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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1 묵상글 ( 부활 제3주간 화요일. - 인간적 완숙이 아니라 성령이 충만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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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1. 부활 제3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4.21 04:44
- 인간적 완숙이 아니라 성령이 충만한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하느님께 더 감사하게 되고
저에게도 고맙다고 할 수 있어서 요즘 저는 기쁘고 행복합니다.
그것은 그렇게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의 할례와는 거리가 멀던 제가
조금은 고개를 숙일 줄 알게 되고 하느님 말씀은 물론 남의 말도
조금씩 더 잘 들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자가 60세에 이순(耳順)이라고 한 것에 참으로 공감하고 동의하며
지금 제가 스테파노의 적대자들과 같지 않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스테파노의 적대자들과 같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제가 곧 스테파노와 같이 된 것은 아니기에 안타깝습니다.
그렇습니다.
악인과 같지 않은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성인과 같아야 하는 것인데 제가 바로 그런 형국입니다.
그리고 공자가 70에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
곧 욕심대로 해도 법에 어긋나지 않음을 얘기했는데
이 경지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지요.
70이 되면 세상 욕심이 더 이상 없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경지가 되어야 하고,
신앙적으로 얘기하면 이 나이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는 내가 이미 되어있어야지요.
사실 이것도 욕심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런 욕심은 거룩한 욕심이고,
우리 영성 생활에서는 성령께서 이뤄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완숙(完熟)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요즘 저의 문제는 안주이고 그래서 성덕으로 더 나아가려고 하지 않음입니다.
풀어 얘기하면 옛날처럼 교만하고 주장대로 하고 그래서 부대끼는 그런 것이 별로
없기에 거의 모든 관계가 순리적이고 원만하며 별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에 만족하고 안주합니다.
오늘 스테파노처럼 성령 충만하지 못하는데도 더 나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사도행전이 얘기하는 스테파노는 성령 충만입니다.
“그러나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인간미가 완숙한 내가 아니라 성령이 충만한 내가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제 그리고 앞으로 저의 과제라고 할 수 있는데
현재 저는 인간적으로 안주하고 있기에 발심(發心) 자체가 문제이고 과제입니다.
그러나 너무 무책임한 얘기인지 모르지만
이 또한 주님께서 해주시리라,
제가 못하니 주님께서 해주시리라 믿고 희망하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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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1. 부활 제3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숨 쉬는 모든 것이 주님을 찬미하나이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는 물질과 영이 깊이 맞닿아 있음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관상과 해방, 그리고 활동
숨 쉬는 모든 것이 주님을 찬미하나이다
2026년 4월 20일 월요일
흑인 농부이자 작가인 리아 페니먼(Leah Penniman)은 농업 과학자이자 발명가였던 조지 워싱턴 카버(Dr. George Washington Carver: 1864–1943)의 신앙을 찬미하며 기억합니다:
조지 워싱턴 카버 박사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으며, 새벽이 오기 전에 숲으로 나아가 기도하는 습관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연을 하느님의 방송국이라 믿었고, 식물들과의 대화를 통해 수많은 과학적 발견과 특허를 얻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자연에 관한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사람이 숲 속을 걸으며 귀 기울이면 책에서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느님의 목소리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펜실베니아의 산코파 공동체 농장(SanKofa Community Farm)의 공동 설립자인 크리스 볼든-뉴스옴(Chris Bolden-Newsome)은 페니먼과의 대화에서 나눈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해줍니다:
저는 아프리카계 미국 가톨릭 신앙 전통에 뿌리내린 실천가입니다. 가톨릭 신앙의 많은 부분은 중앙 유럽에서 정착되고 재정의되기 훨씬 이전부터, 땅과 깊이 연결된 아프리카적 맥락 속에서 이미 존재했습니다. 가톨릭 교회 전체가 이제야 그 기원에 다가가고 있습니다. 1971년 바오로 6세 교황 때부터 교회는 생태적 관심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를 긴급한 호소로까지 확장하였습니다:
가톨릭 신앙의 핵심은—그리고 이는 일반적으로 아프리카 영성의 정신을 반영한다고 생각함—물질과 영성의 깊은 결합에 대한 깊은 경외의 실천이며, 혈연으로 이어진 조상들, 성인으로 시성된 조상들, 혹은 조지 워싱턴 카버와 같은 문화적 조상들까지도 신앙의 길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존경합니다. 이 믿음의 중심에는 하느님께서 예수(Yeshua)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와 연결되신다는 우리의 이해가 자리합니다. 영과 물질의 본질적 일치는 곧 내가 행하는 어떤 지상의 일도 영적 의미를 지니지 않을 수 없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뜻합니다. 그래서 나는 거미와 뱀을 사람과 마찬가지로 존중합니다. 그들도 소중한 벗이기 때문입니다.
제 집의 정원에서 뱀을 볼 때마다 저는 큰 축복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에게 그들의 오래된 이름 가운데 하나로 인사를 건네며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모든 피조물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지혜를 가져다줍니다. 그들은 땅의 수호자인 영들을 드러내는 살아 있는 성사적 표징이자 하느님을 드러내 주는 중개자들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물(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거룩함에 대한 묵상(The meditation)은 제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물은 저의 창조적 상상에 의해 이루어진 세계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런 저의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세상은 깨어진 아름다움에 대한 치유를 중심으로 형성되는데, 그렇기에 그곳에서는 더 많은 존중심이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 세상 안에 하늘 나라를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오직 우리의 눈을 열기만 하면 됩니다.
—Karen B.
References
[1] Pope Francis, Laudato Si’: On Care for Our Common Home. Read here for the full text of this encyclical.
Leah Penniman, Black Earth Wisdom: Soulful Conversations with Black Environmentalists (Amistad, 2023), 23–25.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iska Vrijburg, untitled (detail), 2017, photo, Netherlands.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우리는 나무와 빛, 사슴을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며 그들을 존중한 다음에야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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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군중이 예수님께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미 표징을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 표징으로 인해 사람들이 크게 감동하여 그분을 임금으로 모시려고까지 하였습니다(요한 6,15).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원문 그리스어를 보면 동사가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쓰여 있습니다. 따라서 군중은 새로운 표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보여 주신 표징의 의미를 묻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군중은 "당신이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이 표징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당신이 하시는 일을 설명해 주십시오."라는 뜻일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표징을 모세가 광야에서 하늘의 빵을 내린 사건과 비교합니다. 어떤 유다인들은 모세를 임금으로 여기기도 했기에, 이들은 예수님께서도 자신들의 임금이 되시기를 바랐던 것입니다(요한 6,15).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여기서 예수님은 모세의 행위를 과거형에서 현재형으로 바꾸어 말씀하십니다. 곧 광야에서 빵을 주신 분은 모세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며, 지금 이 순간에도 같은 하느님, 즉 "아버지"께서 당신 백성에게 참된 빵을 내려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모세처럼 빵을 마련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바로 그 빵 자체이십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지금 주시는 생명의 빵이 바로 예수님 당신 자신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으며, 당신을 믿는 이는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슴하신 내용을 떠올리게 합니다(요한 4장).
군중도 예수님의 말씀을 단순한 빵으로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고 밝히시자, 그들은 실망하며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과연 무엇일까요?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불경한 자들은 끝없이 욕망을 채우려 방황하면서도, 오직 그들을 참된 목적지로 이끄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을 미친 듯이 거부한다."라고요.
그들은 물질적 세계관에 사로잡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배를 채워 주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기대했지만, 믿음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요?
이 군중의 태도와는 다른 모습일까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참된 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예수님 안에서 그 의미를 찾기 위해 마음을 다하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인가요?
만일 우리가 지금 당장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만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면 우리는 이 군중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을 지닌 이들일 것입니다.
존 밀턴(1608-1674)은 자신의 저서 [자유에 관한 논문]에서 "배부른 돼지로 사는 것보다 배고픈 인간으로 사는 것이 더 낫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는 단순히 물질적 만족만을 추구하는 삶보다, 사랑과 진리, 자유, 그리고 인간다운 존엄을 추구하는 삶이 훨씬 더 가치 있다는 뜻일 겁니다.
지금의 우리 세상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이런 참된 추구를 하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또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일 거고요.
지금의 세상이 단절과 분열 갈등과 혼돈으로 가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이런 참된 추구를 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닌지에 대해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오늘의 이런 문제는 문제의 중심에 서 있는 단 몇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깥 쪽에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찾고 그 문제의 원인을 찾고자 무의식적인 분석을 하는 사이에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그 문제의 한가운데에 서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를 깊이 성찰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더 나은 세상, 즉 하느님 나라를 향한 발걸음을 떼기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오늘 첫 순교자 스테파노처럼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는 고백을 드릴 수 있을 것이고,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향해 뻗치시는 사랑과 구원의 손길에 손을 내밀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구원하시는 손길 자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한없이 부족한 죄인일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이 세상을 해방과 구원의 길로 이끌어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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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1. 부활 제3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제 <복음>의 끝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묻는 군중들에게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9)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요한 6,30)라고 표징을 요구 장면으로부터 오늘 <복음>은 시작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3)
그렇습니다. 이 빵은 인간이 만든 빵이 아닙니다. 선사되고 주어진 은총의 빵입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 입니다. 이 빵은 더 이상 하늘에만 차려져 있는 빵이 아니며, 이미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 안에 우리 가운데 있는 빵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빵을 이 세상에서 먹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빵은 하늘에 올라가서야 먹게 되는 빵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늘을 살게 하는 빵입니다. 이 세상을 하늘로 만드는 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3)
그러니,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 되어야 합니다. 곧 자신을 세상에 빵으로 내어 주어야 합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하는 사명으로 주어진 빵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빛과 소금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듯, 자신을 위한 빵이 아니라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이미 자신이 받아먹은 ‘하늘에서 선사된 빵’을 세상에 생명으로 다시 내어놓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살아 있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부활의 증거 되는 삶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호수 건너편까지 찾아온 이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하고 간청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결코 굶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양식으로 내어놓으십니다.
베네딕도 16세 교종께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의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이신 이 생명의 빵을 먹어야 할 일입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말합니다.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아모 8,11).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
주님!
부서져 먹히게 하소서!
부서져 먹히는 빵이 되고서야 양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먹혀 형제들 안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먹혀 사라지고서야 생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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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1. 부활 제3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진품명품’이라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집에 있는 오래된 물건을 가져오면 전문 감정가들이 평가해 주는 프로였습니다. 단순한 항아리인 줄 알았는데 조선시대의 유명한 ‘백자’인 경우도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걸려있던 초상화인데 알고 보니 조선시대 유명한 화가가 그린 선비의 ‘초상화’인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판정이 나면 엄청난 가격이 정해지곤 했습니다. 반대로 고려시대의 청자인 줄 알고 애지중지했었는데 알고 보니 ‘모조품’인 경우도 있습니다. 조선시대 추사 김정희의 서예 작품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위조품’인 경우도 있습니다. 진품명품은 전문 감정가의 판단이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명품과 짝퉁’이란 말도 있습니다. 명품과 짝퉁을 구분하는 우스운 이야기도 있습니다. 명품 가방은 비가 오면 가슴에 품고 걷는다고 합니다. 짝퉁 가방은 비가 오면 우산 대신 머리를 가리면서 걷는다고 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옥석’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허영과 욕심 때문에 옥석을 구별하지 못하곤 합니다.
교회는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면서, 교우들의 신앙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여러 방법을 찾기도 합니다. 친교실을 만들어서 주일 미사 후에 식사를 준비하기도 합니다. 도서실을 만들어서 영적인 양식을 차려주기도 합니다. 카페를 만들어서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기도 합니다. 전례를 즐겁게 하려면 밴드를 전례 음악에 도입하기도 합니다. 교우들의 취미와 문학적인 소양을 돕기 위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합니다. 좌석을 늘리기 위해서 장궤틀을 없애기도 합니다. 쉽고, 빠르고, 편리한 것이 과연 교우들의 영적인 성숙에 도움이 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다.’ 또 ‘때가 가까이 왔다.’ 하고 말하겠지만 그들을 따라가지 마라.” 신앙인은 무엇이 진짜 신앙인지, 무엇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길인지 식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명예도, 권력도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 사람들은 지배한다는 말과 다스린다는 말을 폭력으로 억압할 수 있다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착취하고, 빼앗아도 좋다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지배와 착취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신분, 계층, 세대, 이념, 피부, 성으로 차별하는 역사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지배하고, 다스리라고 하신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것을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배고프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목마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바로 그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모두가 평등하게, 모두가 평화롭게 가진 것을 나누었고, 특히 가난한 이와 아픈 이를 돌보았습니다.
안도현 시인은 이렇게 삶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페스탈로치는 신앙의 원천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인류의 아버지이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자녀에게는 죽음이 없다. 인류의 순수한 마음속에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이 깃들어 있다. 단순하고 소박하고 감사와 사랑에 대한 순수한 인간적인 감정, 이것이 신앙의 원천이다.” 페스탈로치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인간, 그리스도, 시인, 모든 것을 남에게 바치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축복이 있을지어다. 그의 이름에 축복이 있을지어다.” 삶은 사름의 준말이고, 사름은 사르다의 명사형입니다. 그러니까 삶은 사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한 줌의 재로 남은 것입니다. 잘 산다는 것은 잘 사라지는 것입니다.
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 스테파노는 죽음의 순간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그렇습니다. 삶은 고난의 순간에도, 죽음에 이를지라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부활의 꽃이 피고,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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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1. 부활 제3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안에 매일 현존하고 싶어 하시는 주님의 간절한 바람의 표현, 성체!
참 신기한 일이 한가지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릴 때는 어찌 그리도 밥 시간이 기다려지는지 모릅니다. 어찌 그리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것이 많은지? 왜 그리도 미련하게 숨도 못 쉴 정도로 과식을 하는지?
반대로 뭔가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 보람되고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는 일을 할 때는 먹고 마시는 일이 부차적인 일이 되고 맙니다. 몰입하고 헌신하는 과정에서 나를 잊고, 일상적으로 겪는 고통과 우울감을 잊고, 더 나아가서 먹고 마시는 일조차 잊게 됩니다.
복음선포와 인류 구원 사업에 과몰입 중인 예수님을 가까이 따라다니느라 습관적 배고픔과 목마름에 시달려왔던 제자들이 하루는 이렇게 청합니다.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아직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빵에 대한 참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오븐에서 갓 구워져 나온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부드럽고 맛있는 세상의 빵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래로만 향하던 제자들의 시선을 더 높은 곳으로 향하도록 초대하십시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4)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매일의 성체성사 안에서 쪼개지고 나누어지며 우리를 위한 생명의 빵이 되십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백성들 안에 현존하시며, 그들을 위한 영원한 생명의 빵이 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적인 헌신과 관대한 나눔으로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제공하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런 우리의 노력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향한 생명의 빵이요, 동시에 우리를 향한 영원한 생명의 음료가 될 것입니다.
영성체 때 우리가 영하는 성체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 성체는 우리 안에 매일 현존하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간절한 바람의 표현입니다. 우리와 온전히 하나 되고 싶어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겨운 바람의 구체적인 표현이 영성체입니다.
은혜롭게도 우리는 이 미사를 통해서 우리와 온전히 하나 되고자 간절히 원하시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실 있습니다. 이 미사를 통해서 우리는 그 크신 하느님을 보잘것없고 비천한 우리 안에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고맙게도 우리는 매일의 영성체를 통해 죄투성이인 우리 몸을 하느님의 성전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유한하고 제한적인 우리지만 은혜롭게도 성체성사를 통해 영원성을 지향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받기에 부당한 죄인인 우리지만, 매일의 미사를 통해 이 땅에서부터 영원한 삶을 살짝 맛볼 수 있습니다.
이토록 은혜롭고, 이토록 과분한 하느님의 선물이 매일 아무런 조건 없이 무상으로 주어진다는 것,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모세의 인도를 따라 사막을 횡단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한시적이고 제한적인 생명의 빵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제공되는 생명의 빵은 무한 리필입니다. 우리가 그분께로 나아가기 위해 발길을 돌리기만 한다면, 아무런 조건 없이 그 어떤 제약도 없이 언제든지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의 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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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1. 부활 제3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6,30–35
군중은 예수님께 다시 묻습니다.
“당신이 무슨 표징을 행하시기에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을 수 있습니까?”
그들은 만나를 기억합니다.
광야에서 조상들이 먹었던 빵,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시선을
과거의 기적 자체가 아니라
지금 눈앞에 계신 당신 자신에게로 돌리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참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그리고 마침내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대 바실리오는
인간의 영혼이 하느님을 떠나면
겉으로는 많은 것을 소유해도
안으로는 늘 굶주리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못하고,
참된 선이신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서만
비로소 제자리를 찾습니다.
그래서 바실리오에게 믿음은
막연한 관념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께 자신을 다시 돌리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군중은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질문 안에는
“우리를 납득시켜 달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더 많은 증거보다 더 깊은 만남을 주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무언가를 주시는 분이라는 뜻을 넘어
주님 자신이 우리 생명의 양식이라는 선언입니다.
평화/인내 주간에
이 말씀은 더욱 깊이 다가옵니다.
평화는
내가 원하는 조건이 다 갖추어져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을 때 옵니다.
인내는
내가 스스로를 버티게 하는 기술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먹여 살리신다는 믿음 안에 머무는 힘입니다.
내가 인정받지 못할 때에도,
길이 열리지 않을 때에도,
응답이 늦어 보일 때에도
“주님은 나를 굶기지 않으신다”는 믿음이
우리 안에 평화와 인내를 자라게 합니다.
오늘 화요일 성령의 날에
우리는 묻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으로 배를 채우려 하는가?
사람의 인정인가, 성과인가, 익숙한 위안인가,
아니면 참 생명의 빵이신 주님인가?
성령께서는
우리 안의 거짓 허기를 드러내시고
예수님께로 다시 이끄십니다.
그분께 가는 이는 굶주리지 않고,
그분을 믿는 이는 목마르지 않습니다.
주님,
표징만 찾는 마음에서 벗어나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헛된 허기로 흔들리는 제 마음을
성령으로 채우시고,
평화와 인내 안에
당신께 머무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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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1. 부활 제3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9:00 추가.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0-35)>
1)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만나’는, 먹을 것이 없어서 광야에서 굶어죽을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양식이었고, 동시에 자주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들의 ‘신앙’을 위한 양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만나’는 하느님께서 항상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을 보살피신다는 ‘표징’이었습니다.
그런데 탈출기에 있는 ‘만나’ 이야기를 보면(탈출 16장), 사람들이 하느님께 감사드렸다는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느님께 감사드리기는커녕
‘만나’를 지겨워했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생선이며,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생각나는구나. 이제 우리 기운은 떨어지는데, 보이는 것은
이 만나뿐, 아무것도 없구나(민수 11,4-6).”
그들에게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은총의 양식이 아니라, 먹기 싫지만 억지로 먹어야 하는 지겨운 음식이었습니다.
또 그들은 자신들이 왜 이집트를 탈출했는지를 잊어버리고,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시절을 그리워했습니다.
사실 그게 더 큰 문제였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만 있다면, 자유를 잃고 노예로 살아도 좋다.” 라는 생각은,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나중에 지옥 가도 좋으니, 사는 동안 마음껏 부귀영화를 누리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2) 초대교회에서 있었던 일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 6,1-4)”
사도들이 그리스계 유대인들을 차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들에게 생활비나 생필품을 배급할 때,
그 일을 담당한 실무자들이 따로 있었을 것이고,
사도들은 그 일을 감독했을 텐데, 히브리계 유대인들이 그 실무를 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히브리계 유대인들 가운데 일부가 그리스계 유대인들을 차별하는 일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 교회 공동체 안에 ‘편 가르기’가 있었고, 자기편만 생각하는 ‘이기심’이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 모습은 날마다 ‘만나’를 받아먹으면서도 하느님께 감사드리지는 않고, 매일 똑같은 것만 먹으니 지겹다고 불평했던 구약시대 백성들의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 모습은 ‘썩어 없어질 양식’만 찾는 모습과 같습니다.>
어떻든 그 일에 대해서 사도들이 한 말은, ‘종교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중요한 말입니다.
종교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공동체입니다.
만일에 기도하지도 않고, 말씀을 듣지도 않고,
‘썩어 없어질 양식’을 두고서 다투기만 한다면,
그 모임을 종교라고 말할 수도 없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3) 유대인들은 누구나, 모세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모세가 아니다. 하느님이시다.” 라고 강조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되어달라고 요청했음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임금이 되어달라고 요청한 일과(요한 6,15)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이 ‘몸의 배부름’만 원하고 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는, “하느님께 ‘몸의 배부름’만 청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청하여라.”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는, “나는 정치 지도자가
되려고 온 것이 아니라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왔다.”이고, “나를 믿어라.”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과 ‘나를 믿는 사람’은 같은 말이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을 뜻합니다.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는 하느님 나라에서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을 뜻합니다(묵시 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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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1. 부활 제3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22:00 추가.
요한 6,30-35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육체의 배고픔을 해결하고자 당신을 찾은 이들에게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라고, 구원받으리라는 믿음으로 당신 앞에 나아와 당신과 함께 하면 결코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시는 배고픔과 목마름은 육체적인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결핍이 채워지고 영적 갈망이 이루어진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영적인 배고픔은 무엇으로 채워야할까요? 그것은 오직 ‘사랑’으로, 나를 완전히 이해하시고 사랑하시는 분이 주시는 참된 사랑으로만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피조물인 인간은 나에게 그런 사랑을 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에게 기대고 세상 것들에 의지하면 나는 결핍된 사랑 때문에 늘 커다란 공허함 속에서 괴로워하게 되지요. 그리고 그 공허함을 육체적 배고픔으로 착각하여 세상 것들로 어떻게든 채워보려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채울수록 마음이 더 헛헛해질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이들을 당신께로 초대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생명의 빵”이라는 그분 말씀이,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 마음에 크게 와닿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그동안 성체성사 안에서 수 없이 그분 몸을 받아 모셨지만, 단 한 번도 배고픔이 사라지거나 갈망이 채워졌다고 느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게 다 우리가 육적인 배고픔과 영적인 배고품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해서 생기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로 나아가려면, 그분께 대한 참된 믿음을 지니려면 필연적으로 육적인 배고픔을 추구해야 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신앙생활 하는게 참으로 힘이 들지요. 주님께서 나의 배고픔과 갈망을 충만하게 채워주시리라 기대하며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그분께로 나아가려면 오히려 더 배고파져야 한다고 하시니 일종의 ‘배신감’이 드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로 나아가기 위해 육적인 배고픔을 추구하는 건 그분을 간절히 찾기 위함입니다. 주님을 간절히 찾아야 그분께 대한 믿음이 깊어지고 그분께 대한 믿음이 깊어지면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나에게 얼마나 큰 은총과 사랑을 베풀어주고 계시는지를 비로소 알아보게 됩니다. 그렇게 알아본 은총과 사랑으로 나를 충만하게 채우면 비로소 행복해지고, 주님께 받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살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두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아먹는 생명의 빵은 나중에 하늘에 가서야 먹게 되는게 아니라 지금 이 세상에서 그분께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먹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둘째, 그렇게 주님을 생명의 빵으로 받아모시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늘의 삶을, 영원한 생명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 복된 삶을 누리는 이들은 주님의 뜻인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여 내가 받은 생명을 세상 사람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빵이 되신 것은 우리가 당신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사랑으로 하나가 되기를 바라셔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이 세상이 생명력 넘치는 하느님 나라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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