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베트남 꽝응아이성 미 라이 마을에서 504명의 민간인(베트남 정부 주장, 미국은 347명이라고 주장)이 무참히 희생된 '미 라이 학살'에 연루돼 미군으로는 유일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윌리엄 캘리가 지난 4월 28일(현지시간)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사실을 뒤늦게 워싱턴 포스트(WP)가 29일 보도했다. 영국 BBC와 AP 통신이 다음날 전한 데 따르면 WP는 조지아주 사망자 기록에서 찾아낸 하버드 로스쿨 졸업자의 제보를 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확한 사망 원인은 인용하지 않았다. 그가 눈을 감은 것은 비교적 평화로운 여생을 보낸 조지아주 게인스빌의 호스피스 시설이었다.
'미 라이 학살'은 미군 역사에 최악의 전쟁범죄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 살육 사건은 당시 미국인들을 큰 충격에 빠뜨리며 1970년대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을 촉발시켰다는 평가를 듣는다.
캘리는 미 육군 분대를 이끌어 베트남인 마을 손 마이에서 여성과 어린이를 비롯한 수백명의 민간인들을 살해했다. 그는 1971년 재판에서 22명의 민간인 살해에 대한 책임이 인정돼 종신형을 선고받아 미군 연루자로는 유일하게 처벌 받았다. 하지만 그는 단 사흘만 복역하고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가택 연금으로 감형하는 바람에 3년 6개월만 연금 상태로 지내다 자유의 몸이 됐다.
캘리는 플로리다주 남부의 한 단과대학을 낙제하고 1964년 육군에 자원 입대했다. 사병이었지만 병력 자원이 고갈된 탓에 재빨리 준위로 진급한 뒤 소위 계급장을 달았다. 학살 사건 당시 입대한 지 4개월 밖에 안 됐다. 장교로 무능했을 뿐만 아니라 사병들을 함부로 다뤄 부하들은 늘 그를 사살할 준비가 돼 있었다고 한다.
1968년 3월 16일 아침 캘리 분대는 베트콩 대원들과 동조자들을 색출해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손 마이 부락(당시 미군들은 '미 라이 4' 마을로 알고 있었다)으로 공수됐다. 미군들은 도착했을 때 마을 주민들로부터 어떤 저항도 받지 않았다. 1972년 세이무어 허시 기자가 뉴 요커에 실은 기사에 따르면 주민들은 바깥에 불을 피워 아침 식사를 조리하고 있었다. 허시 기자는 캘리와 그의 분대가 몇 시간 뒤 민간인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삼삼오오 몰려 다니며 총질을 했다. 도랑으로 밀어넣고 총을 쐈고 집 근처에서 사살했다.
AP 통신은 전날 이 부대원 동료 몇몇이 북베트남군 공격에 목숨을 잃거나 실명한 데 대한 분풀이 차원이었다고 전했다.
미군 병사들은 여인들과 소녀들을 집단 성폭행했고 고문도 했다고 허시 기자는 보도했다. 초기에는 은폐했지만 일 년 반 뒤 공론화됐는데 허시의 노력 덕분이었다. 그는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캘리는 범죄 혐의로 기소된 26명의 장병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유일하게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가 유죄 판결을 받자 미국인들은 양 극단으로 갈렸다. 몇몇은 그를 전범으로 본 반면, 다른 이들은 궁극적으로 상관들 책임인데 그가 희생양이 된 것이라고 동정론을 폈다.
캘리는 1976년 조지아주 컬럼버스의 보석 가게 주인의 딸인 페니 빅과 결혼해 외동아들 윌리엄 로스 콜리 3세를 두고 2000년대 중반 이혼했다. 장인 가게에서 일하며 여생을 비교적 평온하게 지냈다. 그는 미 라이 학살 사건에 자신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입을 연 적이 거의 없었고 역사학자, 기자와의 만남을 거절했다.
그러다 2009년 콜럼버스 지역 키와니스 클럽 강연을 통해 사과했다. "하루도 그 날 미 라이에서 일어났던 일과 관련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지나간 날이 없다. 살해된 베트남인들과 그들 가족, 연루된 미군 병사들과 그들 가족 때문에 회오(悔悟)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