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父子 청백리,완전독립 요구한 여운형 |
김진우의 족보이야기 - (31) 함양 여씨 (咸陽呂氏) |
뿌리공원에 조성된 함양여씨 조형물.전면/대전 중구 |
번영(繁榮)의 상(像)
남 철 (충남대학교 예술대 교수)
양쪽의 날개와 같은 하늘을 향한 대칭구조는 무한한 공간을 향한 영원(永遠)한 미래의 번영(繁榮)을 상징하는 인체의 추상체이다. 중심구의 원구(圓球)는 꿈과 희망(希望)이 응집된 표상이며 변함없는 응집된 충절의 핵을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포근히 감싸는 외곽의 메스(mass)는 한국 고유의 원만하고 은은한 곡선을 형성하면서 따스한 사랑과 효심(孝心)을 상징하며 단합(團合)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뿌리공원에 조성된 함양여씨 조형물.후면/대전 중구 |
<뿌리공원에 새겨진 함양여씨 유래>
함양여씨(咸陽呂氏)는 신라말기부터 고려조를 거쳐 근세 조선500년간 우리 민족과 나라를 아끼고 사랑해온 민족 구성원의 명문족의 하나로써 그 시조 휘(諱) 어매(御梅)께서 단기 3210년경 중국 당나라의 황소난을 피하여 래동(來東)하시어 함양을 세거지(世居地)로 삼으시고 창성(創姓)하신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시조이신 전서공(典書公)의 제단은 경남 함양군 휴천면 호산리에 봉안되어 있으며 2세조 휘(諱) 임청(林淸)은 고려진국대장군(高麗鎭國大將軍)으로 북방수호에 헌신하였으니 그 묘소(墓所) 또한 시조제단하에 모셔져 있고 5세조 휘(諱) 위황(渭璜) 고려조 금자광록대부 지문하성사판삼사사공(金紫光祿大夫 知門下省事判三司事公)의 묘단(墓壇)은 전북 김제군 용지면 장신리에 모셔져 있다. 10세조 휘(諱) 칭(稱) 자(字) 중문(仲文) 호(號) 저곡(樗谷) 시(諡) 정평공(靖平公)은 이씨 조선 개국의 원훈으로 관이 자헌대부 지의정부사(資憲大夫 知議政府事)에 이르렀으며 공(公)의 자손중 문 무과 등제자(登第者)가 280여명으로 국가 정치 국방문화창달에 공헌한바 크다 정평공의 묘는 개성 대정리에 있으며 300여년전 나라에서 하사한 사우(祠宇)를 청주에 모시고 있다. 공(公)의 장남 휘(諱) 계(稽) 관(官) 승의랑(承議郞) 가선대부 호조참판 공(公)은 휘(諱) 종숙(宗肅)을 장남으로 차남 종경(宗敬) 삼남 종주(宗周) 사남 종모(宗貌) 오남 종상(宗商)등 5남을 두어 그 자손이 오늘날 이땅에 살고 있는 함양여씨의 거의 대부분이며 공의 묘는 서울 구로구 고척동 산6번지 서울시립공원내에 배위와 아래위에 모셔져 있으며 서울시 금석문화재 제80호로 지정되어있다. 또한 공(公)은 손자 판서 휘(諱) 자신(自新) 시(諡) 정장공(貞莊公)과 자(子) 절도사 휘(諱) 윤철(允哲) 부자(父子)는 이나라 청백리지의 첫머리에 기록되었으며 공(公)의 6대손 영상(領相) 휘(諱) 순원(順元)을 슬하에 동추(同樞) 여길(與吉) 우윤(右尹) 유길(裕吉) 관찰사 우길(祐吉) 도정(都正) 인길(裀吉) 수사(水使) 지길(祉吉)등 5형제와 군수 이항(爾恒) 참판 이징(爾徵) 부사 이량(爾亮) 현감 이흥(爾興)등의 손자 아래로 영의정 성제(聖齊)외에도 세세년년히 당대의 국가사회에 업적을 남긴 문신 현관과 민족의 위난시대에 국방에 공헌한 무관공신등 문 무 백관에 봉직한 선대와 근세에 있어서 당대 석학으로 학문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던 규형(圭亨) 호(號) 하정(荷亭)관 도승지와 민족자주 독립을 지도해온 운형(運亨) 호(號) 몽양(夢陽)을 비롯한 국가 정치 경제 사회일선에서 활동해온 기라성같은 선대들이 한 시대와 역사를 면면히 이어온 오늘에 이르러 34개소 종족으로 분포되어 국가사회 각처에서 활동하는 종중으로 번성한 자손들이 함양여씨대종회 산하에 결속하여 서울시 구로구 개봉동에 소재한 함양여씨대종회관을 본거로 하여 조상께서 물려주신 계훈 효우(孝友) 돈목(敦睦) 충후(忠厚) 인애(仁愛)의 종훈을 정신적 유산으로 삼고 이를 생활속에 실천하며 조상님들의 위업을 계승하고 각 종중간의 상호연대와 백년지친의 의(誼)를 다져서 인류를 사랑하고 국가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는 종족으로서의 번영을 도모하며 함양여씨대종회를 운영하고 있는 의지를 본 종족 후손들에게 주지시키고자 하는 취지에서 본문을 여기에 기록하는 바이다.
단기4330년 정축(丁丑)7월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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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 작가의 해설>
<조선시대에 과거에 급제한 인물>
여유길(1580년 알성시).여계선(1586년 알성시).여우길(1592년 별시).여이징(1624년 식년시).여위로(1635년 증광시).여이재(1637년 정시).여민제(1649년 정시).여증제(1652년 증광시).여성제(1654년 식년시).여필용(1683년 증광시).여필중(1696년 정시).여위량(1699년 식년시).여필희(1709년 알성시).여광주(1709년 알성시).여광헌(1721년 정시).여계주(1725년 정시).여선응(1736년 정시).여광세(1738년 식년시).여영조(1741년 식년시).여선형(1751년 정시).여선덕(1763년 증광시).여귀주(1763년 증광시).여만영(1771년 정시).여준영(1790년 증광시).여영휘(1792년 식년시).여동식(1795년 춘당대시).여규익(1864년 증광시).여선기(1867년 식년시).여규형(1882년 별시).여인섭(1892년 별시)
<현대인물 및 역대인물 성산여씨 포함>
여임청 여성재 여규형.여운형.여석기(고려대 교수).여수동(전 교수).여경구.여운상.여명구.여영무.여운계(탈렌트).금수청년회 회장 여상은.총무 여건동.이우장학재단 이사장 여우균.종친회 회장 여석동.총무 여상노.여운홍(전 국회의원).여경구(의학박사).여영구(이비인후과 원장).여운환(전 단국대 이사).여원구(서예가).여성구(전 중학교교장).여석구(전 군수).여운택(전 경찰서장).여홍구(교수).여인란(도예가).여운택(전 통일주체 대의원).여운상(변호사).여명구(의학박사).여운봉(방사선과 원장).여영구(서에가).여운건(예비역 육군소장),여인영(교수).여원현(전국불교신도회 전 부회장).여운평(전 교장).여승구(종친회 전 총무).여관구(전 경찰서장).여상원(전 대한상의 회장).여환진(교수).여증동(교수)여정기(교수).여영근(교수).여춘동(전 판사).여상조(전 판사).여상필(전 교수).여록기(전 교수).여일균(전 화수회회장).여동영(변호사).여주환(전 군수).여성수(병원장).여원환(운수회사대표) 등등
○여광유(고려때 낭장)
○여광주(자는 사중.1709년(숙종35)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교리.장령을 지냄)
○여광헌(자는 사장, 1721년(경종 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에 여러 내외직을 거쳐
사간원 대사간(大司諫)등을 지내고 기로소에 들어감)
○여만영(자는 경뢰, 1771년(영조48) 생원으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예문관검열이 되고
대교를 거쳐 병조 정랑·병조 좌랑·사간원 정언·사헌부 집의·승정원 승지 등을지냄)
○여문망(자는 주경, 1552년(명종 7) 문과에 급제하여 갑산.동래 부사를 거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병마절도사 등을 역임)
○여민제(자는 여효, 1648년(인조26) 생원이 되고, 1649년(인조2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병조 좌랑.사간원 정언.사헌부 집의.재령 군수.강릉.철원 부사 등을 역임)
○여선응(자는 백언, 1739년(영조1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병조.이조좌랑
병조.이조정랑을 거쳐 사간원 정언.사간, 사헌부 지평.집의, 시강원사서.보덕(輔德:세자시강원에서 세자에게 경사와 도의를 가르치던 벼슬.홍문관 직제학이나 응교 등이 겸임함 정3품).장악원정.사복시정 등을 지냈으며 춘천.강진 현감때는 나가 선정을 베풀고 한성부 좌윤(종2품).승정원 도승지(정3품).부총관(종2품) 역임)
○여선장(자는 원백, 호는 어은, 1719년(숙종45) 진사로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고 시강원 설서.홍문관 수찬.교리.응교, 이조.병조의 좌랑(정6품 요직으로 전랑이라함),이조.병조정랑(정5품 요직으로 전랑이라 함) 등을 역임하고 승정원 승지(정3품) 지냄)
○여선형(자는 군회, 1751년(영조2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집의, 시강원사서.필선(세자시강원에서 세자를 가르치던 정4품 벼슬).보덕 등을 역임하고 사복시정.후에 병조참지(정3품).공조참의(정3품)를 역임하고 문천군수.경원목사.능주목사(정3품) 등을 지냄)
○여성제(조선의 문신. 시호는 정혜, 자는 희천, 호는 운포, 부사 이량의 아들로
참판 이징에게 입양 1650년(효종 1) 생원이 되고, 1654년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이 해 가을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검열에 등용되었다. 1665년(현종 6) 북평사에
이어 집의.동부승지.호조참의를 역임하고 좌부승지.대사헌(종2품.검찰총장)을 지냈으며 보사공신의 추록을 반대하다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앞서 현종의 국상 때 도감으로서의 공로가 인정되어 숭정대부(崇政大夫:종1품 하(下)의 동반관계)로 판의금부사를 지낸 뒤 좌참찬(左參贊:의정부의 정2품 벼슬)을 거쳐 1684년 병조판서(判書:정2품 장관)가 되고 이어 이조판서를 지낸 후1688년에 우의정(右議政;정1품 정승)에 이르렀다.
이 해 남구만과 함께 동평군 항에 대한 왕의 지나친 총애를 간하다가
경원에 위리안치되었으나 곧 풀려 나와 판돈령부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다시 우의정
이어 영의정에 승진하여 사직, 행판중추부사로 전임함
이 때 남인들이 성혼.이이를 무고하여
문묘에서 출향하려 하자 그 불가함을 진소한 후 앞서 성혼.이이를 문묘에 배향할 때
관계관이었다 해서 스스로 청죄한 후 고향에 갔다가 이 해 상경하여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채택되지 않았음)
○여순원(자는 복초, 호는 신고재, 1595년(선조28) 사재감 참봉이 되고, 광릉 참봉을 거쳐
선공감역·주부를 지냈다. 후에 전생서 주부·종친부 전적·사직서령·사도시첨정 등을 역임하였다.
1614년(광해군 6) 첨지중추부사에 오르고 기로소에 들어가
대광보국숭록대부(정1품 품계)로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됨).
○여여충(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 통영.한산도 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우고 순절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그의 충성을 상소하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추증)
○여영원(조선의 무신으로 시호는 양장, 인조 때 무과에 급제 훈련원 첨정을 지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후금이 쳐들어오자 대신들의 천거로 요충인 벽동 수비의 책임을 맡고
현지에 나가 고군분투하다가 정세가 불리해지자 자결했다.1796년(정조20) 병조판서에 추증)
○여영조(자는 술보, 1741년(영조17) 식년문과 을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을 거쳐 군수지냄)
○여영학(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판관으로서 역전하다가 순절하여 정려가 세워짐)
○여온(고려 때 감무를 지냄)
○여우(자는 도행, 1392년 조선개국 때 태조 이성계를 도와 개국원종공신에 책록되고
호조전서.검교 한성윤을 역임)
○여우길(조선의 문신. 자는 상부, 호는 치계. 첨지중추부사 여순원의 아들이며
성혼의 문인으로 1591년(선조24)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전적으로 사신이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평안도도사.충청도 병마절도사.밀양 부사를 역임했다. 1607년(선조40) 회답 겸 쇄환사로
일본에 1614년(광해군 6) 진위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618년(광해군10) 공홍도관찰사(公洪道觀察使:종2품 감사.공흥도는 충청도)지냄.
○여위로(자는 군보, 1635년(인조1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내섬시(內贍寺:2품이상에게 주던 술과 안주 등 음식물을 맡아보던 관청) 봉사(정8품 벼슬)가 되고
성균관 전적.병조좌랑.비인현감.호조좌랑.예조좌랑(정6품)을 거쳐
경상도 도사.춘추관 기주관을 지냄)
○여유길(조선의 문신. 자는 덕부, 호는 춘강, 첨지중추부사 순원의 아들
성혼의 문인으로 1580년(선조13)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 호조 정랑 등을 거쳐
1593년 헌납이 되고, 1599년 공주 목사, 1601년 장령, 이듬해 사예를 거쳐
양주 목사를 역임하였다. 1604년 군기시정으로 춘추관 편수관,임진왜란 때 소실된
실록의 재간에 참여하였고 1606년 첨지중추부사, 1607년 사옹원정·봉상시정을 역임했다.
이듬해 선조가 죽자 국장도감도청이 되고 1610년(광해군 2)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한성부 우윤.1612년 부총관이 되었다. 병조 참판에 이르러 노부모를 위해..
남양 부사를 자청, 1618년 병으로 사직했다. 산수를 잘 했음)
○여윤철(조선 때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내외직을 거쳐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여이제(조선의 문신. 시호는 숙헌, 자는 자후, 호는 해옹, 총관 인길의 아들
○여이징(조선의 문신. 자는 자구, 호는 동강, 한성부우윤 여유길의 아들. 1636년 경기도 관찰사.한성부 좌윤(종2품).예조참판을 지내고 1641년(인조19) 함경도 관찰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뒤에 부빈객으로 기용되고 대사성.대사헌.강화부 유수(2품 벼슬)부제학(홍문관 정3품).도승지(왕의 비서실장.3품벼슬).공조참판을 역임했다.성리학에 밝았고 시문에 뛰어남) ○여자신(조선의 무신,무과에 급제하고 1479년(성종10)에 병조참판에 이어 경기도.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1499년 지중추부사(정2품)가 되어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여자장(고려때 평장사(정2품)지냄).○여정방(자는 언우,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파천할 때 수문장으로 호종하여 호성공신 3등에 서훈,함원군에 봉해지고 평안도 절도사를 역임) ○여필선(1728년(영조 4) 이인좌 등이 난을 일으키자 도순무사의 막부록으로 출정하여 ○여필용(자는 휴경, 1783년(숙종 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가 되고 ○여호(1460년(세조 6) 진사로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장령,사간원 정언 등을 지내고
그가 병환으로 누웠을 때 왕이 소식을 듣고 의원과 약을 내렸으나 세상을 떴다.
영변판관(判官:종5품벼슬)으로 있을 때 모든 정사를 청렴결백하게 처리하여 고을 백성들이 청백비를 세움)
장현광의 문인으로 1619년(광해군11) 사마시에 합격, 1637년(인조15) 건원릉 참봉이 되고
이 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조.병조의 좌랑과 정언을 역임
1644년 심기원이 모반하자 구인후를 도와 이를 토평하여 영국공신 3등이 되고 지평에 승진했다가
사직했다. 그후 오위장.병조참지(정3품)를 거쳐 1646년 형방승지로 유 탁을 친국(심문)할 때
왕을 보좌한 공으로 호조참판(종2품차관)에 승진, 한성부우윤(종2품)을 지낸 뒤 형조판서(정2품 장관)가 되었다.1662년(현종 3) 한성부 판윤으로 동지사(冬至使;동짓달에 중국에 보내던 사신)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옴)
한백겸의 문인으로 1610년(광해군 2) 생원이 되고, 1616년 경안도 찰방(종6품벼슬)에 임명되었으나 폐모론이 일어나자 양강에 은거했다. 인조반정(1623)후에 사포서 별좌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1624년(인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1626년 문과 중시(重試:이미 급제한 사람에게 거듭보이던 과거로 합격하면 당상관을 줌)에 병과로 각각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고 전적을 거쳐 병조.예조의 참판을 역임했다.
이듬해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내고 연산군 때 도총관.전라도와 함경도의 관찰사.
이조참판 등을 거쳐 중종 때 병조판서에 올랐으며 아들 여윤철과 함께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공을 세워 공신에 녹훈되고, 현감.군수를 지냈다.공조참판에 추증)
병조좌랑.사간원 정언.사헌부 지평.집의를 거쳐 승정원 도승지.병조참의.예조참의.
공조참의.호조참의.예조참판·병조참판을 역임하고 강원도 감사(관찰사).
후에 승정원 승지.한성부 좌윤.우윤, 예조.호조참판.돈령부지사 등을 지내고
기로소에 들어갔음).○여필희(자는 수경, 1685년(숙종11)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시강원 설서.지제교 등을 역임하고 암행어사.경기도 도사를 지냄)
승문원 교리.지평이 되었다. 그후 군기시 판관.군자감 첨정을 거쳐 황해도 도사.자산 군수.
안악 군수를 역임)
○여희재(자는 여로, 호는 동은 1652년(효종 3)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고 후에 직강을 거쳐 예조좌랑.병조좌랑.사간원 정언.사헌부 지평.
장령.장악원정을 역임하였으며 황해도 도사.경성 판관을 지냈음 호조참판에 추증)
○여운형(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몽양,여정현의 아들.경기도 양평 출신.
배재학당.흥화학교 중퇴 우무학당 졸업,1909년 광동학교를 세워 청년들을 교육했고
이듬해 기독교에 입교한 뒤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가 중퇴
1914년 중국에 건너가 남경 금릉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다가 중단했다.
협화서국에 근무하면서 교민단 단장에 선임되고
1918년 파리에서 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의 독립을 청원할 대표를 파견하기
위해 신한청년당을 조직, 총무간사에 선임되어 김규식을 파견했고
이듬해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다(하단 인물탐구 참조)
집성촌
충북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경북 금릉군 귀성면 금평동 등
함양여씨(咸陽呂氏)
여자신.여윤철 부자(父子) 청백리
임진왜란 후 일본과의 국교를 회복시킨 여우길
독립운동가 여운형
우리나라 여씨(呂氏)는 문헌에 30여 본이 전하나 대부분 함양여씨와 성산여씨의 세거지명 이라고 한다.
함양여씨(咸陽呂氏)는 서기 877년(신라 헌강왕 3)에 '황소(黃巢)의 난'을 피해 신라에 귀화한 여어매(呂御梅)를 시조로 받든다.
시조 여어매는 우리나라에 들어와 함양을 세거지(世居地)로 삼고 창성(創姓)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시조 전서공(典書公:시조는 공조전서 여어매.공조전서는 정3품 장관) 여어매의 제단은 경남 함양군 휴천면 호산리에 봉안되어 있다.
전서공 여어매의 9대손인 여 칭(呂稱)이후 많은 명신(名臣)을 배출하였다.
여 칭(呂稱)은 고려 말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조선 태조 때 도총제(都摠制:오위도총부의 벼슬)와 형조판서(刑曹判書:정2품벼슬.법무부 장관)를 역임하였으며 청빈하기로 유명했다.
여 칭(呂稱:1351~1423.시호 정평)은 함양여씨로 자는 중부(仲父). 호는 화곡(樗谷).시호는 정평(靖平)이다.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규정(糾正:비위를 밝히고 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종6품 벼슬).전라도안렴사(按廉使:지방장관).전법총랑(典法摠郞.6사의 하나인 전법사의 정4품 차관).나주(羅州)목사(牧使:정3품) 등을 역임하였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경상.전라도 조전부사(漕轉副使:조전은 조운이라고도하며 국가에 수납하는 대동미.전세를 중앙으로 운송하던 것을 말함.운송 단계별로 책임자가 다름)가 되고 이어 판합문사(判閤門事:조회나 의례 맡아본 관청의 벼슬).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의정부참지사(議政府參知事:참지사는 도평의사사가 바뀐 최고행정기관인 의정부의 벼슬로 삼공과 함께 백관을 통솔하고 도의를 논했으나, 태종때 혁파됨)가 되었다.
1402년(태종 2) 태상왕(太上王)이 북행(北行)할 때 동북면도순문사(都巡問使:원수를 고친이름)로 배종(陪從:지체높은 사람을 모심)하였고, 1404년 사은사(謝恩使:중국이 호의를 베풀었을때 가던 사신)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서북면도순문사 겸 병마도절제사(節制使:병마절도사의 예전이름으로 정3품 벼슬).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중군은 군영의 대장으로 사(使) 다음의 벼슬이며 군사를 통할하던 관청).개성유수(2품 벼슬)를 역임하였다.
1412년 형조판서(判書:정2품 법무부장관) 에 오르고 이듬해 흠문기거부사(欽問起居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치사(致仕;벼슬을 사양함)하고 은거하였다. 여기서 흠문기거(欽問起居)부사는 황제의 기거(起居)를 흠문하기 위해 보내던 사신을 말하며 주로 황제가 궁전을 떠나 외지에 있을때 차견하기위해 가던 사신의 두번째 서열이다.
< 전 좌군 도총제 여칭의 졸기>
세종(기유년)
전 좌군도총제(前左軍都摠制) 여칭(呂稱)이 돌아갔다. 여칭의 자(字)는 중부(中父)이니, 그의 본관은 경상도 함양(咸陽)이다.
고려 왕조에 벼슬하여 사헌 규정(司憲糾正)에 임명되고 전라도 안렴사(按廉使).전법.전리총랑(典法典理摠郞)을 역임하고 외관직으로 공주(公州).나주(羅州) 두 주(州)의 목사(牧使)가 되었다. 우리 왕조 때에 와서 양광도(楊廣道).경상도.전라도의 조전부사(漕轉副使)가 되고, 여러 번 천직(遷職)되어 판각문사(判閣門事)와 여러 조(曹)의 전서(典書:정3품 장관)가 되고, 승추부 우군 동지총제(承樞府右軍同知摠制)와 강원도 도관찰사를 지냈으며,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에 이르렀다.
임오년에 태조가 북방으로 행차할 때에 동북면 도순문 찰리사(東北面都巡問察理使)가 되었는데 태종은 그가 위태한 시기에 임하여 정도(正道)를 지켰다 하여 전지(田地)와 노비(奴婢)를 주었다.
서북면 도순문 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로 옮겨져서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개성 유후(開城留後).형조판서.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겸하였다. 계사년에 사신이 되어 연경(燕京)에 가서 황제의 안부를 묻고 돌아왔다.
한가로이 있은 지 10년 만에 이때에 와서 돌아가니 연세가 73세이다. 부고(訃告)가 위에 들리니 조회를 3일 동안 폐하였고, 정평(靖平)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너그럽고 즐거이하여 고종명(考終命)한 것을 정(靖)이라 하고, 다스림에 과오(過誤)가 없는 것을 평(平)이라 한다. 칭은 나라를 위함에 부지런하고 근신하여 세미(細微)한 일까지도 정세(精細) 치밀(緻密)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아들은 둘이니 여 계(呂稽)와 여 뇌(呂賚)이었다.
<도총제 여 칭의 사제문>
세종(갑술년)
작고한 도총제(都摠制) 여 칭(呂稱)에게 사제(賜祭)하였는데 그 제문에 이르기를 "국가의 조종(祖宗)으로부터 내려오면서 무릇 신하들이 작고하면, 상제(喪祭)를 반드시 그의 작위와 훈벌의 등급에 따라 품절(品節)하는 것이 모두 옛법에 근본한 것이다.
경은 단정하고 바르며, 강직한 자품으로 이치(吏治)에 장점이 있으면서 학문까지 겸비하였다. 네 고을의 수령으로 백성들이 사모하고, 다섯 도(道)의 감사(監司:관찰사)가 되어 간사한 무리가 없어졌다.
임오년에 북방을 순문(巡問)하였을 때 마침 어렵고 위태로운 일이 있었는데, 경이 마음껏 의(義)에 따라 미리 방비하여 안녕(安寧)을 도모하였다. 태종께서 더욱 가상히 여기셨다. 그 뒤에 송도유수(松都留守:2품 벼슬)가 되어 여러 군대를 모두 거느렸으며, 혹은 판형조(判刑曹)로 혹은 지의정(知議政)이 되었으니, 모두 높은 품질(品秩)이다.
이리하여 경은 위엄스러우면서도 은덕이 있는 상(相)이 나타났고 번잡한 일은 덜어서 없게 하였으며, 요령을 따지는 재주를 갖추어서 평탄할 때나 험난할 때를 가릴 것이 없이 큰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니 경은 이같은 지위를 얻은 것이나, 이러한 이름을 받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난번에는 늙었다 하여 집에서 휴양한 적도 몇 해나 되었으나, 아직 기력이 그다지 쇠하지 않았으므로 오히려 나의 미치지 못하는 일을 도와주기를 바랐더니, 하늘이 어찌 돌보지 아니하여 나의 구인(舊人)을 빼앗아 갔는고? 이 향기롭지 못한 박전(薄奠)이나마 그대로 가시지 아니한 정혼(貞魂)을 위로할 수가 있을는지"하였다.
함양여씨묘역(咸陽呂氏墓域: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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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함양여씨 묘역이 중요한 이유는 숭의랑공이 중요한 인물이기이도 하지만 묘역이 조선 전기 묘제를 알 수 있는 분묘 양식으로 큰 가치가 있다고 한다.
여 계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 병조판서를 지낸 여 칭(呂稱,1351~1423)의 아들이며, 태종 때에 호조좌랑ㆍ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세종 3년(1421)에 세상을 떠났으며, 세종 10년(1428)에 이곳에 묘소를 마련하였다. 부인은 청송심씨로 당시 정승을 지낸 심백덕의 손녀이며, 판사를 지낸 심의구의 딸이다. |
여 칭의 증손 여자신(呂自信)은 성종과 중종대에 걸쳐 이름난 무신(武臣)으로 병조판서(兵曹判書:정2품 벼슬.국방부장관)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여자신(呂自新)의 시호는 정장(貞莊)이며 본관은 함양이다.
무과(武科: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급제하여 1479년(성종10년)에 병조참판(參判:종2품 차관)이 되었으며 이어 경기도.강원도의 관찰사(觀察使:종2품.감사)를 역임하였다
1499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정2품 무관 벼슬)가 되어 성절사(聖節使:황제의 생일 축하사신)로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이듬해 평안도 병마절도사(節度使:각도의 병마를 지휘하던 벼슬)를 거쳐 연산군때 도총관(都摠官:오위의 정2품으뜸 벼슬)이 되었다.
전라도와 함경도의 관찰사(觀察使:종2품 감사)와 이조참판(參判:종2품 차관)을 지냈으며 중종때 병조판서(判書:정2품 국방부장관)에 이르렀고 아들인 여윤철과 함께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여자신의 아들인 여윤철(呂允哲)은 조선 중기의 무관으로 청백리 여자신의 아들이다.여러 내외직을 거쳐 평안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병마를 지휘하던 2품 벼슬)로 있으면서 북쪽 변방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수호하였으며 모든 정사를 청렴결백하게 처리하여 고을 백성들이 청백비를 세웠다.
전라 좌수사때 해상방어를 지휘하다 왜구의 탄에 맞게되자 왕이 소식을 듣고 의원과 약을 하사하였으나 세상을 뜨고말았다.
함양여씨는 여 칭의 8대 손인 여우길(呂祐吉).여유길(呂裕吉)의 대(代)를 고비로 선조.숙종대에 걸쳐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여우길은 선조 때 문과(文科:대과.문관을 뽑아쓰기위한 과거)에 급제하고,여러 벼슬을 거쳐 광해군때 관찰사(觀察使:종2품벼슬.감사)에 이르렀으며,특히 대명(對明)외교에 큰 공헌을 하였다.그는 임진왜란 뒤에는 일본에 건너가 중단된 국교를 회복시켰다고 한다.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여운형(呂運亨)은 여우길의 11대손이다.
여유길은 선조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조선시대에 왕이 성균관에서 알성한 뒤에 보이던 과거)에 급제하고, 광해군 때 병조참판(兵曹參判:종2품 벼슬)에 이르렀다.
여유길의 아들 여이징(呂爾徵)은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도승지(都承旨:승정원의 정3품 당상관벼슬로 왕의 비서실장).부제학(副提學:홍문관에 둔 정3품 당상관 벼슬)을 거쳐 대사헌(大司헌:사헌부의 종2품 으뜸 벼슬로 백관을 규찰하던 현재의 검찰총장)에 올랐다.
그는 성리학에 밝고 천문.역법(曆法).시문(詩文).서화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그의 종제(從弟) 여이재(呂爾載)는 인조 때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였으며 심기원(沈器遠)이 모반했을 때 공을 세워 영국공신(寧國功臣)에 책록되고 형조판서(刑曹判書:정2품 벼슬.현재의 법무부장관)에 이르렀다.
함양여씨의 상신(相臣:정1품벼슬로 우의정.좌의정.영의정을 일컬음.정승) 여성제(呂聖齊)는 소론(少論)의 한 사람으로 의정부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에 이르렀으며 남인(南人)과의 대립으로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왕명을 출납하고 궁중을 숙위하던 중추부의 으뜸 벼슬.1품관)로 전임하였다.
여 씨의 한축인 성산여씨의 시조는 고려시대에 진사(進士:소과와 진사과에 급제한 사람)를 지낸 여양유(呂良裕)이며 성주여씨의 대표적 인물로는 여희림(呂希臨)을 들 수 있다.
그는 중종 때 진사시(進士試:소과와 진사과에 급제한 사람을 진사라 함)에 급제하였으며,여러벼슬을 거쳐 왕자사부(王子師傅:왕자를 가르치던 벼슬)가 되었는데 당대의 학자로서 명성이 높았다.
<성산여씨의 근원>
東國呂氏始祖 翰林學士 新羅典書 府君家狀 동국여씨(東國呂氏)는 중국여씨(中國呂氏)의 상대말로 사용된 것으로 한국여씨가 된다. 동국여씨 시조(始祖)라는 말은 한국에 살고 있는 여씨의 시조가 같다는 뜻이고,한림(翰林)은 당나라 벼슬 전서(典書)는 고대 한국의 벼슬로 전서는 고려때는 상서(尙書)로, 고려말에는 판도판서(版圖判書)였으며,조선시대는 판서(判書)로 바뀌게 된다. 동국여씨(東國呂氏,한국의 여씨)에는 성산파(星山派,성산여씨)가 있고 함양파(咸陽派,함양여씨)가 있다.
(동국여씨시조 한림학사 신라전서 부군가장)
이들 양 파(派)의 시조는 여어매(呂禦梅)다. 부군(府君)이 당나라 한림원 대학사(翰林院 大學士)로 있던 희종(僖宗) 건부(乾符) 4년에 황소의 난(黃巢亂)을 피하여 처자를 거느리고 신라땅 동북으로 건너왔다. 이때가 신라 헌강왕(憲康王)3년 이었다. 성산파(星山派) 세보(世譜)에는 "시조 어매공이 신라말기에 전서(典書)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조 전서부군(典書府君)의 아들과 손자들 이름을 모두 모르게되어 민망하게 살아오던 가운데 고려대장군(高麗大將軍)여임청(呂林淸)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이른바 함양여씨가 되었고,
고려 삼중대광(三重大匡:정1품)에 오른 여양유(呂良裕)로 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이른바 성산여씨(星山呂氏)가 되었다.<성산여씨 참조>
성산여씨(星山呂氏)는 여어매(呂御梅) 이전의 선계(先系)를 문헌의 실전(失傳;묘지나 사적을 알수없게 됨)으로 자세히 알 수 없어, 고려때 삼중대광(三重大匡:정1품 품계)에 오른 여양유(呂良裕)를 시조로 받들며 그의 후손들이 조상들의 정착 세거지인 성산(星山)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여양유의 아들 여위현(呂渭賢)이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호부상서로 고치기전의 정3품 장관)를 지냈으며 문장이 뛰어났던 여극회(呂克誨)가 조선때 공조판서(工曹判書:정2품 장관)를 5세손 여문승(呂文承)이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중종때 학자로 왕자사부(王子師傅:왕자의 스승)를 지냈던 여희림(呂希臨)은 현량과(賢良科)에 합격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성주(星州)에서 정주학(程朱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현량과는 경학(經學)이 밝고 덕행(德行)이 높은 사람을 시험하던 과거로 1519년(중종14)에 조광조(趙光祖)의 건의에 의하여 실시되었다.
선조때 별시문과(別試文科:나라에 경사가 있을때 보던 과거)에 급제하여 군수(郡守:종4품)를 지낸 여대로(呂大老)는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이 밖에 조선말 의병장으로 임실군의 대운치(垈雲峙)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운 여주목(呂株穆)과 북간도에서 이동녕(李東寧).이상설(李相卨)과 함께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세워 후진 교육에 힘쓴 독립운동가 여 준(呂準) 등이 성산여씨(星山呂氏)를 빛냈다.
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였으며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로 봄)에 11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80명 등 모두 124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인구조사에 의하면 함양여씨는
1985년에는 총 6,028가구에 인구는 25,115명이었으며,
2000년에는 총 8,040가구에 인구는 25,667명으로 조사되었다.
본관소재지 함양(咸陽)은 경상남도 함양으로 서기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천령군(天嶺郡)이라 개칭하였고 고려초에는 허주(許州)로 개칭하였으며 983년(성종 2)에 허주도단련사(許州都團練使)로 승격하였다.서기 1395년(태조 4) 함양군으로 되었으며 1729년(영조 5) 함양부(咸陽府)로 승격하였다가 1788년(정조 12) 다시 함양군으로 강등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함양군이었다가 이듬해인1896년에 경상남도 함양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7개 면을 통합해서 함양군으로 합병하였다. 1933년 위성면이 함양면으로 개칭되고 1957년에는 석복면(席卜面)을 함양면에 통합하여 함양읍으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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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 여운형(呂運亨:1886~1947], 호는 몽양(夢陽), 본관은 함양)
여운형(呂運亨:1886~1947,호는 몽양 夢陽)의 본관은 함양이며 아버지는 여정현(呂鼎鉉)으로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꼴(妙谷)에서 출생하였다.
여운형은 1900년 신학문에 뜻을 두고 배재학당에 입학했으나 민영환(閔泳煥)이 세운 흥화학교로 전학하였고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다시 국영 통신원 부설 우무학당(郵務學堂)으로 전학하였다. 1908년 부모를 잃은 그는 미국 선교사 클라크 목사 집에 기거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였고, 1910년 생활의 방편으로 강릉 초당의숙(草堂義塾)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여운형 집터> 표석.서울시 종로구 계동 일반 140-16
그러나 한일합방으로 초당의숙이 폐쇄되자 목사가 되기 위해 평양 장로교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클라크 목사와 서간도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를 견학한 후 자신은 독립군이 되기보다는 독립운동가가 될 것을 결심하고 공부를 더하기 위해 1914년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南京) 진링대학(金陵大學) 영문과에 진학하였다.
1917년 대학 졸업 후 상하이(上海)로 가 1918년 40명의 청년들과 신한청년당을 결성하여 당수가 되고, 신한청년당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대표로 김규식(金奎植)을 파견하여 조선의 완전한 자주 독립을 요구하였다.
또한 1919년 4월 상하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는데 일본정부가 그를 회유하고자 도쿄(東京)로 초청하였으나 오히려 장덕수(張德秀)를 통역관으로 삼아 일본의 조야 인사들에게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1921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遠東) 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여 한국의 사정을 세계에 호소하였고, 1929년 제령(制令)위반죄로 3년간 복역한 후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사장에 취임하였는데 1936년 베를린올림픽대회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신문이 강제 폐간되자 사장직을 사임한 후 1944년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였다.
8·15 해방과 동시에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취임하여 3차에 걸쳐 송진우(宋鎭禹)와 협력을 교섭하였다. 그 해 9월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으나 우익진영의 반대와 미군정의 불인정으로 실패하였다. 12월 조선인민당을 창당 1946년 29개의 좌익단체를 규합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였으나 반대하여 탈퇴하고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였으나 극좌.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던 중 극우파 한지근(韓智根)에 의하여 1947년 7월 19일 혜화동로타리에서 암살되었다.
몽양은 체육인으로도 할약하여 덴마크체조를 보급하고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의 전신) 제11대(1946∼1947) 회장도 지냈다. 지난 2005년 3.1절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현재 우리사회는 친북과 반북, 보수와 진보로 나눠져 있다. 그러나 몽양 여운형은 견해가 다른 사람과도 의논을 해온 인물이다.
몽양 여윤형의 딸 여연구(1927~1996)는 북한의 대표적 여성 정치인으로 유명했고 주로 대남(對南)업무를 맡아 왔다. 여연구는 8·15해방 직후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1946년 아버지를 따라 월북했다.
1979년 대남전위기구인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 서기국 부국장으로 대남(對南)업무를 맡아왔고 1991년 11월에는 북한의 여성대표로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이라는 서울 토론회에 참석했었다.<문헌 참조>
몽양 여운형 묘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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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 |
(2009년 대한민국 성공기업인 선정).
(2009년 올해를 빛낸 '장한한국인상' (문화)수상)
이메일 sewoora@naver.com 블로그.카페 blog.naver.com/sewoora.cafe.naver.com/sallija<한국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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