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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상과 표현 원문보기 글쓴이: 김영원
만해 한용운 시 깊이 읽기(15)
류양선(柳陽善)
프로필:
문학평론가, 전 가톨릭대학교 교수
장편소설: 《이 사람은 누구인가》,편저 《윤동주 시인을 기억하며》,
저서: 《한국농민문학연구》 《한국근현대문학과 시대정신》 《한국현대문학의 탐색》 《순결한 영혼 윤동주》
수상: 다시올 문학상, 김우종문학상 대상
1. 시인의 눈물(2)
「만해 한용운 시 깊이 읽기(14)」에서는, 만해의 시편들에 자주 등장하는 ‘까닭’이라는 말에 착안하여, 만해의 시가 인과율의 논리적 구성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인과율의 논리는 총 4연으로 이루어진 시 「당신을 보았습니다」의 전문(全文)에서, 그리고 각각의 연 안에서 어김없이 나타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 다음, 이 시의 제2연을 그런 논리적 구성에 따라 상세히 읽어보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시의 제2연에 나오는 ‘쏟아지는 눈물’과 관련하여, 만해가 흘린 눈물을 만해 자신의 글을 통해 알아보았습니다. 즉, 「북대륙(北大陸)의 하룻밤」에서 조선 청년들과의 격투 끝에 흘린 눈물, 「평생(平生) 못 잊을 상처(傷處)」에서 소년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흘린 눈물, 그리고 「국보적(國寶的) 한글 경판(經板)의 발견경로(發見經路)」에서 안심사의 한글 경판 정리를 마치고 흘린 눈물이 그것입니다.
또 그와 관련하여, 당시 조선어연구회에서 ‘가갸날(한글날)’을 제정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쓴 시 「가갸날에 대하여」를 읽어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이 시에 기쁨과 슬픔이 한데 어우러진 시인의 눈물이 깊이 배어들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만해가 흘린 눈물은 모두가 조국과 민족 그리고 민족문화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눈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해의 눈물에 대해서는 주위 사람들에 의해 전해지는 몇 가지 경우가 더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김광식 교수가 경봉 스님의 상좌인 명정 스님을 만나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만해는 1913년 5월, 통도사 강원의 강사로 부임하게 되는데, 이때 통도사의 대장경을 열람하고 『불교대전』을 편찬하여 1914년 4월 범어사에서 출판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만해가 통도사에 머물러 있을 때, 경봉은 통도사 부설 명신학교를 졸업하고 비구계를 받은 지 얼마 안 된 젊은 승려였다고 합니다. 만해와 경봉은 이렇게 통도사 강원에서 선생과 제자로 만났는데, 그때의 일을 경봉이 그의 상좌인 명정에게 전했다는 것입니다. 김광식은 명정에게서 들은 만해와 경봉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만해에게 화엄을 배우던 경봉은 만해 회상에서 공부를 할 때, 만해가 수업 시간에 월남(베트남) 망국사를 이야기하면서 우리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월남처럼 될 것이라면서 우시더라는 이야기를 상좌인 명정 스님에게 전하였다고 한다. 최근 필자는 통도사 호국 극락선원장을 맡고 있는 명정 스님을 찾아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만해 스님이 울었을 때 경봉 스님을 포함한 학인들은 같이 울지 않았는가를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명정 스님은 그것은 경봉 스님에게 여쭈어보지 못하였다고 말했다. 다만 명정 스님은 만해와 경봉과의 깊은 관계를 잘 몰랐을 때 만해의 시 <알 수 없어요>를 스님 앞에서 암송했는데, 경봉 스님은 만감이 교차되는 듯 심각한 모습을 띠었었다고 증언하였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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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김광식, 『우리가 만난 한용운』(참글세상, 2010), pp.6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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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는 아마도 구한말 애국 계몽기에 번역된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를 읽었을 것입니다. 구한말 애국 계몽기에는 『월남망국사』 외에도 많은 역사서(歷史書)와 전기물(傳記物)이 역술(譯述)되어 나옵니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전국 도처에서 의병 전쟁이 일어나는 한편, 계몽과 교육을 통해 동포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당시에 역술된 책들은 다른 나라의 경우를 거울삼아 동포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켜 국권을 지키려는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발간된 것입니다.
같은 시기에 나온 『서사건국지(瑞士建國誌)』(박은식 역술), 『애국부인전(愛國婦人傳)』(장지연 역술), 『이태리 건국 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신채호 역술) 등이 모두 그런 책들입니다. 『서사건국지(瑞士建國誌)』는 스위스의 독립투쟁에 앞장섰던 빌헬름 텔의 일대기를 담은 것이고, 『애국부인전(愛國婦人傳)』은 백년전쟁 당시 영국에 대항해 싸운 프랑스 잔다르크의 구국 항쟁을 다룬 것이며, 『이태리 건국 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은 이탈리아의 민족국가 수립과정에서 활약한 마치니 ‧ 카보우르 ‧ 가리발디의 영웅적 일생을 그린 것이지요. 이태리 건국 삼걸 중의 한 사람인 마치니는 만해의 시집 『님의 침묵』의 서문인 「군말」에서, “장미화(薔薇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치니의 님은 이태리(伊太利)다.” 하는 대목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이렇게 역술된 책들과 함께,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나오는 위인들, 특히 외적의 침략을 물리친 구국영웅들의 전기물도 써집니다. 신채호의 『을지문덕(乙支文德)』(1908), 『이순신전(李舜臣傳』(1908), 『최도통전(崔都統傳)』(1909~1910), 박은식의 『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1911), 우기선의 『강감찬전(姜邯贊傳)』(1908) 등이 그런 책들이지요. 이 중 신채호의 『최도통전(崔都統傳)』은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된 것이고, 박은식의 『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은 서간도에 망명해서 쓴 것입니다. 이 전기물들 역시 우리 민족의 역사에 등장하는 구국영웅들을 본받아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켜내야 한다는, 그런 강렬한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목적으로 써진 것들이지요.
만해는 아마도 이런 책들을 많이 읽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쉬지위(徐繼畬)의 『영환지략(瀛環志略)』, 량치차오(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 등 중국에서 나온 책들도 찾아 읽었을 것입니다. 쉬지위(徐繼畬)의 『영환지략(瀛環志略)』은 세계지리를 담고 있는 책으로, 만해는 이 책을 읽고 “비로소 조선 이외에도 넓은 천지가 있는 것을 인식하고, 행장을 수습하여 원산을 거쳐서 시베리아에” 2) 이르기까지 했었던 것입니다. 또 량치차오(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읽으면서는 서양의 사상과 철학에 대해 알게 되었던 것이지요. 실제로 만해의 글을 읽어보면, 불교만이 아니라 유교와 노장사상 등의 동양 정신에 조예가 깊었던 것은 물론, 여기에 더해 서양의 철학과 종교 그리고 당시의 세계정세에도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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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용운, 「시베리아 거쳐 서울로」, 『한용운 전집 1』,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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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인용한 경봉에 대한 명정의 회고와 관련된 『월남망국사』는 월남의 망명객 소남자(巢南子)와 량치차오(梁啓超)의 대화를 기록한 책으로, 1906년 현채(玄采) 역과 1907년 주시경(周時經) 역, 그리고 역시 1907년 이상익(李相益) 역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 중 현채가 번역한 『越南亡國史』의 목차를 보면, (1) 월남망국원인급사실(越南亡國原因及事實) (2) 국망지사소전(國亡志士小傳), (3) 법인(法人)이 월남인(越南人)을 곤약우고(困弱愚瞽) 정상(情狀), (4) 월남(越南)의 장래(將來)로 되어 있고, 주시경이 번역한 『월남망국』의 목차를 보면, (1) 월남이 망 근본과 실샹, (2) 나라망 때 분여 애쓰던 사람들의 젹, (3) 법국 람이 월남 람을 곤고 약게 며 무식고 어리석게 는 졍샹, (4) 월남의 장래로 되어 있습니다. 3)
만해는 바로 이 『월남망국사』를 읽고, 통도사 강원의 수업 시간에 베트남이 프랑스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가 된 이야기, 그 이후에 베트남 국민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분투하는 애국지사들의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월남처럼 될 것이라면서” 울었다는 것이지요. 실로 우리 조국과 동포들을 생각하며 흘린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위의 인용에서 보듯 김광식은 명정에게, “만해 스님이 울었을 때 경봉 스님을 포함한 학인들은 같이 울지 않았는가를 물어 보았”지만, 명정은 “그것은 경봉 스님에게 여쭈어 보지 못하였다고 말했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가르치는 선생이 우는데 배우는 제자들이 울지 않았을 리가 없었겠지요. “만해의 시 <알 수 없어요>를 스님 앞에서 암송했는데, 경봉 스님은 만감이 교차되는 듯 심각한 모습을 띠었었다”라고 하니, 훗날의 그런 경봉의 모습이 만해에게 화엄경을 배우던 당시의 정황을 잘 말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해의 눈물에 대해서는 또, 조지훈이 다른 이들에게 듣고 전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지훈은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 한용운(韓龍雲)」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선생은 술을 즐기셨다. 취후(醉後)에 비분강개가 심하므로 지기지우(知己之友)들이 술을 조금 들라고 말리면, 한 잔만 더 하겠다고 술을 따르면서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돌아보시더라는 얘기도 있다. 선생은 다정다한(多情多恨)의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4)
조지훈이 전하는 이 일화(逸話)는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시 「당신을 보았습니다 와 관련해 볼 때에도, 이 시의 마지막 행이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하는 말로 끝나지 않습니까?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만해의 심정, 그리하여 눈물 어린 술을 마시는 만해의 비감 어린 심정이 자못 심각하게 느껴집니다. “취후(醉後)에 비분강개가 심”한 것도 그런 심정의 발로일 것입니다. 현진건의 소설 제목처럼, 일제강점기는 그야말로 ‘술 권하는 사회’였던 것이지요.
『한용운 전집』에는 ‘한용운을 말한다’는 큰 제목 아래 각계 인사의 글이 부록으로 실려 있는데, 그중 첫 번째로 조지훈의 이 글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 한용운(韓龍雲)」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조지훈의 이 글은 그 제목만 바뀌었을 뿐, 필자가 이미 여러 번 언급한 그의 「한용운 론」과 같은 글입니다. 그런데 『한용운 전집』에 수록된 글에는 위의 인용 부분이 들어 있지만, 『조지훈 전집』에 수록된 글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부분만 쏙 빠져 있습니다. 1773년에 초판이 나온 일지사 판 『조지훈 전집』에서도, 1996년에 초판이 나온 나남 판 『조지훈 전집』에서도 이 대목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필자는 위의 인용 부분이 시 「당신을 보았습니다」의 끝부분에 나오는 “술을 마실까” 하는 구절의 의미와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에 “술을 마실까” 하는 말이 왜 들어가 있는지, 그런 말이 들어가 있는 이유를 심정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요. 즉 당시의 시대상황과 관련하여, 위에 인용된 부분과 함께 이 시를 읽으면서, 만해가 무엇 때문에 술을 마셨는지, 술을 마실 때의 만해의 심정은 어떠했는지, 그 아프고 슬픈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잔만 더 하겠다고 술을 따르면서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돌아보”던, 이루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운 만해의 비감 어린 마음에 깊이 공감할 수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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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에 대해서는 김병철, 『한국근대번역문학사연구(韓國近代飜譯文學史硏究)』(을유문화사, 1975), 215~217에 의거하였음.
4) 조지훈,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 한용운(韓龍雲)」, 『사조』(1958. 10),『한용운 전집 4』,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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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만해의 방성대곡(放聲大哭)을 전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던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선생이 1937년 3월 별세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할 때, 만해는 김동삼 선생의 유해를 인수하여 당시 만해가 거주하던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의 자신의 방에 모셔놓고 오일장(五日葬)을 지냈습니다.
1878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한 김동삼 선생은 고향 마을에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는 한편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와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에 가입하여 활동합니다. 그러던 중 1910년 나라가 망하자 1911년 1월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남만주)의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도착하여, 서울에서 출발해 압록강을 건너온 이회영(李會榮) 등과 함께 경학사(耕學社)의 결성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설립에 참여합니다. 김동삼은 그 뒤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31년 북만주 하얼빈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 ⸱ 압송되어 복역하던 중 1937년 순국하게 된 것이지요.
나라를 빼앗긴 지 얼마 안 되어 만해는 만주를 방문하는데, 이때 여러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책을 논의했을 것입니다. 이선이 교수가 작성한 만해 연보에 따르면, 만해는 1912년 가을에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가인 이회영, 김동삼, 이시영, 이동녕 등을 만나고 귀국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만해의 글 「죽다가 살아난 이야기」에는 그가 만주에 갔던 시기를 “아마 1911년 가을인가 보다.” 5) 하고 회고하고 있고, 이에 따라 『한용운 전집』의 연보에도 만주 방문 시기가 1911년 8월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선이는 「한화상(韓和尙)의 피상(被傷)」이라는 제목의 『매일신보』(1913. 1. 7) 기사를 들어, 만해가 만주에 갔던 시기를 1912년 음력 8월경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6) ‘죽다가 살아난 이야기’라는 글 제목에서 암시되듯, 만해가 “만주산간(滿洲山間)에서 청년(靑年)의 권총(拳銃)에 맞아” 7)사경을 헤매다가 관세음보살을 뵙고 살아났다는 것이 바로 이때의 일입니다.
만주에서 귀국한 이후에도, 만해는 중국에 망명해 있는 독립운동가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겠습니다. 하여간 만해는 서대문형무소에서 김동삼의 유해를 인수하여 장례를 치렀는데, 그 장례 절차의 마지막인 미아리 화장터의 영결식에서 방성대곡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일을 김관호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홍제동 화장터는 일본인 경영이므로 미아리의 조그만 한국인 경영의 화장터에서 장례를 치렀다. 영결식에서 선생은 방성대곡(放聲大哭)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우리 민족 지도자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위인인 일송 선생의 영결은 민족의 대불행이라, 2천 3백만 겨레를 잃는 것처럼 애석한 일이다. 국내 해외를 통하여 이런 인물이 없다. 유사지추(有事之秋 : 독립의 뜻)를 당하여 나라를 수습할 인물이 다시없어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니 비통하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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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용운, 「죽다가 살아난 이야기」, 『한용운전집 1』, p.251.
6) 이선이, 『근대 문화지형과 만해 한용운』(소명출판, 2020), p.386.
7) 한용운, 「죽다가 살아난 이야기」, 위와 같음.
8) 김관호 편, 「만해(萬海)가 남긴 일화(逸話)」 중 <방성대곡(放聲大哭)>, 『한용운전집 6』,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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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만해는 조국이 독립될 것을 미리 내다보고 일송 김동삼 선생의 죽음을 더욱 슬퍼하며 ‘방성대곡(放聲大哭)’을 했던 것입니다. 해방 뒤 나라를 수습할 수 있는 인물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지요. 만해는 이때 이미, 해방공간의 극심한 혼란을 예상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오죽하면 일송 선생과의 영결(永訣)을 “2천3백만 겨레를 잃는 것처럼 애석한 일”이라고 했겠습니까?
일송만이 아니라 만해 자신도 해방되기 1년여 전에 입적하였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단 만해나 일송뿐이겠습니까? 만해나 일송이,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애국지사들이 살아서 해방을 맞이했다면, 해방기의 혼란을 잘 수습하고 통일된 독립 조국을 건설했을는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2. 만해(萬海)와 설산(雪山)
만해의 눈물에 대해서는 또, 1908년 만해가 일본에 갔을 때 오사카(大阪)에서 통곡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설산(雪山) 스님이 전하는 것인데, 여기에 ‘만해(萬海)와 설산(雪山)’이라 하여 따로 항목을 설정하여 서술하는 것은 만해와 설산과의 인연, 그리고 만해와 건봉사와의 인연, 그리고 당시 청년들에 대한 만해의 영향력 등을 함께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잘 알려지지 않았던 만해의 여러 가지 면모를 아울러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설산은 그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 날은 만일회에서 산중 대중이 함께 공양하는 큰 제삿날이기도 하다. 염불만일회를 성취 회향한 만화(萬化) 노스님의 제삿날이기 때문이다.
경성의 만해 스님도 일부러 오셨다. 구월이라 좀 추웠지만 누마루에서 만발공양이 베풀어졌다. 이백 명 대중이 한 자리에서 음식 씹는 소리, 숟가락 소리를 내지 않고 진행되는 이 여법한 절차는 평소에 닦은 수행력이 아니면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다.
다음날이었다. 교무이신 박종운 스님의 주선으로 만해 스님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낙서암 강당은 학생과 젊은 분들로 발 들여놓을 틈 없이 꽉 찼다.
한 번은 만해 선사가 왜국 대판에서 연설하신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 한 재일동포가 조선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단다.
“여러분! 나라 잃은 내 동포를 만리타국에서 만나게 되니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시고는 연단을 세 번 치시더니 통곡을 하셨단다. 그때 그러한 선생님의 연설을 들은 조선 동포들이 같이 방성대곡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지라 나도 마음을 가다듬고 강연을 듣기 위해 준비했다. 9)
만해와 설산은 불가(佛家)의 인연으로 할아버지와 손자의 관계입니다. 직계는 아니지만, 설산은 만해의 손상좌가 되고 만해는 설산의 노스님이 되는 것이지요. 설산은 열다섯 살이 되던 1932년 늦은 봄에 금강산 건봉사에서 사미승이 되는데, 그 뒤 얼마 안 있어 건봉사에 내려온 만해를 처음 뵙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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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박설산 회고록, 『뚜껑 없는 조선 역사책』(삼장, 1994), p.106. 이하, 이 책에서의 인용은 인용 부호만 표시하고 인용 페이지를 따로 밝히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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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서 얼마 뒤, 설산은 만해에게 전하라는 금암(錦巖) 스님의 편지를 갖고 서울에 올라와, 충신동 감로암에 포교사로 있던 그의 은사인 의산(義山) 스님과 함께 안국동 선학원(禪學院)으로 만해를 찾아뵙게 됩니다. 만해를 뵙고 선학원에서 나온 의산은 안국동에 있는 북성당(北星堂)이라는 책방에 들러, 만해의 시집 『님의 침묵』을 설산에게 사 주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님의 침묵』은 설산이 “특별히, 노트에 옮겨 적으며 읽던” 시집이었다고 합니다.
서울을 떠나 건봉사로 돌아올 때, 설산은 불교사(佛敎社)로 만해에게 하직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그때 만해는 설산에게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주면서, “경전에 있는 요점을 모두 뽑아 수록한 것이니 외워 해독하”라고 당부했다고 합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불교대전』은 만해 자신이 통도사에서 팔만대장경을 열람하고 발췌 ‧ 편찬하여 1914년에 범어사(梵魚寺)에서 발행한 책이지요. 설산이 건봉사로 돌아와 금암에게 만해와 선학원에 대해 말씀드리니, 금암은 “조선 사람으로서 그 어른을 따라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앞으로 너도 그 어른의 높고 깊은 사상을 익혀 네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로 미루어 당시 불교계에서, 아니 일제강점기의 한국 사회에서 만해가 차지하는 지도적 위치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설산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건봉사의 젊은 스님들은 진지한 독서회를 가졌는데, “주로 『님의 침묵』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선시 감상 시간에는 뼛속 깊이 파고드는 나라 잃은 슬픔을 딛고 잃어버린 것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라고 합니다. 건봉사에까지 와서 치근덕거리는 형사의 눈을 피해 가며, “만해 선사의 근본정신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기 위해 『님의 침묵』을 외우는 대회를 열”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 만해가 1935년 조선일보에 소설 「흑풍(黑風)」을 연재할 때에는 “호롱불 밑에서 신문지가 닳아 찢어지도록 돌려 읽었다.”는 것이니, 여기서 다시 한번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끼친 만해의 크나큰 영향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건봉사(乾鳳寺)는 만해와 깊은 인연이 있는 사찰입니다. 만해는 1907년 건봉사에서 수선안거(首先安居) - 최초의 선수업(禪修業) - 를 성취합니다. 건봉사의 만화 선사에게서 전법(傳法)한 것도 이때입니다. 이렇게 만화에게서 법(法)을 이어받음으로써, 만해는 “태고(太古) 스님(고려 시대의 태고보우(太古普愚) - 필자)의 22대 법손(法孫)”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1928년에는 『건봉사 급 건봉사 말사 사적(乾鳳寺及乾鳳寺末寺史蹟)』을 편찬하여 건봉사에서 발행합니다. 만해는 이 책의 「서(序)」에서, “내가 본사적(本史蹟)를 편찬하게 된 것은 다만 건봉사 본말사 각위(各位)의 간곡한 위촉에” 따른 것이며, “고기록(古記錄)을 참고하여 편찬하게 되었으나 기적보다 상사(常事)를 중히 하고 문식을 폐하고 사실만을 기록하여 역사적 본질에 치중 하였”다고 10) 말하고 있습니다. 건봉사의 사적을 기록한 이 책만으로도 만해와 건봉사의 깊은 인연을 알 수 있거니와, 만해는 이 책의 초두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一五四七년[新羅(신라) 法興王(법흥왕) 七년 庚子(경자)] 아도 화상(阿道和尙)이 고성현 금강산(金剛山) 남록(南麓)에 사(寺)를 창(刱)하고 원각사(圓覺寺)라 이름하다.
一五六○년[新羅(신라) 法興王(법흥왕) 二○년 癸丑(계축)] 보림암(普琳庵)과 반야암(般若庵)을 창하다.
一七八五년[新羅(신라) 景德王(경덕왕 一七년 戊戌(무술)] 발징 화상(發徵和尙)이 원각사를 중건하고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설(設)하니 이것이 조선의 염불만일회의 효시가 되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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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한용운, 『건봉사 급 건봉사 말사 사적(乾鳳寺及乾鳳寺末寺史蹟)』, 『한용운전집 4』, p.236.
11) 위 책, p. 237. 이하, 만해의 이 기록에서의 인용은 인용 부호만 표시하고 인용 페이지를 따로 밝히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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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에 보이는 연도는 불기(佛紀)이니, 이를 서기(西紀)로 바꾸어 서술하도록 하겠습니다. 만해가 편찬한 이 기록에 따르면 건봉사는 원래 520년(신라 법흥왕 7년)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한 원각사에서 비롯된 사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건봉사는 한국 4대 사찰 중의 하나로서, 여러 말사(末寺)와 수많은 암자(庵子)를 거느리고 있었던 본사(本寺)입니다. 이 건봉사의 시작이 520년에 창건된 원각사였다는 것이지요. 계속해서 만해의 이 기록을 읽어보면, 그 뒤 937년(고려 태조 20년) “도선법사(道詵法師)가 고려 태조의 명을 받아 원각사를 중수하고 서봉사(西鳳寺)라 개칭 하”였으며, 1358년(고려 공민왕 7년)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서봉사를 중수하고 건봉사라 개명 하”였다고 합니다.
건봉사의 염불만일회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758년(신라 경덕왕 17년) “발징화상(發徵和尙)이 원각사를 중건하고 처음으로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설(設) 하”였으니, “이것이 한국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의 효시가” 된다는 것이지요. 이는 또한 “우리나라 정토불교(淨土佛敎)의 효시”12) 이기도 합니다. 이후, 건봉사의 염불만일회는 오랫동안 중단되었다가 1802년(조선 순조 2년) “용허(聳虛)가 제2회 만일회를 베풀”게 됩니다. 그 뒤, 1851년(조선 철종 2년)에 “벽오유총(碧梧侑聰)이 제3회 만일회를 베풀”고, 1881년(조선 고종 18년)에 “만화관준(萬化寬俊)이 제4회 염불만일회를 베풀”게 됩니다. 그리고 1908년(대한 융희 2년) “제4회 만일회를 회향”하고 “금암의중(錦岩宜重)이 제5회 만일회를 베풀”게 되며, 1927년에 “원옹덕성(圓翁德性)이 화주에 피선되어 제5회 만일회를 계승 하”게 됩니다.
그런데 건봉사의 염불만일회는 1911년 일제의 ‘사찰령’ 공포로 탄압을 받게 됩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일본 불교의 법요식을 조선에 강요하면서, 고래로 전래되던 조선 불교의 각종 불교 의례를 금지 하였”던 것이지요. 하지만 “건봉사의 경우는 그 역사가 매우 장구하여 쉽게 폐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1921년에 이르러 건봉사의 염불당은 “당시의 주지 이대련(李大聯) 스님이 중심이 되어 결국 선원으로 바뀌게 되었”고, “그러면서 당시 같은 금강산 장안사에서 주석하던 방한암 선사를 방장으로 초청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3)
그런데 만해가 편찬한 『건봉사 급 건봉사 말사 사적(乾鳳寺及乾鳳寺末寺史蹟)』을 보면, 위에 언급한 대로 1908년 금암의중(錦岩宜重)이 제5회 염불만일회를 베풀고, 1927년에 원옹덕성(圓翁德性)이 이를 계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건봉사의 염불만일회는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끊어질 듯 말 듯 연면히 계승되어 온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어쨌든 이러한 건봉사의 역사 속에서 만해의 스승인 만화 스님은 1881년 제4회 염불만일회를 베풀었으니, 그 염불만일회를 성취 회향한 것은 만일(萬日)이 지난 1908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곧이어서 바로 그해에 금암의중(錦岩宜重)이 제5회 염불만일회를 베풀었던 것이지요.
설산 스님이 위에 인용한 회고에서, “염불만일회를 성취 회향한 만화(萬化) 노스님”이라고 한 것은 곧 만화가 1908년에 염불만일회를 성취 회향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화는 1919년 9월에 입적(入寂)하게 되는데, 그 만화 스님의 제삿날에 “경성의 만해 스님도 일부러 오셨다.”라고 설산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만해는 1907년 만화에게서 법을 이어받았으니, 만화는 만해의 은사였고 따라서 만화의 제삿날에 건봉사를 찾아 내려온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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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이고운 ⸳ 박설산, 『명산고찰(名山古刹) 따라 상』(신문출판사, 1987), p.198.
13) 이상 일제의 탄압과 관련된 내용은 신규탁, 『한국 근현대 불교사상탐구』(새문사, 2012),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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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다음 날, 위에서 인용한 설산의 회고에서 보듯 설산은 박종운 스님의 주선으로 낙서암 강당에서 만해의 강연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설산은 만해의 강연을 듣기 직전에, 만해가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흘린 눈물에 대해 전해 들은 것을 생각하고, 그의 회고록에 위의 인용처럼 서술해 놓은 것이지요. 이로 미루어 만해가 일본에서 흘린 눈물에 대해서는 당시 스님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1908년 만해가 일본에 가서 조동종(曹洞宗)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일본의 여러 곳을 시찰하며 다니던 중에 오사카(大阪)에서 재일동포들에게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한 동포가 고국인 조선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니 만해는 할 말이 없다면서 연단을 세 번 치더니 통곡을 했고, 만해의 강연을 듣던 재일동포들이 같이 방성대곡했다는 것이지요. 1908년이면, 이미 외교권을 빼앗기고 군대마저 해산당한, 그야말로 망국(亡國) 직전의 시기가 아닙니까? 그러니 당시 고국의 상황을 대체 무어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겠습니까? 침략국 일본에 가서 그곳의 동포들 앞에서 통곡하며 흘린 눈물! 이 눈물보다 만해의 그때 심정을 잘 말해주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일본에서 흘린 만해의 눈물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는 설산은 서울에서 건봉사에 내려온 만해의 강연을 듣고, “선생님은 천지를 뒤흔드는 폭풍 같은 힘과 아름다운 꾀꼬리의 목소리를 지닌 분이었다.”라고 회고합니다. 그때 만해는 ‘선사의 설법’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는데, 만해의 시집 『님의 침묵』에는 같은 제목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해는 자신의 시 제목을 연설 제목으로 삼아 설법을 한 것이지요. 설산은 만해의 강연 내용을 자세히 받아 적었다고 하면서 그것을 요약하여 정리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름 아니라 만해가 자신의 시에 대해 직접 설명한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설산이 요약 ⸱ 정리한 만해의 연설은 그대로 시 「선사의 설법」에 대한 뛰어난 해설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그 시를 읽을 때에 상세히 이야기하기로 하겠습니다.
3. “죽지 마라, 이놈들아!”
이상에서 만해가 흘린 눈물을, 만해 자신의 글을 통해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통해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만해가 흘린 눈물이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지금까지 필자가 찾아낸 경우처럼 기록으로 남겨진 회고나 일화 외에도, 만해는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으로 많은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또, 아무도 모르게 혼자 흘린 눈물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설산의 회고록에 나오는 만해와 관련된 일화를 하나만 더 이야기하고 넘어갈까 합니다. 이 일화에도 역시 만해의 비통한 눈물이 숨어들어 있기 때문이지요.
설산은 1941년, 그가 스물네 살이 되던 해에, 건봉사 공비장학생으로 선정되어 서울에 있는 혜화전문학교에 진학합니다. 그런데 1943년에 이르러 일제에 의해 학병에 강제지원을 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1944년 3월로 예정되어 있던 졸업식도 1943년 9월로 앞당겨져 흐지부지 학업을 마치게 됩니다. 공부하는 학생들까지 강제로 징집 당해 일제의 총알받이로 내몰리는 그런 상황이었던 것이지요.
설산은 학병 강제지원을 피해 숨어 있다가 11월 20일의 지원 마감을 넘기고, 강대련(姜大蓮) 스님의 심부름으로 만주 신경(新京) 불교 포교당으로 가는 것으로 위장하여 22일 밤 목단강행 기차에 오릅니다. 그러나 함경남도 홍원역에서 검문에 걸려 역전 주재소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 뒤 우여곡절 끝에, 그리고 많은 고민 끝에 설산은 같은 처지에 있던 최재형(崔載亨), 서성인(徐聖仁)과 함께 셋이서 당시 만해가 살고 있던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을 찾아가게 됩니다. 이때의 일을 설산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습니다.
만해 선생과 방응모 선생, 정인보 선생 세 분이 계셨다. 만해 선생과 방응모 선생은 바둑을 두시고, 정인보 선생은 훈수를 하시는 듯했다. 우리는 차례로 인사를 드렸다. 정인보 선생은 초면이었다.
“웬일이냐?”
“학병에 강제지원당했습니다.”
만해 선생은 쥐고 있던 바둑돌을 바둑판 아래로 내려놓으시고는 눈을 감으신다. 우리는 20일 마감 날짜까지 지원하지 않고 도피했던 것과 탈출 미수로 체포되어 마감 날짜가 지난 26일에 20일 자로 소급해 강제 지원당한 그간의 일들을 소상히 말씀드렸다.
슁, 겨울바람 소리가 세차게 들린다. 잠시 무거운 정적이 흐른다. 우리는 온 전신을 오므리고 긴장해 떨었다. 그때 별안간 바둑판과 바둑알이 우리 쪽으로 날아온다.
“죽지 마라, 이놈들아!”
벼락 치는 소리에 심우장 집이 무너지는 듯했다.
심우장 뜰의 작은 소나무 밑에 둘러섰다. 주먹으로 눈두덕을 비비며 최재형은 씨근거리고, 서성인은 아예 주저앉아 땅을 치며 울었다.
“죽지 말아야 해.”
두 주먹을 꼭 쥐고 북악산을 바라보는 내 어깨를 어루만지시며,
“돌아들 가게. 선생께서 너무 비통해하시네.”
방응모 선생께서도 목소리가 가라앉아 겨우 말씀하셨다.
죽지 않고 다시 찾아올 것을 다짐하면서 찬바람을 안고 허둥지둥 쓰러지듯 심우장을 나왔다. 14)
참으로 안타깝고 비통한,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그야말로 생명력이 약동하는 장면이 아닙니까? “죽지 마라, 이놈들아!” 하는 만해의 일갈(一喝)을, 설산은 “벼락 치는 소리에 심우장 집이 무너지는 듯했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렇습니다. “죽지 마라, 이놈들아!” 하는 만해의 한 마디는 칼날 같은 일갈(一喝) 정도가 아니라 벽력(霹靂) 같은 일할(一喝)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벽력 같은 일할에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만해의 마음이 들어 있는 바, 이는 방응모가 설산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돌아들 가게. 선생께서 너무 비통해하시네.” 하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만해의 심정을 전했던 것으로 미루어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벽력 같은 일할에는 만해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짙게 깔려 있는 것이며, 동시에 그 울음소리를 훌쩍 뛰어 넘는 선사의 기백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비통한 울음소리와 벽력 같은 일할은 같은 것도 아니지만 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 둘은 만해 선사의 기백 속에서 하나가 됩니다. 그리하여 눈물은 희망으로, 극도의 비통함은 강렬한 의지로 바뀌는 것이지요. 만해의 일할은 설산으로 하여금, “앞으로 닥쳐올 운명에 대해 극복할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합니다. 설산은 “그래, 한 사람이라도 죽지 말고 살아남아야 한다. 살기 위해서 죽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살아남아야 할 더 큰 지상 명령이 있기 때문이다.” 하는 결의를 다지게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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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박설산, 앞 책, pp.226~227. 이하, 이 책에서의 인용은 인용 부호만 표시하고 인용 페이지를 따로 밝히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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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설산은 학병 강제지원 훈련을 받고 마지막으로 고향을 찾기 위해 떠나는 학병들과 함께 경성역에서 열차에 오릅니다. 그러고는 발차 시간이 임박하자 차에서 내려 신을 벗어버리고 왼쪽 발끝을 선로 위에 얹어놓아 스스로 발가락 네 개를 자릅니다. 그러고는 들것에 실려 경성 역전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에 눕게 됩니다. 이후에도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설산은 결국 학병 강제지원을 피해 살아남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설산이 심우장을 찾았을 때 벼락 치듯 했던 만해의 일할은 결국 일제의 총알받이로 끌려 나갈 위기에 처해 있던 설산을 살려낸 것입니다. 만해의 일할은 단지 깊은 산중에서 호기를 부리는 선사의 메마른 할이 아니라, 역사의 현장에서 학병에 끌려가는 젊은이들의 고통과 절망을 함께 하는 비통한 눈물이 어려 있는 그런 할이었던 까닭이지요.
아, 설산을 살려낸 벽력 같은 만해의 일할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역시 벽력 같은 일할로 다가옵니다.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 것인가? 오늘날 이 시대는 대체 어떤 시대인가? 우리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을 어느 곳에 쏟아부어야 하는가? “죽지 마라, 이놈들아!” 하는 만해의 일할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하지 않습니까?
설산은 최성장(崔性章) 외과 교수에게서 발가락 제거 수술을 받고 한동안 입원해 있게 됩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그런 와중에도 일제 경찰은 입원해 있는 설산의 머리맡에 헌병을 보호자로 세워 놓고 밤새도록 감시하며 설산을 괴롭힙니다. “종로 경찰서에서 온 형사가 ‘만해 선생의 심우장에는 왜 자주 갔느냐? 무슨 연락 때문이냐? 학병에 나가지 말라더냐?’라고 따지듯이 물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설산은 “학도병 지원은 내 마음대로 스스로 결정했는데 만해 선생과 무슨 관계가 있겠소?” 하고, “대들 듯이 쏘아붙였다.”는 것이지요.
입원한 지 두 달이 지났을 때, 조선일보 기자가 심우장(尋牛莊)에서 심부름을 왔다며 다녀갔는데, 종이에 싼 오원을 설산의 손에 쥐어주었다고 합니다. 만해는 고통을 겪고 있는 설산을 이렇게 위로해 준 것이지요. 이때 설산은 “하늘을 가르는 큰 소리로 ‘죽지 마라!’ 하시던 만해 선생의 말씀이 전신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설산은 입원한 지 석 달째가 되어서야 퇴원하게 됩니다. 때는 1944년 봄입니다. 설산은 황성기의 부축을 받고 왼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 개나리가 노랗게 핀 길을 걸어 심우장으로 만해를 찾아뵙게 됩니다. 만해는 몹시 기뻐하면서, “조선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왔구나. 너는 이겼다. 장하다.” 하고 칭찬했다고 합니다. 설산은 이때 뵌 만해가 “건강이 좋지 않아 매우 수척하셨다.”라고 회고합니다. 결국 만해는 그해(1944년) 6월 29일 신경통으로 심우장에서 입적(入寂)하게 됩니다. 만해의 유해(遺骸)는 조선인이 경영하는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비(茶毘)를 거친 다음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安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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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상과 표현 원문보기 글쓴이: 김영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