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 창세기 3:1-8 “ 유혹 ”
성경에 나타나는 최초의 유혹이 오늘 읽은 말씀입니다. 최초의 유혹이 어떻게 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면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얼마나 교묘한 질문입니까? 분명히 금하신 것이 선악과 하나인데 모든 나무의 과실을 먹지 말라더냐 며 물어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이 ‘예 할 것은 예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해야 하는데 여기서 지나치는 것이 악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지요? 그러니 예 아니요의 대답이 아니라 어중간한 대답입니다. ‘우리가 동산 나무 과실을 다 먹을 수 있지만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다.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하셨다’라는 대답이 아니라 여운을 두는 것입니다. ‘죽을까 하노라’ 안죽을 수도 있을거라는 여운을 두는 겁니다. 이 틈새를 노리고 들어오지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면서 거짓 확신을 심어 주면서 왜 못 먹게 하였냐를 설명합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기에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우리의 유혹도 꼭 이처럼 다가옵니다. 성경에 술먹지 말라는 말이 어디 있느냐 술 취하지 말라고 했지 나는 술 취하도록 먹지는 않는다 하면서 자신의 술 먹는 것을 정당화 하지요 그러면서 성경을 좀 더 안다는 사람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말을 가지고 약으로 쓰도 된다고 하지요? 그러나 이러한 것은 사실 자기 정당화의 방편으로 말씀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술을 즐기기 위하여 이런 말을 하는 자는 잠언서를 한번 보셔야 됩니다. 잠언 23: 29-39 한번 읽어 봅시다.
31절에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이미 술을 즐기는 자는 중독된 것입니다. 이런 자는 술을 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보는 순간 그 유혹을 이길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유혹 보다는 더욱 심각한 유혹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서 끊어내려는 유혹입니다. 사단의 유혹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려는 것이 유혹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이 하나님과 대등해지기를 원하는 것이 유혹의 본질입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이 자신이 언제나 중심이 되고자 하는 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입니다. 어떤 모임에서도 사람들이 큰소리가 나는 것은 자신이 신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말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나이나 계급이나 힘에 눌려서 그렇게 못할 뿐이지 다른 사람에게 단 마음으로 순종하기란 사람으로는 불가능 합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는 경우도 있고 무협소설 같은데서는 그것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러한 것도 하나의 영웅아래 작은 영웅이 되는 것이기에 그 조직과 단체를 위하여 희생함으로 자신은 신으로 남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혹이 이미 우리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 시작이 어떠합니까? 여자가 선악과를 보니, 보니까 유혹이 더 생기는 것입니다. 견물생심이라고 좋은 것을 보지 못하였다면 유혹이 없을텐데 좋은 것을 보니 유혹이 더 생기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보니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먼저 따먹고 남자에게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책임을 여자에게만 돌리는데 사실 책임이란 남자에게 있습니다. 그 대표가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타락을 아담의 타락이라고 합니다. 여자가 함께 있는 아담에게 주었지요. 함께 있으면서도 말리지 않은 것은 자기도 함께 유혹을 받은 것입니다. 이 결과 사람에게 모든 죄된 본능이 다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일 저녁에는 선악 체계에 대하여 말씀드렸지요? 인간의 범죄후의 선악의 기준은 자기에게 이익이면 선 손해이면 악,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이 스스로 선과 악을 결정하여 행동함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이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 사람에게 본능적인 욕망으로 자리 잡은 세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금 금요일 저녁에 세부적인 것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만 오늘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선악과를 본 첫째 느낌이 무엇입니까? 먹음직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체의 정욕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17절을 봅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첫째가 먹음직이지요. 이것이 육신의 정욕입니다. 먹어야 한다는 본능이지요. 이것은 비단 밥만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먹는다는 표현을 하지요 저속한 표현이지만 예쁜 여자를 보고 남자들이 뭐라고 하나요? 따 먹는다고 그러지요. 이것이 육신의 정욕적인 표현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다른 경쟁업체를 어떻게 한다고 합니까? 잡아먹어야 한다고 그러지요?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이 먹음직한 유혹, 육신의 정욕에 의하여 지배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 욕망 속에 살다가 한평생을 보냅니다. 이것을 경제적인 욕망이라고 합니다.
둘째가 어떤 유혹입니까? 보암직하지요. 이것이 안목의 정욕입니다. 일단 먹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보는 것이 즐겁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죠. 배고픈데 무슨 금강산 입니까? 그러므로 경제적인 욕구가 어느 정도 채워져야만 보암직한 것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치적인 욕망이라고 하는데 예술이 보암직한 행위이지요. 특히 순수예술을 하는 자는 더욱 자신의 예술 행위를 보암직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대중이 인정을 하지 않아도 아직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자신의 예술성을 스스로 미화하면서 지내는 것입니다. 국산 영화 치고는 아주 돈을 많이 들인 영화 가운데 ‘쉬리’와 ‘이재수의 난’이 있는데 전자는 한국영화의 신기록을 세우며 흥행에 성공하였고 후자는 흥행에는 참담한 실패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실패한 감독이 자신은 시장성을 염두에 두는 감독이 아니라 작가주의 감독이라면서 볼 줄 아는 자만 보라는 식입니다. 이러한 것이 안목의 정욕입니다. 예술 뿐 아니라 정치를 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정치활동은 철저하게 남을 위한다고 합니다. 이것도 보암직한 유혹 안에 있는 것입니다. 또한 사회에서 봉사활동을 주업으로 하거나 사회사업을 하는 자들도 남을 위해 멋있는 일을 하는 것이지요. 결국 사람들이 스스로 이루어 낸 업적들을 인하여 스스로들 보암직해 하면서 자화자찬하고 있는 것이 안목의 정욕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 한다는 우리 안에도 얼마든지 들어 있습니다. 교회를 위한다고 하는 것이 자신의 욕망에 붙들려 하는 줄도 모르고 그것이 주님의 일인 양 알고 행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신은 주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일하였다고 하는데도 자신의 정치적인 욕망에 붙들려 하는 것이지요. 이런 자를 주님께서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르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일이야 많이 하였지요. 교회를 위해서도, 노회를 위해서도, 총회를 위해서도 총회장도 지내고 크고 굵직 긁직한 일을 이루어 놓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야망을 위하여 한 것이라면 주님과 아무를 상관없는 일입니다. 장유에 제 친구가 전도사로 있는 교회에 얼마 전에 장로 투표를 하였는데 예배드리고 나서 투표하는데 갑자기 살벌해 지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작은 교회안의 일만이 아니라 총회 안에서 총회장 되기 위하여 수억 원을 쓴다는 말이 다 알려진 것입니다. 이런 것이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이루는 것이지 어찌 주님의 일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먹는 문제 해결되고 나면 무엇에 관심을 가집니까? 멋에 관심을 가지지요. 어떻게 보암직하게 보일까? 겉멋만이 아니라 속멋까지 내려고 하지요. 이 모든 것이 안목의 정욕입니다. 중,고등학생 중에 교회를 나오다가 안나오는 아이가 있어 왜 안나오느냐고 알아보니 입고 나올 옷이 없어서 못 온다고 그럽디다. 정말 옷이 없어서 벗고 있을 정도는 아니지요. 멋있는 옷이 없어서 그렇지요?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멋내는 일에 관심을 많이 둡니까? 이 모든 것이 안목의 정욕에 붙들려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오실 때 너무 좋은 옷 안입고 오셔도 됩니다. 앞으로 저도 양복 안입고 강단에 설 생각을 합니다. 물론 이것도 또 다른 안목의 정욕이 될 수 있습니다. 목사가 양복 안입고 설교하더라 멋있지 않느냐 하는 식이 되면 역시 안목의 정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일에 관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였지요. 결국은 자신이 신의 지혜를 가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적인 욕망입니다. 이생의 자랑입니다. 다른 사람은 자기 잘먹고 잘 입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자신은 많은 선행을 쌓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이 영역에서 자기를 신격화 하는 것입니다. 보통사람으로는 안될 만큼 뛰어난 능력을 소유합니다. 절제하고 금욕하고 세상의 것들과 차별화된 종교의 영역을 만들어 갑니다. 그리고는 점점 집단화 하여 이 집단을 신성시하고 신비화하여 나갑니다. 이러한 종교적인 욕구가 이생의 자랑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신처럼 되고자 하고 자신이 신이 못되면 특별한 신적인 자 앞에 엎드림으로 그 신의 후광을 입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아무리 P.D수첩에서 사이비 종교 들추어내어도 그들은 여전히 이탈하는 자 없이 건재한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정명석 교주에 대하여 다루었지요. 그런데 몇주 전에 제가 창원대 앞에 주보 복사하러 갔더니 그 집에 새벽말씀이라는 표지의 책을 만들어 놓았길래 누가 이렇게 열심히 새벽기도 설교내용까지 책으로 만들어 보는가 하고서 잠깐 보았는데 성경을 이야기 하면서 엉뚱한 이야기를 합니다. 골키퍼를 8명을 세워 놓고 공을 차 넣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자신이 매일 새벽에 수천 번씩 연습하고 또 자신이 모든 부분에 통달하듯이 말하는 그런 내용인데 그런 것을 믿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얼마 있으니 젊은 여자들 몇 명이 그 책을 찾아갑디다. 이러한 세계 안에 있는 자들은 계속하여 종교적인 욕구에 붙들려 있기에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종교를 금하시고 있습니다. 십계명의 1,2,3계명이 어떠한 종교도 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본능들이 우리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도 모르게 이러한 본능을 정당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욕망덩어리를 어떻게 해야 구원하실 수 있습니까? 어떠한 종교적이 규칙과 고행을 제시하면 인간의 종교적인 본능이 있기에 다 해내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가 속한 종교 단체를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죽이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의 없음을 철저히 인식하고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나의 구원이 없습니다 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위하여 주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시고 그 시험을 이겨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종교에 담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 복음의 능력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예수님의 시험 받으심을 잘 알지요. 처음 아담이 유혹을 이기지 못하였는데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세 가지 유혹을 모두 이겨내신 것입니다.
첫째, 40일 주리신 후에 돌로 빵을 만들어 먹어라, 먹음직 이지요. 육신의 정욕이지요, 경제적인 욕구를 어떻게 물리치십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씀 하시지요. 둘째, 산위에서 세상의 영광을 보여 줍니다. 나에게 절하면 이 모든 영광을 너에게 주겠노라. 보암직 이지요 안목의 정욕이지요, 정치적인 욕망입니다. 어떻게 물리치십니까? 주님께만 경배하라고 하시지요. 셋째,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 종교적인 슈퍼스타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생의 자랑이요, 종교적인 욕구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물리치십니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물리치십니다.
이러한 세 가지 유혹이 우리가 선악과 따먹은 후의 본능적인 죄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해방되는 길은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이 모든 유혹을 이길 수 있다면 주님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이 믿음도 주님이 주신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을 주님께서 주셨기에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혹은 우리에게 계속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유혹에서 이길 수 있음은 오직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상의 정욕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 안에 이 유혹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의 죄된 본능들이 사실은 서로 서로 묶여 있는 한 덩어리의 욕망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라는 것이 교회의 이슈입니다.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시장조사를 하듯이 사람들이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분석하여 사람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면 사람은 몰려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뜬다는 교회들의 모습입니다. 이미 미국에서 오래전에 시행하는 방법을 그대로 도입하는 것이지요. 뒤에 있는 교계신문을 보시면 잘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도 교회 컨설팅을 해주는 곳이 생긴 것입니다. 안그래도 욕망 덩어리에 욕망의 불을 붙이니 불나방이 죽을 줄 모르고 불에 달려 들 듯이 달려들고 있는 그러한 유혹에 속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요한일서 2:15-17까지 한번 더 읽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06. 창세기 3:9-24 “ 찾아오시는 하나님 ”
아담이 범죄후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범죄한 인간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하시면서 찾아오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찾아오시지 않고 범죄하였으니 그대로 벌받아 죽으라 하셔도 할 말이 없는 죄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담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삭개오 이야기를 잘 압니다. 세리장 삭개오, 키가 작은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보기 위하여 뽕나무 위로 올라갔지요. 이것을 가지고 얼마나 다르게 설교가 되는지를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부분 삭개오 이야기를 하면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보기 위한 일에 초점을 맞춥니다. 유도순 목사님이라고 나이 많으신 목사님이 어느 부흥회를 참석하였답니다. 자기 집에서 가까운 곳이고 또 교계에서 아주 유명한 부흥사이기도 하여 한번 참석하였는데 그 본문이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는 장면인데, 모든 초점이 삭개오에게 있더라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어떻게 준비 하였으며 어떤 자세였는지 그렇게 열심히 만나려 하였기에 주님을 만났다는 설교를 듣고서 분노를 느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설교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죄인 삭개오를 찾아오신 것이 놀라운 복음의 사건이지 어떻게 죄인이 만나기로 한 그 일만을 그렇게 부각시키느냐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면서 삭개오를 부르지 않고 지나가셔도 할 말이 없는 자가 삭개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부르신 것은 이미 주님께서 삭개오를 부르시기를 작정하시고 삭개오를 부르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삭개오에게로 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이며 주님의 놀라운 은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관점이 옳다고 보십니까?
삭개오가 준비를 잘 하였기에 그 준비에 주님이 감동되어 삭개오를 만나 주셨다고 가정한다면 아직 죄가 무언지를 모르고 인간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 지은 인간은 결코 주님을 찾아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거저 두려워하여 도망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죄인이 스스로 하나님앞에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후에 제일 먼저 한 일이 자신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가리고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스스로 어떤 신을 찾아 나간다면 그런 신은 우상입니다. 이름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든 천주여 라고 부르든지간에 스스로 자신의 정성을 바침으로 신의 마음을 움직여 자신의 소원을 이루고자 사람이 찾아가는 신은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 신은 결국 자기를 위한 신입니다. 자기를 지키고 자기 집을 지켜주고 자기 나라를 지켜주는 그런 수호신으로서의 신을 찾아가는 종교적인 본능을 성경은 거부합니다.
십계명의 제 2계명에 보면 너를 위한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나를 위한 것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예수 믿어 내가 덕을 보려고 하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기에 주님을 섬기고 찬양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사람의 제일된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모든 삶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놓고 복 안주나 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섬기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을 섬기지 않는 것은 벌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까?
첫째,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십니다. 따 먹지 말라 하신 선악과를 따먹은 책임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 아담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고 나무밑에 숨는 일입니다. 죄 지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이제부터 모든 인간들은 스스로의 재주를 가지고 자신을 가리워 가는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부실합니까?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린들 제대로 가리워지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나마 가리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만들어 내는 문명이 바로 바벨탑입니다.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자신들의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행위입니다.
홀로 하나님 앞에 서기가 두려운 것입니다. 다수 속에서 힘을 가지고자 합니다. 홀로 단독자로 주님 앞에 서야 하는데 스스로 군중속에 숨어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전으로 여기고 힘으로 여기는 것이 범죄 이후에 자신을 가리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라도 자신의 떳떳하고 당당한 모습을 가지고 나가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는 것과 같은데도 이러한 스스로의 가리는 일을 그만 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경남 기독교 연합회에서 8월 15일 창원 공설 운동장에서 연합으로 예배드린다는 공문이 두 번이나 왔습니다. 그 제목이 ‘광복 54주년 기념 경축예배 및 단군신상건립 저지 기도회’ 라는 것입니다. 이 제목으로 모이는 것도 우스운 이야기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광복을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면 됩니다. 그런데 왜 꼭 연합하여 예배를 해야 합니까? 올 봄에 부산 사직 실내체육관에 부활절 연합예배에 참석해 보았더니 이건 예배가 아니라 사람들의 수를 결집하여 세를 과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도 않는 시장이 와서 무슨 경축을 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단군신상 건립한다고 사람들이 우상숭배라고 하는데 성경은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교회가 단군신상보다 더한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줄 모르는 것입니다.
시편 8편 2절에 보면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 라고 말씀합니다. 어린아이와 젖먹이가 대적을 친다는 것은 사람의 수나 힘의 결집을 하나님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언제 예수님께서 세상의 여우같은 헤롯을 세력 규합하여 대적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그런 곳에 관심 없습니다. 주님의 관심사는 이 땅에 속한 나라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이 주님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나라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 나라에는 어떤 사람들이 들어갑니까? 주님의 택한 자들만 들어가는데 이들의 특징은 세상의 힘을 의지하지 아니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경남기독교연합회의 공문에서 몇 가지 당부의 말씀을 드린다면서 많이 참석하여 힘을 모아 주십시오 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 힘을 모아 단군상 건립을 저지 하겠다는 발상이 이미 비성경적입니다. 성경 어느 곳에도 이런 힘을 요구하지 아니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대형집회를 계속 마련합니다. 여의도에 몇십만 명이 모였다 기독교의 세력을 보라 하니까 천주교에서 더 많이 모였다 그러니 불교에서도 연합집회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인생은 수에 칠 가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만이 모아놓는 것이 세상에는 통하지만 주님의 나라에는 통하지 아니합니다.
지금 세계 인구가 60억이 넘었습니다. 60억 인구 중에 예수님 재림시까지 단 한명만 예수 믿었다고 하면 재림을 연기 하실까요? 그대로 집행 하실까요? 나머지 59억9천9백9십9만9천9백9십9명이 모두 예수 안믿었다면 주님께서 타협하시겠습니까? 구원받은 자가 너무 적다 전도 열심히 해라 재림연기 한다 그러지 않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때 단 한 가정 외에는 몽땅 수장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안에 들어 있지 아니하면 수에 치지도 아니합니다. 그런데 수를 모아 힘을 모아달라고 하는 것이 이미 어린아이와 젖먹이가 되기 싫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스로 가리는 힘으로 가리려는 죄된 모습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담을 그대로 두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나뭇잎 갈아입느라고 세월 다 보내었을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짐승을 희생시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찾아 오셔서 가리워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아무리 힘을 모으고 멋진 일을 이루어 낸다고 하여도 우리가 한 일은 나무 잎사귀로 가린 것임을 알고 오직 주님 가리워 주시는 것으로만 가리움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주님이 찾아 오셔서 하신 약속이 무엇입니까? 15절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사이에 싸움이 일어날 것인데 뱀의 후손은 발꿈치를 상하게 하고 여인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이 세상은 두 편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한쪽은 뱀의 후손으로 한쪽은 여인의 후손으로 서로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뱀의 후손의 특징은 뱀처럼 생긴 것이 아니라. 뱀의 유혹을 받은 그 특징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스로 신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악체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제 신은 필요없다 우리가 신이다 자 이제 우리의 이름을 내자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자기를 지키는 자들입니다. 도시를 건설하고 문명을 세우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에 비해 여인의 후손은 약속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생명으로 나가는 길은 차단이 되었습니다. 천사가 두루 도는 화염검을 가지고 지키는데 누가 생명나무로 나아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이 됩니다. 생명나무와 단절입니다. 이제 어떤 인간도 스스로 생명을 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로지 생명을 주시는 분에 의하여만 생명을 받는데 그것이 바로 여인의 후손이어야 한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받은 아담은 여자를 뭐라고 이름을 부릅니까? ‘하와’라고 합니다. 하와란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고 말합니다. 이 이름이 범죄후에 아담이 하와에게 지어 주었다는 것은 새로운 약속과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생명나무로 나가는 길은 차단되었지만 새로운 생명을 주는 길이 여인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정복하게 될 때 일어날 것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여인의 후손으로 오시는 그 씨에 대하여 구약은 계속하여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의 자손이 등장하는 것을 사탄은 방해 합니다. 그래서 이 둘 사이에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 둘 사이의 싸움은 사람과 사람이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서로 서로의 배후 세력이 다른 것입니다. 특히 시편에서 이러한 싸움이 치열하게 나타납니다. 시편 2편에 보면 여호와와 그 기름부은 자에게서 주의 백성들을 끊어 내려고 합니다. 이 세력이 여호와의 백성을 무고히 괴롭힙니다. 시편에서 의인과 악인이 대별되는 것은 의인은 자기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자입니다. 이들이 약속의 자녀이며 여인의 후손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뱀의 후손이란 자기의 선악체계를 고수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어 내겠다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대결구도가 계속되어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도속에서 세상적으로 볼 때에 약하고 힘없어 보이는 자들이 누구겠습니까? 당연히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싸움이 신약에 가면 그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3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말씀이 이미 이사야 7장14절에 예언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여인의 후손의 등장입니다. 갈라디아 4장4절에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이렇게 여인의 후손으로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인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14절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마귀를 없이 하시려고 예수님이 여인의 후손으로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것이랍니다. 이것을 요한일서 3:8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난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마귀를 이깁니까?
골로새서 2:15에서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여인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야의 일입니다. 이것을 이미 창세기 3:15절에 하나님이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이루어 내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쥐고 있는 마귀의 세력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찾아오셔서 주신 은혜로운 약속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15절을 원시복음이라고 사람들이 부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승리 하셨는데 왜 아직 사단의 역사가 있습니까? 저는 이렇게 봅니다. 뱀의 머리가 십자가에서 깨어짐으로 결정적인 승리는 이미 확정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꿈틀되는 정도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6장 20절에서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라고 말씀합니다. 사단이 십자가에서 깨어졌는데 아직 그 힘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까지도 속히 너희 발아래 상하게 하실 것이라는 겁니다. 이들이 결국에는 불과 유황못에 던지워질 것을 계시록 20장 10절에서 말씀합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이런 맥락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아직도 사탄의 유혹이 있지만 머리를 상하여 꿈틀되는 정도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승리를 주의 성령이 우리를 찾아 오셔서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이 복된 자리로 불러내어 주신 그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 입니까? 그러므로 이제 주의 백성들은 마귀의 후손들이 의지하는 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만 바라보며, 주만 의지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모신 자답게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