발견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에게는 물질적 필요가 긴급할 때가 있지만, 그 너머로 영적이고 초월적인 갈망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자주 의식하고 자각해야 합니다.
사실 참된 행복은 목적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 속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과 감사, 친절과 미소를 나누는 순간들 안에 깃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내면에) 있다."(루카 17,21)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살고자 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있을 저기에서 역시 그 현실은 우리에게 요원한 것이겠지요?!
우리가 매번 주님의 기도(우리 아버지 기도)를 바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청을 드리기는 하는데, 그 하느님 나라의 현실, 즉 '나'를 내어주고, 사랑의 손해를 감수하며, 서로의 약함을 채워주고 이해하며, 서로의 상처를 끌어안아 주고자 하는 정성을 살지 못한다면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 없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참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런 현실을 정성을 기울여 살고자 할 때 그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온전히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이 진리를 외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사랑의 손해만 보면 다른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고, 그래서 문제가 더 커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에고의 계산적이고 상거래적인 정신 구조가 만들어내는 허상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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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0.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호수를 건너 카파르나움으로 몰려 온 군중은 대체 무엇을 찾아 온 것일까요? 또한 우리는 오늘도 무엇을 찾아 헤매고 있는지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 6,26)
그렇다면, 대체 “빵”은 무엇이며, “표징”은 무엇인가?
“빵”은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 것, 곧 육신을 생명을 위해 먹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육신의 생명을 살리는 “빵”을 통해, 당신의 ‘말씀’과 ‘당신의 몸’을 ‘영원한 생명을 위한 빵’이라는 “표징”으로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사실, 군중들은 “빵”으로 육신의 배를 채웠지만, 여전히 배고팠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현세적 음식과 자신들의 이익에만 매달릴 뿐, “참된 생명”인 표징을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7)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우리 주님”으로부터 얻습니다. 바로 당신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양식’(βροσισ)이란 단어는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곧 마을에서 돌아온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좀 잡수십시오.”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4)
그러니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참된 양식’이라는 말씀입니다.
군중들이 “우리가 하느님의 일(들)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하고 질문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8)
여기에서, 군중들은 “하느님의 일들”(εργα)은 ‘복수’로, 자신들을 ‘주어’로 제시하지만,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하느님의 일”(εργον)은 ‘단수’로, 하느님이 ‘주어’로 제시됩니다. 그러니 결국 우리가 할 일은 그분이 하는 일에 전폭적으로 의탁하고 신뢰하는 일이요, 그분이 일하시도록 승복하는 일입니다.
사실, 여기에 나오는 ‘일’(εργα)이란 단어는 ‘음식의 소화’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곧 ‘양식’은 눈앞에 두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입에 넣고 잘 씹어 삼켜야만 비로소 양식이 되듯,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과 그분의 뜻을 ‘믿고 받아들여’ 우리 안에서 흡수하고 ‘실행’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양식을 소화시키는 일은 그 양식을 믿고 받아먹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곧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양식을 얻는 ‘하느님의 일’인 것입니다. 동시에, 이 ‘믿는 일’이야말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소화시켜줍니다.
결국, 우리는 ‘믿음’ 안에서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해 나갑니다. 곧 ‘믿음’은 행위가 되고 실현이 되는 ‘양식’이 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주님!
당신이 주시는 양식을 눈앞에 두고 바라만 보고 있지 않게 하소서.
입에 넣고서 잘 씹어 삼키게 하소서.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완성하는 것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오늘도 당신께서 저와 함께 하시는
당신의 말씀을 이루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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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0.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같은 ‘사건’을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이해와 용서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랑과 믿음의 관점에서 보면 사랑할 수 있고 믿어 줄 수 있습니다. 오해와 원망의 관점에서 보면 오해할 수 있고 원망할 수 있습니다. 미움과 불신의 관점에서 보면 미워할 수 있고 믿지 못할 수 있습니다. 저는 사순과 대림에 특강을 다닐 기회가 있었습니다. 특강을 준비하면서 힘이 들지만 보람도 많았습니다. 특강을 준비하는 마음을 알기에 본당에서 특강이 있으면 꼭 귀담아들으려고 합니다. 지난 사순 특강을 들으면서 모든 것이 성모님께서 준비해 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알코올중독인 본당 신부님을 만나서 힘이 들었지만, 그로 인해서 본당의 사목을 더 많이 배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일을 못 하게 하는 본당 신부님을 만나서 힘이 들었지만, 영어를 배울 기회가 생겼다고 합니다. 그렇게 배운 영어로 나중에 뉴욕에서 공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그 모든 것이 성모님께서 준비해 주셨다고 믿었습니다.
가장 존경하는 신부님이 메주고리예에 다녀와서 회개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놀랐다고 합니다. 교우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사랑이 넘치는 신부님이 회개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더 많이 기도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놀랐다고 합니다. 신부님만큼 기도하는 분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자기의 모습이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았고, 기도하지 않았던 신부님을 하느님의 도구로 불러주셨다고 합니다. 어느 날 아파트 베란다에 비둘기가 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아파트 관리인은 몇 년 동안 근무하면서 비둘기를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부님이 이사 오면서 비둘기가 왔다고 합니다. 그렇게 6개월 동안 비둘기를 보았고, 메주고리예로 순례를 갔다고 합니다. 메주고리예에서 사람들의 모습에 놀랐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손에 묵주를 들고 다녔고, 얼굴에 빛이 났다고 합니다. 마음이 변했기 때문에, 회개했기 때문에 그것이 얼굴로 드러난 것이라고 느꼈다고 합니다.
성당에서 성서를 읽었다고 합니다. 마태오 복음을 읽는데 3장이 눈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받을 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왔고, 하늘에서 ‘이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렸다는 대목을 읽으면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비둘기가 생각났다고 합니다. 성모님께서 비둘기를 보내 주셨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하염없이 나왔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그때부터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평화의 모후 사도회’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특강과 함께 묵주기도와 성시간을 인도해 주었습니다. 성시간이 끝나면서 정성스럽게 ‘안수’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을 만나셨고,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을 때입니다. 제자들은 벅찬 감정을 느꼈다고 합니다. 신부님이 인도하는 묵주기도, 성시간에서 교우들은 영적인 위로를 받았습니다. 신부님이 정성껏 안수해 줄 때 교우들은 치유되었습니다. 그 안수는 마치 두려움으로 물에 빠지던 베드로에게 내밀던 예수님의 손과 같았습니다. 제게도 위로와 용기를 주는 은혜로운 특강이었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최고 의회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 특강을 해 주었던 신부님도 세례명이 ‘스테파노’였습니다. 특강에 함께 했던 분들의 모습이 그렇게 보였습니다. 감사와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빵을 배불리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표징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감사의 마음을 갖는다면 빵은 언제든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참된 구원은 지금 당장 배부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나’를 먼저 신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재물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커다란 능력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아들이 죽었지만 다시 살아났고, 부활하셨다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 믿음 위에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 믿음이 온갖 박해와 죽음까지도 이겨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여러분이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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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0.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08:55 추가.
소수자에 대한 배려, 그것은 품격있는 사회가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문화!
오래전 먼발치에서 송명희 시인을 뵌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과 목청 터지도록 부르던 복음 성가의 작사자를 뵈니 정말이지 큰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으로서 송명희 시인께서 감당해야 할 고통을 참으로 커 보였습니다.
“이렇게 좋은 축복된 자리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짧은 말 한마디를 하시는데,
온 몸을 동원해야만 했습니다.
그런 그분의 마음에서 흘러나온 시구들은 비장애인인 우리들의 가슴을 세게 후려치고 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 나 남이 갖고 있지 않은 것 있으니...”
“예수 그 이름 / 나는 말할 수 없네 / 그 이름 속에 있는 비밀을 / 그 이름 속에 있는 사랑을...”
송명희 시인께서 항상 입에 달고 다니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감사입니다.
“산소 호흡기를 달지 않고도 숨을 쉬고 살아 있음에 감사합니다.”
17살 꽃다운 소녀 시절 송명희 시인은 극심한 고통과 좌절 속에서 아스라이 들려오는 한 음성을 들었답니다.
“명희야! 네 몸이 온전했더라면 네가 나를 알았겠느냐?
두려워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 놀라지 말아라.
나는 네 하느님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그 따뜻한 주님 위로의 말씀에 힘을 얻은 그녀는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온몸과 마음, 혼신의 힘을 다해 쓴 그녀의 시는 세상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유하고 있습니다.
오늘 장애인의 날입니다.
장애인들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오늘 세상의 모든 장애인들을 축복하시고, 그들과 항상 함께 하시며, 송명희 시인에게 그러하셨듯이 큰 위로와 격려를 보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오늘 같은 날 우리 모두 꼭 한 가지 불변의 진리를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떵떵거리며 두발로 서있지만 사실 우리 모두 예비 장애인들입니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우리 모두 장애를 안게 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 우리의 손자손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순식간에 장애를 지니게 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늙고, 길바닥으로 내몰릴 수 있다.
우리의 가족도 언젠가는 사고나 질병으로 장애인이 될 수 있기에, 우리 모두는 잠재적 장애인이다.
선천적인 장애인보다 사고나 질병으로 인한 후천적 장애인의 수가 더 많다.
이 사실은 우리 모두가 언제라도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소수자에 대한 배려, 그것은 세련된 사회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가장 고결한 문화이다.
그것은 돈이나 국가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소수자에 대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진심 어린 이해와 태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박종호, ‘예술은 언제 슬퍼하는가’, 민음사)
과거와 달리 장애에 대한 시선이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부족함이 많습니다.
세상의 많은 장애인들이 차별 대우받거나 고립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되도록 우리 교회는 더욱 발 벗고 나서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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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0. 부활 제3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6,22–29
군중은 예수님을 다시 찾아옵니다.
그들은 빵을 먹고 배부른 경험을 기억하고,
다시 그 만족을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방향을 바꾸어 주십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애쓰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남아 있는 양식을 얻으려고 애써라.”
그리고 “하느님의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한 문장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다.”
오리게네스는
사람이 하느님을 찾는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하느님을 수단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고 말합니다.
기적을 “하느님 자체”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도구”로 만들 때,
믿음은 곧 지치고 흔들립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를 평화/인내의 길로 부릅니다.
평화가 깨지는 순간은 종종
삶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기대한 결과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믿으라고 초대하십니다.
인내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결과가 아니라 관계로 붙드는 힘,
그 힘이 믿음입니다.
오늘 월요일 거룩한 독서의 날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무엇을 ‘양식’으로 삼고 있는가?
내 마음을 살리는 것은
성과인가, 인정인가, 편리함인가,
아니면 주님 자신인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이 흔들릴 때에도
내 중심이 무너지지 않도록
영원한 양식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주님,
제가 당신을 수단으로 삼지 않게 하시고
당신을 당신으로 믿게 하소서.
결과가 늦어도, 길이 멀어도
평화와 인내로
당신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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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0. 부활 제3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Mark Choi님
■ 개떡 같은 관계도 찰떡이 될 수 있을까?!
개떡 같은 관계도 찰떡이 될 수 있을까?!
Can Even Rough Relationships Become a Perfect Match?!
살다 보면 “남자는 첫째 아들이다”라는 우스갯소리를 종종 듣습니다. 어딘가 모르게 보호받고 싶어 하고, 기대고 싶어 하는 모습이 남아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마마보이”라는 말도 따라옵니다.
그런데 가만히 돌아보면, 이것이 꼭 남자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살아가면서 드물지만, 반대로 정서적으로 부모에게 깊이 기대어 있는 여성들도 보게 됩니다.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지만, 중요한 선택 앞에서는 여전히 익숙한 울타리 안에 머물고 싶어 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을 누가 더 낫고 못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모습을 통해 사람의 본성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약한 존재이기에, 본능적으로 기대고 싶은 대상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는 때로 사람에게 향하고, 때로는 관계 속에서 드러나며, 때로는 갈등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관계가 어려운 것도 결국 이 지점인 것 같습니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내가 기대고 싶은 방식대로 상대를 이해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상대의 말이 ‘개떡’처럼 들리고, 마음은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신앙 안에서 바라보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기대기 이전에, 먼저 하느님께 기대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채워질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을 향해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상대가 미숙해 보일 때, 판단하기보다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
상대가 기대려 할 때, 밀어내기보다 한 번 더 품어보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속에서 내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의 모습이 아닐까 묵상해 봅니다.
어쩌면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서로가 완벽해서 이루어지는 ‘찰떡궁합’이 아니라, 부족한 모습을 끌어안기 위해 스스로 한 걸음 내려가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면서 먼저 다가오셨듯이, 우리 역시 관계 안에서 먼저 다가가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개떡 같은 관계도 어느새 찰떡 같은 은총의 관계로 변화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옳은지가 아니라,
누가 더 사랑하려 하는 것인지가 아닐까요?!
We often hear the joking expression, “a man is like the first child in the family.” It suggests that there is still a part of him that wants to be cared for and leans on others. That is why the term “mama’s boy” naturally comes up.
But when we reflect more deeply, this is not something that applies only to men. In life, although rarely, we also see women who are deeply emotionally dependent on their parents. Outwardly they may seem strong, yet when it comes to important decisions, they still prefer to remain within a familiar emotional shelter.
This is not meant to judge who is better or worse. Rather, it reveals something about human nature. We are all vulnerable beings, and we naturally seek someone or something to lean on. That dependence sometimes turns toward people, sometimes appears within relationships, and sometimes becomes the source of conflict.
This is where relationships often become difficult. Instead of seeing one another as we truly are, we tend to interpret others through the lens of how we want to be supported. When that happens, even simple words can feel like “rough rice cakes” that are hard to swallow, and distance grows between hearts.
Yet from a spiritual perspective, we are invited to take one step further. Before leaning on others, we are called to lean on God first. And when we are filled in Him, we are able to extend patience and space toward others.
When someone appears immature, we try not to judge but to understand.
When someone leans heavily on us, we try not to push them away but to embrace them once more.
And in all of this, we are called to lay down our pride.
Perhaps this is what love truly looks like.
Love is not simply a “perfect match” where both sides fit flawlessly like rice cakes. Rather, it is often formed when one is willing to step down in humility to embrace what is imperfect.
Just as the Lord came to us first, fully aware of our weaknesses, perhaps we too can become those who take the first step toward others. And then even relationships that once felt mismatched may, through grace, be transformed into something like a harmonious union.
In the end, the question is not who is right,
but who is willing to lov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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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강만연 (fisherpeter) 2026-04-19
찬미예수님! Mark Choi님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좀 더 새로운 묵상을 하게 돼 감사드립니다. 어제 제가 이와 비슷한 글을 올렸을 때 약간 비몽사몽인 상태에서 올렸는데 나중에 새로운 버전으로 다시 한 번 더 각색을 해보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Mark Choi (mychoi1960) 2026-04-19
찬미예수님! 강만연님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로운 묵상도 기대하겠습니다. Thank you for your thoughtful response. I look forward to your new reflection as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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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0. 부활 제3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Mark Choi님
■ 말씀은 앞서지만, 삶은 따르지 않는 신앙?!
말씀은 앞서지만, 삶은 따르지 않는 신앙?!
교회 안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때로는 깊은 슬픔과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믿음을 말로는 고백하지만, 삶 속에서는 그 말씀이 드러나지 않는 모습을 마주할 때 마음이 무겁습니다.
특히 같은 공동체 안에서 상처를 경험할수록,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 묻게 됩니다. 왜 우리는 말씀을 알고도 실천하지 못하는가, 왜 사랑을 말하면서도 사랑하지 못하는가 하는 질문이 마음 깊이 남습니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결국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나 또한 말씀을 말로만 앞세우고, 삶으로 살아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조용히 성찰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야고보서 2:17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단순한 지식이나 말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는 믿음을 살아가야 함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Faith that speaks, but does not live?!
As I observe many people within the church, I sometimes feel a deep sense of sorrow and confusion. While faith is often professed in words, it is not always reflected in daily life, and this disconnect weighs heavily on my heart.
Especially when wounds are experienced within the same community, it leads me to question the true nature of faith. Why do we fail to practice what we know? Why do we speak of love, yet struggle to live it out?
In the midst of these reflections, I am ultimately led to examine myself. Am I also someone who speaks of the Word, yet fails to embody it in my life?
Scripture reminds us clearly:
“Faith by itself, if it is not accompanied by action, is dead.” — Epistle of James 2:17
Before this truth, we are called not merely to speak or know, but to live out a faith that is visible through our a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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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Mark Choi (mychoi1960) 260420. 02:23
찬미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ㅡ 루카복음 6:46
이 말씀은 단순한 책망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드러내는 거울과 같습니다. 또한 이렇게 이어집니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고,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ㅡ 루카복음 6:43
결국 신앙은 말이 아니라, 삶의 열매로 드러납니다.
Mark Choi (mychoi1960) 260420. 02:26
찬미예수님! Jesus said:
“Why do you call me, ‘Lord, Lord,’ and do not do what I say?” ㅡ Gospel of Luke 6:46
This is not merely a rebuke, but a mirror revealing where our faith truly stands. He also taught:
“No good tree bears bad fruit, nor does a bad tree bear good fruit.” ㅡ Gospel of Luke 6:43
In the end, faith is revealed not by words, but by its fru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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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0.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8:50 추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이튿날, 호수 건너편에 남아 있던 군중은, 그곳에
배가 한 척밖에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를 타고 가지 않으시고 제자들만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티베리아스에서 배 몇 척이, 주님께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 빵을 나누어 먹이신 곳에 가까이 와 닿았다.
군중은 거기에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그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2-29)>
1)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그것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이라는 말을,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바라시는 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을 하는 것이다.” 라는 뜻이 됩니다.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내가 바로 메시아다.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원한다면 나를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빵의 기적’에서 메시아의 표징을 보지 못하고 빵만 보았다.
그래서 나에게 와서 ‘영혼의 구원’은 청하지 않고
‘몸의 배부름’만 청하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는, “허무한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려라.”입니다.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는, “너희는 ‘영원한 생명’만 추구하여라.”입니다.
2) 예수님께서 ‘일용할 양식’의 필요와 가치를
부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일용할 양식’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하고, ‘몸의 건강’도 필요합니다.
정말로 배가 고프고, 정말로 몸이 아플 때에는
신앙생활 자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은, 사람들에게 살아갈 ‘힘’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 ‘힘’은 하느님 나라까지 잘 걸어가는 데에 필요한 보조 수단일 뿐이지 인생의 목적은 아닙니다.
‘몸의 배부름’과 ‘몸의 건강’만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은,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는 일이고,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3) ‘낙타와 바늘귀’ 이야기에 나오는 ‘어떤 사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마르 10,17).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0,21-22).”
재물이 많은 사람이든지 하나도 없는 사람이든지 간에, 영원한 생명보다 재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4)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간 그 사람은, ‘간절함’이 부족했던 것일까?
실천하려는 의지가 부족했던 것일까?
우리는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하는데,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굶고 있는 사람은 몸도 병들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비참한 심정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 상황에서는 하느님 나라나 영원한 생명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정말로 몸이 아파서 고생하는 사람들도, 그리고 정말로 큰 불행을 만나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고통을 경험해 본 적도 없고, 그런 상황에 있는 이들의 심정도 모르는 사람들이 신앙생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듣다보면, “신앙생활이란, 먹고사는 데에 어려움이 없는 사람들의 취미생활인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배고픈 사람들의 사정을 모르고서
‘썩어 없어질 양식’이라는 말을 사용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직접, 그리고 늘, 배고프고 고달프고
힘든 생활을 하신 분입니다(루카 9,58).
<지금 먹을 것이 있는 사람은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혼자서만 배불리 먹는 것은 죄악입니다.
사랑 실천이 없는 양식은 모두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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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0. 부활 제3주간 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6:00 추가.
요한 6,22-29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우리는 이런 말을 입버릇처럼 반복하곤 합니다.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우리가 힘들고 어렵게 일을 하는 것은 ‘먹고 살기 위해’, 즉 조금이라도 더 좋은 것을 먹으며 더 즐겁게 살기 위해서인 것이지요. 그렇기에 인생 최대의 관심사는 ‘먹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언제나 ‘맛집’을 찾고, 몸에 좋은 것을 찾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데에, 제대로 살기 위해 필요한 양식은 그게 다가 아니지요. 사리분별을 제대로 하고 올바른 판단을 하며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배워서 머리에 지식을 채워야 합니다. 내가 관계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며 마음에 감사와 기쁨을 채워야 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나와 내 삶을 바라보며 마음에 믿음과 희망을 채워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찾아다니는 군중들은 지극히 일차원적인 양식, 즉 굶주린 배를 채워줄 ‘음식’만을 찾습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이용하여 그 음식을 넉넉히,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생각만 할 뿐, 자기들을 성숙시켜주고 완성시켜 줄 참된 양식을 찾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그들의 마음가짐은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에서도 드러나지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놀라운 기적을 직접 체험하고도 그분을 ‘라삐’라고 부릅니다. 이는 예수님 시대에 널리 사용되던 사회적 존칭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잘 모르는 상대방을 ‘선생님’이라고 높여 부르는 것과 비슷하지요. 즉 그들은 예수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신 것을 보고도 그분을 자기들을 구원하시며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들에게 현세적 이익을 가져다 줄 ‘높은 사람’, ‘권력자’ 정도로 생각하여 이용하려고 들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물론 우리는 하루 하루 우리의 육적 생명을 유지해주는 양식도 주님으로부터 얻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청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그분께 청해야할 것은 그런 물질적인 양식만이 아닙니다. 물질적인 양식은 탐욕과 집착으로 과하게 가지고 있어봐야 오히려 나를 영적으로 병들게 만들 뿐이니 그것은 꼭 필요한 만큼만 청하되, 그 대신 나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만드는 참된 양식을 청해야 합니다.
그 참된 양식이 무엇인지에 대한 힌트는 요한 복음 중에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는 장면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음식을 잡수시라고 권하자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청하고 찾고 바라야 할 참된 양식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믿음과 사랑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와 완전한 일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완전한 일치를 통해 하느님께서 누리시는 참된 기쁨과 영광을 그분과 함께 누리는 것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해 추구해야 할 ‘영원한 생명’의 본질인 것이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뜻은 그리 거창하거나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분, 즉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분을 진정으로 믿으면 그분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을 누가 억지로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마음에서 우러나서 실천하게 될 테니까요. 그러니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싶다면 엉뚱한 데서 찾지 말고 일단 신앙생활부터 충실하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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