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에서 나를 찾다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사회적 인간인 우리는 모두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나는 나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누구로서 존재하고, 관계 속에서의 위치로 규정된다. 그런데 이런 관계 속에서만 나를 바라보면 정작 나의 존재 자체나 정체성은 사라지고 관계만이 나의 모든 것이 되어 버린다. 현대사회에서 자주 언급되는 인간소외는 이 거대하고 복잡한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사라져 버린 개인의 존재감 상실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관계를 벗어난 혼자만의 완전한 세계를 상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은 현실을 벗어난 도피적 망상으로 귀결되기에 십상이다. 더러 일인칭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현실 도피적인 음풍농월의 시들에서 이러한 경향을 볼 수 있다.
조광자 시인의 시들은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자신의 정체성을 관계의 절연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찾는다. 관계에서 해체되어 가는 존재를 다시 관계를 통해 확인하는 그 긴장감이 그의 시에 팽팽하게 펼쳐진다.
벼리고 깎아서
서로에게 필요한 연장이 만들어지듯
무딘 칼날은 숫돌을 깎아내리고서야
날을 세우고 시퍼런 위엄을 갖춘다
거품을 물고 흘러내리는
예리한 눈빛
상처를 파헤치듯 돌아눕는
싸늘한 금속의 차가움이여
서로에게 익숙해질수록
제 몸을 깎아 완벽한 짝으로 태어나는
칼과 숫돌 사이처럼
무뎌지고 뭉텅한 마음을 벼리고 산다
- 「칼과 숫돌 사이」 전문
시인이 벼려야 할 마음은 무엇일까? 그것은 칼날처럼 “시퍼런 위엄”이다. 하지만 그것이 “싸늘한 금속의 차가움”으로 변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숫돌을 만나 “서로에서 익숙해”지는 것을 통해 숫돌과 “완벽한 짝”이 되는 그런 존재가 되기를 꿈꾸고 있다. 다시 말해, 숫돌 없이 날카로운 칼이 만들어질 수 없듯이, 자신과 관계 맺는 나 아닌 존재에 대한 사유를 통해서만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고자 한다. 그럴 때 “무뎌지고 뭉텅한 마음”처럼 현실의 상투성에 자동화되어 진정한 자신을 망각하고 사는 일상에서 벗어나 나의 의식을 다시 일깨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시인은 칼을 벼리는 심정으로 시를 쓴다. 그 시는 날카로운 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서로 파고들어 하나가 되는 숫돌과의 사이에서 쓰여진다.
자신 아닌 타인과의 관계를 사유한다는 것은 타인이 겪은 고통을 자기 것으로 내면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평생을 뒤척이며 허리가 뒤틀렸다
꼬인 근육이 견디는 통증이 깊어지면
옹이 진 마음도 같이 자란다
꼿꼿하게 세우지 못한 허리에
누군가는 손을 얹고
더러는 비웃고 지나쳤을 그 길
…(중략)…
짓무른 눈가를 문지르며 바라보시던 어머니
그 말씀이 썩어서 거름이 되도록
여름 한 철 자갈밭에 묻혀 산다
갈라진 맨발을 딛고 일어선 바람이 산을 넘어가는 소리
허물어진 마음이 봉긋해지도록 다독이는 소리
비탈진 길에 휘어진 소나무 한그루
그만 쉬었다 가라고 구부러진 허리를 내민다
차마 앉을 수가 없어 돌아서 간다
- 「휘어지다」 부분
시인은 길을 지나다 세월의 풍상에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난다. 그 아래에서 쉬어 가고 싶지만, 그 소나무가 겪었을 고통의 세월을 생각하며 “차마 앉을 수가 없어 돌아서 간다”. 고향에 살고 있는 시인의 노모가 바로 그랬을 것이다. 평생의 힘든 노동으로 굽어진 허리를 꼿꼿하게 들지 못하고 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러는 주위의 무시를 받으며 살아왔을 것이다. 시인은 소나무에서 이런 자신의 노모를 떠올리고 그 삶의 고통을 다시 한번 자신의 마음속에서 확인한다. 시인이 휘어진 소나무 밑에서 쉬어 가지 못하고 돌아서 가는 것은 그 고통을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감내한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와 경건한 존경의 표현이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느릿느릿 되새김질하는 강
가는지 오는지 깊은 속을 보이지 않는다
밀림 한 가운데서
사자에게 먹히고 있는 새끼를 바라보는
어미의 눈이 저랬다
온통, 검푸른 동공뿐이었다
- 「산다는 것」 전문
산다는 것은 인간이나 자연에나 모두 슬픔과 고통을 수반한다. 사자에게 새끼가 잡아먹히는 것을 보는 초식동물의 슬픔과 고통은 우리가 쉽게 감내할 수 없는 것이리라. 시인의 그 슬픔의 눈빛을 깊은 속을 보이지 않는 강물로 비유하고 있다. 그만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과 고통을 관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자신의 감각과 자신의 정서로는 완벽하게 체험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이렇게 내 몸과 내 감각으로 파악되지 않은 타자에 다가가는 일이다. 그래서 그 관계 사이에 파고들어 존재들과의 소통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한 철 보기엔 꽃이 좋아
플라스틱 화분에 담긴 작은 앵초 꽃을 사 왔다
좁은 집에 전족을 딛고 선 어린 신부
피우지 못한 겨울이 젖꼭지처럼 말라붙었다
…(중략)…
입을 버리고 고무호스가 대신 먹고 있는
소화되지 못한 감정이 쿨렁, 기침을 한다
수치심을 묶어버린 손이 힘겹게 버둥거리자
침대에 묶인 뿌리가 서서히 젖는다
한 줌 물과 햇살에 매달려 살아가고 있는 저것들
차마 버릴 수가 없어 가슴에 걸어두고 산다
- 「식물의 감정」 부분
시인은 메말라 죽어가는 두 개의 존재를 보여주고 있다. 하는 겨울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가는 앵초 화분이고 또 하나는 병원에서 생명연장장치에 의존해 버티고 있는 가족 중 한 명(아마 노모)이다. 둘 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식물이다. 시인의 이 식물의 고통을 읽고 그것을 자신의 고통으로 치환해 감내하려 한다. 마지막 구절 “차마 버릴 수가 없어 가슴에 걸어두고 산다”는 말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우리는 나 아닌 존재들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 “한 철 보기엔 꽃이 좋아” 화분을 사 집에 놓아두는 그런 사소한 만남이든 내게 절대적인 사랑을 베풀어 준 어머니 같은 존재와의 긴밀한 만남이든 타인과의 관계에서 기쁨과 사랑을 경험하며 산다. 하지만 그 존재의 고통까지 함께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내게 표현되지 않고 쉽게 경험되지 못한 “식물의 감정”이다. 시인은 그것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그것의 슬픔과 고통을 체화하여 언어로 만들어 내고자 한다. 그래서 시가 나와 타인을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사이의 언어’가 될 수 있기를 시도하고 있다. 식물의 고통까지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은 따뜻하고 시인의 시선은 예리하다.
이런 마음과 시선은 다음 시에서 좀 더 뚜렷하게 확인된다.
-앞만보고달리는자전거에매달려가는롤러스케이트의여자
품에안긴아기의때묻지않은눈동자
자전거를 따라 빠르게 회전하는 롤러스케이트
그녀의 머리에 새가 돋아나 먼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바퀴의 중심축을 벗어나 날고 싶은 새
길에는 날개가 없다
액자 속으로 들어간 가족은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 「틀」 부분
시인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한 장의 사진이다. 거기에는 젊은 부부와 아이가 즐겁게 자전거와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가는 모습이 들어 있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것에서 다른 것을 본다. “먼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여자의 눈빛을 보고 있다. 날고 싶지만 날지 못한다. 날개가 없으므로 바퀴의 중심축을 따라 돌며 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꿈을 가족에게 저당 잡힌 그런 그녀의 슬픔을 느낀다. 액자 속의 사진이 박제화되어 있듯 그녀의 삶도 가족이라는 틀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액자는 행복의 기록이지만 한 존재의 삶을 옭아매는 “틀”이기도 하다. 조광자 시인은 이렇게 사진 한 장을 보고도 그 안 인물의 고통을 자신의 정서와 언어로 내면화하고 있다. 시인이 자신의 시론에서 말하고 있는 “영적 수행으로서의 시 쓰기”가 바로 이런 것이다. 시인이 게을리하지 않으리라 다짐한 “눈을 밝히는 수행”이 우리들의 눈까지 밝게 만들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