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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Ⅱ. 낙랑출토의 漢簡 Ⅲ. 初元 4年 縣別戶口의 구성 Ⅳ. 初元 4年 戶口資料의 검토 Ⅴ. 맺음말 |
Ⅰ. 머리말
최근 평양시 락랑구역의 한 木槨墓(귀틀무덤)에서「樂浪郡初元四年縣別戶口多少☐☐」라 이름 붙여진 木簡이 같은 시기의 몇몇 ‘公文書 초사본’과 더불어 출토되었다. 이는 북한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의 학술지『력사과학』최근호(Vol. 198〜200)에 게재된 손영종의 논문에서1) 散見되는 사실이다.
손영종의 보고에 따르면「樂浪郡初元四年縣別戶口多少☐☐」木簡은 전한 元帝 初元4年(BC 45년)에 집계된 낙랑군 25개현의 縣別 戶口數가 기재된 통계표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소개된 내용은 극히 소략하다. 목간이 출토된 무덤의 구조와 부장유물에 대한 설명은 물론이고, 목간의 전체 목록, 관련 사진, 수효. 형태, 서체, 판독 全文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다.
다만 25개현 가운데 8개현의 戶數와 3〜4개현을 단위로 합산한 戶口數를 소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전체 인구수에서 ‘한족’과 ‘원 토착주민’이 구분되어 있다고 하면서도, 구분의 구체적 기준이나 木簡에서 이들을 구분하기 위해 구사한 用語에 대해서는 언급 없이 수효와 비율만을 제시하고 있을 따름이다.
낙랑고분에 대한 발굴은 70여기 정도가 일제 강점기에 이루어졌고, 해방이후 북한에서 3천여 기가 발굴되었으나,2) 이 가운데 1980년대 초이래 발굴한 2,600여기의 조사보고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근래 연구서 형태의 몇몇 자료가 나왔지만,3) 자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기 어렵다. 특히 文字遺物의 보고는 더욱 부실하여 설명한 내용조차 신뢰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따라서 初元 4년에 작성된 목간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는 오랜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알려진 단편적인 사실이라도 관련 연구자에게는 시사점을 제공할 것으로 여겨진다. 다듬어지지 않은 내용이나마 소개하려는 까닭이다.
1) 손영종, 2006,「락랑군 남부지역(후의 대방군지역)의 위치-‘락랑군 초원4년 현별 호구다소☐☐’통계자
료를 중심으로」『력사과학』198, 30〜33쪽.
______, 2006,「료동지방 전한 군현들의 위치와 그후의 변천(1)」『력사과학』199, 49〜52쪽.
______, 2006,「료동지방 전한 군현들의 위치와 그후의 변천(2)」『력사과학』200, 31〜35쪽.
2) 梅原末治, 1950,「朝鮮北部に於ける漢墓」『東洋の文化と社會』京都大學支那哲學史硏究會, 4쪽.
리순진, 2001,『평양일대 락랑무덤에 대한 연구』평양, 사회과학출판사, 2쪽.
3) 리순진, 2001, 위의 책.
리순진, 2002,『락랑구역일대의 고분발굴보고』평양, 사회과학출판사.
한인덕, 2002,「평양일대의 벽돌칸무덤에 관한 연구」『평양일대의 벽돌칸무덤, 고려무덤, 삼국시기 마구에 관한 연구』평양, 사회과학출판사.
Ⅱ. 낙랑출토의 漢簡
1931년 남정리 116호분(일명 채협총)에서 墓主의 故吏 였던 朝鮮縣丞 田肱이 부하인 조선현의 史를 시켜 비단 3필을 장례에 봉정한다는 내용의 木札(길이 23cm 폭 6cm, 두께 0.6cm의 木牘)이 출토된 이래 현재 5건의 簡牘이 확인된다. 이를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4)
유적명 |
출토시기 |
유구 |
연대 |
출토내용 |
내용 |
남정리 116호분 |
1931 |
귀틀무덤 (橫口式 木室) |
3세기 전반 |
木牘 1점 |
賻儀名謁 |
정백동 3호분 (周古墓) |
1963 |
나무곽무덤 (異穴合葬) |
기원전 1세기 후반 |
木簡 3점 |
未詳 |
락랑동 1호분 |
1981 〜1984 |
귀틀무덤 |
1세기 |
木簡 6점 |
未詳 |
락랑구역 나무곽무덤 |
1990.2 〜1992초 |
나무곽무덤 |
기원전 1세기 |
竹簡 일괄 |
論語 全文 (권11〜12) |
락랑구역 귀틀무덤 |
2005(?)1) |
귀틀무덤 |
기원전후 |
木簡 일괄 |
公文書 (기원전 45년) |
이들 자료는 모두 평양시 남쪽 이른바 낙랑토성 주변의 고분군에서 출토되었으며, 시기적으로는 전한말에서 후한말까지 나타난다. 그러나 남정리 116호분을 제외하면 모두 기원전후 시기에 근접하고 있다. 이는 簡牘의 편철, 보관 과정의 흔적이라 할 낙랑 출토 封泥의 사용 연대와도 일치한다.5)
기원전 45년 작성된 호구자료가 출토된 무덤은 뒤로하더라도, 나머지 간독 자료의 내용 또한 구체적 사실을 알기 어렵다. 기원전 1세기말로 편년되는 정백동 3호분이 周古라 쓴 인장과 함께, 관모, 띠걸이 등 官人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세형동모와 쇠도끼, 화분형토기 등이 부장되어 있는 점에서 토착민이 군현 관리로 활동한 사실을 유추해 보는 정도이다.
한편 1990년 초에는 論語 竹簡이 출토되었다. 다행히 권11〜12의 全文이 적혀 있다고 알려졌다.6) 보고자가 권 11과 12를 명시한 점에서 전한말 이래의 論語 20권 본을 염두에 둔 표현인바, 先進篇과 顔淵篇이다. 그런데 이들 竹簡은 재료의 생산지를 고려하면 낙랑지역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라, 內地에서 유입된 것이라 생각된다. 낙랑군의 군현지배와 관련된 문자수용 및 유학보급의 측면에서 주목할 자료라 하겠다.7)
4) 북한의 보고서에는 목간을 나무패쪽(혹은 글쓴 나무패쪽), 죽간을 참대패쪽(혹은 글쓴 참대패쪽)이라 하거나 단지 나무 쪼각으로 표현하고 있어서 구분이 쉽지 않다. 예컨대 정백동 116호분에서도 23cm 길이의 나무자와 함께 나무패쪽 4개가 나왔다하고, 정백동 37호분에서도 장방형의 나무패쪽 여러 개가 출토되었으며, 2003년 3월 낙랑토성 서벽 근처에서 발굴한 우물유적에서도 4각 단면에 구멍이 나있는 나무 쪼각이 나왔다고 한다.
5) 손영종의 관련 논저와 북한을 방문했던 연구자들이 傳聞한 내용을 종합할 때 2005년 발굴되었거나, 아니면 그 전에 발굴하였지만 내용 판독이 이 때가 되어서야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6) 漢代封泥는 王莽時代 이후로는 소멸했다고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江村治樹, 1981,〈東京國立博物館保管陳介祺舊藏の封泥〉《MUSEUM》364, 4~17쪽). 그러나 국립박물관 소장의 낙랑봉니 “黃信之印”은 위진대 유물로 추정된다고 한다.(孫慰祖, 1995,「朝鮮半島出土的漢魏時代封泥考」『大公報․藝術』香港 ; 2000,『孫慰祖論印文稿』上海書店出版社, 66쪽)
Ⅲ. 初元 4年 縣別戶口의 구성
손영종은 “초원 4년의 호구통계가 얼핏 서북한에 낙랑군이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검토하면 요동반도의 천산산맥 일대에 위치하였다는 확고한 증거”라고 한다. 이를 위해 낙랑군의 남부지대, 뒤에 대방군 지역이기도한 7개현의 호구수를 언급하면서
대방군 7개현 가운데서 제해, 해명, 함자현이 남는데 이 3개현의 호구는 다 합쳐도 우에서 본 것처럼 864호, 6,608명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락랑군의 상대적으로 큰 현들의 1/3〜1/6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현들은 황해남도의 서부와 남부, 황해북도 중부와 동부의 광활한 지역 아마도 6개의 큰 현들이 넉넉히 들어갈 만한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된다. 황해남도 지역으로 말하면... 다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되는...인구가 조밀한 지대였다. 그런데 여기에다가 황해북도...지역까지... 합해서 3개 현 864호, 6,608명의 호구밖에 없었다는 것은 도저히 리해될 수가 없는 것이다. ....《락랑군 초원4년 현별 호구다소☐☐》에 관한 통계표에 보이는 7개 현(후의 대방군지역)의 호구수는 료동반도 남단의 력사지리적 및 경제지리적 환경조건과 대비고찰해보면 잘 대응한다는 것을 말할수 있다.8)
라 하였지만, 제해, 해명, 함자현의 3개현의 범주를 황해도 동남부 전역으로 설정한 것이나 반대로 요동반도 남단지역이 잘 대응한다는 설명도 납득하기 어렵다. 나아가 목간이 출토된 귀틀무덤의 주인공은 요동에 있던 낙랑군의 관리인데 평양일대로 도망(망명)온 존재라는 이해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樂浪郡初元四年縣別戶口多少☐☐」木簡은 ‘縣別戶口多少’라 한데서 호구수의 增減(多少)을 나타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아가 같은 시기 공문서 초사본 몇몇도 나왔다 한다면, 墾田, 錢穀, 吏員, 律令 등 군현 행정의 실무를 위한 여러 자료가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귀틀무덤이라는 사실 외에 부장유물 등 피장자에 대한 어떠한 추정도 곤란하다. 초원 4년의 호구자료를 비롯한 동 시기 공문서를 함께 부장했다면, 생전에 낙랑군 태수부의 吏員으로서의 직무와 관련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덤의 축조연대는 기원전후로 추정해 볼 수 있겠다.
이처럼 초원 4년 호구자료는 중국 연운항시 尹灣 6호 漢墓인 白石少吏의 무덤에서 나온 東海郡의 上計集簿를 연상케 하는 자료라 하겠다. 낙랑군의 것은 소속 縣別의 호구자료를 太守府에서 集計한 것인데 반해, 동해군의 것은 군 전체의 吏員, 戶口 및 墾田, 錢穀의 출입 등을 기재한 集簿이다. 군현 단위가 아니라 縣의 하위 단위인 鄕別로 보고된 자료를 종합한 통계 자료도 최근 발굴되었다고 한다.9)
이처럼 2006년 손영종이 처음 소개한 낙랑출토의 木簡은 낙랑군의 군현운영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최적의 사료로 생각된다. 그러나 목간의 성격과 내용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은 북한에서 추가 보고가 없는 한 불가능하다. 현재 할 수 있는 것은 소개된 현별 호구수를 가지고 낙랑군 전체의 호구수를 복원하고, 이의 의미를 검토하는 일이다.
초원 4년 호구자료는 한서 지리지 낙랑군조에 수록된 25개현이 모두 확인된다고 한다. 기재순서를 모두 제시하지 않았지만, 동부도위 관할의 7개현이 No.19〜25의 순으로 나열된 점으로 미루면 한서 지리지와 큰 차이가 없는 듯 하다. 이 자료에는 25개현의 호구수를 나열하는 한편 낙랑군 전체 호구수에 대한 수치도 들어 있다. 그런데 전체 인구수를 280,000명이라 하면서 전체 戶數에 대하여는 손영종이 언급하지 않고 있다.
한편 총 인구의 14%인 4만 명이 漢族이며, 86%는 土着民으로 구분되어 있다고 한다. 문서가 縣別 戶口多少 곧 현별 호구 증감을 기재한 것으로 보면, 한족과 토착민의 구분도 縣別로 집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전체 戶數를 알 수 없으므로 한족과 토착민의 호수는 물론 戶當 口數의 산출도 어려움이 있다. 제시된 현별 호구수를 조합하면서 전체상을 복원해 보기로 한다.
먼저 비교적 자세히 소개된 대방현 이하 열구, 장잠, 소명 및 해명, 제해, 함자의 7개현 곧 樂浪郡 南部都尉의 사정이다. 손영종이 소개한 수치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10)
대방현 이하 7개현 합이 7,353호 51,167명 (호당 6.958명-인용자)
대방현이 4,346호 29,941명 (호당 6.889명)
대방현 외 6개현 합이 2,917호, 21,226명 (호당 7.276명)
열구, 장잠, 소명현 3현의 합이 2,148호 14,618명 (호당 6.805명)
해명, 제해, 함자현 3현의 합이 864호, 6,608명 (호당 7.648명)
이를 정리한 것이 말미의 표3이다. 총인구 280,000명을 대방현 이하 7개현에서 산출된 戶當口數 6.958명을 대입하면 낙랑군의 총호수는 약 40,241호로 산출된다. 그러나 이는 실제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위에서 보는 대로 현별 호당구수에 있어서 편차가 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손영종이 서술한 다음 문구는 낙랑군 총호수를 산출하는 단서가 된다.
① 우의 통계에 의하면 락랑군의 총인구 28만여 명 중에서 한족인구수는 4만 명 정도
로서 전체 인구수의 약 14%정도 밖에 안되며, 원 토착주민수는 약 86%였다고 인정되 는 것이다.....② 우에든 7개 현(대방, 열구, 장잠, 소명, 해명, 제해, 함자-인용자)의 호 구수는 7,353호, 5만 167명으로서 전체 락랑군 호구수의 16%밖에 안된다.11)
곧 대방현 이하 7개현의 호구수를 7,353호에 총 50,167명으로 기재하면서 전체 호구수의 16%라 한 것을 기준으로 유추가 가능하다. 총인구 28만 명의 16%라면 44,800명인바, 위의 50,167명은 16%를 크게 상회한다. 따라서 인용문 ②에서 언급한 전체 호구수 16%라는 수치는 인구수가 아니라 대방현 이하 7개현의 호구수 7,353호를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 이를 백분율로 환산하면 낙랑군의 총 호수는 대략 45,956호라는 계산이 나온다.
이처럼 기원전 45년 낙랑군에는 45,956호에 280,000여 명이 郡縣民으로 파악되고 있었고, 戶當口數는 약 6.09명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전체 인구수에서 14%인 4만 명이 漢族으로 나머지 86%가 土着民으로 파악된다고 하였으므로, 漢族이 6,568호, 土着民은 39,388호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파악된 기원전 45년 낙랑군의 호구수를 漢書와 後漢書의 기록과 비교해 한대 낙랑군의 호구수를 정리한 것이 표1이다. 이 표를 통해 전한말 낙랑군의 연평균 인구증가율을 계산해본 결과 0.8%가 산출되었다.12) 이는 전한대 정상적인 연평균증가율 0.7〜0.8%과 같으며 전한말(BC67〜AD2) 연평균증가율 0.6%보다는 다소 높은 수치이다.13)
다음은 낙랑군 동부도위 관할의 7개현의 호구수를 살펴보자. 역시 손영종이 소개한 내용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동이, 잠태, 불이, 화려, 사두매, 전막, 부조현의 7개현 가운데 1,150〜1,564호 사이의 비교적 호수가 많은 현들이 불내, 화려, 사두매, 부조현이고, 동이현은 가장 작아 279호 에 불과하다. 잠태현과 전막현은 각각 544호이다.14)
대방현 이하 7개현의 기록과 달리 戶數만 일부 기재하고 인구수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먼저 7개현 가운데 호수를 알 수 있는 동이, 잠태, 부조현과 어느 현인지 모르지만 1,150호와 1,564호의 두 현을 더하고, 나머지 두 현은 1,150〜1,564호의 평균치 1,357호를 환산하면 총호수가 6,795호가 산출된다. 여기에 같은 부도위 체제하에 있으며 비슷한 호구수를 지니고 있는 대방현을 제외한 열구현 등 6개현의 평균 戶當口數를 기준치로 환산하여 전체 호구수를 복원한 것이 표4이다.
끝으로 위만조선의 중심지이자 낙랑군 직할의 11개현의 사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부분에 대한 손영종의 소개는 가장 소략하여 조선현이 근1만호, 남함현이 2,284호, 탄렬현이 2,000호, 증지현이 가장 작아 548호라 적고 있다.15) 그러나 낙랑군 총호구수에서 동부도위와 남부도위의 호구수를 제외하면 31,812호, 179,433명이 도출된다. 이에서 戶當口數 5.64를 산정하고 이를 戶數를 알 수 있는 조선현 이하 4개현에 대입하여 정리한 것이 표5가 된다. 한편 표2는 위와 같은 방법으로 산정된 낙랑군의 권역별 호구수를 정리하고 이를 소속된 현의 수만큼 평균치를 도출한 것이다. 기원전 45년경 낙랑군의 군세와 권역별 사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7) 류병홍,「고고학분야에서 이룩한 성과」『조선고고연구』1992-2, p.2
8) 김경호, 2005,「한대 변군지배의 보편적 원리와 그 성격-이념적 측면을 중심으로」『東洋史學硏究』91, 東洋史學會. 邊郡地域에서의 문자 유입은 곧 중국적 가치를 반영하는 유교문화의 수용을 의미한다고 한다.
9) 손영종, 2006 a,「락랑군 남부지역(후의 대방군지역)의 위치-‘락랑군 초원4년 현별 호구다소☐☐’ 통계자료를 중심으로」『력사과학』198, 32〜33쪽.
10) 한림대 사학과 김병준 선생님의 교시.
11) 손영종, 2006 a, 32쪽.
12) 손영종, 2006 a, 32쪽.
13) 시작해의 인구를 P0 라 하고 n년 후의 인구를 Pn 이라 하면, Pn = P0 * exp(r*n)으로 산출되며 여기서 r이 인구증가율이다. 통계청 인천사무소의 최유미 선생의 도움으로 산출하였다.
14) 葛劍雄, 1986, 『西漢人口地理』人民出版社, 72〜83쪽 (李成珪, 1998,「虛像의 太平-漢帝國의 瑞祥과 上計의 造作」『古代中國의 理解』4, 지식산업사, 124쪽 재인용)
15) 손영종, 2006 b,「료동지방 전한 군현들의 위치와 그후의 변천(1)」『력사과학』199, 49쪽.
16) 손영종, 2006 b, 49〜50쪽.
Ⅳ. 初元 4年 戶口資料의 검토
이상에서 2006년 손영종이 소개한 내용을 가지고 初元 4년(BC 45)의 낙랑군에서 파악하고 있던 縣別 호구수를 정리해 보았다. 다소 자의적인 기준치로 환산한 부분도 있지만 대체에 있어서는 원 자료에 기재된 내용에 근접하였을 것으로 여기고 있다. 통계자료의 성격이 불확실하고, 제시하고 있는 호구수가 과연 얼마나 실상에 부합하는지의 信賴度 문제는 달리 검증할 방법이 현재로서는 없다.
다만 47년 뒤의(元始 2년) 호구통계인 한서 지리지 기록과 비교할 때, 연간 인구증가율이 동시기 정상적인 수치와 일치하고, 戶當口數도 안정되어 있음을 본다. 물론 한서 지리지의 호구자료와 마찬가지로 초원 4년의 호구자료는 실제 낙랑군에 거주하던 모든 주민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編戶되지 않은 異民族, 流民과 奴婢는 제외되어 있을 것이며, 漏落 등 집계하던 관원의 조작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한말의 호구통계는 일반적으로 다른 시기보다 조작의 정도는 비교적 낮았던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16) 그러므로 初元 4년 樂浪郡의 戶口資料는 실제의 호구수 그 자체는 아니지만, 당시 낙랑군이 파악하고 있는 범위 내에서의 실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자료의 신뢰도를 낮추어 보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초원 4년의 호구자료를 가지고 당장 미세한 분석을 시도하기는 주저되는바 없지 않으나, 우선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를 나열해 보기로 한다.
첫째는 낙랑군 25개현을 권역별로 볼 때, 낙랑 직할지의 郡勢가 절대 우의에 있다는 점이다. 戶當口數에 있어서도 한대 編戶의 기준치라 할 5〜6口에17) 도달하였음을 보는데, 남부도위와 동부도위는 1.31명〜1.63명이나 차이를 보이고 있다. 編戶化의 진전과 郡縣民의 확보가 지배정도를 나타낸다고 할 때, 東部都尉의 후한초 放棄는 이미 이때부터 진행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일찍이 市川任三이 전한대 邊郡 部都尉 문제를 언급하면서, 동부도위와 달리 南部都尉가 방기되지 않고, 군현체제로 전환된 것을 漢의 지배력의 신장의 결과라고 지적한18) 견해를 새삼 되새기게 한다. 실제 표 3을 보면 남부도위의 군세는 帶水 河口의 대방현을 중심으로 하여, 列水 하구의 列口縣, 염사치가 낙랑에서 해로로 辰韓으로 들어갈 때 출발지로 여겨지는 장잠현, 황해도 信川에 비정되는 소명현 등 교통의 요충지를 중심으로 縣勢가 큰 현들이 자리잡고 있음을 본다. 漢은 낙랑군 남부지역을 즉각 군현체제로 전환하지는 못했지만 교통의 요지를 거점으로 교통로와 이어지는 거점을 장악하는 형태로 지배력을 확장해 나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고 대방현 외의 현의 縣勢가 동부도위의 불내, 화려현보다 나을 것이 없다. 따라서 남부도위지역이 放棄되지 않은 이유는 낙랑군의 중심부와 맞대어 있고, 三韓과 倭로 통하는 교통로 확보차원에서 포기하기 어려운 지역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 지배는 여전히 영역지배이기 보다는 거점지배방식이 구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25개현의 縣勢를 살펴보면 동부도위 동이현이 279호 2,030명을 최소치로 하여 잠태와 전막현 544호 등 1,000호 미만의 현이 남부도위에 6개, 동부도위에 3개 등 전체의 1/4에 달한다. 또한 1, 500호 미만이 동부도위에 4개현, 2천호 이상이 남부도위에 1개이고 낙랑군 직할지는 대부분 2,000호를 넘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현을 비롯한 낙랑군 직할지에 인구가 밀집되어 있고, 남부도위는 교통의 거점에 동부도위는 원산만의 비옥한 지대에 밀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縣勢가 인위적인 것인가? 물론 군현 설치 후 都會에 유입되는 漢人 등이 적지 않았을 것이고, 지역간 편차가 있어도 稅役의 기초자료로서의 編戶도 군현 전지역에서 시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대등한 縣으로 단위지어 있으면서도 위에서 나타나는 극심한 호구수의 편차는 당시 국가가 파악하던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으며, 그 같은 부조화를 용인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컨대 기원전 45년 낙랑군 25개현의 分定은 종래의 社會基盤을 용인하고 재활용하는 형태로 이루어 졌음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셋째, 기원전 45년 낙랑군에는 漢族으로 土着民과 구분되는 부류의 주민이 4만명이 확인되고 있다. 전체 호구수의 14%에 달하는 적지 않은 수라 하겠다. 기왕의 연구에서도 군현 설치 후에 관리, 군병, 상인 등 漢人의 이주를 상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 수효와 비율을 대하고 보면 예상보다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흔히 邊郡太守는 萬兵을 거느린다고 했고, 칙임의 長吏와 군초 遼東에서 屬吏까지 들어왔으며, 한서 지리지에 樂浪朝鮮民이 밀려드는 중국인과의 분쟁이 늘어났음을 보면서도 실제 정착한 수는 많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했던 것은 오류였다고 생각된다. 漢族 4만명이 낙랑군 전지역에 고루 분산되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에, 조선현을 비롯한 都邑과 교통의 요지나 경제적 이권이 달려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한족이 분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치 조선현의 호구수가 1만호에 5만 6천여 명 임을 보면, 한족의 비율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전체의 86%가 토착민이라는 사실이고, 한족이 중심지와 교통로 등 요충지에 거점지배 형태로 거주하였을 것인바, 고조선이래의 토착적 사회구조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하였을 것으로 생각해 본다. 또 하나 이들 漢族으로 분류된 주민들이 모두 군현 설치후 새로이 들어 온 이른바 ‘新來漢人’인가 하는 점이다. 삼국지 예전에 군현 설치 후 ‘胡漢稍別’ 했다는 기록, 군현설치 전 燕齊趙 방면에서 數萬口가 유입된 정황, 낙랑군 남감현으로 들어온 王景家와 같은 주민들이 이 시기 漢族인지 土着民으로 편제되었는지도 검토할 일이다.
17) 佐藤武敏, 1984,「前漢の戶口統計について」『東洋史硏究』43-1, 120~124.
18) 越智重明, 1969, 「漢代の戶と家」『史學雜誌』78-8, 23~29쪽) 漢代 小農의 농가구성 형태 戶當 5~6구 정도로 파악하고 있다.
19) 市川任三, 1968, 「前漢邊郡都尉考」『立正大學敎養學部紀要』2, 2~4쪽.
Ⅴ. 맺음말
연합통신 2007년 1월 17일자에 따르면 북한은 평양시 통일거리에 ‘낙랑국 유물보존실’이 건립 중에 있다고 조선신보 인터넷판을 인용 보도하였다. 여기에는 그 동안 북한에서 발굴한 낙랑유물을 전시한다고 한다. 아울러 좀더 충실한 발굴보고서와 연구가 뒤따르길 기대해 본다. 이나마 拙文을 작성하는데도 너무 많은 분들에게 폐를 끼쳤다. 단국대 서영수 선생님, 세종대 하문식선생님, 국립박물관의 이용현선생님, 오영찬 선생님, 고려대 정인성 선생님, 한림대 김병준 선생님, 통계청 인천사무소 최유미 님, 동아일보 문화부 윤완준 기자님, 조선일보 통한문제연구소 방보영 선생님, 장서각 정기간행물실의 문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이다.
年 代 |
戶 數 |
口 數 |
戶當 口數 |
소속 縣數 |
初元 4년(BC 45) |
45,960 |
280,000 |
6.09 |
25 |
元始 2년(AD 2) |
62,812 |
406,748 |
6.48 |
25 |
永和 5년(AD140) |
61,492 |
257,050 |
4.18 |
18 |
圈域名 |
戶 數 / 縣平均 |
口 數 / 縣平均 |
平均 戶當 口數 |
소속 縣數 |
樂浪郡 直轄 |
31,812 / 2,892 |
179,433 / 16,312 |
5.64 |
11 |
南部都尉 |
7,353 / 1,050 |
51,167 / 7,309 |
6.95 |
7 |
東部都尉 |
6,795 / 970 |
49,440 / 7,062 |
7.27 |
7 |
小 計 |
45,960 / 1,838 |
280,000/ 11,200 |
6.09 |
25 |
縣 名 |
戶 數 |
口 數 |
戶當 口數 |
비 고 |
帶方縣 |
4,346 |
29,941 |
6.889 |
|
列口縣 長岑縣 昭明縣
海冥縣 提奚縣 含資縣 |
2,148 (평균 716호)
864 (평균 288호) |
14,618 (평균 4,872)
6,608 (평균 2,200) |
6.805
7.648 |
* 平均 戶當口數 - 7.276명 *海冥ㆍ提奚ㆍ含資縣의 호구 수는 大縣의 1/3〜1/6 수준 |
小計 |
7,353 |
51,167 |
6.958 |
|
縣 名 |
戶 數 |
口 數 |
戶當 口數 |
비 고 |
東暆縣 蠶台縣 前莫縣 |
279 544 544 |
(2,030) (3,958) (3,958) |
(7.276)
|
*東暆縣의 戶數가 가장 적다. *口數는 남부도위 6개현의 戶當 口數로 환산함. |
不而縣 華麗縣 邪頭昧縣 夫租縣 |
1,150〜1,564 (평균 1,357호) |
39,494
|
(7.276) |
* 1,150호 8,367명+ 1,564호 11,379명+ 1,357호 9,873.5명 *2현 19,747명= 39,494명 |
小計 |
6,795 |
49,440 |
(7.276) |
|
縣 名 |
戶 數 |
口 數 |
戶當 口數 |
비 고 |
朝鮮縣 駟望縣 屯有縣 遂成縣 鏤方縣 渾彌縣 |
近 10,000
|
(56,400)
|
(5.64)
|
*口數는 낙랑군 직할지의 현별 평균치를 적용함. * 䛁邯縣은 비교적 큰 현임. * 增地縣의 戶數가 가장 적다. * 駟望縣 이하 縣別戶口數를 알 수 없는 7개현은 합계 16,980 호, 95,782명이며, 현별 평균 치는 2,425호, 13,683명으로 산정된다. |
䛁邯縣 增地縣 黏蟬縣 浿水縣 吞列縣 |
2,284 548
近 2,000 |
(12,881) ( 3,090)
(11,280) |
(5.64) | |
小計 |
(31,812) |
(179,433) |
(5.64) |
|
【부록】2004년 이후 손영종의 낙랑관련 논저목록
손영종, 2004,「고구려-신전쟁과 고구려에 의한 료동군 동부 및 남부지역의 수복」
『력사과학』189, 34〜37쪽.
______, 2004,「3〜4세기 고구려의 서변에 대하여」『력사과학』192, 42〜45쪽.
______, 2004,「락랑문화의 그 조선적성격」『고구려사제문제』사회과학출판사, 207〜213쪽
______, 2004,「〈한4군〉과 료동군의 위치」『고구려사제문제』사회과학출판사, 251〜259쪽
______, 2004,「〈한4군〉위치에 대한 정확한 리해」『사회과학원학보』45호, 6〜12쪽.19)
손영종, 2005,「락랑문화의 조선적 성격」『력사과학』193, 41〜43, 48쪽.
______, 2005,「락랑문화의 유적유물에 대하여」『력사과학』196, 64쪽.
손영종, 2006,「락랑군 남부지역(후의 대방군지역)의 위치-‘락랑군 초원4년 현별 호구다소 ☐☐’통계자료를 중심으로」『력사과학』198, 30〜33쪽.
______, 2006,「료동지방 전한 군현들의 위치와 그후의 변천(1)」『력사과학』199, 49〜52쪽.
______, 2006,「료동지방 전한 군현들의 위치와 그후의 변천(2)」『력사과학』200, 31〜35쪽.
20)『사회과학원학보』45호는 고조선, 낙랑 특집호로서 손영종의 글 외에도, 김유철,「료동지방에 있는 한 락랑군에 대하여」(13〜16쪽)도 참고가 된다.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참고가 될 듯 하군요. 올라온 글을 편집해서 논문 파일로 카페에 올려두겠습니다. 아,,읽다가 한가지 의아한게 있어서 그런데,, 공문서를 개인 무덤에 넣는 경우가 다른 곳에도 있나요? 낙랑지역 말고 중국에서 공문서를 부장품으로 하는 경우가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만약 파일이 필요하시다면 출처를 게재했으니 직접 다운받아서 올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약간의 파일수정도 가해진 것 같으니까요.
낙랑 지역 인구조사 .. 낙랑국??? 낙랑군??? 언론은 누구 말 따라 바로 낙랑군 인구조사내용???
님은 낙랑지역이 한반도 북부를 다스리던 낙랑군이라는 가정으로서의 낙랑 토성 치소의 문제점을 이해해야 할것같군요. 왜 그래서 종래의 오늘날에서는 단순 무역 중계소니 하는 식의 실제 명목상의 그런 부분으로 나오지도 않는 주장으로까지 축소 이야기되어 지는지에 대한 공부가 있어야 할것입니다. 이글은 제가 요즘 바쁜 관계로 시간이 나며 추후 올리겠습니다. 평양 지역의 낙랑을 400년 존속의 낙랑군으로 단순 대입시키기에는 문제점이 분명하다는 점도 살펴 봐야 할것입니다.
고구려가 복속시킨 평안도지역의 낙랑국을 후한 광무제가 복속시킨 이후에 요서지역에 있었던 전한의 낙랑군의 행정문서들을 평양 낙랑군으로 옮겨온 결과가 아닐까요? 그러니깐 목간은 전한의 요서 낙랑군에서 인구조사한 것을 평양 낙랑군으로 가져온 결과 후에 매장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론 한나라공문서로 쓰는 죽간은 각 용도마다 크기가 정해져 있다고 들었습니다 근데 저 죽간은 어떤 용도로 쓰던 공문서죽간인지 전혀 정보가 없군요 게다가 공문서를 개인부장품으로 매장했다라....... 제가 보기엔 저 죽간이 공문서가 아닐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즉 옛 공문서를 배낀 개인 자료용 죽간일지도 모르죠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가져가겠습니다.
소요자님 본문에서 주석 번호 위치가 조금 잘못된거 같더군요. 원래 파일에서 주석 5번이 주석 1로 처리되어 있어서 헷갈리게 되어 있더군요. 수정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거 전문을 이렇게 올려도 되는 건가요? 최소한 링크나 정확한 출처를 표기하는 것이 예의가 아닐지...
아...그렇군요. 확실히 출처를 표기안한건 저의 부주의입니다. 그렇지만 내용게재는 자료가 공개자료실에 있고 누구나 다운해서 볼 수 있게 한 점등으로 볼 때 큰 결례는 아닐 것 같습니다. 출처는 곧 게재하겠습니다. ^^
위의 글의 출처는 한국고대사학회 공개자료실입니다. 거기 한글파일로 올려져 있으니 필요하신 분은 누구나 받아서 보실 수 있습니다. 주소는 http://www.koreaancienthistory.net/modules/bbs/index.php?code=pds&mode=view&id=11&page=&___M_ID=86&sfield=&sword=
북쪽 학자분들의 자료를 참고하신 것 같은데 북한자료라고 난리가 나지 않는게 이제 시대가 많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남북한의 할발한 공동 연구와 역사 인식의 합일점을 찾는 일이 보다 많이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좋은 자료 소개 감사드립니다.
공문서를 무덤에 부장한 경우가 하나 더 있습니다. 비록 진나라 시기 이긴 하지만 호북성 운몽현에서 발견된 진나라 현급 관리였던 '희'라는 사람의 무덤에서 진나라 법-진율에 대한 죽간 600점을 비롯 무려 1100점이나 되는 죽간이 출토 됬다 합니다.
있긴 있는데 흔치는 않는 거라,,? 거참 애매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