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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2 묵상글 ( 부활 제3주간 수요일. - 주님께서 끊어주실 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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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2. 부활 제3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4.22 04:31
- 주님께서 끊어주실 때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내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배고프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려면
당신이 생명의 빵이시라는 것을 믿고
당신께 오라고 주님은 오늘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뜯어보고 제게 적용하니
주님이 생명의 빵이시라는 것은 제가 잘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 가는 것은 가야지 하는 생각은 있지만
지금 만사 제쳐 두고 서둘러 가야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배고파야 서둘러 갈 텐데 배가 고프지 않은 것입니다.
목마라야 서둘러 갈 텐데 목이 마르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육신의 배만 고프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사실 저는 매일 성체를 모셔서 영적으로도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습니다.
옛날 군 생활 동안은 제가 육신의 배도 고팠지만 3년 동안 미사를 못 드리니
그때는 하느님 체험도 하지 못했을 때인데도 영적인 목마름이 아주 컸었지요.
그러니 관건은 배고프고 목마라야 간절할 텐데 그렇지 않은 겁니다.
그러나 아마 아직일 것입니다.
아직은 배고프지 않고 목이 마르지 않지만
언젠가는 저도 배고프고 목이 마를 겁니다.
요즘 들어와서 제가 자주 생각하는 것은
제가 스스로 하지 못하면 언젠가 머지않아
하느님께서 하게 해주실 것이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해주셨다고 프란치스코가 유언에서 고백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주님께서 형제들을 보내 주셨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주님께서 친히 알려주셨으며,
회개 생활조차도 주님께서 시작하게 해주셨고,
교회와 사제들에 대한 신앙심도 주님께서 주셨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것은 모두 다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 말 안에는 덜 좋은 것도 있고 더 좋은 것도 있다는 말이고
덜 좋은 것도 주시고 더 좋은 것도 주신다는 말이 들어있으며,
더 좋은 것을 주시려 덜 좋은 것으로 대리 만족하고 안주하는
제게 그것들을 끊는 고통도 주시리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주시려고 곡기를 끊게 해주실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육신 생명을 끊어주실 텐데,
주님께서 끊어주실 그 고통의 때에도 지금처럼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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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2. 부활 제3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오늘은 1년에 한두 번 [매일 묵상]을 쉬는 날입니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활동과 관상을 위한 센터]가 수행하는 사도직은 여러분의 관대한 나눔 덕분에 잘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뢰와 동반자적 협력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관상과 해방, 그리고 활동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께 — 요즘 저는 너무나 단순해서 오히려 자명하게 느껴지는 한 가지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2026년 4월 21일 화요일
우리는 치유를 간절히 요청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슬픔을 봅니다. 분노를 봅니다. 냉소를 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순간을 하느님의 치유의 도구로 받아들이는 이들을 봅니다. 용기와 사랑, 그리고 평화를 지닌 이들을 말입니다.
"저는 깊은 슬픔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매일 치유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의 도구가 되고 싶습니다. 이 불확실한 시기를 함께 걸어가며 저를 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제리, ‘매일 묵상’ 독자
오늘은 1년에 한두 번 매일 묵상을 쉬는 날입니다.
"기쁘고 자유롭게 나눔을 실천해 주시는 여러분의 관대한 사랑 덕분에 이 사도직이 이어질 수 있음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세상의 고통을 직면하면서도, 사랑이 중심에 있을 때 치유가 가능하다는 믿음을 간직하는 이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의 평화와 모든 선이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기도드립니다."
평화와 선!
활동과 관상을 위한 센터
창설자
리처드 로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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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사실 그들은 이미 주님을 따라 산에 올라왔고(요한 6,3), 아무 음식도 가져오지 않아 배가 고프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일까요?
요한 복음서는 언제나 그렇듯, 이 말씀에도 또 다른 차원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들이 먹은 음식은 실제로 존재하는 빵이었지만, 동시에 또 다른 굶주림을 채워 주시는 영적 양식을 상징했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나는 인류의 가장 깊은 갈망을 채워 주는 존재다. 나는 너희 삶 속 가장 친밀한 실재, 입 안의 음식처럼 너희를 지탱하는 존재다. 나는 너희 의식을 등불처럼 밝게 하고, 마음을 따뜻하게 하며, 의지를 건강하고 강인하면서도 온유하게 지켜 주는 존재다. 나는 너희 눈을 들어 세상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바라보게 하고, 영의 눈을 열어 하느님을 뵙게 하는 존재다."라고요!
이번 주 내내 우리는 요한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생명의 빵 담화]를 듣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말씀을 집요하게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6,53-56).
조금 이해할 수 있게 이 말씀의 참된 의미를 설명해 주시면 참 좋으련만 예수님께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똑같은 말씀만 반복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생명력으로 예수님처럼 살아야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도 설명이 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런 식으로 풀어서 설명해 주셨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했을까요? 아닐 겁니다. 사람들이(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 말씀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생명의 빵 담화] 끄트머리에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예수님처럼 거짓 자아인 '에고'를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과 일치된 사랑을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주시는 생명력에 온전히 의탁하여 그러한 삶을 살아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담대하고 분명하게 선언하십니다. 참되고 완전한 충만은 오직 당신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요. "나에게 오는 이는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이는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우리는 이 사실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참되고 완전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이런 삶을 살아낼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삶을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질문에 베드로가 나서서 이렇게 답하는 겁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물론 베드로 사도가 자신의 이 고백이 지닌 참된 의미를 완전히 이해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하느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입을 통해 이 진리를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단순히 베드로 개인의 생각을 넘어, 교회 전체가 예수님 안에서만 참된 생명과 구원이 있음을 선포하는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나 이 고백을 반복하며, 성체성사 안에서 그분의 생명을 받아 모시고, 그분의 말씀 안에서 길을 찾습니다.
결국 베드로의 이 고백은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길과 수많은 목소리가 있지만, 참된 생명의 말씀은 오직 예수님께만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다른 곳에서 답을 찾으려 해도 궁극적인 생명의 길은 '나'라는 작은 세상을 버리고 '우리'라는 온전한 전체를 택하는 예수님의 길뿐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살아가는 길은 이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나'라는 작은 세상을 버릴 때 비로소 볼 수 있고 살 수 있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 길은 택하기가 참 어려운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을 택한다는 것이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기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력, 곧 은총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은총에 의탁할 때 비로소 그 길을 걸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를 끊임없이 당신의 생명으로 채워 주시고, 그 힘으로 세상 속에서 복음을 증거하도록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체성사는 단순히 이 세상에서 복을 받기 위한 하나의 제도적 장치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삶을 살아가고, 또 그렇게 해서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실현해 내도록 힘을 불어넣어 주는 실질적인 하느님 은총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이 은총의 성체를 영하면서 이런 하느님 사랑 힘을 느끼고 있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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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2.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를 듣고 호수 건너편까지 찾아온 군중에게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빵" 이야기를 했을 때, 그들은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하고 간청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선언은 “나는 ~이다”(εγω ειμι)라는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선언문입니다. 당신 신비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에 대해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것은 당신 몸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빵은 내 몸이다.”라는 말씀은 한참 뒤에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생명의 빵”은 그분의 신성을 가리킵니다. ‘성찬의 빵’이 거기에 강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빵이 되듯, 이 신성은 말씀이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빵”입니다.”
그러니 “말씀이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빵”, 곧 ‘말씀의 빵’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셨을 때, 신명기(8,3)의 말씀을 들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또 예언자 아모스는 말합니다.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아모 8,11)
이는 예수님의 말씀이 ‘참된 빵이요 참된 생명’임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빵을 먹는 일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 벌어집니다. 곧 ‘예수님께 와서 말씀을 듣고 믿는 이’ 안에서 실현되는 빵입니다. 그래서 이 “빵”(말씀)은 믿는 이의 생명을 참된 생명에로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요한 6,39-40)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고, 아들은 그 뜻을 실현하는데 전념하십니다. 곧 ‘당신께 와서 보고 믿는 이들’을 살리십니다. 곧 구원이 바로 ‘아버지의 뜻’입니다.
빵을 먹는 일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 벌어지듯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 역시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에게서 벌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일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진정 우리의 ‘내적인 눈’이 열려야 할입니다. 곧 ‘믿음’으로 열리는 눈 말입니다. 그 눈은 바로 ‘믿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주님! 믿사오니, 당신 생명을 주소서. 당신 사랑 안에 머물게 하소서.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요한 6,37)
주님!
아래로 흐를 줄을 알게 하소서.
모든 것을 받아 흐르는 큰 강물 같은 사람 되게 하소서.
아래에 머물러 있을 줄을 알게 하소서.
모든 것을 끌어안은 큰 바다 같은 사람 되게 하소서.
믿어주지 않아도 믿어 주고, 사랑해주지 않아도 사랑해 주며
물리치기보다 품을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과 제 형제를 물리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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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2.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년 가을에 혼배미사 부탁을 받았습니다. 신랑과 신부가 견우와 직녀처럼 주말에 만나면서 사랑을 키웠습니다. 지난 3월 14일에 혼배미사가 있었습니다. 혼배미사를 마치고 피로연까지 함께했습니다. 신부의 아버지는 사랑하는 딸을 위해서 노래를 불러 주었습니다. 신랑은 어머니와 함께 춤을 추었습니다. 흥에 겨워 저도 부부를 위해서 ‘영원한 사랑’을 불러 주었습니다. 먼 타국이지만, 신랑과 신부는 부모님께 폐백을 드렸습니다. 부모님은 좋은 덕담을 해 주었고, 대추와 밤을 신부의 치마폭에 던져 주었습니다. 대추는 아들을, 밤은 딸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신랑과 신부는 아들딸을 많이 낳아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하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축복 속에 새로운 가정이 탄생하였고,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신혼부부는 새출발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멀리 중동에서는 1달이 넘게 드론을 날리고, 미사일을 날리고 있습니다. 폭탄을 투하하고, 시설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린 여학생 170명이 숨졌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생명을 낳고, 보존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죽이고, 없애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부디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개신교회를 떠나서 가톨릭으로 온 형제님이 ‘변심’한 것에 대해서 마음에 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가톨릭, 이슬람, 개신교, 유대교는 뿌리가 같다고 설명해 드렸습니다. 같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라고 설명해 드렸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변심이 아니라, 회심에 관해서 설명해 드렸더니 마음의 짐이 가벼워졌다고 합니다. 개신교회에서 열심히 했던 신앙으로 가톨릭에서도 열심히 하면 하느님께서 같은 축복을 주실 거라고 설명해 드렸습니다. 변심은 나의 욕심과 욕망 때문에 마음이 바뀌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드라마에서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재물 때문에, 성공에 대한 미련 때문에 모든 것을 바쳐서 헌신했던 연인을 버린다면 그것은 변심입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진리를 찾아 나선다면 그것은 회심입니다. 대기업에서 성공이 보장된 자리를 버리고 아프리카로 선교사로 떠난 분을 보았습니다. 회심이라 생각합니다. 종교라는 옷을 갈아입는 것이, 직분을 바꾸는 것이 회심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세상의 것들과 결별하는 것이 회심입니다.
우리에게 균형 잡힌 신앙이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철야가 좋다고 밤샘 기도를 주로 다니기도 하고, 어떤 분은 좋은 강의를 들어야 한다고 매일 강의를 들으러 가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성지순례가 좋다고 성지순례를 많이 다니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도 적당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어떤 것이 바람직한 신앙생활일까요?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분심과 잡념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첫째는 과로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세상의 일과는 멀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았지만, 아직 세상의 일들 때문에 주일에 성당에 못 나오는 것을 봅니다.
둘째는 자주 기도하는 것입니다. 손을 자주 씻는 것만으로도 질병을 예방할 수 있듯이, 우리가 자주 기도드리면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나의 영혼에 묻어 있는 허물을 씻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사도들도 모든 일들을 감사하게 여기고, 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성사에 자주 참여하는 것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서 주님을 받아 모시는 것은 나의 영혼을 건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영혼을 정화하는 사람은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곧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성당에서 시작하는 교육과 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분들은 신앙생활을 더욱 활기차게 할 수 있습니다. 늘 그렇지만 열심히 기도하고, 신앙생활을 잘하는 분들이 교육과 피정에 더 많이 참석하는 것을 봅니다. 그분들은 교육과 피정의 효과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교육을 받고, 피정을 통해서 지친 영혼을 정화해야 하는 분들은 아무리 좋은 피정이 있어도 교육이 있어도 함께하지 못합니다. 바쁘기 때문입니다.
박해가 시작되었어도, 사도들은 충실하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것이 참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좀 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능력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하셨고, 자신을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기꺼이 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교만, 욕심이라는 장애를 넘어서야 합니다. 우리는 희생과 봉사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럴 때 사랑으로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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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2.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사!
이번 주간 계속 봉독되는 복음의 주제는 생명의 빵입니다. 매일 주제어가 생명의 빵이요, 영원한 생명이니 신부님들 강론 준비하시기가 참 어려운 시기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 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이토록 거듭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냥 생명, 사라질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관련된 것이기에 그렇게 자주 강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듭 강조하고 계시는 생명의 빵은 오늘날 매일 우리가 봉헌하는 성체성사를 통해서 다시 기억되고, 재현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결코 배고프지 않기 위해서, 결코 목 마르지 않기 위해서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성체성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냥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온전한 마음으로, 열렬한 마음으로 성체성사로 나아가, 그 위대한 사랑의 신비에 깊이 몰입하고 그 맛을 만끽하는 것입니다.
신부님들의 연피정에 와서 ‘마지막 피정’(파블로 도밍게스 저, 강기남 신부 역, 성 바오로)을 다시 읽고 있습니다. 책에 소개되고 있는 반 투안 추기경님 일화가 감명 깊습니다.
반 투안 추기경님이 투옥되고 나서 가장 스스로를 괴롭혔던 질문이 한 가지 있었답니다. 그것은 ‘언제 다시 미사를 드릴 수 있을까?’였습니다. 수감자들은 교도소에 입소할 때 개인 물품을 소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랜 남북 전쟁 직후 당시 베트남의 감옥의 현실은 처참했습니다. 공산 정부는 재소자들에게 최소한의 식량과 물품을 제공했습니다. 그걸로는 굶어 죽거나 얼어 죽기 딱이었습니다. 따라서 재소자들은 가족들이나 친지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대체로 식품이며 담요며 생필품을 청했습니다. 안타까웠던 일은 물품들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중간에서 빼돌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추기경님은 투옥된 후 처음 쓴 편지에 가장 필요한 물품으로 위장약으로 사용할 포도주를 보내 달라고 청했습니다. 편지를 읽은 신자들은 즉시 추기경님의 의중을 알아차렸습니다. 작은 포도주 한 병을 구했고, 병에다가 ‘위장병을 위한 치료제’라고 쓴 쪽지를 붙였습니다. 제병은 옷가지들 속에 잘 숨겼습니다.
추기경님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소포가 추기경님의 독방으로 배달되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후 추기경님은 당시의 기쁨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포도주와 제병을 받았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 손바닥에 포도주 세 방울과 물 한 방울을 떨어뜨려서 매일 미사를 드렸습니다. 그분과 함께 그분의 쓰디쓴 성작의 피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사를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미사 안에 계신 예수님의 놀라운 힘은 그야말로 엄청납니다. 그 어떠한 세력도 미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칠흑 같은 감옥의 어둠조차도 파스카 광명의 빛으로 변화시켜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습관처럼 봉헌하는 성체성사가 누군가에게는 정말이지 간절한 것을 넘어 절박한 것일 수가 있습니다. 좀 더 정성과 열정과 마음을 다해 미사를 집전하고 또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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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2. 부활 제3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6,35–40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주님은 군중의 기대를 맞추는 방식으로
당신을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당신 자신이
사람의 가장 깊은 허기와 목마름을 채우는
참된 생명의 근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이 말씀은 위로이면서 동시에 초대입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이 사라진다는 것은
삶의 문제가 하나도 없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존재의 뿌리가
더 이상 세상의 불안정한 것들에 매이지 않고
주님 안에 놓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잠시 허기를 잊게 하는 빵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십니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식이
단순한 외적 도움에 그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삶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짊어지시고
당신 생명에 참여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레고리오에게 그리스도는
인간을 바깥에서 고쳐 주는 분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새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교리를 아는 데 멈추지 않고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받아들여
내 존재의 중심을 바꾸는 일이 됩니다.
오늘 복음은 평화/인내 주간에 특별한 빛을 줍니다.
평화는
내 삶이 원하는 대로 잘 풀릴 때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붙드신다는 믿음에서 옵니다.
인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내는 혼자 버티는 힘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에 의지하여
오늘을 다시 살아가는 힘입니다.
특히 오늘 함께 읽는 루카 복음에서는
주님을 따르는 일이 가볍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삶의 중심이 바뀌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단지 삶의 한 부분이 아니라
삶 전체를 새롭게 정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생명의 빵이다”라는 말씀은
달콤한 위로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정말 나를 생명의 중심으로 모시고 있는가?
너의 배고픔을 채우는 것이
성과인가, 인정인가, 소유인가,
아니면 나 자신인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의 통찰처럼
주님은 우리를 반쯤만 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전인격을 구원하시고,
전 존재를 생명 안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믿음도
부분적인 위안이 아니라
전 존재의 응답이어야 합니다.
주님께 가는 사람은 굶주리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목마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결코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헛된 것을 생명의 빵처럼 붙드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당신께 저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게 하소서.
평화와 인내 안에서
당신께서 저를 끝까지 붙드신다는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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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2. 부활 제3주간 수요일. 굿뉴스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Mark Choi 님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9&id=2131615&menu=4770
Mark Choi [mychoi1960] 260421.09:05 ㅣNo.189213
■ Beverly Hills Superior Court 에서의 하루?!
Beverly Hills Superior Court 에서의 하루
A Day at the Beverly Hills Superior Court
오늘 나는 Beverly Hills Superior Court 에 다녀왔다. 개인적인 일로 법원을 찾았지만, 그 안에서 마주한 모습들은 단순한 절차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Hearing 전에 만난 negotiator의 태도는 공정함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고, 결국 나는 주저 없이 정식 Hearing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그 과정 속에서 예전에 경찰의 편향된 판단과 false statement 로 인해 힘들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하지만 오늘도, 그리고 그때도 공통적으로 분명했던 한 가지는 판사의 공정함이었다. 사람의 판단은 흔들릴 수 있고, 때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할 만큼 부족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공의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며, 나는 다시 한 번 하느님께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님께서는 의로우시어 의로운 일들을 사랑하시니 올곧은 이는 그분의 얼굴을 뵙게 되리라." (시편 1 1:7)
이곳 캘리포니아의 구조나 교육, 제도 속에서 부족함과 왜곡을 경험할 때가 있지만, 그 속에서도 하느님은 여전히 공의를 이루어 가신다.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이 아닐지라도, 하느님은 각 사람과 상황을 통해 그분의 뜻을 드러내신다.
오늘의 경험은 나에게 사람을 향한 실망보다, 하느님을 향한 신뢰를 더 깊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정의는 살아 있고, 하느님은 결코 침묵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사람을 바라보며 흔들리기보다, 주님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함을...
Today I visited the Beverly Hills Superior Court for a personal matter. What I encountered there carried a deeper meaning beyond a simple legal process. The negotiator I met before the hearing seemed far from fair, which led me to proceed directly into the hearing itself. In that moment, I was reminded of a past experience when I struggled due to a biased and false statement written by a police officer.
Yet both then and now, one thing remained clear: the fairness of the judge. Human judgment can falter, and at times it may fall short of what we hope for. But even in such circumstances, justice has not completely disappeared. Seeing this, I was reminded that God is watching over everything.
“For the Lord is righteous, He loves justice; the upright will see His face.” (Psalm 11:7)
Even when we encounter flaws and distortions in systems, education, or institutions, God continues to work out His justice. It may not unfold in the way we expect, but through people and situations, His will is still revealed.
Today’s experience deepened not my disappointment in people, but my trust in God. Justice still lives, even when unseen, and God is never silent. So I steady my heart again—not to be shaken by people, but to move forward with my eyes fixed on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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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2. 부활 제3주간 수요일. 굿뉴스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영근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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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근 [dimonz] 260421. 10:24 ㅣNo.189220
■ 예수님은 효자 이실까?
** 예수님은 효자 이실까?
일상 생활에서 또한 아들로서
예수님은 부모님께 효자 였는지 생각해 봅니다
일단,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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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복음 2장 48 ~ 51절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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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살 소년 예수의 예루살렘 성전 일화를 살펴보면
어려서부터 예수님은 성부 하느님을 가장 최우선으로
생각하였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모에게 순종하였다 라고
누가복음 저자는 기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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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 복음 2장 3절 ~ 5절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다.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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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어머니의 말씀에 반응하신 예수님도 흥미롭습니다.
어머니의 요청에 기적을 실행 하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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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가복음 3장 33절 ~ 35절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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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어머니이고 형제이다
여기서도 성부 하느님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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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9장 26절 ~ 27절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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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 하느님의 뜻인 십자가 수난을 실천하시다가
어머니를 발견하시고 사랑하는 제자에게 성모님을
부탁하시는 장면 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은 우리가 잘 알고있는 편입니다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부 하느님의 뜻인
인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말씀하시고
십자가 수난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원을 이루신 것을
우리는 알고있고 또한 믿습니다.
그런데 공생애 활동 이전의 일상 생활에서는
부모님께 순종한 착한 아들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원 1세기 나사렛 지방, 목공인 집안의 장남으로서
아버지에게 목공의 기술을 배우고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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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 체험
1. 첫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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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얼마 지난후...
예수님께서 진지하게 말씀하심.
" 네가 어머니에 대해 알수록
어머니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 깨닫게 될것이다 "
예수님, 주님께서는 제가 영세를 받은 얼마후에
성모님에 대해 알수록 성모님께서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시는지
깨닫게 될것이다 말씀하셨나이다.
네 맞습니다. 주님.
저는 성모님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나이다.
그런데 예수님, 저는 또한
주님의 성모님에 대한 마음을 깨닫게 되었나이다
하느님 이시지만, 아들의 마음으로 성모님을 사랑하시는 주님.
성모님의 기도에 귀기울이시고 저희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자애로우신 성모님,
예수님은 성모님의 말씀을 아들의 마음으로 들으시나이다
저희들을 위하여 기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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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두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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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공항에 근무하던 시절에..
" 예수님, 성부 하느님의 정의가 실행될때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
" 예수님도 하느님이시고,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시지 않으시나요?"
........ ( 예수님은 그냥 말없이 조용히 계심. 고민도 하시는듯.. )
며칠 후에, 예수님께서 성모님과 함께 계시다.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성모님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
" 어머니, 저의 자비는 아버지의 정의 중에서도 활동할 것입니다 "
" 저의 자비를 어머니를 통해 세상에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세요"
" 그래 알았다"
성모님께서 고개를 끄덕이시며 말씀 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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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체험을 통한 느낌은..
예수님께서는 오직 단 한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성모님의 말씀에 귀기울 이십니다.
단 한가지의 경우는
하느님으로서 정의를 실행 (심판) 하시는 경우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낳으신 분,
어머니로서 한없는 사랑과 희생을 하신 분,
특별한 아들로 인해 고난을 겪으신 어머니,
하느님의 어린양인 아들 때문에 고통을 겪으신 분,
십자가 수난을 함께 하신 어머니로서
성모님을 공경하고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 성모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제일 이신 분입니다.
우리들 모두와 성인들 모두의 사랑을 합하여도
예수님의 사랑에는 비견될수 없습니다
묵주기도 영광의 신비 5단,
" 예수님께서 성모님에게 천상모후의 관을 씌우심 "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고 신비 인것을
요즘에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여러번 발현을 통하여
묵주기도를 자주 드리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루에서 미사 참례하는 것이 가장 가치있는 행위 이듯이
성모님과 함께 묵주기도를 드리는 것이
가장 좋은 행동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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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공유할 묵상글(강론글)로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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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2.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10:05 추가.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겠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5ㄴ-40).”
1) 여기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에게는 ‘내가’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들을 나는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입니다.
“내가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 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만’ 믿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여러 방법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억울하게 탈락하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하고,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주님의 구원 사업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일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2) ‘아버지의 뜻’은 ‘인간 구원’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곧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고, 우리 입장에서는,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38절의 “내 뜻이 아니라” 라는 말씀은, ‘아버지의 뜻’과 다른 ‘예수님의 뜻’이 따로 있다는 말씀이 아니고, “내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라” 라는 의미입니다.
3) “하나도 잃지 않고” 라는 말씀은, 마태오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 또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은, 최고 수준의 성덕을 쌓은 사람들이나 성인 성녀들에게만 허락되는 일이 아니라, ‘충실하게 믿는 이들 모두’에게 허락되는 일입니다.
성경과 교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도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도와 사랑 실천이 부족해도, 또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아도, 주님께서는 어떻게든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이 말을 신앙생활에 관한 말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생활입니다.
나이가 어린 사람도, 지식이 부족한 사람도,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도, 몸이 불편한 사람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생활입니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교회에서 중요한 직책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바로 그 ‘잘나고 똑똑함’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심각하게 방해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못나고 모자란 사람들이 더 쉽게,
더 많이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로운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율법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논객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코린 1,20.27-29).”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 라고 경고하셨습니다.
4) “하나도 잃지 않고”를, “하느님께서는 ‘너를’ 잃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려고, ‘나에게’ 오신 분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과 나의 ‘일대일’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생활입니다.
착한 목자가 애타게 찾는 ‘잃은 양’이 바로 ‘나’입니다.
37절의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과 39절의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은, 구원받을 사람을 하느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셨음을 뜻하는 말씀이 아니라,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응답’도 ‘내가’ 해야 하는 일이고, 신앙생활도 바로 ‘나 자신이’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임승차 할 수는 없습니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마태 24,41).”
따라서 “모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빠짐없이 모두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긴 해도, 그것은 ‘무조건’ 그렇게 된다는 약속이 아니라, “스스로 희망하고, 응답하고, 노력하는 사람에 한해서 모두” 라는 조건부 약속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 예수님께서는 그를 끝까지 버리지 않으셨지만, 그 자신이 스스로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은 예수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억지로 구원하는 것은, 구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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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2. 부활 제3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8:30 추가.
요한 6,35-40 "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오늘의 제1독서는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가 큰 박해를 받는 장면입니다. 사울을 중심으로 한 유다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를 없애버리려고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끌어다가 감옥에 가두었지요. 그리하여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 서슬퍼런 박해를 피해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오히려 그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됩니다. 만약 그 ‘흩어짐’이 내부의 갈등이나 다툼 때문이었다면, 그래서 그들 안에 주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교회는 곧 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박해가 만든 반발력으로 더 깊고 단단해진 믿음을 지닌 채 흩어졌기에, 마음 속에 소중히 간직한 그 믿음을 자기가 만나는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전한 것이지요. 그들도 처음엔 자기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을 겁니다. 박해가 무섭다고 주님을 저버릴 순 없으니, 안전한 곳으로 피해 신앙을 지켜나가려는 마음이었겠지요. 그러면 하느님께서 당신 손길로 자기들을 지켜주시리라 믿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복음의 씨앗을 널리 퍼뜨리는 ‘민들레 홀씨’가 되었지요.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 뜻을 따르는 ‘순명’입니다.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는 ‘의탁’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렇다고 하시면 의심 없이 그렇다고 믿고, 그 과정에서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생겨도 내 뜻을 내세우거나 고집부리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순간까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그 원칙을 지키신 것처럼, 나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면, 그렇게 주님의 뜻을 삶 속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한다면 그 참된 믿음의 삶을 통해 그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 하느님과 더욱 깊은 일치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해 마음에 품고 계신 깊은 뜻을 알려주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나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뜻이, 우리가 그분 뜻을 따르면 다다르게 될 최종 목적지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굳게 믿는다면, 그분 뜻을 따르는 과정에서 박해를 받거나 죽게 되더라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새로운 존재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 영원토록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그렇게 되려고 창조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희망을 간직한 채 매 순간 하느님 뜻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며 그분 섭리 속을 걸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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