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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5대 궁궐
1392년 태조 이성계는 개경에서 조선을 건국한 후 한양으로 도읍을 옮겨 종묘와 사직을 세운 후
경복궁을 건설했다. 정종 때 수도를 개성으로 옮겼으나, 태종 때 수도를 다시 한양으로 옮기면서
창덕궁을 건설하여 이궁(離宮)으로 사용했다.
성종은 어머니 소혜왕후와 예종비 안순왕후와 세조비 정희왕후를 모시기 위해 창경궁을 지었다.
임진왜란 후 의주에서 돌아온 선조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버려 월산대군이 살던
집에 임시로 거처하는데,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하면서 경운궁(慶運宮)이라 했다.
고종이 아관파천 후 이전까지 거처했던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경운궁에서 지냈으므로 궁을
넓혔다. 그리고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상왕이 거처하는 곳이라 하여 덕수궁이라 불렀다.
광해군이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이 살던 새문동 집터에 왕기(王氣)가 서렸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
에 궁궐을 세웠는데, 처음에는 경덕궁이라 했으나 영조 때 경희궁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정궁(正
宮)인 경복궁을 두고 이궁을 건설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왕이 전란이나 화재 등 정궁에 거처할 수 없을 경우에 대비하여 이궁을 두어 양궐 체제를 유지했
다. 특히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고 나서 선조 이후의 왕들은 창덕궁이나 창경궁에 거처했고,
고종 때 가서야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했다. 이렇게 해서 수도 한양에는 북궐인 경복궁, 동
궐인 창덕궁과 창경궁, 서궐인 경희궁, 덕수궁이 세워졌고, 이를 ‘한양의 5대 궁궐’이라고 한다.
※ 궁궐과 궁
궁궐과 궁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궁궐은 왕이 생활을 하는 궁(宮)과 궐(闕, 망루)이 합쳐진 곳이
라 정의하기도 하고,왕이 일상생활을 하는 궁과 왕이 업무를 보는 업무 영역인 궐이 합쳐져 왕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정사(政事)를 보는 곳이라 정의하기도 한다. 따라서 궁궐이란 왕이 정치하면
서 일상생활도 하는 궐로 둘러싸인 공간이라 하겠다.
수도 한양에는 북궐인 경복궁,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 서궐인 경희궁, 덕수궁이 세워졌다.
1. 경복궁景福宮
: 사적 제117호, 북궐, 北闕
조선의 정궁으로 정연한 배치체계를 갖춘 궁궐로 북궐이라고도 한다.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삼으면서 건설한 것으로 〈시경詩經〉의 ‘왕조의 큰 복을 빈다’는 의미를 따 이름을 지었다. 5대 궁
궐중 가장 먼저 지어졌으나 임금이 거주한 기간은 길지 않다.
궁궐 내부는 정문인 광화문으로부터 홍례문과 근정문과 향오문을 일직선 상에 배치했다. 이 사이
공간은 정사를 보고 의식을 행하는 업무공간이다. 향오문 뒤에는 제반시설이 자리한 후원이 자리
잡고 있다.여러 차례 화재 피해를 겪어 이에 대한 복구가 거듭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원래 건물을
해체하는 등 본래 모습을 잃었으나 1996년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면서 일부가 복구되었다.
현재 다양한 국보·보물급 건축물과 석조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 경복궁은 여전히 서울의 중심이자 한국의 중심이다.경복궁은 조선이나 조선 유교에 더해 이른바
‘플러스알파’를 갖고 있다.
- 품격이 있으면서도 검소한 경복궁, ‘예’로 지은 궁궐이다. 예정신과 예미학이 스며들어 배어 있다.
(임석재건축학박사)
- ‘예’의 목적은 인仁과 의義를 구현하는데 있다.예는 인과 의와 함께 작동해서 인의예지(仁義禮智)
를 이룬다. ‘예’는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과 본분과 사랑과 희생인 것이다. 부모가 사랑과 예절
로 자식을 키우는 것, 자식이 믿음과 사랑으로 부모를 따르는 것,친구를 우정과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모든 것이 ‘예’정신이다.
동아시아에서 ‘예’는 인의예지의 인의仁義는 물론이려니와 화和, 중中, 악樂, 덕德, 성誠, 선善 등
수많은 다른 좋은 가치와 함께 어울려 짝으로 작동한다. 이런 좋은 가치들을 만드는 것이 ‘예’의 목
적이다. ‘예’에 대해 긍정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경우며 바로 경복궁이 ‘품격이 있으면서도 검소
한’ 이라는 특징이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중화中和와 조화調和의 가치다. 이는 곧 어울림의 가치다. 동서양의 공통으로 하면 조화의 가치
이며 순 우리말로 하면 어울림의 가치다. 이 역시 현대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덕목이다. 나누고 어
울림이 필요하다. 이것은 한 사회와 나라를 유지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 된다.
첨단과 기술이 우리 생활을 지배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의 인성과 사회관계는 더 나빠지고 불안해
져만 간다. 지금 이 시대에 그 누가 경복궁이 진부하고 고리타분하디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임석재건축학박사)
2. 창덕궁昌德宮
사적 제122호. 조선시대 5대 궁궐 가운데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1405년(태종 5)에
지어져 광해군 때부터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화재로 몇 차례 중건과정을 거쳤고 일제강점기에 변
형을 거쳤다. 창경궁과 이어져 있고, 뒤쪽에 후원이 조성되어 있다.
원래 정문인 돈화문이고 궁궐 내 금천 위에 금천교가 놓여 있다. 정전의 정문인 인정문은 양쪽의
월랑이 'ㄷ'로 감싸고 있다. 마당 안에는 임금이 걷는 길이 있고, 북쪽 끝 중앙 월대 위에는 인정전
이 자리한다. 인정전의 동북쪽에는 편전인 선정전이 위치해 있다. 창덕궁의 북쪽 터에는 금원이
라 부르던 후원이 있다.창덕궁에 있는 인정전·돈화문·인정문·선정전·희정당·대조전·선원전 등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예썰의 전당’ 유홍준 교수(문화재청장 역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궁궐 이야기 :
2023.3.5일 오후 10시 30분 KBS1 공영방송 50주년 기획으로 ‘예썰의 전당’이 유홍준 교수와 함
께 우리 ‘궁궐’의 아름답고 독특한 궁중 예술을 만나다.3월 5일 방영된 ‘유홍준 교수와 함께하는
예썰의 전당’ 1부는 서울의 울창한 빌딩 숲 사이 조선 왕조 500년 역사를 품고 있는 ‘궁궐’에 주목
했다. 유홍준 교수는 한양도성 내 다섯 개의 궁궐이 있는 서울을 ‘궁궐의 도시’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반드시 가봐야 할 한 곳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에 그는 망설이지 않고 ‘창덕궁’을 뽑았다.
웅장하고 위엄 있는 경복궁과 달리 창덕궁에는 인간적인 체취가 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홍준 교수는 우리 궁궐 고유의 아름다움을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고 말했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라는 의미다. 창덕궁 곳곳에도 ‘검이불루
화이불치’한 조선 왕실의 문화‧예술이 숨어있지만, 모르고 보면 무심코 지나치기 쉽다.
3. 창경궁昌慶宮
사적 제123호, 본래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지은 수강궁이었다. 그
후 1483년 수강궁 자리에 별궁인 창경궁을 건립했다.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616년 다
시 세웠으며, 1624년 이괄의 난으로 소실된 많은 전각들이 1633년에 중건되었다. 1656년에 요화
당·난향각·취요헌·계월각 등 4개의 전각을 지었다.
1909년 일제가 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었으며, 1911년에는 박물관을 짓고 창경원으로 격
을 낮추어 불렀다. 1984년 일제가 철거했던 문정전과 월랑 등을 복원하고 정비하면서 다시 이름을
창경궁으로 환원했다.이 궁궐의 전체적인 배치는 창덕궁처럼 지형의 높고 낮음을 그대로 두고 꼭
필요한 곳만을 골라 집터를 잡고 정원을 꾸민 것이 특징이다.
4. 경희궁慶熙宮
사적 제271호. 5대궁 중 서쪽에 자리하여 서궐로도 불렀다. 인조, 효종, 철종 등 10여 명의 임금이
살았지만 기간이 짧았고 거의 빈 궁궐로 있었다. 원래 ‘경덕궁’이었는데 1760년(영조 36) '경희궁'
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경희궁지〉에 경희궁의 규모와 배치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둘레는 6,600자였으며 흥화문, 흥원문, 개양문, 숭의문, 무덕문의 5개 문을 두었다. 숭정전은 신하
들의 조회를 받던 곳이며 뒤쪽에는 자정전은 임금이 업무를 보던 곳이었다.
1908년에 일제의 일본인 중학교를 세우면서 조선왕조의 5대 궁 중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1988
년부터 복원작업을 시작하여 2002년 자정전과 숭정전, 숭정문 등을 복원하는 1차 복원공사를 마
치고 시민들에게 공개되었다.
5. 덕수궁德壽宮
사적 제124호, 경운궁慶運宮,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
덕수궁은 처음 월산대군의 집터였던 것을 임진왜란 이후 선조의 임시거처로 사용되어 정릉동 행
궁으로 불리다가 광해군 때에 경운궁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1907년 순종에게 양위한 고종이 이곳
에 머무르게 되면서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의미에서 덕수궁(德壽宮)이라 다시 바꾸었다.
1897년(광무 1)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부터 중화전을 비롯하여 정
관헌, 돈덕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준명전, 흠문각, 함녕전, 석조전 등 많은 건물들을 지속적으
로 세워졌다. 이곳은 고종의 재위 말년의 약 10년간 정치적 혼란의 주무대가 되었던 장소로, 궁내
에 서양식 건물이 여럿 지어진 것이 주목된다. 1963년 1월 18일에 사적 제124호로 지정되었다.
Ⅱ. 서울의 4대문
사대문四大門 : 조선시대 도성에서 정동의 흥인지문, 정서의 돈의문, 정남의 숭례문, 정북의 숙정문
(1523년 이후 개칭) 등 4개 성문.
1. 흥인지문興仁之門
보물 제1호, 동대문東大門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문. 대한민국 보물 제1호이며, 속칭
'동대문'이라 부른다. 본래 ‘흥인문’이었으나 풍수지리상 한양의 동쪽이 비어있다 하여 ‘지’자를 넣
어 무게감을 실어 주었다고 한다. 1996년 일제강점기 문화재 재평가작업을 통해 ‘흥인지문’이라는
본래 이름을 되찾았다.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흥인지문은 태조 때 도성을 수축하면서 건설되었는데, 1396년(태조 5) 1차 축성 때 경상도 안동과
성주 사람들이 동원되어 동대문 일대의 축성 공사를 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이듬해 4월에 완공
되었다. 이어 1451년(문종 1)에 중수를 시작하여 1453년(단종 1)에 끝냈다.
이 문의 현판은 오행(五行)의 동쪽을 나타내는 인(仁)을 포함하며, 동대문 일대가 서울 도성 안에서
가장 낮은 지역으로 바로 남쪽에 청계천이 흐르고 있으므로, 땅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흥인지문(興
仁之門)이라고 ‘之’자를 보강하였다고 한다.
동대문의 중층 누각은 1869년(고종 6)에 새로 지은 것인데, 조선왕조 말기의 대표적인 목조 건물로
건축양식의 시대적 변천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흥인문은 주위 지형의 열악한 조건을 보
완하고자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작은 성)을 두른 것이 특징이다. 이
옹성은 문 앞쪽에 반달 모양으로 둥글게 축성되어 옹성 안에 들어온 적을 앞뒤에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왜적이 가장 먼저 입성하였다.
※ 국보와 보물
* 숭례문은 ‘국보 제1호’, 흥인지문은 ‘보물 제1호’로 정해져 있다. 다 같은 문화재인데 ‘국보’는 뭐고,
‘보물’은 또 뭘까요?
*국보란 우리나라의 문화재 중에서도 특별히 더욱 아끼고 보호해야 할 귀중한 것을 말한다. 보물 역
시 그에 못지않게 귀중하지만 국보 다음가는 것으로 정한 것이다. 국보나 보물로 정하는 것은 귀중
한 문화재들을 더 잘 관리하고 보존하기 위해서이다.
*그런가 하면 ‘사적’이나 ‘명승’ 등으로 이름 붙여진 문화재들도 있다. 사적은 전쟁터나 집터, 절터처
럼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이나 건물이 있던 자리를 말한다. 또 명승은 경치가 좋기로 이름난 곳을 말
한다. 사적이나 명승은 국보·보물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것 또한 나라에서 정하여 보호할 만한 가
치가 있는 곳이다.
2. 돈의문 敦義門
돈의문은 도성의 2차 공사가 끝나면서 다른 성문과 함께 건축되었다. 처음에는 경희궁 서쪽 언덕 지
점에 위치하여 서전문(西箭門)이라 불리었다. 그러다가 1422년(세종 4) 2월에 도성을 고쳐 쌓게 되면
서 서전문을 헐고 그보다 남쪽 지점에 새로 돈의문을 세웠다. 이후로 돈의문은 통칭 ‘새문[新門]’이
라 불리게 되었다. 돈의문은 의주(義州) 국도의 관문으로 황해도와 평안도를 거쳐 중국으로 통하였다.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 볼 수 없지만 지금의 신문로 큰길과 정동에서 평동으로 통하는 길이 교차하는
마루턱에 위치하였다. 이괄(李适)의 난과 을미사변에 관련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돈의문의 현판
은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글씨는 1711년(숙종 37)에 조윤덕(曺潤德)이 썼고 1749년(영
조 25)에 영건소에서 개조했다고 뒷면에 음각되어있다.
3. 숭례문 崇禮門
숭례문은 도성의 정문으로 청계천과 만초천(蔓草川)을 가르는 언덕에 세워져 있다. 도성 8문 가운데
가장 웅장하고 규모가 크며 서울의 얼굴 구실을 하였다. 남대문의 건축은 홍예(虹霓)와 문루 등 그 구
조에 특별히 유의하였는데 1396년에 시작하여 1398년(태조 7) 2월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되었다.
1448년(세종 30) 숭례문의 지대를 높여 남산과 인왕산의 지맥을 연결시켜 경복궁을 아늑하게 껴안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풍수지리설과 당시의 여론에 따라 다시 건축하였다. 이때의 숭례문이 오늘
에 전하는 것인데 1479년(성종 10)에 중수되었다. 한편 1962년 개수 공사 때 세종과 성종 때 개축 또는
중수한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숭례문의 현판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글씨로 전하는데, 다른 도성문과 다르게 횡액(橫額)이 아니라
종액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오행사상에 따른 것으로 ‘예(禮)’자는 오행의 화(火)에 해당하
는 글자인 까닭에 불이 타오르는 형상에 따라 세워서 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한양의 조산(朝山)인 한강
건너의 관악산이 오행의 화산에 해당되어 그 불기운이 도성을 범접하게 되므로 숭례문의 현판을 세워
맞불로 도성을 보호하고자 했다는 전설이 있다.
졌다.
4. 숙정문 肅靖門
숙청문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1413년(태종 13)에 폐문되었는데, 즉 북쪽은 음(陰)에 해당되어 이 문을
열어 놓으면 음기가 번성하여 도성 안의 부녀자들이 놀아나 풍기가 어지러워지기 때문에 문을 꼭꼭 닫
아둔다고 하였다.
숙청문은 위치상 통행에는 거의 이용되지 않았고, 단지 장마가 지면 비 그치기를 기원하는 영제(禜祭),
즉 기청제(祈晴祭)를 여기에서 거행하였다. 또 예종 때부터는 가뭄이 들면 양기가 많은 남대문을 닫고
음기 서린 북대문을 열어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를 지냈다. 숙청문은 중종 이후 모든 기록에 ‘숙정문(肅
靖門)’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현재 새로 복원한 문루에도 ‘肅靖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 홍지문(弘智門)은 한성(漢城)의 북쪽에 있는 문이므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하였으나, 숙종이 친
필로 '홍지문(弘智門)'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여 달면서부터 이것이 공식적인 명칭이 되었다. 기능적으로
도 1413년 폐쇄된 숙정문 대신 실질적인 북대문의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 보신각普信閣 설치 :
인의예지의 중심에 신을 넣어 어질고, 정의롭고, 똑똑하고, 착해도, 믿음이 없으면 자신의 욕망을 절제
하지 못하고, 이웃에게 피해를 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중심에 信, 믿음을 넣었다.
5. 서울의 4소문(四小門)
조선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
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4대문은 유교사상인 인의예지에 근거를 두고 명명됐다. 동쪽문은 인을 일으키
는 문이라 하여 흥인문, 서쪽문은 의를 돈독히 하는 문이라 하여 돈의문, 남쪽문은 예를 숭상하는 문이
라 하여 숭례문이라 했다.4소문에는 홍화문(혜화문), 광희문, 창의문, 소덕문이 있다.
출처: 효학과 원문보기 글쓴이: 김시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