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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12.12군사반란에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대응방법
베스 추천 0 조회 186 14.08.05 10:0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장태완 소장은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취임한지 24일이 되던 79년 12월 12일 저녁 6시 30분 전두환 합수부장의 만찬초대로 신촌의 연희동 요정에 갔다. 장 사령관은 그곳에서 ‘정승화 총장 공관의 총격사건’ 보고를 받고 저녁 7시40분 귀대하는 차안에서 수경사 헌병단 5분대기부대를 한남동 소재의 정 총장 공관으로 출동지시한 후 예하부대에 비상을 발령하고, 전 지휘관 및 참모들을 상황실로 소집하였다.

저녁 8시 수경사에 도착한 장 사령관은 상황을 파악해 보았으나 정확한 상황을 알 수 없었으며, 상황실에는 방공포병단장 황동환 대령(갑종출신)만이 소집되어 있었다. 즉, 제30경비단장 장세동 대령(육사 제16기, 하나회)과 제33경비단장 김진영 대령(육사 제17기, 하나회) 그리고 조금전 만찬장소에 있었던 헌병단장 조홍 대령(보안사로 이탈) 등 3명의 지휘관은 보이지 않았다.

장태완 소장은 그의 저서 ‘12ㆍ12 쿠데타와 나’에서 그 당시의 상황을 “나는 직감적으로 하나회 사조직 집단들의 소행임을 느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그리고 “원만한 부대수습을 위해서 나는 내색을 노출시키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곧이어 장 사령관은 특수임무조(헌병 1개소대, 전차 1대, 경장갑차 1대, 트럭 1대, 사이드카 2대)를 편성한 후, 헌병단 부단장인 신윤희 중령(육사 21기, 하나회)으로 하여금 지휘케하여, 정 총장 공관으로 출동, 총장의 소재확인 및 구출 그리고 현지상황을 도착 즉시 보고하도록 임무를 주고 출동시켰다.

그러나 특수임무조를 파견시킨지 30분이 경과해도 아무런 보고가 없어 장 사령관은 직접 확인하려고 저녁 8시40분 정보참모를 대동하고 총장공관으로 가던중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으로부터 ‘전두환의 합수부 측에서 정승화 총장을 연행했으니 속히 사령부로 돌아가 사태를 수습하라’는 무전을 받았다.

이 교신이 끝날 무렵에는 이미 한남도 공관촌 입구에 접근해 있었다. 그곳에는 여러부대에서 출동한 많은 병력과 민간인들이 뒤섞여서 큰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서 수경사 특수임무조를 만나 신윤희 중령으로부터 ‘해병대 경비병들의 사격이 심하여 접근을 못하고 이곳에서 대비중’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또한 이곳에는 육본 비서실장 최연수 준장(포간 제15기)과 육본 5분대기부대를 이끌고 출동한 육본 본부사령 황관영 준장(육사 제12기)이 있었는데, 그들은 ‘육본 헌병감실 성환옥 대령(육사 제18기, 하나회)이 헌병 1개소대(마이크로버스 1대)로 사건 진압차 총장공관에 진입했으나 총장 납치범은 이미 외부로 탈출한 후였기 때문에 귀대하려는 순간에 해병대 경비병들에게 억류되어 수경사 병력으로 구출작전을 시도했으나 해병대 경비병들에게 저지되었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 해군 기동타격대를 이끌고 출동한 해군 헌병감 박종곤 준장이 장 사령관에게 다가와 정반대의 이야기 즉, “이유없이 억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범인 방조자들이다”라고 귀띔해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옳은 판단이었다.

그래서 장 사령관은 육본 본부사령 황관영 준장과 해군 헌병감 박종곤 준장에게 상호협조해서 잘 처리해 줄 것을 부탁하고 신윤희 중령에게는 수경사 병력은 철수하도록 지시하고 밤 9시 수경사로 돌아왔다.

한편 전두환 합수부장의 거사본부인 제30경비단장실에서는 해병대에 의해 억류되어 있는 성환옥 대령 등 자파병력을 구출하기 위해 제33경비단장 김진영 대령으로 하여금 제30경비단의 병력(80명)을 지휘케 하여 출동시켰다. 현장에 도착한 김진영 대령은 그의 임무를 위장하였기 때문에 타 부대와의 충돌은 없었으나 그는 여기에서 수경사에서 출동한 특수임무조장 신윤희 중령을 설득하여 쿠데타군으로 포섭하고 말았다. 아울러 5공전사에 따르면 신 중령은 반란군 측에 가담한 조홍단장으로부터 김 대령의 지시에 따르라는 무전지시를 받은 바 있었다.

신윤희 중령은 바로 12월 12일 새벽 3시40분 자신의 직속상관인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육본 수뇌부들을 체포하는 책임자가 되었던 것이다.

장태완 사령관이 수경사 상황실에 도착하자 참모장 김기택 준장(육사 제11기)은 “지금 제30경비단장실에는 제30 및 33경비단장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중장과 노태우 및 박준병 소장 그리고 제1, 제3, 제5공수여단장, 제71훈련단장 백운택 준장 등이 모여 있습니다.” 라는 보고를 하였다.

장 사령관은 짐작은 했으나 정치군인들이 기어이 모반했다고 직감하고 제30경비단장 장세동 대령을 전화로 불렀으나 전화에는 장 대령이 아닌 국방부군수차관보 유학성 중장이 나왔다. 이때 장 사령관과 반란 중요임무종사자들과의 사이에 주고받은 대화내용이 녹취로 알려져 있다.

먼저 장태완 사령관은 유학성 중장에게 “선배님, 지금 전군에 비상이 걸려 모두 정위치인데 남의 부대에 여러 사람을 모아 놓고 무슨 작당을 하고 잇습니까? 그리고 총장님을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선배님, 저 보다도 그쪽에 계신 분들이 총장님과 더 가깝지 않습니까? 이 비상시국에 계엄사령관인 총장님을 납치해 다가 뭘 어쩌자는 겁니까? 빨리 총장님을 원상적인 위치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이번 일은 언론에 나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 제30경비단은 대통령을 모시는 근위부대입니다. 사령관인 저도 해가 진 후에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 부대에 가질 않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유학성 중장은 “흥분하지 말고 이리 와서 말 좀 하자”고 회유하는 것이다. 이에 흥분한 장 사령관은 유 중장에게 “반란군 놈들! 거기 그대로 있거라. 전차를 몰고 가 깔아 죽일 테다”라고 하자 유 중장은 제1군단장 황영시 중장에게 전화를 바꾸었다. 황 중장은 장 사령관에게 “왜 흥분하고 그래 진정해. 그러지 말고 제30경비단으로 와서 우리와 같이 일하도록 해요”라고 유 중장과 같이 회유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장 사령관은 황 중장에게 “형님이 나보고 정승화 총장을 잘 모시라고까지 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랬으면 형님이 잘 보필해야지 이래서 됩니까? 정 총장과 가까운 형님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러니 총장님을 빨리 원상복귀 시키도록 하십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황 중장은 “장 장군, 그럴 수는 없어. 이건 박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를 위해서 불가피한 일이야”라고 대답함에 따라 장 사령관은 재차 “좋아 이놈들! 꼼짝말고 거기 있어. 내가 포를 가지고 가서 네놈들의 머리통을 모두 날려 버릴테니……”라고 욕설을 퍼부었더니 황 중장은 ‘차규헌 장군을 바ㅝ 주겠다’고 하기에 장 사령관은 전화를 끊어 버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장태완 사령관은 “과거에 차규헌 중장을 직속상관으로 모신 일이 있었기 때문에 결례를 피하고자 하는 뜻과 차 중장이 윤필용 소장과 함께 하나회의 후견인이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통화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장 사령관은 전두환 합수부장 측과 교신한 결과, 타협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무력을 동원하여 반란을 진압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반란군들은 비상계엄하에서 상관의 허락도 없이 근무지를 무단 이탈하여 계속 반란음모를 꾸미고 있고, 특히 대통령의 재가도 없이 직속상관인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 대장을 강제로 연행한 이상 더 주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들 일당을 일망타진하려면 제30경비단의 방어태서 등을 감안할 때 저항 강도가 높을 것이기에 추가적인 진압부대가 필요함을 느낀 장태완 사령관은 직속지휘계통을 따라 부대의 추가 지원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장 사령관은 밤9시30분 윤성민 참모차장에게 전화를 하였으나 통화가 되지 않아 직접 국방부장관과 통화를 시도하였지만 부재중이었다. 이에 김용휴 국방부차관에게 전화를 하여 이제까지의 상황을 보고하고 난 다음 반란진압작전시 수경사령관이 가용토록 되어 있는 수개사단 가운데 제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 그리고 수개 공수여단중 유일하게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제9공수여단을 지원해줄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용휴 차관은 “알았어. 그 못된 놈들이 장난하는 모양인데 장 장군이 잘해야 돼. 장태완 파이팅!”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구체적인 요구를 위해 제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에게 전화를 하여 현 상황을 전하고 나서 제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을 가급적 속히 서울운동장과 장충단공원 일대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건영 제3군사령관은 그 요청을 승낙하면서 “장 장군! 알았어. 윤필용, 전두환 그 못된 그 못된 놈들이 장난을 하는 모양인데 장 장군이 잘 해야 돼. 그리고 화영시 제1군단장, 차규헌 수도군단장 이놈들의 지휘하에 있는 예하부대들을 절대 서울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잡아둘테니까 걱정 말고 그놈들을 빨리 소탕해야 돼”라고 격려까지 하였다.

얼마 후 윤성민 참모차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그간의 상황을 보고하고 아울러 국방부차관과 제3군사령관과의 대화내용을 설명하면서 2개사단의 병력지원을 요청하였다.

이로부터 약 10분 후인 밤 9시50분 장 사령관은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연희동 요정에서 헤어진 후 처음)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는 ‘노재현 국방부장관 및 합참본부장 문홍구 중장과 통화했는데 유학성, 황영시 등이 장난을 친다는 사실과 그들이 병력을 동원하기 시작했으니 주의하라는 것 그리고 공수여단이 국방부를 목표로 쳐들어온다는데 막아달라는 것“ 등이었다고 했다. 정병주 사령관은 국방부장관에게 ”장난하는 놈은 장관님이 가지고 있는 수사기관으로 모조리 체포하십시오“라고 진언했다는 것을 첨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관심사는 공수여단들을 고착제지하는 것과 2개사단(제26사단 및 수도기계화사단)을 지원 받아 그들을 선제진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장 사령관이 정 특전사령관에게 공수여단들의 동태를 문의하였던 바, 그는 제1공수여단이 출동하고 있다는 참모보고를 받고 즉각 중지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부사령관 이순길 준장과 헌병부대장을 제1공수여단에 보내 불응하면 여단장을 체포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제3공수여단장 최세창에게는 ‘유사시에 즉각 명령을 실행할 수 있도록 상황판단을 잘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었다.

그후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정병주 특전사령관과의 통화에서 제1공수여단이 지휘계통을 이탈한 사실을 알게 되어, 비육사 출신인 제9공수여단장 윤흥기 장군의 부대만을 지원요청하였다.

이어 장 사령관은 참모총장 대리 윤성민 중장에게 위 사실을 보고하고 제9공수여단을 즉시 배속시켜줄 것을 건의하여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특전사령관 정 소장과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제9공수여단의 한강교 통과방법을 협의하였다. 그 무렵 모든 한강교는 바리케이트와 차량장애물로 수경사 병력에 의해 차단되어 있었다

그후(밤 10시) 장 사령관은 수도권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제26사단장 배정도 소장(종합 제6기)과 수도기계화사단장 손길남 소장(종합 제29기)에게 전화하여 출동준비 상태를 확인하였다.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은 계속하여 밤 10시30분 제30사단장 박희모 소장(갑종 제9기)에게 전화로 상황을 설명해 주고 “반란군인 제1공수여단이 제1한강교로 도강을 시도했으나 수경사에 의한 차량바이케이트로 인하여 회군하였는데 혹시 제 30사단 관할인 행주대교를 이용하려고 할지 모르니 반드시 차단해 달라”는 것과 “전두환 합수부장 측인 노태우 소장의 제9사단이 병력을 출동시키면 제30사단 지역을 통과할 터이니 구파발의 대전차 장애물에 연하여 전차와 106밀리 무반동총, 로켓트 등을 동원해서 제9사단의 서울진입을 막아주어야한다”는 요지의 작전요청을 함과 아울러 “반란군인 전 합수부장과 황영시 제1군단장의 지시를 받아서는 안된다”고 경고성 당부도 했던 것이다. 이와같은 요청과 당부를 두 번이나 하였다. 이에 대해 박희모 제30사단장은 “알았다”라고 했으나 결국 배반함으로써 쿠데타를 성공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하고 말았다.

만일 박 소장이 행주대교의 봉쇄와 구파발 접근로를 완전히 통제했더라면 제1공수여단이나 제9사단 및 제2기갑여단 등 반란군은 서울진입이 곤란했을 것이다.

그런데 박 소장은 2개의 주요 통로를 반란군에게 개방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1개연대 병력을 고려대학교에 진주시켜 반란에 적극 가담하였다.

밤 10시45분, 육군 수뇌부가 수경사로 이동해 옴에 따라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윤성민 참모총장 대리에게 그때까지의 상황을 보고하였다.

잠시후 수경사 정문에서 전화가 걸려와 장 사령관이 받았더니 육본 보안부대장 변규수 준장이 왔다는 것이다. 장 사령관은 얼마전 수경사에 파견된 보안부대 요원들을 모두 감금했었기 때문에 변 준장도 연금함이 타당할 것ㅇ라고 판단하고 윤 참모차장의 승인하에 연금해 버렸다.

밤 11시 장 사령관은 황원탁 대령(총장 수석부관, 육사 제18기)이 정 총장 구출작전을 위해 전차 1대를 지원요청 하여 승인한 바 있었으나 노재현 장관의 지시를 받은 문홍구 합참본부장에 의해 제지되고 말았다. 또한 육군헌병감 김진기 준장은 장 사령관에게 삼청동 총리공관에 가서 최규하 대통령을 모셔오겠다고 하면서 헌병 1개소대를 지원요청하여 이를 쾌히 승인했었다. 그런데 김진기 준장이 공관을 정찰하고 나서 이미 반란군에 의해 장악되었음을 확인하고 대통령 구출작전도 포기하고 말았다.

그후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윤 참모차장을 비롯하여 제3군사령관 및 가용부대장에게 병력출동을 요청해 보았으나 하나같이 국방부장관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노재현 장관이 우회지휘하면서 모든 병력출동을 제지시켜 놓은 결과였던 것이다.

뿐만아니라 수경사에 위치하고 있는 육군 지휘부도 노 장관과 합참의장, 중장부장 서리 등으로부터 병력출동 제지지시를 파상적으로 받고 있었으나 장태완 사령관에게만은 전달되지 않았다. 이때의 비통한 상황에 대하여는 이미 육성녹음과 녹취를 통해 세상에 공개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겨우 밤 0시를 넘어 출동하던 제9공수여단도 회군하고 말았다. 장 사령관은 최후의 수단으로 수경사 자체병력만을 이끌고 경복궁에 있는 제30경비단과 보안사를 공격하여 전두환 합수부장 측을 진압하기로 결심하고 사령부의 잔류 장병들을 소집하여 공격준비명령을 하달하였다.

이때의 무력은 전차 4대와 TOW(대전차 미사일)중대, 그리고 행정병 100여명에 불과하였다.

이와같이 12월 13일 새벽 1시30분 장 사령관이 최후의 행동을 위해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던 중 비서실장 김수탁 중령이 달려와 “전두환 합수부장 측에 가담한 전차대대 본부로부터 전차소대에게 ‘수경사령관을 사살하라’는 무전이 계속 들어오고 있으니 속히 피신해야 하겠습니다”는 것이었다

전차 4대가 최후공격의 주력인데 이것마저 돌아선다면 나머지의 전력은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 무렵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은 전두환 합수부장 측의 지시를 받고 출동한 제3공수여단 예하 제15대대장 박종규 중령(육사 제23기)의 특공조(10명)에 의해 팔에 총상을 입고 체포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제1공수여단도 전 합수부장 측의 지시로 육본과 국방부를 점령하기 위해 행주대교를 통과하여 서울로 진입하였다는 보고와 거의 같은 시각에 장 사령관이 미리 출동지시를 해 놓았던 수경사 예하 야포단 단장 구창회 대령(포간 제57기)으로부터 “야포단이 행주대교로 서울에 진입하려고 하였으나 박희도 제1공수여단장이 행주대교를 통과한 후 다리를 재1공ㅅ여단이 장악하고 있어 야포단 이동이 불가능한 상태이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보고해 왔다. 이에 실망한 장 사령관은 “야포단은 원위치에서 경복궁 제30경비단장실을 향해 사격준비를 하고 다음 명령을 대기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구명회 야포단장은 수경사 작전참모 박동원 대령(육사 제14기)에게 “명령은 이행하겠으나, 실제 포격은 곤란하니 조명탄이나 준비하겠습니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시간이 지날 수록 자기가 의도했던 계획이 뒤틀리는 것을 알게 되자 이른 바 ‘최후의 돌격’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무실로 돌아온 장 사령관은 때마침 찾고 있던 노재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때가 12월 13일 새벽 3시였다.

먼저, 당시의 상황을 간추려 보면, 서울의 요소 요소는 반란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고 있었다. 즉, 국방부 및 육군본부, 특전사령부, 경복궁, 제30경비단과 중앙청 일대, 태능과 고려대학교, 효창공원 및 장충단 일대 등이 점거되고 예상 접근로마저 반란군이 통제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국방부 지하실에 피신 중이던, 노 장관과 대화가 이루어진다.

노 장관 : 야, 장태완, 넌 왜 자꾸 싸우려고만 하나

장 사령관 : 장관님.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저에게 무슨 병력이 있어야 싸우지요. 저놈들이 언제 쳐들어 올지 모르니까 다만 자체 방위태세만 갖추고 있을 뿐입니다.

노 장관 : 야, 말로 해 말로 …

장 사령관 : 아니, 저놈들이 초소를 유린하면서 부대를 공격해 들어와도 말입니까? 그러시다면 지금부터 어떻게 하라는 지시를 장관님께서 내려주십시오. 지금이라도 지원병력을 출동시켜 주시겠습니까?

노 장관 : 말로 하란 말야. 피를 흘려서는 안된단 말야.

장 사령관 : 피흘린 것도 없지만 이제 다 끝났습니다. 병력들이 다 저쪽으로 넘어가고 여기는 전투병력이 없습니다.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노 장관 : 병력을 철수시키고 상황을 끝내도록 해.

장 사령관 : 알겠습니다. 그것이 장관님의 명령이라시면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장관님, 복명복창하겠습니다. 이 시간부로 상황을 끝내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교신을 끝낸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같은 방에 있던 육군참모차장 윤성민 중장과 육군 참모부장들에게 12월 13일 새벽 3시부로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보고했다.

장 사령관은 그의 저서에서 ‘노 장관은 정 총장 공관에서 총격이 있은 후 총 8시간만에 그것도 상황이 반란군 측에 완전히 기운 시점에 나타나서 상황중지 명령을 내리니 그의 저의에 큰 의문을 품으면서 복장이 터지는 아픔을 느꼈다.’라고 쓰고 있다.

장태오나 사령관은 상황종료 조치로서 모든 전투행위를 중단시키고 전 한강교량상의 새벽 4시 통금해제와 동시에 철수하도록 지시하였다.

한편, 윤성민 참모차장은 반란군 측의 유학성 중장과 전두환 합수부장에게 전화로 진압군의 상황종료를 알렸던 것이다.

이러는 가운데 장태완나 사령관과 육본 수뇌부의 체포 또는 무장해제를 지시 받은 헌병단 부단장 신윤희 중령은 호시탐탐 기회만을 노리다가 새벽 3시40분 헌병중대장들과 대원 10명을 지휘, 사령관실로 진입하여 하소곤 육본 작전참모부장에게 M-16 소총을 사격하여 부상케 하고 직속상관인 장태완 사령관에게 “보안사령관 명령으로 이제부터 사령관님을 모시겠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장 사령관은 직속부하에게 무장해제된 채 새벽 4시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되었다.

동시에 육본 수뇌부도 모두 무장해제되고 윤성민 참모차장과 합참본부장 문홍구 준장은 별도로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되었다.

장태완 준장은 훗날, 인터뷰를 통해서 당시 수경사령관으로서 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책임을 솔직히 시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2·12군사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데에는 첫째, 최규하 대통령에게 큰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군통솔권자이자 국헌을 수호해야 할 책무를 갖는 대통령이 목숨을 걸고 쿠데타를 거부하지 않았으며, 계엄부사령관인 육군참모차장이나 수경사령관에게 반란 진압의 확고한 의지와 분명한 진압지침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둘째, 국방부장관의 부당한 행위로 인해 반란진압이 가능치 못했다.

즉, 국가 비상사태하에서 군령과 군정권을 관장하여 대통령을 보좌하고 군통솔권행사를 도와야 할 노재현 국방부장관이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우선해 몇시간 동안이나 자리를 비운 것은 계엄지휘관 수소이탈이며, 특히, 반란 진압부대의 출동을 제지하면서 지휘체계상에 혼란을 빚게 하였다.

셋째, 기회주의적 성향의 장성들이 많았기 때문에 진압작전을 실패했다.

즉, 당시 대부분의 장성들이 5·16 때에 쿠데타군을 진압하려다가 반혁명분자로 몰리는 장면을 목격 또는 체험했기 때문에 기회주의적 태도를 취하며 우유부단한 자세로 상황의 추이에 민감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끝까지 무력진압 의지를 고수한 장성은 고작 한 두명 뿐이었다는 것이다.

넷째, 쿠데타군과 유혈충돌이 없도록 타협하겠다는 육본 수뇌부 측의 미온적이고 불합리한 태토로 인해 쿠데타 진압을 실패했다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 나선 쿠데타군과는 타협이 있을 수 없다는 교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혈충돌 방지라는 미명하에 타협하려고 노력하며 시간만 허비했다는 것이다. 또한 유혈 무력충돌 없이 쿠데타군을 진압할 수는 없는 것이라는 것.

다섯째, 쿠데타군이 육본과 국방부를 점령하였음에도 방패부대인 제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의 동원요청을 거절한 참모차장과 제3군사령관이 모두 거절의 사유로 국방부장관의 ‘병력동원 불가 지시’만을 제시했다.

끝으로 장 사령관은 12·12 초기단계에는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다가 종말단계에는 돌아서 버린 육본측 장성들에 대해 배신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어쨌든 장 사령관은 보안사에 연행되어 50일간의 혹독한 조사를 받고 강제예편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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