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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에만 무려 54개... 우리 해안을 지켜준 '이것'
[돈대를 찾아가는 길-1] 살아있는 역사, 강화도 54개 돈대
오마이뉴스 기사 등록일 : 2022.02.16.
'돈대'를 아느냐고 지인들에게 물었더니 '돈데보이' 노래는 아는데 돈대는 모른다며 '돈데보이 돈데보이' 노래를 부른다. '돈데보이(Donde Voy)'는 애잔한 멜로디의 멕시코 노래로 우리나라에서도 TV 드라마 음악으로 쓰이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곡이다. 그 '돈데'와 내가 말하는 '돈대'는 전혀 다르지만 둘 다 애잔한 마음이 든다는 점에서는 일면 공통점이 있는 것도 같다.
돈대는(墩臺)는 주변을 잘 관측할 수 있도록 평지보다 높은 평평한 땅에 설치한 소규모 군사 기지를 말한다.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접경지역 또는 해안 지역에 주로 만들었다. 조선 인조 때 남한산성에 돈대 2개소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고 1796년(정조 20년)에 축성된 수원 성곽에는 3기의 돈대가 설치되었다.
돈대의 고장, 강화도
12일 강화도에 방문했다. 이곳엔 무려 54개의 돈대가 있다. 조선 숙종 5년에 48개의 돈대를 만들었고 그 후로도 계속 쌓아서 모두 54개의 돈대가 강화를 호위하고 있다.
강화도의 경우 해안가 툭 튀어나온 언덕에 돈대가 주로 있는데, 주변 관측과 방비에 유리한 지형에 설치한다는 돈대의 목적상 해안가 언덕은 최고의 적지였음이 분명하다. 이것으로 봤을 때 강화는 과연 돈대의 고장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강화도의 해안선 둘레는 약 100여 킬로미터인데, 2킬로미터마다 돈대가 하나씩 있는 꼴이다.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많은 돈대를 강화도에 만들었던 걸까. 342년 전인 숙종 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조선 19대 왕인 숙종(재위 1674년∼1720년)을 떠올리면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생각난다. 숙종의 치적은 떠오르지 않고 궁중 여인들의 암투와 모략만이 떠오를 뿐이니 드라마를 너무 열심히 보았나 보다.
숙종은 14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가 왕이 되었을 때는 아직 나라가 병자호란의 침탈로부터 회복되지 않았을 때였다. 청나라가 쳐들어와서 조선의 국토를 유린하고 백성들을 살육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나라의 형편은 어렵기만 했고 주변 정세 역시 어지러웠다.
숙종은 나라의 방비를 튼튼히 할 것을 주문했다. 영의정 허적의 청을 받아들여 강화도에 돈대를 쌓도록 결정했다. 그해(1678년) 10월에 병조판서 김석주를 강화도에 보내 돈대를 쌓기에 알맞은 장소를 살피게 하고 11월 4일에 강화 돈대 설치 시행 지침을 담은 강도설돈처소별단(江都設墩處所別單)을 반포한다.
김석주가 올린 후록(後錄)에 보면 돈대의 형태와 규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돈대의 수를 49개소로 정하고 돈대의 제도는 산이 있는 곳은 산을 따라 성첩(城堞)을 만들며, 평지에 성을 쌓는 경우에 있어서는 그 높이를 3장(丈)으로 하고, 그 두께의 밑넓이는 3장 5척으로 하며, 면(面)의 넓이를 2장 5척으로 한다. 치첩은 높이 6척, 두께 3척, 길이 9척으로 하고 전면에 포혈(砲穴) 2개소, 좌우에 포혈 각 1개소로 하고, 주위를 4면 10칸(間) 기준으로 하되 그 지형에 따라 방형(方形) 또는 원형, 일직선 또는 ㄷ 자형으로 하며 파수병이 많아야 할 긴요한 지역의 경우는 성의 제도를 알맞게 크게 한다.'
연인원 1만5000여 명이 투입된 대공사
1678년 음력 12월 1일, 강화도에 돌을 다루는 석수(石手)들이 들어온다. 돈대를 쌓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석재(石材)가 필요하다. 다행히 강화도와 인근 섬의 산에는 바위가 많아 돌 공급에는 큰 애로사항이 없었다.
돌을 쪼개고 운반하는 팀이 강화도로 들어왔다. <비변사등록>에서 보면 석수가 400여 명, 대장장이가 50여 명에다 그들을 돕는 일꾼들까지 해서 총 1400여 명이 강화도로 왔다. 또 쪼갠 돌을 실어 나르는 배도 75척이나 투입되었다. 각각의 배를 모는 사공과 사공을 돕는 격군 2명씩 해서 모두 220여 명의 사람들도 같이 왔다. 돈대 쌓기에 앞서 돌을 깨고 나르는 데 만도 1600명 이상의 사람이 강화로 와서 작업에 들어갔다.
자,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 보자. 음력 12월이면 양력으로는 1월 쯤이 된다. 강화의 겨울은 춥다. 김포에서 강화로 들어오는 바다도 얼어서 유빙이 흘러내려갔을 것이다. 그렇게 추울 때 바위를 깨고 나르는 일을 했다. 바위는 산에 있으니 평지보다 더 추웠을 것이다. 특별한 방한용품이나 보온 장비도 없이 오로지 맨 손으로 돌을 쪼아 깼을 선인들을 생각하니 돈대를 대하는 마음 자세가 달라진다.
화톳불을 켜두고 곱은 손을 쬐어가면서 일을 했을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강화의 온 산에는 돌 쪼는 소리가 쨍쨍 들렸을 것이다. 민족의 영산이라 불리는 마니산은 물론이고 돈대가 들어서는 곳 근처에 있는 산은 대규모 공사로 몸살을 앓았을 듯하다.
지난 2월 15일은 음력으로 1월 15일, 정월 대보름날이었다. 각종 나물과 오곡밥을 해서 먹으며 다가올 봄을 기다리는 날이다. 342년 전 정월 대보름날에도 보름나물과 오곡밥을 먹었을까. 언 손을 녹여가며 돌을 깨고 날랐을 일꾼들이 이 날 하루만이라도 배 불리 먹고 쉬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강화의 돈대들을 찾아가 보자. 한겨울 추위와 싸워가며 돌을 깨고 날라 만든 돈대들이다. 연인원 1만5000여 명이 달라붙어 80여 일 만에 쌓은 대공사다. 돈대 앞에 서면 그 장엄한 역사 앞에 절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
범의 해인 임인년 올해는 돈대를 찾아가는 해로 만들어 보자. 강화도 해안을 굳건히 지켜주었던 돈대들이다. 한양을 수호하고 우리 땅, 우리 민족의 안녕과 보존을 위해 쌓았던 돈대들이다. 돈대를 찾아가는 길의 첫걸음을 우리 함께 힘차게 내디뎌보자.
강화도 해안을 지켜준 54개의 ‘돈대(墩臺)’ 1
문화재 :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무태돈대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창후1리 151-1
한국NGO신문 기사입력일 : 2022.09.26.
기자명 : 정진해 문화재 전문 대기자
제주도 해안을 따라 환해장성이 축성되어 있고, 또한 곳곳에 봉수대와 연대가 있다면, 강화도는 해안을 따라 외성이 있고 곳곳에 적의 동태를 파악하고 포를 쏘았던 돈대가 자리하고 있다. 강화도는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조강을 만들고, 다시 북한의 예성강이 모여서 바다로 나가는 입구에 위치한다. 예로부터 해상교통의 중요한 길목이었고, 전시에는 피난처가 되고 임시수도가 되었으며, 군사적 요충지가 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몽골의 침입에 맞서 천도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시 왕실, 분조가 피신하였고, 양요 당시에는 치열한 격전지였다. 또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는 서해안의 근거리 항로가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에서 생산된 세곡을 중앙으로 운송하는 주요 해상로로 강화도는 방어 및 보장처, 경제적인 부분에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조선시대의 강화도는 한성 진입의 입구이자 전란 시 지형적인 유리함에 보장지처(保障之處)의 기능을 하였다. 이에 따라 해안을 따라 성곽과 군사시설이 축조되었으며, 후기에는 화학무기의 도입과 이에 따른 전술과 군사제도의 변화로 방어체제에도 함께 발전하게 되었다. 이에 맞춰 해안선을 따라 54곳에 돈대가 축조되었다. 각각의 돈대가 개별적으로 독립된 기능을 수행하는 하나의 요새로서, 우리나라 성곽 축조의 마지막 발전단계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각각의 돈대는 강화 중앙의 진무영이나 12개의 진과 보에 소속되어 지휘 받았는데, 해당 관련 유적은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는다. 다만 일부 돈대는 ‘강화전사유적 보수정화사업’으로 일부 복원 또는 보수, 정비를 하였으나 복원된 돈대의 모습이 충분한 고증을 통하지 않는 점이 눈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성곽에서 돈대가 활용된 사례는 지금까지 알려진 사례로는 6건인데, 『남한지(南漢志)』에 인조 때 축조된 것으로 기록된 남한산성(南漢山城) 신남성 돈대와 벽돌이 적극적으로 사용된 수원 화성 華城의 공심돈, 파주 장산진 돈대, 황해도 연안의 나진포구 주변 돈대, 평안도 선천 지역의 돈대 4개소 그리고 강화 돈대가 그것이다.
조선 후기인 1679년(숙종 5)을 시작으로 강화도 해안을 따라 축조된 돈대는 매우 풍부한 문헌 기록에서 확인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국조보감(國朝寶鑑)』등 다양한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것으로 1678년(숙종 4) 병조판서 김석주의 건의로 요충지인 강화도의 방어 태세 강화를 위해 돈대 수축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678년(숙종 4) 12월 1일 경석수京石手 400명이 성돌을 채취하여 공사 준비하고, 1679년 3월 3일에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의 승군(僧軍) 8,000명과 어영군(御營軍) 4,300명 이외에 순수 역부 13,162명, 경석수와 제도석수 총 1,100명 등 수많은 인원이 동원되어, 80일이라는 단기간인 같은 해 5월 중순에 48개의 돈대를 완성하였다. 그 후 검암돈대, 빙현돈대, 철북돈대, 초루돈대, 작성돈대가 추가되었고, 신미양요 당시 보강을 위해 용두돈대가 추가되면서 54개가 완성되었다.
강화도에는 돈대 축조 이전에 강화외성, 강화중성, 강화내성, 정족산성, 고려산성 등 12개의 성곽과 대모산성, 진강산봉수, 덕산봉수, 하음산봉수, 남산봉수 등 9개서의 봉수가 있었으며, 돈대 축조 이후 54돈대 12진보 8포대의 방어체계가 완비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강화도의 12진보는 제물진, 월곶진, 승천보, 철곶보, 인화보, 정포보, 장곶보, 선두보,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용진진으로 각 진보에서 돈대 2~4개씩 관할하였다. 각 돈대의 돈군(墩軍)이 군기와 성벽 및 여장을 관리하였다. 이처럼 효종~숙종 대에 구축된 해양 관방체계는 이후 조선 후기 내내 강화도를 중심으로 한 도성 방어체계의 핵심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강화 돈대의 평면 형태는 크게 방형(정방형, 장방형, 말각방형 포함), 원형(원형, 타원형), 반월형半月形의 3가지로 분류된다. 방형은 총 26개소(제숭돈, 염주돈, 화도돈, 덕진돈, 섬암돈, 후애돈, 양암돈, 송곶돈, 북일곶돈, 검암돈, 송강돈, 건평돈, 망양돈, 석각돈, 계룡돈, 망월돈, 무태돈, 인화돈, 광암돈, 구등곶돈, 작성돈, 불장돈, 의두돈, 철북돈, 숙룡돈, 휴암돈)이며, 원형은 총 11개소(망해돈, 좌강돈, 용당돈, 오두돈, 손석항돈, 미곶돈, 장곶돈, 삼암돈, 초루돈, 월곶돈, 옥창돈), 반월형 3개소(가리산돈, 굴암돈, 석우돈),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원형이 훼손되거나 복원 과정에서 원래 형태를 알 수 없게 된 경우가 총 13개소(갑곶돈, 광성돈, 용두돈, 초지돈, 장자평돈, 택지돈, 동검북돈, 갈곶돈, 천진돈, 빙현돈, 소우돈, 낙성돈, 적북돈) 이외에 지형에 따라 초승달 형태로 지어진 특이한 사례(분오리돈)가 있다.
강화 돈대의 시설은 크게 성벽과 출입문, 전방 포좌와 배수 시설인 누조(漏槽), 총안을 갖춘 여장이 있다. 성벽은 보통 지형에 따라 안쪽으로 물려 쌓은 기단부와 그 위의 체성벽, 그리고 여장(女墻)이 있다. 망양돈대 등 일부 복원된 돈대의 경우 체성벽과 여장 사이에 미석(楣石)을 쌓기도 하나 실물이 확인될 정도로 완벽하게 보존된 자료가 없어 불분명하다. 문은 모든 돈대가 1개씩 배치되며, 형태에 따라 ⼌모양의 평거식(平居式)과 ∩모양의 홍예식(虹霓式)으로 분류된다. 평거식문이 일반적인 형태인데, 월곶돈, 구등곶돈, 미곶돈의 3개 돈대가 홍예식문을 가지며 나머지 돈대는 모두 평거식이다. 포좌는 돈대의 전방을 지향하여 배치되며 대부분 4개의 포좌가 배치되나 간혹 3개의 포좌가 배치된 경우도 있다. 누조는 폭우 등으로 인한 성벽의 붕괴를 막기 위해 외부로 물을 배출하기 위한 배수 시설로 형태에 따라 상방하원형(上方下圓形), 방형(方形), 합구형(合口形)으로 분류된다. 이방(耳房)은 포좌 안쪽 내부의 좌측면 벽체에 감실(龕室)과 같이 공간을 만들어 놓은 시설로 북일곶돈대, 장곶돈대, 송곶돈대, 망양돈대(복원), 삼암돈대 등 주로 강화 서해안 일대 돈대에서 확인된다.
54개소의 돈대 중에 접근이 가능하고 복원되거나 돈대를 정리해 놓은 곳부터 찾아보았다. 강화도의 돈대 중에 답사가 가능한 창우리의 무태돈대부터 해안선을 따라 외포리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최종 연미정이 있는 월곶돈대까지 총 24개의 돈대로 끝을 맺는다.
무태돈대(인천시 문화재자료, 강화군 하점면 창후1리 151-1 소재)는 숙종 5년(1679년) 5월에 완성된 48개 돈대가 만들어지고 나서 이후 5개 돈대가 추가 만들어질 때 축성된 돈대이다. 해안 방향으로 축성된 돈대는 주변보다 높은 평지에 쌓았는데, 밖은 구릉을 깎아서 성벽을 높게 하여 적이 직접 접근할 수 없도록 하고 안쪽은 낮게 하고 가운데에 현문식 출입문을 두었다. 무태돈대와 광암돈대, 구등곶돈대, 작성돈대, 인화돈대와 함께 강화의 7보(堡) 중의 하나인 인화보(寅火堡)의 관할하에 있었다. 돈대의 모양은 직사각형 구조로 둘레가 210m, 너비 2m, 석벽 높이가 1.2m~5.3m 이르며, 성돌은 화강암으로 쌓았고 잡석과 흙을 안을 채웠다. 석축은 지형의 높낮이에 따라 쌓아서 해안 쪽은 낮아 경사지게 쌓았고 동쪽과 서쪽 성벽은 잘 남아 있는 상태이다. 남쪽 성벽 하다는 원형이 남아 있으나 상부는 최근에 복원하면서 새로 쌓았다. 현재 해안 쪽 성상에는 총안을 하나만 둔 여장이 다듬은 돌로 3단을 쌓고 그 위에 4단의 돌로 쌓아 여장을 만들고, 좌우와 후면의 성상에는 여장을 두지 않았다. 성내에서 밖으로 포를 쏠 수 있는 포좌를 4곳에 설치하였으며 모두 다듬은 화강암으로 축조되었고 지붕돌은 큰 자연석과 다듬은 대리석으로 덮었다. 포좌 옆에는 포탄을 저장하는 공간인 이방을 별로로 두지 않았다. 출입문 평거식으로 남쪽 성벽과 가까이 두었으며, 문이 있었던 돌확이 남아있다.
무태돈대에서 바라보는 행안은 좌 성주산과 우 화개산이 보이는 위치이다. 탁 트인 바다로 접근하는 적들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돈대를 복원하면서 충분한 고증을 거쳤는지 의심될 정도이다. 포좌 지붕에는 시멘트로 마감한 것도 있지만, 여장과 성벽 등이 옛 모습을 찾아서 축조하였는지 의심을 가며, 포좌의 위치가 부정확하다. 그러나 이곳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튼튼한 돈대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인화보의 관할하에 있는 광암돈대, 구등곶돈대, 작성돈대, 인화돈대는 현재 발길이 닿을 수 없는 곳이다. (계속)
강화도 해안을 지켜준 54개 돈대(墩臺) 2
문화재 :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망월돈대, 계룡돈대, 삼암돈대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망월리 2107/강화군 내가면 황청리 282번지/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산223-4
한국NGO신문 기사입력일 : 2022.10.08.
기자명 : 정진해 문화재 전문 대기자
무태돈대에서 남쪽으로 직선거리로 약 3.5km의 거리 해안선에 위치한 망월돈대는 다른 돈대처럼 자연 지형에 축조된 돈대가 아니고 고려 후기부터 20세기까지의 간척사업으로 바다를 막은 망월평야 남서쪽 내가천과 바다가 만나는 끝자락에 위치한다. 강화도의 가장 넓은 간척 평야로, 벌판 한 가운데에 마을이 형성되어 연간 약 760만 톤의 쌀을 생산하는 부농마을이다.
망월돈대의 첫 시작은 고려 고종 때 강화로 천도하면서 해안 경비를 위해 외성으로 축조한 것에서 출발한다. 누문 6개소, 소문 7개가 있었으며 망월돈대에서 무태돈대까지 이어졌다. 만리장성이라 불리기도 한 성은 높이가 7m, 너비 1.5m의 규모였으며, 이후 조선 광해군 10년(1618신돈으로 하여금 하여금 수축하였고 영조 21년(1745년) 유수 김시환이 개축하였다. 그러나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현재는 외성의 역할은 상실되고 홍수를 막거나 물을 저장해두는 제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의 망월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년)에 병조판서 식암 김석주의 명에 의해 유수 윤이제가 정비한 것으로 40~120cm의 장방형 돌을 쌓아 남북 간 길이 38m, 동서 간 길이 18m, 높이 2.5m 규모로 축조하여 외성과 연결하였다. 돈대의 상부 성상에는 원래 여장이 둘려 있었으나 현재는 여장이 남아 있지 않고 계룡돈대와 함께 영문 관할로 돈장을 두었다.
서쪽의 해안에 축조된 망월 돈대는 사방이 확 트여 있다. 앞에는 바다, 뒤로는 평야 지대가 펼쳐져 있어 다른 돈대처럼 높은 곳에 축조되지 않아도 적의 행동을 알 수 있는 위치이다. 먼 곳에는 교동도의 화개산이, 가까운 곳은 석모도의 상주산이 자리한다.
출입문은 1개로 평거식으로 지대석을 깔고 그 위에 2단의 기석을 놓고 장방형 돌을 올렸다. 안쪽에는 문을 달았던 흔적의 확돌이 남아 있다. 출입구는 동벽의 남쪽으로 치우쳐 냈으며 입구부터 안쪽 1단 기단까지 박석을 깔았다. 서쪽으로 3문의 포좌를 배치하였고, 가운데 포좌 남쪽에 성상으로 오를 수 있는 계단을 설치하였다. 포좌의 지붕은 장방형의 화강암을 반듯하게 가공하여 올렸다. 돈대 내부에는 건물이 있어 창고와 수직하는 병사들의 숙소로 활용되었으나 현재는 빈터만 남아있다. 돈대를 복원하면서 성곽의 내부는 다듬은 돌로 5단을 쌓았고 여장이 있던 자리에는 2단의 미석을 둘렀다.
돈대에 올라서서 망월동 마을을 바라보면 넓은 들이 봉천대산과 고려산, 벌립산이 품은 모양이다. 망월동의 서쪽 아래에는 오교(烏橋)가 있고 위로는 작교(鵲橋)가 있어 얼마나 큰 평야임을 알 수 있다.
화남 고재형(1846~1916)은 강화도를 유람하면서 망월동에 이르러 시 한 수를 노래하였다.
<망월동(望月洞)>
望月洞開大野中 망월동은 넓은 들판 가운데에 펼쳐있고,
烏橋春水鵲橋通 까마귀다리 봄물은 까치다리로 통하네.
水秧旱播隨天氣 비 오면 모내고 가물면 씨 뿌려 날씨를 따르지만,
穡事年年實有豊 해마다 농사일은 풍년이 든다네.
망월돈대에서 해안선을 따라 남서쪽으로 약 2km에 이르면 외딴섬 위에 자리 잡은 계룡돈대(강화군 내가면 황청리 282번지)가 있다. 강화도의 돈대 중에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지닌 돈대로 정평이 나 있다. 망월돈대에서 약 10분이면 도착하는 계룡돈대는 다른 돈대와 마찬가지로 해안이 근접하고 있다. 계룡돈대는 다른 돈대와 함께 조선 숙종 5년(1679년)에 축조되었다. 축조 연대가 바깥쪽 벽면에 새겨졌는데 이처럼 축조 기록연대가 새겨진 것은 현재 강화도 많은 돈대 중 초루돈대와 계룡돈대가 유일하다. 돈대 석문 왼쪽 석축 아랫단 돌 하나에 ‘강희 18년 4월 일 경상도 군위어업축조(康熙十八年四月日 慶尙道 軍威御營築造)’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곧, 조선 숙종 5년(1679) 4월 어느 날 경상도 군위 현에서 온 어영청 소속의 병사들이 이 돈대를 축조했다는 뜻이다.
강희(康熙)라면 중국 청나라의 4번째 황제인 강희제 때 사용한 연호이다. 1662년부터 1722년까지 이 연호를 썼으니, 강희 18년이라면 조선 숙종 5년인 1679년이다. 그러니 계룡돈대와 같은 시기에 축조된 48개 돈대 중에 명문이 있는 돈대는 계룡돈대가 유일하다.
30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방치되었던 계룡돈대는 2009년에 복원공사가 완료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되찾았다. 무너졌던 여장과 장방형의 돈대는 그 높이와 폭으로 옛 모습대로 온전하게 복원되면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두게 되었다. 돈대 주변에는 오랫동안 뿌리를 내려 자라온 해송이 듬성듬성 자라고 나무계단을 따라 오르면 평거식 석문이 돈대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석문 남쪽 지대석 위에 네모반듯한 돌에 명문이 새겨져 있다. 출입문은 지대석 위에 2단의 기대석을 놓고 그 위에 복원하면서 다시 2단의 반듯한 돌을 올리고 장방형 돌을 가로질러 올려놓아 문을 완성하였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앞에 길쭉한 장방형의 내부 공간이 앞을 막는다. 북서~남동쪽은 33m, 북동~남서쪽은 202m의 직사각형의 한 면은 석축 높이 2~4m 정도에 길이가 30m이고, 3면은 석축을 올려 해변을 향하고 뒤쪽의 한 면은 넓은 망월들판이 펼쳐진다. 포좌는 북쪽 면에 2좌를 두었고, 정면의 우측에 치우쳐 1좌를 두었으며, 남쪽에 1좌를 두었다. 성상에는 여장을 둘렀는데, 각 여장의 타에는 여장옥개석이 없으며 ⼐자 모양이다.
기록에 의하면, "남쪽으로 가면 석각돈이 1,960보(1,418m) 거리에 있고, 둘레는 79보, 치첩은 33개이고, 북쪽으로는 망월돈이 1,525보 거리에 있다"라 하였다. 돈대 벽체의 구조는 북쪽 육축부의 경우 하층부는 막돌 허튼층쌓기를 했고, 상단부는 비교적 열을 맞추어 거친 돌 층지를 쌓기하였다. 또한 경사가 급한 동벽의 경우 벽체 하단부에 여러 단의 석재를 쌓아 성벽을 보강한 보축이 이루어졌으며, 내부에는 돈사가 아닌 움막 터가 확인되었다. 계룡돈대를 광대돈대, 겨룽돈대로도 불러왔다.
서쪽 여장 너머의 개펄 해안에는 다양한 생물들과 탐조가 어쩌다 날아와 먹이를 찾는 노랑부리저어새(천연기념물)를 볼 수 있으며, 우아한 자태를 드러낸 왜가리도 함께 볼 수 있다. 돈대와 해송, 더 넓은 망월들판, 그리고 수평선과 다양한 생물의 삶을 이어가는 개펄에서 계룡돈대의 참 멋을 현대에 와서 그 모습을 보여준다.
계룡돈대에서 남쪽으로 직선거리 약 2km에 삼암돈대(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산223-4)가 자리하고 있다. 황정2리 마을을 지나 석모대교 입구 강화해 누리 공원을 지나 약 200m 거리에 해안을 바라보며 자리한 삼암돈대는 장방형의 구조가 아닌 원형의 돈대이다.
삼암돈대도 마찬가지로 조선 숙종 5년(1679)에 강화유수 윤이제(尹以濟, 1628∼1701)가 병조판서 김석주(金錫胄, 1634∼1684)의 명령8천여 명을 어영군 8천여 명을 동원하여 쌓았다. 건평돈대(乾坪墩臺), 망양돈대(望洋墩臺), 석각돈대(石角墩臺) 등과 함께 정포보(井浦堡, 井浦鎭)에 속하였다. 바다를 향해 약간 돌출한 곳에 있는데, 해안 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돈대의 물레는 91보(약 121m)로, 네모진 형태로 거칠게 다듬은 돌을 안팎으로 쌓았다.
출입문은 지대석 위에 2단의 기대석을 올리고 그 위에 무사석을 덮어 천정을 만들었고, 문을 설치하였던 장군목을 끼웠던 홈이 남아 있다. 성벽에는 4개의 포좌가 바다를 향해 설치되었는데, 포좌 내에는 포탄을 저장하였던 감실형의 방인 이방(耳房)이 있다. 바다 쪽에 쌓은 성벽에는 몸을 숨긴 채 총을 쏠 수 있는 총안(銃眼)을 두었다. 한편 성벽 위에 쌓은 성가퀴인 치첩(雉堞)도 55개가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또한 돈대 안에는 화약고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일부의 석축만 남아 있을 뿐이다. 돈대 안 마당에 고인 물을 빼내는 석누조(石漏槽)가 성벽에 따로 설치되어 있다. 누조는 돌에 홈을 파서 구유처럼 만들어 성벽에 끼워 넣고 물이 그쪽으로 흘러내리도록 한 배수장치이다.
강화도와 석모도 사이를 석모수로라 일컫는데, 이곳은 조선시대 삼남 지방에서 한양으로 들어가는 길목 중 한 수로였으며, 교동도 앞에서 양서(황해도와 평안도) 해로와 합쳐져 한양의 양화나루까지 이어졌다. 석모수로는 강화 남쪽 해안에 비해 수심이 깊어 썰물 때에도 배를 띄울 수 있었다. 그곳 일대의 포구 근처에 돈대가 많이 배치되었는데 이는 나루나 포구가 적의 상륙 지점으로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석모수로를 지키는 돈대는 모두 9개가 있었는데 '인화보' 관할 아래 있던 돈대와 '정포보' 관할의 돈대가 석모수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삼암돈대는 건평, 석각, 굴암돈대와 함께 '정포보'에 속해 있었다. (계속)
강화도 해안을 지켜준 54개의 ‘돈대(墩臺)’ 3
문화재 : (기념물) 망양돈대, (기념물) 건평돈대, (기념물) 굴암돈대
소재지 :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680번지/양도면 건평리 산 39 /양도면 하일리 487번지
한국NGO신문 기사입력일 : 2022.10.22.
기자명 : 정진해 문화재 전문 대기자
삼암돈대에서 직선거리로 약 1.3km의 거리에 있는 망양돈대는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680번지에 위치하며, 조선 숙종 5년(1679년)에 완성된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건평돈대, 삼암돈대, 석각돈대와 함께 정포보에 속했다. 석각과 삼암 그리고 건평돈대가 정포(외포리)에서 떨어진 곳에 있다면 망양돈대는 정포에 있는 돈대였다. 정포는 서해로 나가는 포구였다. 그래서 삼별초는 이곳에서 먼 바닷길을 따라 진도로 향해 배를 띄웠을 것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삼별초군은 배중손을 대장으로 강화의 구포(九浦, 구하리 일대)에서 출항했다. 옛 구포는 간척을 해서 평야지대가 되었지만 삼별초가 출항했던 고려시대에는 바다와 통하는 하구였다. 삼별초가 떠난 외포리가 400년이 지난 뒤에 돈대가 들어섰다.
망양돈대는 바닷가 경사진 높은 언덕에 위치해 있다. 돈대의 생긴 모양은 정사각형이며 둘레는 120m로 54개 돈대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편에 속한다. 바다로 향한 성벽에는 대포를 장작하기 위한 포대가 4개 있으며 성상로에는 여장이 40개가 둘러져 있으며, 각 여장마다 근총안이 1개와 원총안은 2개씩 배치하였다. 돈대의 높이는 3m, 폭은 2.5m이다. 성벽은 앞면이 직사각형 또는 정사각형, 요철(凸)형, ㄱ자형, ㄴ자형으로 다듬은 돌을 축성에 맞게 쌓아 올렸다. 돈대의 바닥에는 몇 단의 지대석을 깔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대 보이는 것은 지대석을 깔고 그 위에 뒤로 약간 물러나 돈대의 성벽을 쌓았다. 해변쪽은 높고 출입문쪽은 지형에 따라 축성하여 높이가 차이가 난다. 포문은 ㅍ자 모양으로 아래와 위에는 성돌에 비해 긴 부형무사석을 각각 놓고 좌우에는 대각선의 돌기둥의 포구를 만들었다. 포구 위에는 2단의 성돌을 쌀고 미석을 밖으로 내고 그 위에 1단의 기단을 두고 4단의 높이의 여장을 쌓았다.
출입문은 평거식으로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2단의 기석을 올리고 그 위에 선단덕을 덮어 천정을 만들었다. 문을 달았던 확돌이 좌우로 남아 있다. 포대 내부에는 무기를 보관할 수 있는 감실을 두었다.
삼암돈대에서 남쪽으로 약 3km에 건평돈대가 자리한다. 돈대는 건평리(乾坪里) 노고산(104.9m) 자락에 자리한다. 건평리는 ‘마른들’ 또는 ‘건들’이라 불리웠던 동데이다. 건평리의 너른 들판은 조선시대에 간척을 해서 생겼는데 수로(水路)가 낮아 논에 물 대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마른 논이 많아 동네 이름이 마른들(건들)이었다고 한다.
1906년 봄에 건평리를 찾았던 한 화남 고재형이 물이 가득 찬 수로를 보며 ‘건평동(乾坪洞)’이란 시 한 수를 남겼습니다.
名是乾坪卽水坪 이름은 건평(마른들)이지만 물이 많은 수평인가
滿堰春波灌稻粳 뚝에 가득 봄물 차니 논에 물 대기가 좋구나.
且畊且讀諸君子 밭 갈면서 책 읽는 이 모두가 군자이니
聊得斯中一味淸 그러한 가운데서 맑은 기운을 얻는구나.
<沁都紀行(1906)> 華南 高在亨
2017년 4월 건평돈대를 발굴하던 과정에서 무너진 장대석 아래에서 불랑기포 한 정이 발굴되었다. 이 불랑기는 조선대의 주력 화포인 불랑기포로 대포의 포문으로 포탄과 화약을 장전하는 전통 화포와 달리 포 뒤에서 장전을 하는 형식의 대포이다. 포신인 모포(母砲)와 포탄과 화약을 장전하는 자포(子砲)로 분리되어 있고, 모포 뒷부분에 자포를 넣은 뒤 불을 붙여 발사를 한다. 1개의 모포에 5개의 자포가 한 묶음을 이루면서 하나를 쏘고 나면 또 다른 자포 하나를 넣어서, 연속해서 발사할 수 있다. 불랑기포는 당시로 보면 최첨단 신식무기였다. 무게가 약 60㎏ 정도여서 설치하기에 쉬웠다.
건평돈대에서 나온 불랑기포는 실전 배치 장소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크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돈대에 불랑기포가 배치되었다고 적혀 있었지만 실제로 확인된 사례는 건평돈대가 유일하다. 포의 몸체에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를 통해 불랑기의 제작 시기와 관리자, 만든 장인 및 실무 책임자 등을 알 수 있다. ‘康熙十九年 二月 日 統制使全等江都墩(皇)上佛狼機百十五 重百斤 監鑄軍官折衝 申淸 前推管 崔以厚 前萬戶 姜俊 匠人 千守仁’ 1680년(숙종 6) 2월 삼도수군통제사 전동흘 등이 강도돈대에서 사용할 불랑기 115문을 만들어 진상하니 무게는 100근이다.(감주군관 절충장군 신청, 전추관 최이후, 전만호 강준, 장인 천수인)라 기록되었다.
건평돈대에 서면, 앞에는 바다와 석모도가 한눈에 조망되어 바다로 쳐들어오는 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위치이다. 돈대의 형태는 기본적으로 방형이나 서북쪽의 전면 부분이 약간 곡선을 이루고 있다. 둘레가 121m이며, 성벽의 전면부분은 복원을 하였으나 자우부분과 후면부분은 무너진 상태로 그대로 남아 있다. 성벽의 좌우에는 돈대내의 빗물이 고이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는 누조를 설치하였는데, 54개의 돈대 중 상암돈대와 굴암돈대, 북일곶돈대, 그리고 건평돈대에만 있다. 4개의 포는 바다로 향하고, 성상에 여장이 있었으나 무너져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출입문은 무너진 상태에서 그대로 남아 있어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다. 축성은 지면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뒤로 약 20~30cm 물러나 돈대를 축조하였다. 돌의 형태는 거칠게 다듬은 돌로 정사각형, 직사각형, ㄱ자, ㄴ자 모양으로 다듬은 서로 배와 면을 맞추었다. 북서쪽의 전면에는 2단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한보 뒤로 물러나서 축성을 하였다. 전면은 성벽이 높고 뒤로 갈수록 지형의 형태에 따라 축성의 높이가 많이 자이가 난다.
건평돈대에서 굴암돈대까지는 약 2.4km의 양도면 하일리 487번지 바닷가 언덕에 위치한다. '하일리(霞逸里)'는 ‘저녁노을이 진다’는 의미이다. 신윤복의 <나무야 나무야>중에 '강화도의 서쪽 끝 하일리는 저녁 노을 때문에 하일리입니다. 저녁노을은 하루의 끝을 알립니다. 그러나 하일리의 저녁노을은 하루의 끝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이 적과 흑으로 확연히 나누어지는 산마루의 일몰과는 달리 노을로 물든 바다의 일몰에서는 저 해가 내일 아침 다시 동해로 솟아오르리라는 예언을 듣기 때문입니다. 이곳 하일리에서는 오늘 저녁의 일몰에서 내일 아침의 일출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숙종 5년(1679)에 54개의 돈대중 50개가 만들어 졌는데 그 중의 하나가 굴암돈대이다. 규모는 동서 27.6m, 남북 38.6m의 반달모양이다. 성벽의 높이는 3.9m 내외이며 돈대 동쪽에 출입문이 있고 바다를 향한 반원모양의 성상 서쪽 및 남서향 방향에 총 4개의 포좌를 배치하였다. 북쪽 성벽 중앙에는 배수시설인 누조가 설치되어 있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으나 여장의 흔적은 있으나 무너져 남은 것은 없다. 문헌상에는 치첩이 36개이고, 둘레는 88보, 115m이다. 진무영 소속이었다. 남쪽으로는 송강, 선수, 장곶돈대가 나란히 서서 강화의 서쪽 바다를 지켰다.
출입문은 다듬은 돌로 3단으로 쌓고 그 위에 평면 장대석으로 덮어 천정을 만든 평거식 문이다. 성벽은 아래에 지대석을 깔고 뒤로 약간 물러나 일정한 높이로 다듬은 돌로 3단을 쌓고 그 위로는 다듬은 돌의 크기가 일정지 않은 것으로 축조하였다. 포문은 위아래에 장대석을 놓고 좌우에는 V자 모양으로 바깥쪽은 넓고 안쪽으로 작은 포구를 냈다.
강화도 해안을 지켜준 54개의 ‘돈대(墩臺)’ 4
문화재 : (문화재자료)선수돈대, (기념물)장곶돈대, (기념물)북일곶돈대, (기념물)미루지돈대
소재지 : 인천 강화군 화도면 내리 1831번지 외 1필지/강화군 화도면 장화리 산 361/강화군 화도면 여차리 170-2
한국NGO신문 기사입력일 : 2022.11.08.
기자명 : 정진해 문화재 전문 대기자
굴암돈대에서 직선거리로 약 4.6km 떨어진 선수돈대는 원래 검암(黔巖)돈대라 부르다가 이 지역이 선수포구가 있어 선수돈대라 부르게 되었으며 뒷개돈대라고도 불리웠다. 48개 돈대외에 추가로 축조된 돈대 중 하나이며, 장곶보에 속했던 돈대이다.
돈대는 후포항 뒷산 마루턱에 있는 선수돈대는 등산로를 따라 10여분 정도 오르면 해발 약 100m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지대가 높아 좌우와 전면이 매우 경사가 급하고 바다가 잘 보이는 위치이다. 기록에 의하면, 장곶돈대 서쪽 1,260보에 위치하고 주위가 33보라고 한다. 선수돈대 북쪽으로는 송강돈대가 있었고 남쪽으로는 장곶돈대가 있다.
선수돈대는 다른 돈대에 비해 전면이 좁고 좌우가 길다. 동서 길이 18m이고, 남북 길이는 32m의 길죽한 직사각형이다. 북쪽으로 2좌의 포좌를 두고, 동서양방향은 북쪽으로 치우쳐 각각 1좌의 포좌를 두었다. 출입구는 남쪽 면 중앙에 평거식으로 좌우 장주를 한 개씩 새우고 평거식 돌을 올려 지붕을 만들었다. 출입문의 안쪽에는 좌우로 4단의 기석을 쌓고 평거식 돌을 올렸다. 성상의 폭은 약 1.5m로 바다쪽으로 길게 다듬은 네모난 석축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성상로에는 23개의 여장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 있는 것이 없는 상태이다.
선수돈대에서 직선거리 1.8km에 떨어진 긴곶돈대로 불리었던 장곶돈대가 위치하고 있다. 강화도 서쪽과 석모도 동쪽 해안 사이로 흐르는 ‘석모수로’의 초입에 위치한다. 곶의 길이가 길어서 ‘긴곶’으로 불리던 이곳은 한자어로 부르게 되면서 장곶(長串)이 되었고, 장곶은 다시 장화리(長花里)로 이름이 바뀌었다. ‘꽃’의 옛 어원도 ‘곶’이니 장곶의 곶이 꽃을 뜻하는 화(花)로 바뀌었고 긴곶, 곧 장곶은 장화리가 되었다.
장곶돈대는 숙종 5년(1679)에 48개의 돈대를 한꺼번에 만들었다. 이후로도 몇 개 더 쌓았으니 숙종 44년(1718)에 빙현돈대를, 경종1년(1720)에는 초루돈대를 축조했다. 영조 때도 돈대를 만들었다. 작성돈대(영조2년, 1726)와 제승돈대(영조 15년, 1739)가 그것이다. 이후 광성보에 용두돈대를 하나 더 만들었으니, 이로써 강화도의 돈대는 모두 54개가 된다.
장곶돈대는 지름이 31.1m에 달하는 둥근 원형의 돈대다. 돈대의 둘레는 128m이며 성벽의 높이는 3.2m 내외이다. 축조된 돌의 크기는 같은 크기의 돌은 없이 크고 작은 돌을 면과 면을 맞추고 틈새는 작은 쇄기돌로 채워 견고한 벽을 완성하였다. 돈대 바닥의 기단을 포함하여 포좌의 윗부분에 덮어 얹은 개석(蓋石)까지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다만 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쌓은 여장은 흔적만 남아 있을 뿐 남아 있는 것은 없다. 출입문은 지대석 위에 우측은 장대석을 눕히고 그 위에 같은 크기의 장대석을 세우고 다시 네모난 돌을 눞혔다. 좌측은 지대석을 위에 장대석을 세우고 그 위에 같은 넓이의 돌을 올리고 평거식의 지붕돌을 올려 완성하였다. 안쪽에는 문을 달았던 돌확이 좌우로 놓여있다. 대포를 설치했던 포좌가 4개 있고, 포좌 안쪽 벽면에는 일종의 감실(龕室)과 같은 공간이 있다.
원형이 잘 남아 있는 장곶돈대는 갑오개혁(고종31년, 1891) 때 돈대는 진무영과 함께 혁파(革罷)된다. 그 후 돈대는 방치되어 자년에 의해, 사람에 의해 허물어지고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돈대를 쌓았던 크고 작은 돌은 민가의 돌담으로, 제방의 둑으로 사용되면서 조금씩 형태를 잃어갔다. 그러나 장곶돈대는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 그런 과정을 덜 겪었다. 1993년에 부분 보수를 하고 2018년에서 2019년에 걸쳐 보수 정비 공사를 했다. 허물어진 성벽을 보수할 때 외부에서 새 돌을 가져오지 않고 돈대 현장에 있는 석재를 그대로 사용했다. 장곶돈대는 원형을 잘 간직하여 고졸한 옛 맛을 보여주지만 여장은 그 형태를 알 수 없어 복원에서 제외되었다.
장곶돈대에서 남쪽으로 직선거리 약 3km의 거리에 있는 북일곶돈대는 장곶돈대처럼 지형이 바다로 길게 뻗어 나온 끝에 네모반듯한 형태로 강화군 화도면 장화리 산361에 위치한다. 둘레가 122m, 남북이 28.7m, 동서는 32.2m이다. 성벽은 40~60cm 내외의 크기로 화강암을 이용해 퇴물림 방씩으로 축조하였다. 둥근모양의 돈대는 사위를 경계하기에 적합하다면 네모난 형태의 돈대는 사방을 나눠 경계하기에 유리하다. 해안가 설치된 돈대의 형태는 방형(장방형, 정방형), 원형(원형, 타원형), 반월형의 3가지로 분류된다. 방형(네모난 형태)은 모두 26개소이며 원형은 총 11개소, 반월형은 3개소이다.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원형이 훼손된 경우가 총 13개소이며, 특이하게 본오리돈대처럼 초승달 형태의 돈대도 있다. 돈대를 둘러보면 방형 돈대 다음에 원형 돈대가 있고 또 그 다음에 방형 돈대가 있다. 어찌 보면 의도적으로 네모난 형태와 둥근 형태의 돈대를 번갈아가며 축성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마치 천원지방의 사상을 대입한 것 같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뜻으로, 하늘은 춘하추동 사계절을 순환하며 둥글게 돌고, 지상의 모든 만물은 동서남북 방위를 갖고 존재한다는 사상을 돈대의 축성에 의미를 담은 것 같다. 성벽의 안쪽과 바깥쪽은 큰 돌로 쌓고 그 사이는 흙과 잡석을 채워 넣는 협축 방식으로 쌓았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3.5m 내외이며 그 위에 설치한 40개의 성가퀴(여장)는 허물어지고 없다.
2019년에 북일곶돈대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되면서 내부에 온돌과 구들을 구비한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돈사(墩舍)로 추정되는 이 건물터는 돈대에서 숙직하는 병사가 있었음을 알려 준다. 처음 돈대를 축조하면서 내부에 건물을 만들지 않았다가 숙종 9년(1683)에 병졸의 수직을 위한 건물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진과 보에 소속된 돈대는 장수가 간검하며 별장 2명과 군졸 3명이 돌아가며 숙직했고, 군졸 1명이 돈사에서 숙식을 하며 근무하였다.
북일곶돈대의 출입문은 평거식으로, 지대석 위에 4단의 기석을 올리고 위에 장대석을 가로 놓아 천정을 만들었다. 돈대의 벽은 다듬은 돌을 지형의 높이에 따라 높이가 약간씩 다르게 축조되었으며, 출입문쪽의 벽은 5~6단으로 이루어졌고 그 위에 미석이 밖으로 약간 나와 있다. 돈대의 정면에는 9~10단으로 축조되었고 그 위에 미석 일부가 남아 있다. 여장이 있어야 하나 복원되지 않은 상태이다.
북일곶돈대에서 미루지돈대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3.6km의 거리이다. 미루지돈대는 숙종 5년(1679) 윤이제가 유수로 재임할 때 축조한 돈대이다. 둘레가 128m, 높이 2.2m로 장곶보 소관하에 있었다. 돈대는 돌을 이용해 직사각형으로 쌓고, 해안을 향해 4개소의 포좌를 설치해 놓았다. 성곽돌은 40-120cm의 돌로 장방형으로 축조하고 여차리 해안쪽을 향해 4문의 포좌를 설치했다. 출입구가 다른 돈대의 평거식이 아니고 홍예를 이르고 있다. 성상에는 여장의 흔적만 남아 있고 현재는 여장이 없는 상태이다.
성벽을 보면 협축식 방식으로 벽을 쌓은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시대에 축성의 방법의 하나로 협축식은 안과 밖의 벽을 모두 큰 돌로 쌓고 그 안에 흙과 자갈 등을 채우는 방법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돈대가 모두 협축식으로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미루지돈대도 다른 돈대와 마찬가지로 퇴물림(들여쌓기)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성벽의 아래에는 무겁고 큰 돌을 쌓고 위로 올라갈수록 그 무게와 크기를 줄인 돌을 조금씩 뒤로 물려가며 쌓았다. 이러한 방식은 전통적인 우리 선조 건축물의 특징이다. 이러한 방식은 돈대의 하중을 줄여서 배불림 현상을 막을 수 있고 그로 인한 성벽의 붕괴 역시 억제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성벽을 쌓을 때 돌과 돌이 서로 아귀가 맞고 잘 맞물리도록 돌을 다듬었다. 아랫돌이나 옆의 돌 크기나 모양에 맞춰 맞물리는 돌의 모서리를 'ㄱ'자 또는 'ㄴ'자 모양으로 깎아내고 다듬었다. 이런 기법을 '그랭이질'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쌓은 석축은 꽉 맞물려 견고하다.
출입문은 홍예문이다. 54기의 돈대 중 홍예문인 곳은 월곶돈대와 구등곶돈대, 미루지돈대 뿐이다. 좌우로 홍예기석을 세우고 그 위에 2단의 홍예돌을 놓고 가운데 선단석을 끼워 홍예문을 만들고 그 위에 부형무사를 올려 홍예문을 완성하였다.
강화도 해안을 지켜준 54개의 ‘돈대(墩臺)’ 5
문화재 : (비지정)송곶돈대, (유형문화재)분오리돈대, (유형문화재)후애돈대
소재지 : 화도면 동막리 182번지
한국NGO신문 기사입력일 : 2022.12.08.
기자명 : 정진해 문화재 전문 대기자
미루지돈대에서 동쪽으로 약 2.8km에 송곶돈대가 있다. 분오리돈대와 함께 진영무에서 관할했을 정도로 중요한 돈대였다. 진영무는 조선 시대에 바다 방위를 목적으로 조직된 군영으로 강화도에 본영이 있었다. 병력은 포군(砲軍)을 중심으로 하여 3,000여 명에 달했으며 강화도의 중요 돈대들을 관할하며 강화도의 해안 방위를 했다. 현재 무너져 있는 상태여서 높이를 알 수 없으며, 둘레가 126m에 이른다. 본오리돈대와 함께 숙종 5년(1679)에 축조되었다.
동막돈대로 불리었던 송곶돈대는 바다와 맞닿아 있는 언덕 위에 방형으로 한 면의 길이가 31m에 이른다. 원래는 갈곶돈대 별장에 속해 있었지만, 중요성에 따라 본영인 진무영이 직접 관할했었다. 현재 기단과 석축 일부만 무너진 채 모습을 드러내 있고, 바다 쪽 성벽에 대포를 배치했던 포좌가 4곳에 있었지만, 그 역시 기단부만 확인될 뿐 정확한 재원은 알 수 없다.
송곶돈대에서 동쪽으로 직선거리는 약 2.1km에 분오리(分五里)돈대가 위치한다. 숙종 5년(1679) 축조된 최초의 48개 중 하나이다. 분오리돈대는 다른 돈대처럼 원형이나 방형의 모양이 아니고 초승달 모양의 돈대라는 점이다. 남쪽 해안의 중앙, 동막 해수욕장 동쪽 끝에 자리한 돈대는 바다를 향해 돌출한 능선의 끝부분, 곶을 이룬 지형 형태에 따라 축조된 돈대이다. 시야가 넓으면서 좌우에는 깊이 굽은 갯벌의 주변으로 포구가 형성되어 있다. 육지에서 진입할 때는 평지에 가깝지만, 해안은 절벽과 급경사로 이루어져 있다. 지형을 그대로 살려 성벽을 쌓았기에, 평면은 반달 모양이며, 특히 동쪽 성벽 일부는 자연암반 위에 쌓았다. 한마디로 해안 방어의 요충지다.
돈대에 올라서면 동쪽과 남쪽 서쪽이 너른 갯벌이 펼쳐져 있고, 북쪽은 마니산이 있어 천혜의 방어벽을 형성한다. 이러한 중요도에 의해 강화영문에서 돈장을 따로 파견해 직접 관할했다.
돈대의 구조는 바다 쪽으로 약간 큰 초승달 형태를 이루고 있다. 북면만 제외한 삼면은 자연 절벽을 활용해 축성하였다. 동쪽으로는 자연 암반을 그대로 활용하여 그 위에 직벽을 쌓아 더욱 높아 보인다.
성벽의 성돌은 거칠게 다듬은 네모난 면석을 안팎으로 쌓았다. 높이는 평균 4~5m, 둘레는 113m이며, 안쪽 둘레는 약 70m, 너비는 12.8m이다. 돈대의 문은 동벽 끝부분으로 치우쳐 있으며, 문 좌우에 화강석을 투박하게 다듬어 만든 커다란 무사석을 쌓고, 그 위에 보 형식으로 장대석을 건너지른 평거식 형태이다. 돈문 안쪽에는 문짝을 설치했던 흔적으로 빗장에 해당하는 장군목(將軍木)을 끼웠던 구멍이 선명히 남아 있다. 성상에는 여장이 37개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무너져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1994년에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지만, 아쉽게도 불완전 복원으로 여장은 복원되지 않았다. 4개의 포좌가 모두 바다를 향해 앉혀 있다. 분오리돈대에 올라가 사방을 조망해보면, 탁 트인 강화 남쪽 바다가 광각으로 조망된다. 그래서 일출과 일몰을 한곳에서 다 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이기도 하다.
분오리돈대에서 동쪽으로 직선거리 약 2.7km 지점에 후애돈대가 있다. 이 돈대도 다른 돈대와 함께 숙종 5년(1679)에 축조된 48개 돈대 중 길상면에 있다. 강화유수 윤이제 재임 시, 어명을 받은 병조판서 김석주의 지휘하에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 삼도의 승군(僧軍) 8,900명과 어영군 4,300명이 80일 만에 완축했다.
후애돈대는 강화 남쪽 해안 끝자락에 있어서 주변 해상과 돈대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화강암을 이용해 정사각형 모양으로 쌓아 올렸으며, 대포를 올려놓는 포좌를 4개 설치했다. 둘레가 129m이고, 석벽의 높이는 280㎝~500㎝이다. 택지돈대, 동검북돈대와 함께 선두보에 소속됐다.
돈대와 인접해 있는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누구든 이 돈대를 훼손하면 재앙이 따른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은 후애돈대를 신성시하여 본래의 모습을 지금까지 잘 남아 있게 된 원인이기도 하다. 현재 성상에 둘려 있는 여장은 옛 모습대로 복원되어 있다. 복원 전만 하여도 원성 일부와 여장 일부가 남아 있었는데, 1988년에 옛 모습을 찾아 그대로 복원하였다. 다만 여장이 있는 성상로는 시멘트로 포장된 것이 결점이다. 돈대는 아래에 네모난 돌을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성돌을 안쪽으로 들어 쌓기 시작하여 위로 오를수록 약간의 경사도가 있게 8~9단을 쌓고 그 위에 미석을 놓고 여장을 쌓았다.
여장의 모양은 '⼐'로 한 타에 총안 하나씩 내고 지붕을 얹지 않았다. 여장은 벽돌처럼 다듬은 돌을 10단으로 쌓았고 총안은 아래에서 7단을 쌓은 후 8단부터 10단까지 총안 공간을 냈다. 출입문은 문짝을 고정하기 위해 만든 돌확이 남아 있다. 돈대 문 옆에 돌확이 하나 있는데 그 용도는 알 수 없다.
모두 복원이 되었으나 아직도 복원되지 않는 것이 있다. 돈대 완공 3년째 되던 1682년부터 짓기 시작한 5칸의 돈사(墩舍)가 복원되지 않았다. 3칸은 무기고이고 2칸의 병사들이 쉴 수 있는 숙소이다. 문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 있는데도 문짝을 달지 않았고, 포혈 안쪽에 포좌만 있고 당시 사용했던 불랑기포 4호, 5호의 모형이라도 배치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후애돈대에서 초지돈대 사이에는 택지돈대, 섬암돈대, 장자평돈대가 있었지만, 지금은 흔적 또는 위치를 찾을 수 없게 지형이 많이 변해 있다. 택지돈대는 돈대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축성에 사용되었던 석재의 흔적이 지표면에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 있는 상태이다. 택지돈대(宅只墩臺) 안내판에는 ‘길상면 선두리 1081번지’ “조선 후기 강화도 수비 체제의 중요한 방어시설로 외적의 해안 상륙을 저지하고 나아가 수도방위의 전초전 역할을 담당하여 외세의 침입을 사전 효율적으로 응징하고자 설치된 국방유적으로 조선 숙종 5년(1679) 축조된 돈대 중의 하나이다.’라는 내용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을 뿐이다.
섬암돈대도 택지돈대와 마찬가지의 운명에 겪었다. 해안가 야산의 정상부에 자리한 돈대로 주변이 숲이 우거져 그 위치를 찾기가 힘겨울 정도이다. 쓰러져 있는 안내판에 택지돈대와 마찬가지의 안내문이 있을 뿐이다. 많은 석재는 해방 후 근처 제방을 쌓는 데 모두 가져다 사용하여 현재는 석재가 남아 있는 것이 없고 몇 개의 면석이 돈대의 터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돈대 터는 밭으로 변해 있고, 산 아래쪽 전면은 간척지가 되어 경작지가 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섬암돈대는 방형이고 둘레가 93보, 여장은 40개라 하였다. 두꺼비처럼 생긴 산등성이 위에 있다고 하여 섬암돈대라 불렀으며, 강화의 남쪽 바다를 굽어보면서 강화 본섬 사이의 해협을 지켰을 위엄있는 모습은 이제는 찾을 수 없다.
길상면 초지리 1072번지가 장자평돈대가 있던 자리이다. 돈대 자리에는 현재 ‘한성정미소’가 자리하고 있다. 원형을 알 수 없으며, 과거에는 전면이 바다였으나 간척사업으로 주변 경관 역시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강화도 해안을 지켜준 54개의 ‘돈대(墩臺)’ 6
'신미양요'의 치열한 전투 현장...강화도 초지진
문화재 : 초지진(초지돈대), 덕진진(덕진돈대)
소재지 :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해안동로 58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355
한국NGO신문 기사입력일 : 2022.12.20.
기자명 : 정진해 문화재 전문 대기자
초지진은 길상면 초지리에 있는 성(城)이다. 바다로 침입해 오는 적을 막기 위해 조선 효종 7년(1656년)에 구축하고 조선 숙종 때인 1679년에 축성된 요새이다. 『여지도서(輿地圖書)』와 『강화부지(江華府志)』에 따르면 1716년에 설치되었으며, 1726년(영조 2)에 진장(鎭將)으로 종4품 무관인 병마만호(兵馬萬戶)가 배치되었다. 1763년에는 진장을 종3품 무관인 첨사(僉使)로 승격시켰다.
1866년 10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 극동 함대와 1871년 4월 무역을 강요하며 침략한 신미양요 때 미 군함 모노카시호와 팔로스호 등의 포격, 미국 해병 450명의 상륙공격으로 초지진이 미군에 점령되면서 군기고(軍器庫), 화약고, 진사(鎭舍) 등이 모두 파괴되었던 사건이 있었다.
당시 지휘관이었던 한 미군 대령이 "조선군은 근대적 무기도 한 자루 보유하고 있지 못한 채 노후한 전근대적인 무기로 근대적 화기로 무장한 미군을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다.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용맹스럽게 싸우다 모두 전사했지만,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민족을 그리고 국가를 위해 그토록 처절하고 강력하게 싸우다가 죽은 국민들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1875년 8월에 침공한 일본 군함 운요호의 포격으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또다시 초지진은 큰 피해를 보았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외세에 문호가 개방되면서 초지진의 할 일이 없어지면서 돈대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은 전투의 현장은 허물어진 상태로 그대로 방치하게 되었다. 1973년 강화 전적지 보수 정비사업 때 초지돈만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초지진은 원래 경기의 안산에 설치되었던 진이었으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이후 국왕의 피난처로 정해졌던 강화의 방어체제 강화를 위해 1656년(효종 7) 강화유수 홍중보(洪重普)의 건의로 강화의 동남쪽 해안인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설치했다.초지진에는 군관 11인, 사병 98인, 돈군(墩軍) 18인, 목자(牧子) 210명 등이 배속되어 강화해협을 수비했다. 최초에는 초지진의 방어 책임자로 감목관(監牧官) 1인이 겸임해 임명되었으나 방어체제의 강화를 위해 1665년(현종 6) 서필원(徐必遠)의 건의로 진장(鎭將)으로서 종4품의 무관인 만호(萬戶)가 임명되었다.
또한 초지돈대, 장자평돈대, 섬암돈대 등 세 곳의 돈대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들 돈대와 본진 간의 협공체제를 통해 수비력을 극대화했다. 초지진에는 군선(軍船) 3척이 배속되어 있었고, 부속된 3곳의 돈대에는 각각 3개의 포좌(砲座)를 마련하고 화포를 설치하여 강화 해협을 수비했다.
그러나 현재 초지진 주변은 음식점 등 각종 건축물 등이 들어서 축조 당시의 흔적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1973년 복원된 초지돈대가 초지진을 대표하고 있다. 높이 4m 정도에 장축 114m의 모서리가지지 않는 삼각형 형태의 돈대로, 내부에는 3곳에 포좌와 여장을 설치했으며, 여장마다 1~3개의 총안이 총 100여 개 있다. 내부에는 전면 3칸, 측면 1칸의 보호각에 당시 사용되었던 대포 1문이 전시되어 있다.
숙종 초 돈대를 최초 건설할 당시 책임을 맡았던 김석주(金錫冑)의 기록에 따르면, 초지진에 속한 섬암돈대 등 세 돈대는 모두 방형으로서 둘레는 90보 전후였고 치첩(雉堞)의 수효는 40개 이내였다고 한다. 외부의 성돌은 다듬은 네모난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는데, 기단석 위에 7~8단을 쌓고 그 위 성벽에 비해 약간 앞으로 나오게 네모난 돌로 미석을 놓았다. 미석 위에는 벽돌을 이용하여 11단을 쌓아 여장을 만들고 위에 지붕돌을 얹었다. 출입문은 평거식으로 기단석 위에 3단의 기석을 놓고 그 위에 가로로 장대석을 올려 문을 만들었다. 돈대 내에는 성상로를 두고 내탁으로 흙을 채워 경사지게 하고 오를 수 있게 계단을 두었다.
돈대 밖 남쪽에는 수령이 약 400년 된 큰 소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포탄을 맞은 상흔이 남아 있는데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를 상상할 수 있다.
초지돈대에서 직선거리로 약 1.7km의 거리에 덕진돈대가 자리한다. 1679년에 축조된 덕진돈대는 용두돈대와 함께 덕포진의 관할에 속했다. 덕포진은 원래 강화에 있었는데 1666년(현종 7)에 통진(지금의 김포시 대곶면)으로 옮겼다. 그 자리에 덕진진이 설치됐다. 당시 강화유수 서필원의 계청으로 첨사를 통진땅 덕포로 옮기고 이곳에 별장을 두었으며, 1677년 유수 허질의 계청에 따라 만호로 승격시켰다. 덕진진 배치 인원은 만호 1명 군관 26명 사병 100명 돈군 12명 군량미 115석, 콩 26석, 첨향미 103석, 간장 5독, 진선 2척, 군기와 군용품 약간이었다.
덕진진은 1874년(고종 11)에 축조된 남장포대와 덕진포대를 관할하는,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로 강화 12진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을 지키고 있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의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했으며,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가장 치열한 포격전을 벌인 곳이다. 그러나 초지진에 상륙한 미국 군대에 의해 점령당했다. 이때 여장과 문루가 모두 파괴되고 문루지만 남게 되었다. 1976년 성곽과 돈대를 고치고 남장포대도 고쳐 쌓았으며, 앞면 3칸·옆면 2칸의 문의 누각도 다시 세웠고, 당시의 대포를 복원하여 설치했다.
덕진돈대는 남쪽으로 온수천과 이어지는 갯골과 인접해 있으며, 서쪽으로 강화외성과 내측과 외측으로 각각 4혈 포좌를 설치했다. 돈대의 북쪽으로 15혈의 남장포대를 설치했다. 포대의 설치는 온수천으로 들어오는 적선을 막는 역할과 손돌목으로 북상하는 적선을 저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돈대의 내부에는 토축으로 둘려 있고 4개의 포좌를 갖추었으며, 원형은 여장이 40개로 갖추어진 둘레 90보의 석성 돈대였다. 복원하면서 여장은 복원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출입문은 평거식으로 기단석 위에 반듯하게 가공된 기석을 좌우로 놓고 그 위에 반듯한 돌을 올리고 장대석을 가로로 놓아 문을 만들었다. 입구의 안쪽에는 3단의 계단을 두었고 올라서면 평탄한 돈내 내부가 네모나게 평탄하고 돈대의 내탁은 흙을 채워 45도 경사지게 하였다. 4개의 포좌는 다듬은 돌로 반듯하게 쌓았고 성상로로 오를 수 있게 돌계단을 두었다. 정확한 여장의 형태를 알 수 없으며 상성로에는 잔디가 덮여 있다.
돈대의 외벽은 가공된 돌을 8단으로 쌓았으며 위쪽으로 쌓으면서 안쪽으로 경사지게 쌓았다. 돈대의 앞쪽에는 경고비가 세워져 있는데 비에는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가 새겨져 있다. 바다의 관문을 지키고 있기에 외국 선박은 통과할 수 없다‘라는 내용이다. 이 비는 조선 고종 4년(1867년)에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강화 덕진첨사가 건립한 것으로 개화기에 외국 선박의 출입을 통제하겠다는 척화의 의지를 담고 있는 비이다. 비의 크기는 높이 140cm, 너비 54.5cm, 두께 28cm이다.
덕진진의 성문인 공조루는 19세기 외세의 침탈을 제1선에서 막아냈던 성문이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을 거치면서 치열한 항쟁을 거치면서 성문인 공조루도 철저히 파괴되었다. 특히 신미양요 때는 미국 극동함대에 맞서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지만, 마침내 초지진에 상륙한 미해병대에 점령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누각도 사라지고 튼튼한 방어력이 되었던 성벽과 함께 허물어져 홍예만 남았었다. 1976년 성곽과 돈대를 고치고 덕진진의 문루를 다시 세웠으며 남장포대와 당시의 대포를 복원해 설치했다. 문루의 현판은 “바다를 제어한다”는 뜻의 ‘공조루控潮樓’라고 쓰여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4면은 판벽을 하고 가운데에 판문을 달았다. 누각의 좌우에는 협문을 두어 계단을 오르내리며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성문의 천정에는 동쪽을 상징하는 구름 속의 청룡이 그려져 있다. 공조루 앞에는 우물이 있는데, 이 우물은 이곳에서 근무했던 병사들의 식수였다고 한다. 성문을 나서면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으며, 성벽 위에는 벽돌을 이용하여 하나로 연결된 연속평여장에 근총안과 원총안이 마련되어 있다.
강화도 해안을 지켜준 54개의 ‘돈대(墩臺)’ 7
신미양요 때 백병전을 치룬 현장 광성보
문화재 : (사적) 광성보(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
소재지 :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23-1
한국NGO신문 기사입력일 : 2023.01.01.
기자명 : 정진해 문화재전문 대기자
덕진진에서 강화해협의 해변을 따라 북쪽으로 약 2km의 거리에 자리하는 광성보에는 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위치한다. 광성보가 처음 이곳에 만들어지기 시작할 때는 고려시대 때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강도시기(1232~1270년)에 지금의 선원면, 불은면, 길상면 일대의 해안에 흙과 돌을 이용하여 축성했다.
조선시대에 오면서 강화가 국가의 보장지로 주목받으면서 관방시설이 수차에 걸쳐 정비되었다. 1618년(광해군 10)에 외성이 보수 되었고, 1658년(효종 9년)에 광성보를 만들게 되었다. 다시 1691년(숙종 17)에 허물어진 상태의 외성을 보수하면서 여장까지 갖춘 외성이 완성(1692년)에 완성되면서 광성보 소속 광성돈대, 오두돈대, 용두돈대, 화도돈대 등이 완성됐다.
광성보는 신미양요(1871년) 때 백병전의 현장이다. 당시 미국의 로저스가 통상을 요구하면서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했다. 이때 이미 해병 450명으로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자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 이하 전 병사가 열악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웠다. 포탄이 부족하면 칼과 창으로 싸웠고 돌과 주먹으로 싸웠으나 한발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백병전을 벌였지만, 지휘관 어재연 장군과 그의 아우 어재순, 군관과 49인의 장사, 200여 명의 병사가 전사했다. 이때 파괴되어 폐허가 되어 있던 것을 1977년 옛 모습을 복원하게 되었다. 안해루, 광성돈, 손돌목돈, 용두돈과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묘,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각 등 보수 정화됐다.
안해루는 영조 21년에 광성보를 개축하면서 성문을 건립했는데 이를 안해루(按海樓)라 명명했다. 광성보는 해안에 세운 소규모의 성곽으로, 안해루는 성의 안과 밖을 오가는 문이다. 홍예문을 안과 밖이 같은 모양이며 2단의 홍예 기석을 쌓고 그 위에 홍예석과 선단석을 연결함으로써 문이 완성되고 홍예문 위에는 여장을 설치하고 안쪽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누각을 두었다. 성문의 안쪽 좌우에는 누각을 오르내리는 계단을 두었고 북쪽으로는 성벽이 광성돈대와 연결되어 있다. 누각의 좌우에는 각각 협문을 두었다.
안해루의 북쪽에는 광성돈대가 자리한다. 반원형의 돈대로 서벽은 직선이고, 동벽은 볼록한 반원형으로, 마치 다리미 바닥모양으로 둘레가 142m이다. 광성보 전투에서 활약을 보였지만, 신무기로 무장한 미국 해군을 맞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미군은 9인치, 8인치 등 85문의 대포를 쏘았으나 조선군은 정조준도 어려운 대포와 소포로 적과 마주했다. 홍이포는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후 포 뒤쪽 구멍에서 점화해 사격하는 포구장전식 화포이다. 사정거리 700m정도, 포알은 화약이 폭발하는 힘으로 날아가지만, 포알은 폭발하지 않았다. 소포는 불량기라 하여 프랑스군이 쓰던 것으로, 사정거리 300m로 포알은 대포와 같다. 미군의 전쟁사에 ‘48시간 전쟁’으로 기록되어 있는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 군대는 어재연 장군을 포함해 430여 명이 전사하고 20여 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광성보와 돈대들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1977년 전적비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광성돈대가 복원되고 포좌 4개소와 포 3문을 복원 설치했다.
안해루에서 손돌목돈대로 가는 길에는 뿌리를 드러낸 나무들이 옛 강화외성의 흔적을 잡고 있고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는 순국한 용사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비로, 비문 뒷면에는 한글로 신비양요가 일어났던 당시 우리 수비군의 활약상을 기록하여 놓았다. 쌍충비각에는 신미양요 때 중군 어재연과 그의 동생 어재순의 순절을 기념하는 비와 함께 당시 순국한 장병들의 충절을 기리는 광성파수순절비(廣城把守殉節碑)가 세워져 있다. 어재연, 어재순 형제를 기린 비문은 ‘凜乎忠勇(름호충용) 日月光輝(일월광휘) 兄弟賓從(형제빈종) 視死如歸(시사여귀) '늠름한 충성과 용맹은 해와 달처럼 빛나고, 형제가 서로 뒤따라서 죽음을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이 하였네.' 兄死於國(형사어국) 弟死於兄(제사어형) 一門忠友(일문충우) 百世風聲(백세풍성) '형은 나라 위해 죽고 아우는 형을 위해 죽으니, 한 가문의 충성과 우애, 오랜 세대를 두고 이를 날리리라.'
<광성파수순절비>에는 본영 천총(千摠) 김현경과 본진 별장(別將) 박치성의 추모 시문이 있고, 뒷면에는 전사한 병사 49명의 명단이 있는데, 마지막 구절에 '半百武士(반백무사) 一心殉國(일심순국) 危忠卓節(위충탁절) 千秋不泐(천추불륵) '반백의 무사가 한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높은 충성 높은 지조와 절개를 긴 세월이 지나도 잊을 수 없으리.' 나라를 위해 몸바친 순국의 의미를 새겼다. 쌍충비 앞에는 순미순의총(辛未殉義塚)이라는 7기의 무덤이 있다. 이 무덤은 신미양요 때 목숨을 잃은 무명용사들의 신원을 알 수 없어 7기의 분묘에 합장하여 묻은 묘이다.
손돌목 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에 쌓은 48개 돈대 중 하나로 신미양요 때 미군과 치열한 전투 벌였던 격전지로, 광성보에서 가장 높은 구릉 정상부에 둥근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원래 돈대 중앙에 3칸의 무기고와 포좌 3개가 있었지만, 신미양요 때 미국 해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이때 격렬한 전투로 인해 모두 파괴되었던 돈대를 1976~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복원했다. 일명 손석항(孫石項)돈대로도 불리며 남북 간 지름이 30m, 동서 간은 34m로 평면 원형에 가까운 돈대로, 둘레는 108m, 돈대 넓이는 778㎡에 달한다.
돈대에서 동쪽으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용두돈대가 있으며, 그 앞의 염하(강화해협)를 뱃사공 손돌이 왕의 오해로 억울하게 죽은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 부른다. 손돌목의 손돌은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로 피난 가던 고종 임금을 배에 태웠던 뱃사공의 이름에서 따왔다. 배에 오른 고종이 이곳을 지날 때 배가 심하게 요동치자 손돌 뱃사공이 자신을 죽이려고 배를 이곳으로 몰았다고 의심한 나머지 손돌을 처형했다. 손돌은 죽기 전 임금이 건너갈 수 있도록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반드시 뱃길이 트인다"고 말한 후 죽음을 맞았다. 정말 바가지를 따라가니 뱃길이 열리고 고종은 무사히 강화 땅에 오를 수 있었다. 비로소 자신이 오해한 것을 안 고종은 손돌뱃사공을 후하게 장사지내 주도록 했다. 염하 건너편 동남쪽에 덕포진이 있는데, 덕포진 언덕 위에 손돌의 묘가 있어 늘 염하의 물살을 지켜보고 있다.
손돌목돈대 아래에는 용의 머리처럼 염하강에 불쑥 나와 있는 용두돈대가 자리한다. 길게 바다로 향해 굽어진 길이 용의 머리 같아 붙인 이름으로 이곳은 염하와 바로 맞대고 있는 천혜의 요새이자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며, 신미양요 때 미군과 격렬한 전투를 치른 격전지이기도 하다. 용두돈대는 광성보에 소속되어 있으며 강화 54돈대 중 가장 마지막으로 합류한 돈대이다. 광성보 내 강화외성의 부속시설이었던 해안가의 용도를 돈대로 명명함으로써 돈대 대열에 올랐다.
용두돈대에는 포좌와 출입문이 없다. 강화도의 돈대 중 바다 쪽으로 가장 돌출된 암반 위에 지어진 돈대는 암벽 상단 모양에 따라 축성하여 돈대 앞머리는 부채꼴을 하고 있다. 또한 단층 구조를 하고 있으며, 긴 용도를 갖고 있다. 용도 양편으로 총안이 뚫린 여장이 설치되어 있다.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돈대 중앙에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로 쓰인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비 뒷면에는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글씨를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손돌목돈대 아래 해안에는 12좌의 광성포대가 있다. 이 포대는 고종 11년 용진진, 광성진, 덕진진, 초진지에 포대를 설치할 때 함께 만들어진 포대이다. 광성포대는 손돌목돈대 주변 3곳에 설치되었는데 각각 9좌, 4좌, 3좌의 포좌를 갖추고 있었으며 이 중 가장 규모가 큰 중앙포대는 길이 80m, 포좌의 크기 약 6m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1875년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외세에 문호를 개방함에 따라 파괴되었던 것을 2004년 발굴조사를 거쳐 복원되었다.
강화도 해안을 지켜준 54개의 ‘돈대(墩臺)’ 8
강화 염하의 방어와 공격력이 극대화된 돈대
(비지정) 오두돈대 : 강화군 불은면 오두리 3
(문화재) 화도돈대 : 강화군 선원면 연리 54번지
(비지정) 용당돈대 : 강화군 선원면 연리
한국NGO신문 기사입력일 : 2023.01.16 13:03
기자명 : 정진해 문화재전문 대기자
염하 해변을 따라 축성된 돈대 중 광성돈대에서 북쪽 방향 직선거리로 약 2km의 거리에 있는 오두돈대는 강화 전성에 인접해 있다. 모든 돈대는 해안을 둘러 있어 그만큼 강화도 해안의 방비가 중요했음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돈대는 주변을 잘 관찰할 수 있는 평지보다 높은 평평한 땅에 설치된 소규모 군사기지이다.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접경지역 또는 해안에 주로 만들어졌다. 제주도 해안처럼 많은 연대가 있으면, 강화도는 많은 돈대가 자리 잡고 있다. 조선시대 돈대는 인조 때 남한산성에 2개의 돈대를 설치하였고, 정조 때 수원 성곽에 3기의 돈대를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강화도에는 무려 54개의 돈대가 해안을 따라 일정한 간격의 요소마다 만들어졌는데, 숙종 때 48개 돈대와 그 후 계속 축성하여 전체 54개의 돈대가 강화를 호위하고 있다. 해안선 둘레가 100여 km인데, 2km마다 동대가 하나씩 있는 꼴이다.
왜 숙종 때 강화도에 많은 돈대를 만들게 되었을까? 그 주변 정세가 어지러웠다는 데 있었다. 14세 때 왕위에 오른 숙종은 나라가 병자호란의 침탈로부터 회복되지 않은 때였다. 나라가 튼튼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숙종은 나라의 방비를 튼튼히 할 것을 주문했다. 이때 영의정 허적의 청을 받아들여 강화도에 돈대를 쌓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1678년 11월 4일에 강도설돈처소별단(江都設墩處所別單)을 반포하면서 시작되었다.
병조판서 김석주가 올린 후록에 돈대의 형태와 규격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돈대의 수를 49개소로 정하고 돈대의 제도는 산이 있는 곳은 산을 따라 성첩(城堞)을 만들며, 평지에 성을 쌓는 경우에 있어서는 그 높이를 3장(丈)으로 하고, 그 두께의 밑넓이는 3장 5척으로 하며, 면(面)의 넓이를 2장 5척으로 한다. 치첩은 높이 6척, 두께 3척, 길이 9척으로 하고 전면에 포혈(砲穴) 2개소, 좌우에 포혈 각 1개소로 하고, 주위를 4면 10칸(間) 기준으로 하되 그 지형에 따라 방형(方形) 또는 원형, 일직선 또는 ㄷ 자형으로 하며 파수병이 많아야 할 긴요한 지역의 경우는 성의 제도를 알맞게 크게 한다.'
돈대를 만들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석수들이 강화도로 오지 시작한 날이 1678년 음력 12월 4일이다. 돈대를 쌓기 위해서는 많은 석재가 필요했다. 많은 석재는 강화도와 인근 섬에서 공급해 오면서 큰 어려움이 없었다. 섬에서 배를 이용해 실어 나르는 운반팀도 있었다. <비변사등록>에 의하면 석수가 400여 명, 대장장이가 50여 명에다 그들을 돕는 잡부들까지 총 1,400여 명이 강화도로 왔다. 이뿐만 아니고 다듬은 돌을 섬에서 운반하기 위한 배도 75척이고, 배를 운영하는 뱃사공과 이를 돕는 격군도 2명씩 해서 220여 명이 함께 도착하였다. 돈대 쌓기에 앞서 돌을 깨고 나르는 데 만도 1,600명 이상의 사람이 작업을 하였다. 총인원 15,000여 명이 80여 일 만에 쌓은 대공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이 공사에서 오두돈대도 빼놓지 않고 그때 축성된 돈대이다. 그러나 신미양요로 인해 돈대는 무참히 부서지고, 허물어지면서 손을 쓸 수 없어 그대로 방치되었다. 오두돈대는 광성돈대와 화도돈대와 함께 7보 5진 중 하나인 광성보의 관리하에 방어진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돈대는 강화군 불은면 오두리 산1에 자리 잡고 있다. 지형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자라의 머리와 같은 지형에 설치되어 있으며, 평면 형태는 원형으로 지름이 32m에 달한다. 벽체의 두께는 3.5m, 둘레는 107m에 이른다. 처음에는 화도보에 속했으나 1759년(영조 35)에 광성보 관할 하에 들어갔다.
오두돈대는 원형으로 자라의 머리처럼 해안으로 불쑥 나와 있어 염하의 첫 물굽이여서 좌우의 관측이 유리하여 방어력과 공격력에 극대화할 수 있다는 장점에서 설치한 것으로 본다. 돈대의 동쪽과 남쪽으로 4개의 포좌를 배치하였고, 출입문은 서북쪽에 두었다. 돈대의 내에서 빗물을 배수할 수 있는 석조 누조가 설치되어 있는데 돈대의 지면에서 5단 높이에 있다. 성벽은 아래에서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안쪽으로 기울어지게 축조되었고 성벽 위에 미석은 성돌의 높이로 쌓고 그 위에 다듬은 돌로 여장을 쌓았는데, 총안은 두지 않고 타와 타 사이 타구를 두고 여장의 가운데에 다듬은 돌을 두고 위가 열린 총안 하나씩 두었다.
돈대의 남쪽에는 조선시대 강화 8경의 하나인 오두정이 있었던 오두정지가 있는 이것은 권율 장군의 정자터로 알려져 있다. 바로 옆에는 1742년 강화유수 김시혁에 의해 2년 동안 개축한 벽돌로 쌓은 강화 전성이 자리한다. 이 전성은 수원 화성(정조 18년, 1794년)보다 50년이나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다. 남쪽 일부 구간은 최근 복원하였다. 전성 성벽 위에는 축성 당시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긴 세월 풍화로 무너진 전성 사이로 나무뿌리가 뻗어 더 이상 무너지지 않게 잡고 있는 듯하다.
오두돈대에서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약 1km의 거리에 위치한 화도돈대(花島墩臺)는 강화군 선원면 연리에 있다. 오두돈대와 함께 1710년에 화도보가 폐지되면서 광성보의 관리하에 감시소와 방어진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강화외성과 연결되어 있으나 현재는 주변의 외성이 소실되어있는 상태이다. 동쪽으로 나 있는 수구 옆에는 강화유수 한용탁이 1803년에 세운 ‘화도수문개축기사비(花島水門改築記事碑)’가 있다. 예전에는 이 수문을 통해 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무너진 상태 남아 있었으나 북쪽에는 약간 있었지만, 성벽의 터만 남아 있을 뿐 완전히 소실된 상태로 내부는 과수원으로 사용되었다. 남쪽에는 연못이 조성되어 돈대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포좌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어 추정이 불가능하였다. 돈대는 절벽 쪽으로 장축을 기대고 있는 남북 면의 길이 35m, 동서 면은 32m로 직사각형의 구조이며 둘레가 129m이다. 기록에 의하면, 둘레는 92보, 여장(성가퀴)은 42개였다고 한다. 2002년 육군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한 후 성벽의 기단과 출입문의 무사석만 복원한 상태이다.
화도돈대에서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직선거리 약 1.2km(1,390보) 거리인 선원면 연리 1번지에는 용당돈대(龍堂墩臺)가 있다. 용진마을 남쪽의 소구산에서 염하로 이어지는 능선의 동쪽 끝자락 정상의 지형에 맞추어 축조되었다. 평면은 동서 방향으로 긴 타원형이며 북서와 남동 방향은 강화외성과 연결되어 있었다.
용당돈대는 숙종 5년(1679) 강화도 해안방어를 목적으로 강화 해안선을 따라 축조된 48개 돈대 중 하나로 가리산돈대, 좌강돈대와 함께 응진진에 소속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4개의 포좌와 36개의 여장을 갖춘 것이라고 하지만, 어떤 연유로 성체와 여장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기단석과 몇 단의 성돌만 남고 거의 유실된 상태로 남았었다. 2000년에 토축의 형태로 윤곽을 확인하고 돈대의 출입문과 성벽, 포좌를 복원하였지만, 현재까지 미완으로 남아 있는 상태이다. 성상에는 잡석만 가득 메워 있고 포좌의 지붕돌인 장대석만 덮여 있다. 또한 있어야 할 여장의 자리에 잡석만 깔려 있고 복원되지 않았다.
돈대 내부에는 7x5m 규모의 건물터가 있는데, 상주하던 병사들의 숙소와 무기고 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돈대 내에는 갈참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어떤 연유로 이곳에 갈참나무가 자라는지 알 수 없지만, 낮에는 해를, 밤에는 별을 보며 돈대를 지켰다는 덕담에 돈대의 마스코트가 되어 '별나무'란 별명까지 갖게 되었다.
강화도 해안을 지켜준 54개의 ‘돈대(墩臺)’ 9
굴욕적 강화조약 체결 현장과 병자호란의 현장
(인천시 기념물) 용진진 좌강돈대 : 인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215번지
(사적) 갑곶돈대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 1020번지 외
(비지정) 월곶돈대 : 인천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242
한국NGO신문 기사입력일 : 2023.01.31.
기자명 : 정진해 문화재전문 대기자
염하 해안을 따라 용당돈대에서 북쪽 직선거리 약 1km에 숙종 5년(1679)에 축조된 가리산돈대, 용당돈대와 함께 용진진의 관할하에 있는 좌강돈대가 있다. 또한 용진진의 홍예문은 북서쪽의 좌강돈대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곳을 용진나루, 용담포 등으로 불렀다.
용진진(인천시 기념물)은 조선 효종 7년(1656)에 축조된 진으로 군인이 머물러 있던 무장 성곽지역이며, 육군인 병마만호의 관리하에 있었다. 만호는 조선시대 무관 관직으로 지방 군영의 장수로 품계는 종4품이다. 이곳의 진에는 각궁, 교자궁, 목궁 등의 무기와 조총, 불랑기 등 각종 중화기로 무장한 군관 24명, 사병 59명, 진군 18명 등 101명의 병력이 주둔했었다. 이뿐만 아니라 선박 3척, 토졸의 위답이 20섬지기, 군향미 174섬, 조가 25섬, 장이 8점을 보유하였다. 시설로는 포좌 4문, 총좌 28개소가 있었으나 신미양요와 병인양요를 거치면서 석축 부분이 없어지고 홍예문만 남아 있던 것을 1993년에 문루와 연결된 좌강돈대가 복원되었다. 홍예의 높이는 2.57m, 폭은 4.15m, 두께는 60cm~61cm, 우측 홍예의 높이는 2.14m, 폭은 4.80m, 두께는 50~60cm의 규모이며 석재는 대리석이다.
복원된 용진진의 홍예문 전면에는 지대석 위에 2단의 홍예기석을 놓고 그 위에 홍예돌을 올렸다. 선단석으로 홍예를 마감하고 무사석을 전면으로 쌓았다. 염하 쪽으로 성을 복원하지 않고 대각선으로 마감하였고 서쪽 편으로는 좌강돈대와 연결한 성을 9단을 올리고 미석으로 마감했다. 홍예문 위 2단 높여 미석을 두고 좌우에 누조를 마련했다. 미석 위에는 총안 1구만 낸 여장을 8개를 설치하고 홍예문 안쪽 좌우로 누각으로 오를 수 있는 계단을 두었다. 참경루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두 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을, 각 칸에는 정면과 후면에는 판문을 달았고 좌우의 측면에는 판문을 달았다.
좌강돈대는 숙종 5년(1679)에 축조된 48개 돈대중의 하나이다. 염하에 접한 돈대중에 비교적 낮은 구릉 위에 축조되었다. 가까이에 용진진의 홍예문이 있어 성벽과 연결되어 축조하였다. 돈대의 형태는 원형이며 포좌는 염하 쪽으로 4좌가 있으며, 출입문은 서쪽에 배치된 평거식이다. 돈대의 축조는 화강암을 사각형으로 다듬어 8단으로 쌓고 그 위에 사각의 돌로 2단의 미석을 두고 여장은 복원하지 않는 상태이다. 기록에 의하면 여장은 37개, 둘레는 96보라 하였다. 또한 돈대 축조에 사용되었던 석재는 매음도(지금 석모도)의 해명산에서 박석을 캐서 강화 해안의 축조 현장까지 운반하여 축조하였다. 돈대의 지름은 32m이고, 돈대 내에는 창고와 주둔 병사의 숙소가 있었는데, 복원되지 않고 전체를 잔디로 깔았다. 돈대의 북쪽에는 수로가 있는데, 당시 이 수로를 따라 침입하는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되지 않았나 추정된다.
좌강돈대에서 북쪽으로 염하 해변을 따라 약 1.5km 거리에 강화도의 관문인 강화대교와 인접한 곳에 갑곶돈대가 있다. 갑곶돈은 고려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고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이다. 돈대 주위가 113보(步)였고 성벽 위에 낮게 쌓은 성가퀴인 여장(치첩)은 40개였다. 포좌가 있는 본래의 갑곶돈대는 옛 강화대교 입구의 북쪽 언덕에 있었으며, 지금 사적으로 지정된 갑곶돈대는 제물진과 강화 외성의 일부인 치성이다.
갑곶돈대는 1679년 숙종 5년에 48개의 돈대를 축조할 때 당시 갑곶나루에 만들었는데, 이때는 ‘갑구지돈대’라고 불렀다. 이곳이 ‘갑곶’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삼국시대 ‘갑비고차(甲比古次)’에서 유래되었다. 고려 때 몽골군이 지금의 강화대교 김포 쪽에서 강화도로 건너고자 하였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했는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널 수 있었을 텐데 ‘라고 한탄했다는 말에서 유래 됐다고 한다.
1866년 프랑스인 성직자 9명을 처형한 책임을 물어 프랑스 함대에 속한 600명의 군사가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했지만, 10월에 정족산성(鼎足山城)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양헌수(梁憲洙)가 이끈 부대에 패해 물러났다. 패한 뒤 약탈한 수많은 문화재를 갖고 돌아갔다. 이로 인해 강화 지방에서는 혹독한 박해가 시작됐고 갑곶성지가 보이는 백사장에서 많은 신자가 순교했다. 1875년(고종 12) 갑곶돈에 갑곶포대가 설치됐다. 이때 갑곶돈대, 망해돈대, 제승돈대, 염주돈대 등 세 포대와 함께 제물진(濟物鎭)의 관할에 속했다.
1876년에 일본의 전권대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가 6척의 함선을 이끌고 와 이곳으로 상륙한 뒤 운요호 사건의 책임을 물어 강압적으로 강화도 연무당(鍊武堂)에서 조선의 접견대관 신헌(申櫶)과 강화도 조약(한일수호조규, 병자수호조약)을 맺었다. 그 뒤 갑곶돈은 허물어져 일부만 남았던 것을 1976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갑곶진에서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직선거리 약 4km 지점에 월곶돈대(月串墩臺)가 위치한다. 강화 5진 7보 중 하나로 남쪽으로는 강화해협인 염하와 연결된다. 북쪽으로는 한강과 임진강의 하구인 조강이 서로 만나는 지점 중 강화도 쪽 돌출부인 월곶에 자리한다. 이 월곶돈대는 서해에서 한강, 임진강 두 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조선시대 해상 교통로의 요충지에 해당하는 곳으로 매우 번성한 포구였다.
이 돈대는 숙종 15년(1679) 당시 강화유수 윤이제가 정비한 돈대로 전체적인 모양은 타원형으로 둘레가 148m에 이른다. 돈대의 동서양방향의 폭은 약 47m, 남북방향의 폭은 약 38m이다. 해안 방향으로 3구의 포좌가 있으며, 문루인 해조루까지 성벽으로 연결되어 강화 외성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돈대의 출입문은 홍예식이며 지대석 위에 홍예기석 1단을 놓고 그 위에 홍예석과 선단석으로 형태를 갖추고 성벽은 사각으로 다듬은 돌로 11단을 쌓고 미석을 두지 않고 총안 1구를 갖춘 여장을 두었다.
돈대 내에는 연미정(인천시 유형문화재)이라는 정자가 있다. 강화해협과 조강의 물결모양이 마치 제비의 꼬리 같다고 해서 제비 ‘연(燕)’, 꼬리 ‘미(尾)’자를 써서 연미정이라 부른다. 팔작지붕의 겹처마로 10개의 장초석 위에 기둥을 얹은 민도리집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벽체는 두지 않았다. 북쪽으로는 개풍군, 동쪽으로는 문수산이 한눈에 들어와 아름다운 경치를 내려다볼 수 있다.
연미정은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 때 후금과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체결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후 조선은 오랑캐라 여겨온 청나라를 형제처럼 대우해야 하는 굴레를 지게 된다.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제23대 왕 고종이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면학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중종(1510)이 삼포왜란 때 큰 공을 세운 병마절도사와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황형(黃衡) 장군(1459~1520)에게 이 정자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그 후 황형 장군의 후손들이 대대로 연미정 지역에 터를 잡고 살아왔고 최근까지만 해도 황 씨 집안 소유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연미정 옆에는 원래 수량 500년이 넘은 2그루의 느티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2019년 9월 태풍 링링의 영향으로 북쪽 느티나무가 부러졌는데, 느티나무 뿌리와 줄기 자체는 살아있어서 현재 새싹이 다시 나고 있다.
강화도 동쪽 해안을 따라 쌓았던 50여 리가 조금 넘는 외성에는 출입문이 여섯 개 있는데 그 첫 번째 문의 누각이 이 조해루(朝海樓)다. 조해루는 숙종 5년(1679)에 지어져 강화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검문하는 검문소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복원된 조해루는 월곶돈대와 연결되고 남쪽의 외성과는 연결되지 않았다. 홍예식 성문을 만들고 그 위에 누각을 지은 전형적인 성문 건축물이다. 성문 밖에서 본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의 겹처마건물이다. 정면 3칸 중 좌우 칸은 중간칸의 1/2이며 좌우 각 칸에는 판벽을 하고 한 개의 판문을 달았고, 중간칸에는 2개의 판문을 달았다. 누각 앞에는 총안을 낸 여장을 두었고 안쪽에는 총안이 없는 여장을 둘렀다.
조해루와 월곶돈대 사이에 장무공황형장군택지비가 세워져 있어 향년 62세로 청수를 다하자 부음에 접하신 중종왕께서 크게 슬퍼하시면서 시호를 정무로 추증하고 연미정 3만여 평 전역을 하사했다는 내역이 기록돼 있는 비(碑)이다.
강화도 돈대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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