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한국 대표팀이 1월 31일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16강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승부차기 끝에 꺾고 이후 호주까지 이겨 4강에 진출했다. 아시안컵에서 사우디를 꺾은 건 36년만이다.
한•일 양국에서 개최된 2002년 월드컵에서의 한국 4강 진출은 대한민국을 온통 축제장으로 만든 바 있다.
그런데 축구의 주도권은 오랜 세월 유럽과 남미권이 행사해왔다. 아시아권은 그야말로 변방의 하나로 치부되어왔다. 재미난 사실은 축구의 역사는 황하문명권의 상고 시대부터 명나라까지 이어졌는데도 불구하고 현대 중국의 축구실력은 완전히 하위권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오랜 역사와 뛰어난 전통을 되살리지 못한 대표적인 실패사례이다. 이는 중국이 17세기까지는 세계문명사에서 가장 앞섰으나 이후 산업화와 근대화에 뒤처져 서구의 침탈을 받고 후진국으로 전락한 사례의 하나이다.
서구는 근대화와 산업화에 앞서 부국강병의 선진국을 이루었으나 그들은 자신의 과거 봉건시대의 역사와 전통을 부정하지 않고 계승하였다. 반면에 서구의 침탈을 받은 사회주의 중국이나 식민지를 겪은 한국은 자신의 역사와 전통을 철저히 부정하고 짓밟아왔다.
미국 작가이자 인플루언서인 마크 맨슨이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국가’로 한국을 지칭하며 여행기 영상을 올렸다. 그는 한국인의 우울증에 대해 유교와 자본주의의 단점이 극대화된 결과라고 지적했다. 마크 맨슨은 그럼에도 한국은 회복력이 뛰어난 나라라고 하였다. 축구( 蹴鞠 :축국)실력이 중국보다 훨씬 앞서 있는 점이 좋은 사례이다. 물론 다른 여러 산업분야에서도 앞서 있다.
그러나 중국이 역사와 전통을 적극적으로 되살리면서 바짝 추격해오고 있는 현실을 보면 중국의 저력을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다. 그 많은 인구에 축구선수층을 두터이하고 관객붐을 일으키면 중국은 얼마든지 세계 축구사에 우뚝 설 수 있을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중국의이 축구실력이 정체되거나 유지될 수 없었던 것은 청나라가 축구를 사치풍조로 인식하고는 전면금지한 데에 원인이 있다.
그렇다면 동서양의 축구 기원을 살펴보자.
고대 로마 제국 시절에도 공을 발로 차는 스포츠가 있었다. 일종의 군사 훈련이었다는 듯. 하르파스툼이라고 불렸다. 이탈리아에서는 14~16세기에 피렌체에서 하던 공놀이가 현대 축구의 모태라고 주장하며 지금도 축구를 '공차기'라는 뜻의 칼초(Calcio)라고 부르고 있다.
다만 어느 나라가 현대 축구의 형태를 완성했는가"라는 질문의 답은 잉글랜드라는 데에 별다른 이견이 없다. 1863년 프리메이슨 테이번이라는 선술집에 런던의 풋볼 클럽과 학교 풋볼부들의 관계자가 모여 회의를 가졌고, 회의 결과 축구협회(The Football Association), 약칭 FA가 탄생하였다. 이는 세계 최초의 축구협회였고, 그 뒤에도 잉글랜드는 '잉글랜드 축구협회'가 아닌 그냥 '축구협회'라는 명칭을 계속 쓰며 자신들이 현대 축구의 발상지임을 어필하고 있다. 어쨋든 현대사회 들어서는 부국강병을 먼저 이룩한 유럽권과 축구를 국민적 스포츠 로 만든 남미권이 주도권을 차지하였다. (출처 : 나무위키)
그렇다면 중국의 축구 (蹴鞠 :축국) 기원은 언제 시작되었는가
***다음은 '家苑 천자문대관' 中1권의 " [20] 恭惟鞠養이면 豈敢毁傷이리오(공손히 키워주고 길러주심을 생각하면, 어찌 감히 다치게 하리오)"의 설명 중 '155. 鞠'의 설명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중국에서 공차는 놀이(축구)의 용어를 蹋鞠(답국, 찰 답, 공 국, 찰 국), 蹴鞠(축국, 찰 축, 공 국. 찰 국)이라고 하였다. ‘鞠(공 국, 찰 국)은 파자해를 하면 革(가죽 혁)에 匊(움킬 국)을 넣어 둥글게 만든 가죽(革) 주머니(勹, 쌀 포)에 쌀겨(米糠, 미강)나 바람을 넣어 만든 공을 말한다. 이 공을 차면서 놀기에 鞠이 ‘차다’라는 뜻으로 쓰고, 공차고 놀면서 체력도 길러지기에 ‘기르다’는 뜻으로도 쓴다.
공(鞠) 차는 놀이를 蹋鞠(답국, 찰 답, 찰 국), 蹴鞠(축국, 찰 축, 찰 국)이라고 하는데, 관련된 내용이 나오는 最古의 문헌은 劉向(서기전77년 ~ 전6년)이 쓴 「 戰國策 」(전국책) 齊策(제책)편이다. 蘇秦(소진)이 趙나라와의 합종을 위해 齊宣王에게 행한 유세 가운데 나온 말이다.
제나라의 수도인 “임치는 매우 풍요로워 그 백성들이 피리를 불고 瑟(슬)을 타고 비파를 타며 琴(금)을 연주하고 닭싸움놀이를 하고, 개 달리기 시합을 하며, 蹋鞠(답국)을 하지 않는 자들이 없다
(臨淄甚富而實, 其民無不吹竽, 鼓瑟, 擊筑, 彈琴, 鬪雞, 走犬, 六博, 蹹踘者).”고 하였다. '戰國策'의 이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여 쓴 '史記' 蘇秦列傳에서는 ‘蹹踘(답국)’을 ‘蹋鞠(답국)’으로 썼다. 蹴鞠(축국)과 함께 통용되었다.
그림 上左는 宋代 畵家인 錢選(천선, 1235~1305)이 그린 ‘宋太祖蹴鞠圖’(송태조축국도, 上海博物館所藏). 右는 明代 중기 화가인 杜菫(두근)이 그린 ‘仕女圖-蹴鞠’ [http://www.wikiwand.com]‘ 아래 그림은 明代 후기 靑瓷에 그려진 童子蹴鞠圖, 왼쪽 (위) 두 아이들은 서로 蹴鞠하다가, (아래) 서로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아무래도 다툼이 있는 듯하다[https://sns.91ddcc.com].
상고시대인 黃帝때 시작되었다는 蹋鞠(답국)은 본래 병사들의 신체를 단련시킬 목적으로 遊戱(유희) 겸 운동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戰國시대 이후로 그 인기는 날로 높아갔다. 한나라 때는 蹴鞠의 규모가 매우 커져 전문 球場인 鞠城(국성)을 두었고, 여자들도 즐겼다.
심지어 명나라 때는 기생들이 남자들을 부르기 위해 蹴鞠 대회까지 열었다고 한다. 蹴鞠이 지나치게 저속화되자 淸나라가 들어서면서 일체 금지시켰다.[자료 참조 wikipedia].
이러한 蹴鞠은 우리나라에도 전해졌는데 「舊唐書」 東夷傳에 “고구려 사람들이 축국을 잘한다.”고 하였고,
고려 말의 이규보는 蹴鞠하는 모습을 보고 ‘우연히 바람 든 공을 보고 뜻을 부쳐(偶見氣毬因寓意 - 「東國李相國集 」)’라는 시를 지을 정도였으며, 조선 후기 洪錫謨(홍석모)의 「東國歲時記」 十二月月內條에 蹴鞠이 언급되고, 그의 한시집 3권에는 “공을 번갈아 받아 차 몇 길씩 까마득히 잘도 오르네, 떨어뜨리지 않는 것이 가장 훌륭한 재주라네.”라고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性理學의 영향으로 武藝의 활달한 기운이 꺾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조 때 중국의 科道官이 군사동향을 살피러 온다고 할 때,
(좌측 사진설명 : 일본 막부시대의 수도에서 유행했던
축구를 재연한 장면
조정에서 관련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李德馨(이덕형)이 “중국 군인들은 拳鬪(권투)로 어깨와 무릎을 쉬지 않고 움직였다.”고 하자 兵曹參判(병조참판)인 沈忠謙이 “李提督은 수시로 자기 형제들과 蹴鞠을 하였다.”고 했다. 그러자 선조가 “중국 將官들은 제각기 각종의 기예를 익히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격이 느슨하여 팔짱 낀 채 아무 것도 하지 않으니, 역시 습속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한탄할 정도였다(선조실록』 27년 4월 24일).
이러한 황하문명권의 축국 역사를 현대사회에 까지 이어왔다면 한,중,일의 현대 축구가 전세계를 장악하였을 것이다. 이렇듯 문명사에서 앞선 역사와 전통은 올바로 계승 발전시켜야 함을 되새겨주고 있다.
https://youtu.be/LUd0qDNNu34?si=ZiyIL9RpSrKrSry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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