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제주시 오등동 방선문(들렁귀) 동쪽 절벽
시대 ; 조선(1779)
유형 ; 마애명
방선문에는 50여개의 마애명이 있는데 환선대란 마애명은 신선(仙)을 부르는(喚) 자리(臺)라는 뜻으로 김영수 목사가 새긴 것이다. 초서로 쓴 글씨가 매우 힘차게 보인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위치에 있어서 이끼가 많이 끼었기 때문에 글씨가 잘 보이니 않는다.
방선문(訪仙門)은 신선의 세계를 방문하는 문이란 뜻이고, 환선대에서 신선을 부른다는 뜻이며 좀 더 안쪽에 있는 우선대(遇仙臺)는 신선을 만나는 자리가 있고, 유선대(遊仙臺)도 있어 신선과 노는 자리라는 뜻이므로 〈방선문(訪仙門), 환선대(喚仙臺), 우선대(遇仙臺), 유선대(遊仙臺)〉등 4개의 마애명이 서로 연결되는 뜻을 가지고 있다.
喚仙臺
別壑乾坤大 외딴 골짜기 드넓은 하늘과 땅
石門日月閑 돌문에 세월은 한가로이 흐르네.
莫云無特地 일부러 없다 말하지 말아.
眞箇有神山 진정 하나의 신선산 있거늘
花老已春色 꽃 시드는 3월의 경치
巖蒼太古顔 바위는 검푸른 태고적 얼굴
戞然鳴鶴支 학이 울며 날아드니
知是在仙間 여기가 신선계인 줄 알겠네.(김익수 譯)
己亥春金永綬 子 樂圓 기해년(1779) 봄 김영수, 아들 낙원
壑 골 학, 戞 창 알
김영수는 안동 김씨로 김방경의 후손이다. 남도병마사로 있다가 정조2년(1778) 12월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재임 중인 정조4년(1780) 각 목장에서의 소와 말이 분실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해 각 산장(山場)의 경계에 담장을 쌓아 군마(軍馬)와 민마(民馬)를 기르는 데 편리를 도모하게 하였다. 도내의 목장중 상장(上場), 침창(針場), 녹산장(鹿山場)을 통칭, 산장(山場)이라 하니 폭원이 2백리요, 23처에 물이 있다. 이 목장은 광활하여 한라산 정상까지 이르니 우마의 분실이 자주 일어나 우마 점검시에는 삼읍 남정을 징발, 그 폐단이 커서 횡장(橫墻)을 신축하고 문로를 개설하여 방목하고 겨울에는 가두어 폐단을 방지하니 축장의 길이는 1만 1천여보요, 높이가 4척이었다. 또한 홍수로 하천이 범람하여 민가가 물에 잠기므로 성지(城址)를 따라 간성(間城)을 쌓아 폐해를 방지하였다. 간성의 길이는 551보(步)요, 높이가 9척이었다. 뿐만 아니라 소민문(蘇民門)과 수복문(受福門)의 두 성문을 세웠으며, 광제교(光霽橋)를 가설하고 벼릿내마을에 보를 쌓아 수해를 막았다. 1778년 어도촌에 사는 강위보(姜渭輔)의 처 오씨에게 열녀를 내리는 등 목민관으로서 청렴공정하고 위엄이 있어 도민으로부터 추앙받았다. 관덕정 들보에 쓴 「탐라형승(耽羅形勝)」은 김영수가 65세에 쓴 글씨이다. 1781년 2월에 이임하였다. 방선문을 방문하였을 때에는 아들이 동행했음을 알 수 있다.
관덕정 안에 있는 탐라형승(耽羅形勝) 글씨를 썼으며, 한산도 제승당(制勝堂) 현판도 썼다. 현재 걸려 있는 현판은 조경의 글씨이고 김영수가 쓴 현판은 제승당 안에 있다.
승정원일기(1779년 6월 25일)에는 봉진하면서 구함(具銜. 자신의 성명이나 직함 아래에 도장 대신 직접 글자를 갖추어 씀)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추고(벼슬아치의 허물을 추문(推問)하여 고찰하던 일)당하는 기사가 있다.(尹塾啓曰, 卽伏見濟州牧使金永綬封進農形狀啓, 則皮封不爲具銜, 莫重狀聞, 如是疎忽, 事體未安。原狀啓依例捧入, 而不可無飭, 濟州牧使金永綬, 推考警責, 何如? 傳曰, 允。)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김영수는 제주목사로 있는 동안 〈도중(島中)에 귀양가 있는 역적들을 잘 방즙(防戢)하지 못하여 그들로 하여금 허다하게 날뛰게 한 죄가 한둘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1781년 변방에 유배당하였다가 금갑도(金甲島)로 이배(移配)되기도 하였으나 1785년에는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 올랐다.
《작성 17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