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문 윤국 선생
숭모회 창립 3주년 기념식
2022년 6월 20일 오전 11시,서울시 중구 서애로에 소재한 문중빌딩 4층 문윤국 선생 숭모회관에서, 애국지사 문윤국선생 숭모회 창립 3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이날 기념식 행사는 김명렬 사무총장의 사회로, 국민의례(국기에 대한 경례,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의 시간에 이어, 손대오 부회장의 기도, 사회자의 내빈소개,김영휘고문의 격려사,문평래 숭모회장의 인사말씀이 있었고,우종춘 이사장의 법인설립보고의 시간을 가진 다음,문성이 여사(우종춘 이사장부인)의 대한 지리가와 아리랑 노래로 이어져갔다.
그런가 하면,문윤국 선생 생존시 유일하게 어린시절 직접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김형태회장의 증언을 들어보기도 하고,김영휘 고문과 손대오 부회장의 보충설명과 노래를 불러 주시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이날 행사에는 전체 50여명의 뜻을 함께하는 회원들이 참석하였는데, 2년전 미국에 가 계셨던 김영휘 고문께서 자리를 함께하므로써 더욱 뜻깊은 시간이 되었다.
마지막 시간은 이창열 감사의 선창으로 억만세를 부르고,자리를 이동하여 인근에 있는 생선 해물탕과, 항아리 보쌈집에서 오찬의 시간을 갖고 해산하였다.
사회자/김명렬 사무총장
내빈소개의 시간
국민의례/국기에 대한 경례
개회 기도/손대오 부회장
격려사/김영휘 고문
인사말씀/문평래 숭모회장
법인설립보고/우종춘 이사장
문윤국(文潤國) 선생은 어떤 분이신가?
선생은 3.1운동 당시, 33인 민족 대표이상으로 공적이 있으나, 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체 이름도 빛도 없이 살다간,잊혀진 독립 유공 애국지사이셨다.
금산(錦山)문윤국 선생은 1877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하시어,정주군 덕언면 덕흥에서 한문교사및 정주읍 신안소학교 교사를 역임하며 후학양성에 힘썼다.
1910년 기독교에 입교,1013년 평양 조선 예수교 장로회 신학교에 37세의 나이로 입학,만학의 의지를 불살랐다.
신학교를 졸업한후,덕언면 덕흥과 덕성,신안면 연봉등 3개 교회 목사로 봉직하던중,1919년 2월 선천군 남교회에서 개최된 평북노회에 참가,조선 독립 13도 발기인의 한사람으로 독립청원서에 서명날인하여 파리 만국 평화회의에 제출하였다.
선생이 기획하고 주도하여 독립청원서를 작성하고, 이를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한 사건은, 후일 유관순열사를 중심한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하는 그 출발점이 되었다.
독립청원서를 이처럼 기획하고 주도했던 분이셨지만,3.1운동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 33인에 들어가지 아니한 것은, 거사 실패후의 후사를 염려함에서였다.
기독교계의 대표 이승훈장로는 선생의 두손을 꼭 잡고 눈물로 후일을 부탁하며,덕흥교회 이명룡,김병조 두장로를 선임 대신 서명케 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1919년 3월 독립만세 시발점이었던 아이포면사무소 뒷산에서 수천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을 선언하고,이어 3.1운동 당시 평북 선천,정주및 오산지역에서 일어난 4000여 군중의 독립운동을 이끌다가 검거되어 징역 2년을 언도받았다.
이승훈장로와 협력하여 세운 오산학교를 중심하고 만세운동을 앞장서 결행하다 일경의 창검에 세곳이나 찔리셨으나,죽기를 각오하고 그들의 회유나 압력에도 굴하지 아니하셨다.
심지어 일제는 군수자리를 주겠다고 회유하였으나, "내가 너희 도둑놈들 밑에서 벼슬을 할줄 아느냐"고, 고함을 치며 훈교하기도 하셨는데,2년형 언도 복역중 특사로 반감되어 출감하셨다고 한다.
출옥후에도 일경의 감시가 계속돼 1921년부터 지하운동을 전개하고, 만주에 거주하는 김숙제목사를 통해, 독립군 자금 7만 8천원(당시 쌀 한가마는 7원이었으니 현 싯가로 약 17억)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당시 선생은 금광을 한다는 명목으로 자금을 가져갔기에,목사가 "패가 망신해서 고향에 도저히 있을수 없어 도망갔다"는 소문이 났으나,나중에 김숙데 목사의 유서를 통해 그 돈이 군자금으로 전달되었음이 밝혀졌다고 한다.
선생은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불가피하게 충북 괴산으로 피신하여 3년을 지낸후 계속되는 감시로 강원도 정선으로 이주해 청년들에게 한학을 가르쳤다.
한학을 가르치는 중에는 벼루와 붓,한지등을 팔아가며 곤궁한 생활을 이어갔다고 한다.
1945년 8.15해방으로 환고향하여 아들을 하나 두었으나,북한이 공산화되자 처자식을 남겨두고 다시 강원도 정선으로 남하하게 되었고,그 이후로는 처자식과 상봉할수 없게 되고 말았다.
1948년 이승만 대통령은 정선군수를 통해 세차례나 정치에 참여할것을 권유받았으나,후학들을 가르치는데만 전념하여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시켰다.
그러던중,1958년 1월2일,정선군 북평면 북평5리 노루목에서 조국의 평화통일을 염원하며 마지막 일생을 마치셨다.
선생은 이승만,최남선등과 친분이 있었고,이승훈이 오산학교를 세울때에 배후에서 함께 하신분이며,통일교회(가정연합)를 창시하신 문선명목사의 종조부(작은 할아버지)이시기도 하다.
문선명목사는 평소 문윤국 할아버지를, 자신의 인생의 맨토이자 나침판으로 여겼다고 말씀하셨단다.
문윤국애국지사는, 1990년 국가 유공자로 선정되었으며,선생이 마지막 생애를 보내셨던 여생터는 그분의 애국정신과 생애를 기리는 기념공원을 조성할 예정이다.
현재는 숭모회와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강원도와 정선군에 기념사업 절차를 밟고 있는 중이란다.
선생이 오랫동안 마지막 여생을 보내셨던 아라리 항골은 빼어난 경관의 가리왕산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선생이 자주 오갔던 화암동굴과 화암약수터는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하다.
문윤국선생이 남기시 시 한수
대한 지리가는 문윤국선생께서 직접 작사하시고 노래를 부르셨단다.
대한지리가를 친정 아버님(문용기 장로)으로 부터 배워 익혔다는 문성이 여사
대한지리가를 직접 부르시고....
김형태회장의 어린시절 증언
아리랑을 불러 주기도 했다.
김영휘고문께서 노래하는 장면
보충 설명과 추가 내빈소개/손대오 부회장
억만세/선창:이창열감사
오찬장에서
해산후 담소를 나누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