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첫 도읍지 | |
요녕성의 중심 심양에서 홀본성(졸본성, 오녀산성)이 있는 환인까지의 길은 순탄하지 못하다.
옛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나라를 세우고 첫 도읍으로 정한 곳, 홀본성!!! 홀본성. 우리는 대개 고구려의 수도를 평양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평양은 국내성에서 427년 천도 이후 668년까지 2백41년 동안만 수도였을 뿐이다.
거의 두배 가까운 기간인 4백64년 동안
고구려는 압록강 이북에 수도를 두고 광활한 대륙의 땅을 경영했다.
그 첫 출발점이 된 곳이 홀본성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주몽은 3현인과 함께 비류수(홀본천)에 이르렀다.
그 땅이 기름지고 경치도 좋았으며 산과 강이 험하고 견고했다.
마침내 도성으로 정했지만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비류수 가에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에서 나오는 홀본성과 위례성(서울), 나정(경주) 등
삼국시대의 건국신화의 주요 무대들이 본격적인 발굴을 통해
신화가 아닌 당당한 '역사'로서 다시 태어나고 있는 시점이고 보면
홀본성을 본다는 것은 곧 고구려의 그 힘찬 출발을 함께 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지난 수 해동안 홀본성은 중국의 고구려사 폄훼의 한 가운데 서 있었기에
더욱 감회가 남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오녀산성의 여명. 산성 오른쪽부터 아침햇살에 붉게 물들고 있다.
오녀산성은 해발 8백m가 넘는 고지다. 남북으로 1km가 넘고 고원의 평지 넓이는 30만㎡에 이른다.
오녀산성 오르는 돌계단. 세계 문화 유산에 등록하기 위해 새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991계단.
이 전에는 십팔반(十八盤)이라고 해서 지그재그로 열여덟 굽이를 돌아서 올랐다.
고구려를 굳건히 지켜주던 자존심이었고 고구려 900년의 역사가 여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중국 학자들은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홀본성이 고구려 성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80년대 중반부 이루어진 오녀산성에 대한 발굴 조사에서 고구려의 초기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중국학자들도 오녀산성이 고구려의 성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산성 중앙에 왕궁터가 발굴되었고 곳곳에 병영터와 곡식 창고도 발굴되었다. 대량의 질그릇과 철기, 갑옷비늘 등이 나왔다. 병영은 온돌구조로 되어있었다. 이제 이 오녀산성이 고구려의 왕궁이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게 되었다.
산성 정상에 있는 우물 천지(天池). 바위틈에서 솟아나오는 샘물을 모아놓는 저수조의 역할을 했다.
이른 아침에 토끼 한마리가 우물가에 물을 마시러 왔다가 발자욱만 남겨 놓았다.
우물이 깊어 세수도 못하고 갔나보다.
오녀산성에 남아있는 왕궁터. 유적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산성의 한가운데 위치한다. 왼쪽 아래쪽에 주춧돌 자리가 눈을 헤치고 반쯤 모습을 드러내고 객을 맞았다.
거대한 맷돌. 소나 말이 맷돌을 돌려야할 만큼 거대했다. 어처구니는 조잡하게 만들어 끼워놓았다.
서문의 성곽터.
오녀산성을 둘러본 뒤의 느낌은 오녀산성은 평상시에 왕이 기거하던 왕궁터가 아니라 전쟁 등 비상시에만 왕궁으로 사용되던 일종의 '행궁'이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오녀산성에서 서쪽으로 3km 지점에 하고성자성(下古城子城)이라는 평지 토성이 있는데 고구려 건국 초기의 축조양식이며 청동기시대부터 이 성터에는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에서는 평상시에는 평지성에 거주하다가 외적이 침입하면 산성으로 들어가 방어하는 도성체계를 가지고 있어, 하고성자성이 평상시에 거주하던 평지성이고 오녀산성이 전쟁시에 거주하던 성이라는 학설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점장대. 동쪽 끝.
오녀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댐으로 생긴 호수와 동쪽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국내의 여러 자료들에는
오녀산성의 높이가 820m라고 되어있지만 점장대를 설명하는 안내판에는 804m로 표시되어 있다.
혼강댐에 물이 차면서 수많은 고구려의 유적들도 물속에 잠기고 말았다.
오녀산성의 남쪽과 서쪽은 수십길 낭떠러지이다. 동쪽 사면을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한 천연의 요새이다.
당시의 주거모습을 재현해 놓은 가옥.
오녀산성 오르는 길부터 산성 곳곳에 설치된 감시카메라.
오녀산성 입구에 설치된 안내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후 입장료가 40위안(약5천원)으로 내국인 관광객들에게는 비싼편이다.
오녀산성의 동남쪽을 지나 환인(桓仁)현을 태극모양으로 휘감아 도는 혼강(渾江)의 새벽.
광개토대왕비에 '옛날 시조 추모왕(鄒牟王, 주몽)께서…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에서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於沸流谷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 비류곡이 곧 압록강의 지류인 혼강이다. 심양에서 환인에 이르는 길은 모두 옥수수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무위에 주렁주렁 매달린 옥수수가 척박한 환경에서도 생명을 지탱해준 원천이기도 하다.
오녀산성에서 서쪽으로 수십km 떨어진 곳에서도 산성의 위용은 여전하다. 앞에 보이는 촌락은 조선족들이 모여사는 마을이다. 중국 속의 고구려사가 왜곡되고 시련을 겪은 만큼
이 곳의 조선족들도 중국 속의 소수민족으로 강제 이주와 전쟁, 문화 혁명을 겪으면서 고단한 삶을 이어왔다.
입구에 '오녀산산성'이라고 새긴 석조물에 유네스코 마크가 선명했다.
본래 '홀본성'이었던 이 곳이 '오녀산성'이 되었는지는 설명한 곳은 없었다.
오녀산성이라는 이름은 이 곳 주민들의 설화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옛날 검은 용이 내려와 이 지역 사람들을 괴롭혔었는데, 이곳에 살던 다섯 자매가 홀연히 나타나 용과 용감히 맞서 싸우다 용과 함께 죽었다. 그 후로 마을을 지키고 죽은 다섯 처자들을 기리기 위해 '오녀산성' 이라 부르기 시작했단다. 입구에서 산성을 바라보면 까마득한 돌계단이다. 본래는 지그재그로 가파른 비탈을 올라가는 길이었지만 991개의 돌계단을 새로 만들었다. 한 번도 쉬지않고 계단을 오른다. 약 150m의 고도를 올려야 했다. 돌계단이 끝나는 곳에 거대한 바위 사이로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작은 틈새가 있어 이 곳이 비로소 오녀산성 정상에 이르는 마지막 관문임을 짐작할 수 있다. 바위에 '창천문(昌天門)'이라고 새겨져 있다. 아마도 하늘로 이어지는 문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문득 지리산 천왕봉에 이르는 등산로에 있던 '통천문(通天門)'이 떠올랐다. 창천문을 지나자 드디어 평지가 나타났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이 넓은 평지가 어떻게 생겨났을까. 오녀산성은 그 모양이 독특해서 수십리 떨어진 곳에서도 금방 눈에 띄고 그 위에 올라서면 주변 동서남북 수 십리가 역시 한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적의 움직임을 쉽게 파악하고, 성을 굳게 지킬 수 있는 천연의 요새가 된 것이다. 평지 한 가운데에는 우물이 솟아나서 식수도 염려가 없었다. 주몽이 이 터를 처음 둘러보고 무릎을 쳤을 것이다. 그 평지에 궁성을 짓고 ,곳간도 만들고 ,병영터도 만들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성이 될 터였다. 동서남북의 삼면은 바위 낭떠러지여서 방금 지나온 서쪽문 하나와 동쪽의 경사면만 경계하면 쉽게 수성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동쪽 접근로에는 돌성을 쌓았다. 여기저기 안내판이 붙어있다. 왕궁터와 천지를 보고 장대에 올랐다. 가장 높은 곳이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찬바람 앞에 가슴을 드러내고 맞서 보아도 답답한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이 땅의 주인으로 만주를 호령하던 옛 고구려의 기상은 여기 한 줌 흙 속에 파묻혀서 유물로만 남아 있아있지 않은가. 동남쪽으로 혼강댐에 잠긴 고구려의 영토가 끝없이 펼쳐진다. 저 구름너머에 백두산이 있을 것이다. 남서쪽으로는 혼강을 끼고 환인 분지의 넓은 벌판이 한 눈에 들어온다. 조용히 밤을 기다리자. 밤이 되면 별이 뜨리라. 고구려의 영광과 고난을 지켜본 별들의 아우성에 귀기울이는 것...영광의 그 날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아! 고구려~ 우리 민족의 위대함이여~~~ 박사모의 회원님들...한 해 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영광의 그날을 기다리며 새해에는 더욱 더 단결된 모습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새 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 그리고 건강하십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