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를 걱정하지 말고 깨치지 못함을 걱정하라
중생은 다 제 잘난 멋에 산다. 부처님의 말씀에
“중생을 제도하라 하시면서 제도했다는 생각이 있으면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있는 것이므로 보살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결국 사상(四相)이 있으면 중생에 떨어진다는 것인데 이 사상은 곧 ‘나’로부터 벌어진다.
‘나’란 생각은 본래부터 있는 생각이 아니고 객관을 상대할 때 ‘나’라는 생각을 낸다.
그러나 이 생각이 사람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며 우리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지금은 이 물건을 사랑하는 마음을 내다가도 얼마 안 가면 싫어하고 미워한다.
이와 같이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이 자기의 바탕일 수는 없고
그런 것을 좋다‧싫다 하고 생각 내는 주체가 ‘나’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것은 내가 항상 말한 바와 같이 물질도 허공도 아닌 산 생명이다.
따라서 이것은 동그라미도 네모 세모도 아니다.
마음자리는 모나고 둥근 게 아닌 형상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먹물은 본래 검은 것이기 때문에 세계의 먹을 다 갈아도 하얗게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물질이나 허공은 본래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아무리 뭉치고 천층만층 높이 쌓아 봐도 그것이 듣고 보고 생각할 줄은 모른다.
그와 같이 물질적 요소로 이루어진 육체도 무엇을 보고 들을 줄은 모른다.
마음이 보고 싶어야 보고 듣고 싶어야 들린다.
육체는 내가 아니라 내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마음은 육체도 아니고 모든 일을 다 초월한 자리,
차원이전(次元以前)이고 태초이전(太初以前)이며 질량이전(質量以前)이다.
이것이 온갖 생각의 주체이고 진아(眞我)이다.
따라서 眞我의 상대가 가아(假我)이며, 생각의 ‘나’이다.
진아(眞我)이니 가아(假我)이니 해도 실제 마음은
진아 가아를 초월한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조차 아닌 만사의(萬事意)의 주체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설명으로 될 것이 아니고 스스로 깨쳐야 한다.
깨달았다 견성(見性)했다는 말은 소위 밥 먹고 자고 일어나고 할 줄 아는
그 자기를 깨친 것이니 깨달았다고 해도 말이 안 된다.
부처님이 깨쳐 놓고 보니 출가하려고 할 때 애쓰던 그 마음 그대로고 실달 태자 그대로다.
「육체 말고 자기 마음 그대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아닌
진실상(眞實相) 그대로의 마음이 있겠구나」하고 이해될 때
그래서 우주에 대자유(大自由) 있고 전지전능한 부처님이 될 수 있다고 믿어지는
이 마음을 깨쳤다고 하는 것이 밥 먹고 똥 싸는 그 마음,
산모가 아기 어서 나가라고 힘주는 마음 그대로이니 이것은 깨쳤다고 해도 안 된다.
본래 미(迷) 한 것도 아닌 게 어떻게 깨치는가.
그런데 육체를 ‘나’라고 하는 데서 아상(我相) 가아(假我)가 생기고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사상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를 나라고 하다 보니 술에 미친 사람,
아편에 미친 사람이 되고 정치에 미친 사람,
문학에 미친 사람이 되어 사는 것이다.
이것은 다 인간의 본성(本性)이 개발되지 않아서 그러하다.
인간성(人間性)은 모든 일을 초월한 것을 뜻하며 선한 것 악한 것이 인간성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은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깨치지 못한 것만 걱정하라는 것이다. 망상을 안 일으키려면 더 일어난다.
망상 일어나려는 것은 내버려 두고 망상도 내가 일으키는 것이지 망상 저 혼자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망상은 가만두고 염불이든 참선이든 그것만 하면
오늘 밤에 깨칠지 금생(今生)에 깨칠지 여하튼 깨치게 된다.
사람이 전생에 공이 많으면 금생(今生)에 깨치고 공이 적으면 내생에 깨치게 된다.
하여튼 깨치게 될 그 시간을 바라고 금생(今生)에 못 하면
늙어 죽을 때까지 염불이나 하고 참선하고 마치면 그러면 내생에는 깨친다.
복도 많이 지어서 내생에는 복을 가지고 태어나고 머리도 지금보다 몇억만 배 좋게 태어난다.
다만 공부하는 데는 깨치려 해도 안 되고 안 깨치려 해도 안 된다.
왜냐하면 다 되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가 될 그런 요소가 나한테 있구나, 오온(五蘊)이 내가 아니구나,
말하는 여기에 배고프면 밥 먹는 여기에 있겠구나.」
여기에 자기 과녁[貫革]을 깨치게 된다.
그 부처님께서 이것을 어떻게 하면 알아들을까? 하고 말씀하신 것이 49년 설법이다.
그러니 경전마다 다 다른 것 같아도 이 이야기다. 온갖 세상 학문의 원리가 다 나온다.
그걸 모르고 경을 들여다보면 불교의 핵심(核心)이 어디 있는지,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마음이 부처란 소리가 어떤 뜻인지를 모르게 된다.
그러니 불교가 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평생 강사(講師) 노릇 해서 제자가 수천 명이 돼도
자기가 모르고 가르치니 제자도 모르고 듣는다.
마치 눈먼 사람에게 매달려 길을 가는 거와 같다.
그러므로 참선하는 거도 그렇고 염불도 그렇고 다른 어떤 공부를 하여도
불교의 근본진리가 어디서부터 어디로 가는지,
생사를 어떻게 해탈할 것인지를 확실히 알고 가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49년간의 기나긴 설법을 하신 것이다.
-청담 스님- <금강경 강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