煩惱(번뇌) 修煉 章 남(他=포괄적인 뜻)이 아는 것을 내(精神 肉身 등)가 모르는 상태가 곧 나이다。 나는 단지 남의 기억장치 도구와 그 집(家)(知가 와서 머물름)이며 그 힘을 쓰는대로 데어(제공)줌에 불과하다. 즉 知觀의 罟(얽힘 얽음)에 메였음이니 이미 나(我)라는 意味를 認知하는 것 自體가 知고(罟)에 의한 것이므로 내가 아닌 他인 것이다.그러므로 내가 나라는 의미를 모르는 상태가 나이니 곧 無我라 하는 것이다. 즉 沒我 無我의 경계에 達함을 뜻한다。嬰兒(어린아기)는 모른다 할 것이나 그 모른다는 것이 희박할 뿐이지 그 本能이 知고(罟)를 代身함을 他가 잘ㅡ 못 느낄 뿐이지 이미 六合으로 生成된 모든 體는 知(罟) 에 메여 있다 할 것이다. 그럼 이 知고(罟)가 누군가? 삿된 것인가? 理인가? 아니면 허상인가? 그 또다른 것인가? (※ 정리할때의 생각이지만 다음은 知에 대한 미흡한 이론이며 성립논리가 불충분한 해설이다) 觀察하는 觸感은 神經을 通하여 心性을 沖動질하고 心性은 神家라 神이 生覺을 그려(圖)내어 알게(知) 되는 것이다. 이미 관찰할 當時 神이라 할 것이나 이는 훌터보는 (散布) 神이고 뒷 神이라 하는 것은 모아거둬드리는 (制感覺 또는 集會覺) 단계의 神이라 할 것이다。神의 둘을 말한 것이 아니라 神의 活動을 말한 것이다. 이미 精神이란 것이 注知하는 상태 主觀하는 상태는 내가(我) 아니다。왜냐하면? 정신이란 것이 그렇게 하는걸 정신이란 그 自體 가 내 정신이란 것을 행동으로 강조하여 정신됨을 앎므로 내가 아닌 것이다. (※ 정신까지도 남이며 웅크려 居하는 남(他)으로 몰아세웠으니 그 나머지 삿된 생각의 논리야 말할나위 있으랴?) 따라서 그 고(罟)에 메여 따르는 肉身이면 그 육신조차 내가 아니다 라고 할 수 있다。覺이 누적되면 念인데 念고(罟)가 固塊(굳은 덩어리=念願은 변함없는 意志 信念을 형성시킴)가 되어 그 自體로 力을 발휘하는 것이 곧 念力인데 이에 기울고 끌림을 당하는 것은 곧 내가 아닌 行인 것이다。(※ 정리때 생각. 그럼 나는 껍질 허상인가? 全體空인가?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도통 뭣을 말하는 것인지 내가 뭣인지 주관이 서질 않는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은 天地六合四方에 찾아 볼래야 없는 것이다。(어젯밤 몽사에 책 끝부분 쓰인 말씀이 숯이 겉이 검으니까 으레껏 속까지 검은줄 안다고 써 있다. 좋은 말씀들에 책을 읽었는데 머리를 잘못 놓아 잘 떠오르질 않는다。이건 고심하던 집필때의 몽사 얘기다) 곧 無我인 것이다。書頭에 남이 아는 것을 내가 모르는 상태를 갖다 나 이다 라고 했다。 이界六合世上엔 남이 알고 내가 모르는 것이 셀 수 없을 정도고 내가 알고 남이 모르는 것 또한 수없을 정도다。(정신이 관찰치 못해 모르므로서니라) 그러므로 我는 有我로써 現世森羅에 얽히고 섥혀 엄연히 존재한다。그리곤 남(정신포함 如他)이 알던 모르던간 스스로인 我(自我)를 관여하는 것이다.내가 아니라는 것이 곧 나이니 이 삿된 것이 아닌 것이다。(※ 이랬다 저랬다 문맥이 뒤틀리고 모순으로 일관하니。정신분열적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 말도 안되고 뜻이 안 통하는 글이니 집필을 잠시 중단하다)…。이틀후 다시 쓰기 시작하다) 내가 아니라는 것이 他의 얽혀듬만 아니라 내라함이 없는 것이 모든 얽힘에 얽혀 감겨 그 얽키고 설킴을 깨쳐버릴 방도를 찾으니 역시 고(罟)이나 탈파의 문턱에 있음이니 無碍의 고(罟) 풀릴 곳으로 向해서 이 고(罟) 없으면 아무렴은 어떻냐는 式의 無眞理」아무러크소니」가 된다 할 것이다. - (※ 훗날 석씨說 한곳을 읽게 되었는데 法相을 흐르는 뗏목처럼 여기라는 구절이 있다。(法相은 여래말씀°진리에 말씀이라는 뜻) 이는 참이라고 固執하면 고(罟)가 되고 또한 영원한 진리는 없다는 것이며 진리도 그 흐름을 탄다는 뜻일게다。물이 저 흘러갔음 떼도 거기에 맞게 흘러 그 때와 진리 즉 그 당시 형성된 여건 및 환경 등에 맞춰 진리한다는 것일 것이다。삼라 제물이 시간에 맞춰 정체현상을 일으키며 흘러가데 서서히 卞異현상을 일으키며 무위유동되므로 진리라는 것은 잠깐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원래 시간은 없다。무위유동속에 一科感(일과감)에 지나지 않는다 할 것이다) 말씀의 차례를 거론한다면 無知 無我 無量(明)이다。즉 내가 모르는 상태 내라함이 없는 상태 나를 모르는 단계로 向한다 할 것이 「一」。無의 力 모름의 힘 知 즉 아는게 힘이다ᆢ 한다. 안다는 것이 스스로 아는걸 힘삼아 우월性을 내세워 자신에 차 있음으로 모름의 힘을 舉論해 보고자 한다。힘이란 말씀이 겨룸(比較 競爭)을 뜻하는 듯해서 德이라 하여두자。모름과 앎 사이가 衡平인 듯 하나 이는 小慨念이고 모름의 德은 無量이라서 그 限界를 設程한다는 것은 있을수 없다。時空 世界의 모든 行事動靜이 앎에 의한 이름은 극히 일부분이고 나머지는 이 모르는 덕이 성취시켜 주는 것이다。그러하니 無知之德의 그 領域을 限界 지을수 있으랴? 限界지을 수 없는 것이다。「뭐뭐」事必歸正이라고 할적에 必然性인 것을 連想하는데 이 필연성이라는 것이 반드시 그렇게 된다고 단정짓는 것은 知(앎)에 의한 것이라 할 것이나 우연 공교와 마찬가지로 모름에 의함이 더 많다 할 것이다. - 즉 필연이라는 것은 앎을 信用하는 것이고 불필연 우연 공교등은 앎을 不信한다。『반드시 그렇킨 뭘 그래 제가 어찌 그렇게 잘 알아!』이다. 반드시 그렇치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니 의외의 변수가 있어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고 달리도 될 수 있다는 뜻이다。저 사람을 보라! 오늘이란 時的으로 모름을 기다리고 있다. 모름이 해결해 주지 않으면 앎도(앎을 가졌음도) 별 수 없다。거래왕래하기도 하고 매매도 하며 매파역할도 한다. 함정이 있는줄 알았더라면 이렇진 않았을텐데는 극히 소수일뿐 이런거 저런거 따지지 않고 그냥 밀어붙치는 것이다. 간교한 생각굴림은 소심자가 될뿐 대범자가 되진 못한다 할 것이다。運命論이나 時空的인 논리로 아무리 필연적으로 뜯어맞춘다 하더라도 모름이 고(罟)를 脫破시켜주지 않으면 德이랄까?…。또는 아무렴의 뜻인 아무러코소니에 드고나지(出人) 못한다 할 것이다。모름의 힘。그는 여하한 힘의 논리를 초월하였다. 즉 그 힘이라는 것까지 뛰어넘었다。즉 그 힘이라는 것까지 초월하여 모름이라, 힘이란 그 힘이란 말뜻으로써 界(領域)가 있다. (德)덕 漢字形을 破字해보면 척(彳)과四一心의 뜻이 나오니 六合八空 中점이 원만 또는 굴러서 원만해진다는 뜻이다。구체적인 形에 들어가선 그것이 네모진 것이건 세모진 것이건 어떠한 것이건 그가 지니고 있는 뜻의 원만을 뜻한다。以上은 無知와 知를 二元化하여 말한 것 뿐이다。無知도 현실적인 내가 아니고 知도 또한 내가 아니다。 (앞서 論을 보면 정신도 내가 아니라 했다) 그래서 無我인 것이다. ◎ 三回의 탈(說=脫通)法 (※ 說= 이는 辯在로 마음에 고(罟)를 벗긴다는 것임) 진리를 따르면 그 진리라 하는 것이 추종자를 영원한 어리석음으로 취급하고 취급당하게 해서 도와주는 체 도와주는체 하면서 도리혀 모두를 가져가 모두를 스스로 편리한데로 종 삼고 헤어나질 못하게 하여 욕됨을 입어 허물 쭉정이처럼 초췌해짐을 추종자가 깨닫지 못하게 함은 물론 점점 매달려 떨어질까를 겁내 아둥바둥 발버둥 침으로 깊이 감겨들게 하여 벗어나질 못하게 하나니라。이는 겉포장이 그럴듯한「그것만이라 하는」我執에 포로가 됐기 때문에 그러함이다。(심신을 다 빼앗긴다) 이미 깨달앗다 하면 이는 거짓이니 진리라 하는) 속에서의 깨달음은 진리의 그릇(器)을 떠나는 허상의 覺 즉 배반이지 이(是)」。깨달음이 있을수 없기 때문이다。왜냐하면 삿된끝 정신등이 亂覺을 線律 튕기듯 한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욕되다 함은 종되지 않을 것이 감히 종되지 못할 것이 종되었음이요°(모든 것은 갈라서 누구를 卑下하여 종삼지 못할 一色空의 일부분임°일부분은 창공과 같아 곧 全體임) 쭉정이라 하였음은 이용만 당하고 난 다음 實得없이 버림받았다는 뜻이요 뜻한 바를 잃었음(指表를 잃고 우왕좌왕 원하는 바를 흡족히 얻지 못함)을 뜻함이다。이상의 말뜻이 반드시 그렇치만도 않나니 참도 있나니 한다면 바로 이 말씀이 벗어남의 문턱이다. 즉 그것만이 아니다 라는 無眞理 이면 진리라 하는 얽힘에서 벗어난다 하리라. (※ 정리때의 생각… 뭘 그렇게 속아만봤나! 희롱 골탕만 먹었는가? 농간부리는 귀신같은 운세가 무엇을 깨닫게 할려고 그러는 것인지 이리 저리가게 하고 저것 이것하게 한다면 인내도 한계가 있는 法 된 돌부처도 깍기는데 사람에 심성이 오죽할 것인가? 하루에도 세상 거둬칠 생각이 열두번도 더 들 것 아닌가?) 이제나 저제나 미제나 진리요 생명이요 길이요 하는 것은 이 배불러 내치는 오만에 말같지만 모다 삿된 부류에 의해 생긴 것이니 그런건 원래 없는 것이다。(※ 대체 무엇을 누구를 제도하겠다는 건가? 求하는 行爲나 方式 및 儀式대로 물들이고 종삼겠다는 것이지…)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이 一家見을 이룬다면 그 또한 진리가 아닌가? 한다면 물론 그렇다 할 것이나 그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마저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으로 否定되라는 것이니 無眞理는 限을 지을 수 없는 것이다。이 限을 지을수 없는 것이 限이라서 진리나니라 한다면 이 말씀의 모순과 뜻의 모순이라 할 것이다. 집착하여 궁구하고 따르면 이 진리나니 즉 진리라는 것이 엉기나니 그렇게 아니하면 이! 없나니라. 추종치 않으면 함정에 빠지지 않으나 有(둠) 즉 끌어드리고자 하는 힘에 이끌리어 상관케되고 상관하므로 빠진다.眞理가 이! 삿된 生成이니 그곳에 끌려 쫓게된다 추종하면 信빙한것이니 그 힘의 엉김 고(罟) 塊를 확산시켜서 물들게한다 그것만이라 하는 것은 추종치 않으면 無力하고 끝내 없어지게 마련이다.또 추종자가 쭉정이가 되면 힘써 펴고자 못해 의지할대가 없어지니 의지할대가 없어지면 그 없어지는 것이다. 진리라 하는 것이 여타를 상대해 보곤 현실적으로 이용가치가 없으면 끌어들이고자 손길을 뻗치지 않는다。前功에 대해서도 전혀 보은할려하는 뜻이없는 것이다. 앞서의 종되지 못할 것이다의 해설에서 미흡한점이 있길래 附言한다면 이 무진리 즉 진리없음으로 서니라, 저 쭉정이는 그냥 쭉정이로 문드러질뿐(이용당하고 도태됨) 어느 전지전능자라도 알차게 못하리니 이는 왜냐하면 알차게 하면 진리이기 때문으로 서다ㆍ 진리탈취자가 됨으로 서다。제- 잘났다.도전자가 됨。「이상의 말씀이 반드시 진리가 아니다」 내 모든 것과 정열과 생애를 받쳤건만 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 이미 빈 쭉정이 인 것을… 이 빈쭉정이가 진리를 위한 虛象의 無眞理인가? 할 것이다 물론 無眞理의 上에서 무슨 깨달음이 있다면 그렇다고할 수 있을 것이나 무진리 진리라 하는 것이 어딘가가 불명확해 미련에 여운만 감돌게 한다 할 것이다. 「三」。宇宙의 形成 상태를 空化數 및 德字形破解에 의지하여 밝혀볼려는 痴愚 삿된 생각의 功夫 (※이것은 몇 년전 立案작성 해논 것으로써 정리때와의 立長見解와 다소 差異가 난다。혹 모순되고 미달논리라 하더라도 다음글의 연계상 그냥 적어본다) 空의 界는 十方(點=점=점이라 쓰여져 있는데 점의 확대축소의 설명이 없음)의 界요 十方의 界는 現感치 못하는 것이라도 亭滯의 界니 정체의 계는 어떤 것일지라도面線點이 있다 정체의 계를 통과하던가 떠나던가 하면 무위유동의 界다 무위유동의界는 시간 거리감 공간감등 何感도 없다 이것이 없을뿐더러 그런 것 자체를 모른다((※ 感없이 안다는 것인지 모른다는 것인지…。感없다면 알 수 없다는 것인데 流動의 界라는 것은 억측일뿐 들어내어서 증명치 못한다 할 것이다.푸른 창공 푸른 물속과 같은 정신一色(그것이 정신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 무엇인지 모르는 것의 一色)이라면 知與否 感與否를 논할 필요가 없이 그냥 안다는 뜻일지 모른다)) 流動의 界는 그 어떤 理想이나 관념을 갖고 헤아릴 수 있는 界가 아니니 즉 하나님의 界라 하는 것도아니요 佛의 界라하는것도 아니요 그 어떤 主義나 思想도 아니며 그냥 無 다ㆍㆍㅡㅡ 오직 모름이다 以上의 말씀은 自他가 다 認知하는 말씀이라 하고, 아는 것은 내라함이니 無眞理에 들지 못한다 오직 슬기로움이 뭔지도 모르는 멍청이 같은 모름이 無에 가깝다. 나리로다 天界 佛界라 하는 界도 (육감 및 어느 감으로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亭滯의 界에 속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전체의 생성원리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보이지않고 듣지 못하고 취향치 못한다하더라도 成空數 破德字形의數로 논할진데 十四一心중의 그 一心의 늘은수二十四數로 生成 및 흐름을 관여함으로서다 (※ 이것은 지금(정리때)에 와서 보면 무슨 생각에서 그렇게 썼는지 모르겠다 그때에 그럴듯한 착상의 당위성이 있었을 것이나 완전히 삿된 생각에 잡혀서 쓴 글이다。왜냐하면 그런 數가 따로놀지 않기 때문이다. 天과 佛이라 하는 삿된 귀신이 웅크릴 餘地의 數는 없다。人人이 天과 佛을 주어섬기니 엉뚱한데다 빗대어 그게 그런 것에도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해봄직 했을 만도 하다할 것이다) 諸佛은 十四一心이라 하고 하나님은 十四로 에워싸는 듯한 육신 피조물을 삼고 一心 自我의 主된 停處로 삼아 諸事物)을 관장하기 때문이다.(※ 이상의 말도 또한 불분명한 것이다) 肉身이란? 心家 精神家를 뜻한다 할것이다.實界의 神이라 하는 것은 被造된 性格의 神이요 虛象의 神은 창조주 하는 것이라 할 것이나 그허상의 창조주라 하는 것이 또한 육신의 집을 (부정하고) 떠나 있을 수 없다 할 것이다. 그러면 十四一心이라 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 덕字形 空論理 앞서의 면적과 부피론 六合八空 軸心을 말함인 것이다(내생각에 최면이 걸려 있으니 서두부터 집필 끝까지 읽어나가다 보면 자꾸 생각이 번복되고 관념이 변해나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할 것이다。마치 늘어지게 생긴 線이 휘어감기듯 해서 흐르듯 말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일관성이 없는 모순 투성이 저술로써 사측한 생각이 집히는 되로 글도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울어 당시마다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天 佛 또한 亭滯의 界이며 유동의 계는 아니라 한다면 이것이 어딘가가 덜되고 모순된 점이 있다 할 것이다。어떠한 假象體를 對象으로 삼고 이리훑어 보고 저리 훑어 보며 그를 비하 하거나 격하시키고자 하는 생각은 이제나 저제나 추호도 없다. 혹 유동의 界라는 것이 氣界로 삿된 뜻이 웅크려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님、참으로 하늘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또 들고 있는 것이다。流動의 界는 無(無的인 것이란 뜻)다. 「四」。雜念 數多 샘솟는 고뇌 (一) 나쁜 감정을 일으키는 것이 自我 心身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時間에 氣流와 時流와 공간이 有動되는 氣流粒子 諸元素들이 殺惡할제 그에 해 있는 노출된 정신과 심신을 충격하여 感性 나쁜 方向으로 이끌기 때문에 나쁜 감정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여기서 殺惡하다 하는 것은 自己의 生體리듬과 附合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띠풀을 당기면 모든 뿌리가 따라 뽑히려 하듯 모든 잡념이 한꺼번에 일어나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가 감이 잡히질 않는다. ※ 時間은 다스림이고 空間은 基이다。공간엔 氣運이 있다。공간의 氣를 그時가 다스림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 結果인 것이다. (二) 事에도 善惡이 있고 物에도 善惡이 있다。事는 다스림의 時間이고 物은 공간의 氣運에서 비롯되어 생긴 것이라 하고 머리에서 맴돈다. (三) 諸事가 心증을 굳혀 行爲로 옮기려 할 당시에 이미 그에 대한 좋고 나쁨이 定해진다는 것이다.(※ 절대 상대 性向은 心에서 일어난다는 뜻일게다) (四) 見物生心 外的인 유혹을 內部에서 뿌리치지 못해 생긴 것이 결과라는 것이다。여기서 內部란? 精神이다. (五) 정신의 잡념은 누적된 기억에 의하여 상상력을 크게 그린다.그래서 고뇌하고 육신도 따라 어지러운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이러므로 정신이 모르면 정신도 맑은 상태를 유지하고 육신도 따라 어지러운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六) 육감으로 느끼지 못하면 유혹당할리 없고 관여해 집착속에 빠질리 없다。육감치 아니하면 유혹당하지 아니해서 욕망이 사라지고 그 욕망에 의한 발전성이 없다하면 이는 삿된 진리를 추구코자 하는데서 나온 천박한 발상일 뿐이다. 왜냐? 진리라 하는 것은 삿됨의 극치이기 때문이다。내라! 하는 것은 삿됨의 극치로써 삼라 제상을 이뤄 저마다 독특한 면을 내보이고 내라 하는 것이다. 저- 빼어난 기상마다 삿된기교 진리의 결정체로 되어 있다 할 것이다.이미 진리라 하는 것은 내라!하는 것이다。내라 하는 것은 자기만의 가진특색이 있다는 것을 내세우는 것 주장하는 것이니 삿된것이라 함인 것이다. (七) 마음 일편에서 빈정대길 그런논리라면 정신마저도 삿된것이니 精神은 나라는(自我) 것을 알리는 수단과 방법등 존재가치를 시키기 위해 집(心家) 한가운데(어느 일구석진 곳인 지도 알수없다) 웅크리고 있어 그런 목적을 내세워 내라 하기 때문에 이 삿된 것이다 하는 또、이러한 삿된정신이 말하길 나는 삿된진리와 가면 쓴 무진리를 비판한다 하고 三布(사양 봉사 희생)의 정신등 自己를 버림없는 것은 무진리가 아니다.또、그런 것을 利用해 스스로를 돕보이게 하는 것도 무진리가 아니다。또 먹혀 없어진 질(진)줄 모르는 것은 무진리가 아니다 하면서 同化(자 이라고 내세울게 없다)되고 소멸되어 잠잠한 것이 무진리이니、存在價値를 알게 하는 壹의 次元을 어기는 것(勝) (메이지 않고 壹로 부터의 탈출)。스스로가 어느 점(點)에 있다는 大達覺性(해탈을 숭상해서 그에 메인類)의 次元을 超越한 것이 무진리라 할 것이다 하고 내뱉듯 주어섬기고 있는 것이다. 또 말하길 저들의 반대立長에 서 있는 諸惡殺이 무진리에 더 가깝다 할 것이다 하고 꽈배기 심사를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八)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체 하는 것은 등장(登場)되는 (배경 및 物事가 지니고 있는 원래 의미나用語의 原來의 意味) 원래의 뜻들을 辱되게 할 수도 있다. 一切의 고뇌와 번민이 무진리가 아니다。삿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수다스럽게 늘어논다면 다음등과 같음이니 즉 솔선수범치 않고 요구하는 것도 무진리가 아니다. 솔선수범하고 요구하는 것도 무진리가아니다= 이는 왜냐? 앞서의 삿된 원인설명에 있다 싶이ㆍ 내라하므로서다。통과하고 소멸되고 잠잠하면 무진리이나니라。 이 말씀 또한 진리라 해서 일가견을 이룰진데 삿됨의 극치인 진리이지 무진리는 아니다. (九) 무진리는 어디에도 없다。 그럼 무진리는 대체 뭔가? 혹 답하길 無知 無我 無量등 모든 無字 들어가는 用語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무진리 이나니라。이것이 또한 家見이 된다면 아니니。이런식으로 파고든다면 말 떨어지면 티끌 묻을까 줍는 노파 치마 꼬리 물고 늘어지는 삽살개처럼 보이지。무진리는 어디에도 없다 할 것이다. 또 말하길 정신의 감각 육신의 행동 우주의 활동 등이 그려내는 것은 무진리가 아니다.모든게 모든 집필내용이 무진리가 아니다.그러나 무진리는 반드시 있을 것이니 반드시 있다 한다면 아무래도 무슨 상관이냐는 식의 아무러크소니가 무진리라 하면 어떨까…이다。즉、아무러크소니가 무진리를 대표하는 적절한 표현의 간판 명분인 것이다. 이 말씀이 또한 진리를 이루더라도 아무러크소니이니 아무러크소니는 어느 일방적인 것을 대표하고 내보이는 내라하는 진리가 아닌 것이다. (十) 그럼、아무러크소니는 뭔가? 앞서 말했듯이 우리 사람들의 여유로운 마음을 담은 뜻 우리(○)나랏 말씀이다。내라함이 없는 곳으로 가고자 할진데 나를 벗겨 내 참모습을 내보이는 말씀과 글(文樣 江山 國土大地 風俗 얼 및 결 풍물 지닌 思想 등등 우리의 것에 의한 바른 來歷의 定立)로 부터이다。 나를 없애기 위하여 너(外로부터 갈마들어오는 모든 것。사상과 이념 主義 理想 신앙 신념 및 文物등 이중에는 깨임과(覺) 美化의 極致를 달리다 못해 그 優秀性을 강조하다보면 날조의 관점으로도 보일 수도 있는 것이 있다 할 것이다. 날조된 것 같은 것은 날조를 고증해보일려는 도전을 받게 된다라 하는것(外來가 좀(蠢)먹게 하는 것은 책임 등과 같은 것을 회피 전가시켜 관점을 희석시키고 願고(罟)가 쌓인데서 모면하려는 얇은 생각에서 비롯됨이다. 관점의 願고(罟)가 쌓였는데 어찌 나를 없앨 수 있을건가? 짐을 지고 고갯길에 땀 흘리는 자를 보라。어찌 진실로 그의 願이라 하겠는가? 그 흐름으로 벗는 걸 그 짐을진자, 스르로 알면 달가워서 願이라 하겠는가? 그래서 영원한 안식처로 듦을 원이라 하겠는가? 모면하려는 것은 부끄럼만 아니라 닦지 않고 덕을 얻고자 하는 비루한 覺이요 내라(우리)의 옴(흐름얼 來歷)을 욕되게 함이다。이런 뜻의 말씀이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진리속의 말씀이나 진리를 말씀치 않고 어찌 무진리를 舉論하겠는가? (※ 끊임없는 번민… 마음이 달가우면 何事에 臨에도 큰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心의 리듬과 맞추었기 때문이다. 즉 능동적인 행동이 되는 것은 육신의 고통쯤은 감내하고 마음 흡족히 여긴다) (十一)物事를 관찰함에 있어 원망半 조소半으로 빈정되는 것은 바른심리가 아니고 비뚤어진 心氣에 의한 삿된비판 不平을 吐 로함에 불과하다。따라서 그러한 심기엔 관점도 사시적이고 뒤틀어질 수밖에 없다. 남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을 돌아보고…이런 격언을 내세워 자신을 돋보이려는 목적으로 이용하거나 허물을 벗고 교묘히 빠져 나가는 수단으로 이용코자 한다면 他人의 시각엔 곱게 않나타날 것이다.그래서 是我非我를 논하기에 앞서 처신을 바로 하라는 것이다. (※ 정리 때의 생각 다음 나오는 내용이 自我 열등의식에서 남을 헐뜯는 말이 아닌가 한다。劣等치 아니한데도 글로써 他의 위상을 높이고 스스로를 卑下하여 부끄러움에 들고 있으니 이것을 갖다 自作之雙(자작지얼)이라 하는 것이다.어디다 基準을 세워 榮辱을 판단하는가? 그 헐은 삼베옷을 걸치고 저 남이 걸친 비단옷이 낫다 함은 부럽게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니 그 실상、내 면을 들여다 본다면 오욕이 난무 하고 악전고투의 격전장에서 핀 꽃과 같음인 것을 왜 모르나. 연꽃을 사랑하고 높이 쳐 주지만 슬픈 일인 것이다) 내용은 이렇다…. 내라의 옴얼(내려온 깃든 기상 및 정신 또는 스며있는 品결)이 어찌 너(外來的인 모든 것 思想 文物 利器 등등)만 못하겠는가? 苦辱 속에 自克받은 것은 기억에 남아 생각조차 되돌리기 진저리쳐지는 것이니 잊고자 두 번 다시 겪음을 싫어하고 평소 좋은 것은 돌출되게 나타나지 않는 것이 많아서 忘覺의 세월과 같이해서 영원히 靈庫에 쌓임을 모르고 알고자 아니해서 너만 못하게 여겨질 뿐이요. 우리 사람들이 善仁하다 못해 痴愚하게 보여서 浮雲처럼 머무를 곳을 몰라 힘겨워 하는 흡사 곧 터질 것 같은 열매의 몸으로 내 씨앗을 뿌릴 수 있는 밭을 주소서 애걸하는 것처럼 겉모습은 다방면 관찰척도에 따라 여러 가지일 수도 있으니 무섭게 두렵게 순박하게 온순 양순하게 순수한 것처럼 덕을 베푸는 것처럼 물들임을 감춘 이중성격의 물감원료처럼 福된 것처럼 갖은 갖은 힘드는 것은 제가 도맡아 하는 것처럼 갖은 寶化利器와 좋은것 기쁜 것 즐거운 것은 제가 다 가진것처럼 全知全能의 自存者처럼 등등이다) 너를 우리내 禮儀로 받아들였을 뿐이다。피로에 지친 나그네가 풍문에 들으니 고향집은 쑥대밭이라서 돌아가길 싫어하고 어두운 밤에 등불을 찾는 것 같이 함에 가련코 측은해 보여 고루 거각과 같은 나의 얼의 품에 들게 하니 도리혀 저가 힘이 세어 차지한줄 알고 남에 집 차지하고 주인인체 우리를 종 부리는 것 같이 한다。슬기가 너만 못함이 아니요 힘이 너만 못함이 아니요 덕이 너만 못함이 아니요 흐름의 歷史美化를 너만 못하게 함만이 아니라 이제 너 흐름(역사)의 미화의 말씀을 네게 대신케 한 것이 우리 흐름얼의 아름다운 말씀을 우리 後家身에 있는 자가 代表性을 띄어 말씀함에 너희 말씀과 行爲의식과 따라온 여러 가지 라는 것이 한낱 허구에 찬 것을 우리의 영화로움을 차차 알 것이다. 네가 네 길(道)을 펴는 것도 其實은 우리의 영화로움에 에워쌓여 있는 것을 왜 모르나? 너 하겠다는 보살을 위해 미개한 것처럼 보이는 佛과 굶주린 껍질을 쓴 佛과 지저분하게 보이는 탈을 쓴 佛과 야만적인 것처럼 보이는 個體를 하고 있는 것임이니 네가 고를 풀겠다는 福된 터는 이와 같으나 그 제공자가 원래 主人이다。製供者는 여러 가지 제공象이니 우리이다.우리는 宇宙의 根源 桓(韓)國의 空들이다。 여기서 석씨 用語를 자주 因用하는 것은 짧은 문장 구사 실력이다 보니 표현의 한계에 도달해 장벽을 만나기 때문이다.이러니 석씨 영향을 아니받았다 할 수 있겠는가? 따지고 보면 석씨 또한 小槪念에 국한해선 外來임엔 틀림없는데 말이다。國家觀만 갖고 논하는게 아니라 정신마저도 남이라 하였는데 그정신을 집한 여러 思想이야말로 몇발치 건넨 外來인 것이다. 이 無盡에 말씀이 이 티끌만도 못하고 仁核(작은 씨앗)만도 못하고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어 없는 것 같으나 大우주와 그 구석에도 차지 않아 조그만 시공을 할애한 것이 이 없는 것 같아.그 티끌 우주를 닦지 않아도 밝기가 光珠에 비교할 바 없다.오히려 그 티끌이 광주와 같이 있어 빛을 뿜을 뿐이다(※ 시공간은 말씀의 글이 담긴 여러 가지 책들을 차곡차곡 쌓은 것 같아 그 여러 말씀을 필자의 미미한 역량으로 티끌만큼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十二) 그럼 아무러크소니가 어떻게 無眞理인가?(※ 이 내용은 뒤에 나오는 桓思想과 虛實論 뒤에 나와야 적당하나 먼저 저술된 것임으로 그냥 정리한다。未達된 이론으로써 미흡한 점이 많고 흠결투성이다)時空엔 萬類가 存在하니 其中엔 우리 나라 말씀도 있다。時空을 超越하면 本然이 何處이며 무엇이 있으렸만은 時空으로 있으니 形象이 있고 形象이 있으니 東西가 있고 天地가 있고 이에 말씀도 있다. 그중 우리(우리란 울=에원싼 울타리란 의미도 있다고 어떤 學者가 말하는 것을 들은 것 같기에 그 의미를 취하여 본다면 둥그런 테의 形容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이는 모두를 包容하는 울테란 뜻을 또한 갖고 있다 할 것이다) 나라말씀이 있고 우리(○)나라 글로부터이니(모든 物事가 글(문늬)이지만 이에는 象形을 취함과 表音을 취함이 있다。象形은 空과 物的인 面이 많고 表音은 時와 事的인 面에 더 치우쳤다 할 것이다。象形은 여러 가지 象과 形에서 그 意味를 따온 것이거나 象과 象의 合成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표음은 소리 生成을 여러 가지 音域의 단계로 구분하여 文字化한 것이다。표음글자 또한 역시 點空形으로부터 序頭를 잡아 소리 울림의 모양새를 형용하여 文字化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필자가 알기론 사람입속(口中)이 소리낼 때 짓는 모양새에서 文字를 形容한 것으로 알고 있다。사람의 다문 입속을 원래 空限象이라고 가정한다면 그에서부터 모든 表音文字의 시발점이 되는 것은 확실하다 혹은 집현전 학자들이 고심중에 은연중 문짝 짜임새 무늬를 보고 그에서 着案하여 글을 만들었다는 說도 있다。하지만 桓檀古記를 본다면 韓國表音은 훨씬 그 以前서부터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필자가 고증하기도 어려운 古記를 신빙하는 것을 갖다 은연중 日人이 自己네 民族을 桓族의 分派로 정당化시키고자 美化掉造(날조)한 글을 信用한다.叱責할지 모르나 그것이 날조된 것이라는 근거는 또 무엇이 있단 말인가? 혹이 말하길 그 書를 본다면 그 自體로도 허황하다 하나 이는 日人植民統治下)에서 핍박받던 때의 암울한 史觀이 잠재의식속에 되살아나 그들이라면 무조건 거부하고 미워하는 관념이 틀에 밖혀 있고 舊債를 新債로 代替한 것에 불과한 것인데도 西歐外來思想 善好하는 자들이 자기들이 추종하는 思想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몰아부치는 우리 얼을 욕되게 하는 事大主義 發想에서 비롯됐다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극히 몰지각한 발상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日人이 우리에게 한 행위 를 옳다고 두둔하는 것은 아니다. 쏜화살처럼 문맥이 그렇게 흘러가는걸 방계곡경으로 뒤틀수없기 때문이다 어느 책자에는 굽은길로 쏜살같이 달러간다 비유하기도 한다 ※ 생각이 딴 곳으로 흐른 것 같다。아무튼 각설하고) 너희가 時空形을 관찰함에 그 관점이 우리의 本然에 取指에 어긋나게 말씀 어휘를 짓고 글을 지어 우리의 無眞理로 흐름을 그릇되게 함일세라。이러모로 時空本然의(인) 우리나라 말씀에 맞는 표기 글을 세종임금을 내어 만들었나니(정리하였나니) 곧 訓民正音(백성 즉、 사람을 가르치는 바른 말씀의 )이다。이 글을 옛의 우리 학자가 어떤 뜻에서 지었는지는 後裔(후예) 생각이 잘 몰라도 후예의 覺이 우리란 뜻을 닮은 꼴로 나름대로 풀기를 이렇게 하였으니 자세히 새겨볼 것이다. 時空形이 있음으로 萬類有力이 있고 力이 있으니까 生克이 있고 明暗이 있다。이에다 뿌리를 두어 만들었음에 그 時空形과 配合이 된다。眞理 一 生覺 울림의 말씀이 表面(聲出)을 싸서 나타난 말씀이 된다. 形이 있음으로 方六合 上下左右前後가 있고 그 形이 있음으로 東西가 있고 南北과 天地가 있다. 本然의 一生覺이 點中이라 할 것이나 이미 나타난 六合을 面으로 표현함에 天地(上下)를 中으로 하고 左를 東으로 하고 右를 西로 하고 뒤를 北으로 하고 앞을 南으로 하였다. 이는 時空運行(地球의 自然法則)을 봐서 밝고 따스한 方向을 앞으로 하고 어둡고 추운 方向을 뒤로 하는 然由에서 비롯됨이니 눈으로 보는 時空 관점상 앞은 밝고 남쪽은 해가 지나는 곳으로 따스하고 뒤는 보이지 않는 곳임으로 어둡고 그림자 지나는 곳으로 춥다 하는 然由에서 비롯됐다 할 것이다. 또한 이치는 尺度를 잴 수 있는 精神을 가진 秀氣體 人類가 땅이 큰 北磐歐에 오랜 세월동안 삶으로 인해서 관점을 그렇게 두게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時空上의 聲音의 울림 波長이 無方으로 퍼짐에 始發中點에서부터 線象化하여 幹線으로 表現한다면 經緯線 十字形으로 表現된다. [* 지금 이강사가 역설하는것을 흔민정음 창제 원리 혜례본이나 운해본 같은글 내용 을 근간으로 하는건 아니라는 걸 미리 밝혀둡니다 2023년8월8일 텍스트할적 부언한 말임] 이는 物을 前面에서 直示한 幹의 상태와 같은 것으로써 면적을 나타내는 基本線인 것이며 부피를 뜻하는 선은 직시한 상태임으로 나타나지 않아도 있는걸 알 수 있는 것이다. 音聲 또한 전율하는 氣粒子의 連結線上에서 形成된다 할 것이다(※ 어떠한 立體物을 그 前面 또한 側面에서 直示할 때에는 單面形만 나타난다 할 것이다。車形을 생각에 떠올려보면 알 것이다) 글자成立上 뒤에서 받쳐주는 母音 글의「形」成立부터 說明한다면 萬有의 원만한 매듭을 뜻하는 音으로써 입을 크게 벌려 입안 全體를 둥글게 원만하게 울려서 내는「아」발음은 글 十字形에서 볼 때 오른쪽으로 꼬리를 두고 있다。오른쪽은 해가 지는 방향으로 해가 지면 결실을 뜻하니 方은 서쪽方이다。이와같은 論理로 聞一千悟할 것이니 결실을 맺는다는 뜻은 열매는 대개 완성단계엔 단단한 것임으로 쇠의 性質에 비유했고 쇠는 숙살시키는 성격을 가졌으니 낙엽은 쇠락해 歸根하고 生物은 움추려들게 되는 것이다(※이는 五行論에서 거론해야 마땅하다 할 것이다) 아무튼「아」形은 그렇고「우」발음形은 입술을 내밀고 목속에서 끌어내는 듯한 발음으로써 十字形에서 볼 때 꼬리를 뒤쪽 北으로 하고 있으니 그 性格을 論한다면 物事가 갈무려지는 곳(藏庫=장고 또는 묻힘)이므로 萬가지를 받아들여 갈무리는 것은 물(水=大海는 萬物의 庫이다) 만함이 없으니 水로 비유했고 물은 또한 흘러 모여고이고 넘치면 재차 흐르는 성질을 가졌다(※ 자꾸만 조잡하게 설명하는 感이 든다) 「어」字形 발음은 십字形에서 볼 때 꼬리를 왼쪽으로 하였으니 해가 뜨는 곳이다. 해가 뜨는 곳은 東쪽으로써 사계절로 論할진데 春節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봄철이면 만물이 生動하여 움(싹)트고자 함에 일의 시작이다。껍질을 터트리고 싹이 올라오는 것은 힘겹고 어려운 일이다.그 힘들어 하는 모습을 힘이 들어가는 發音形「어」字形으로 표현함인 것이다。헤집고 나오게 되는 亨(형)통하는 발음이다. 혀를 띄워 굴려 어금니와 볼을 울려내는 발음으로 그 뜻을 헤집고 자라오르는 나무(木)에 비유했다. 「오」字形에서 볼 때 앞쪽으로 꼬리를 향하게 한 발음글이다. 이는 해가 지나는 남쪽방향을 가르키는 形으로써 사계절에 있어선 여름절후가 됨이니 한나절의 뜨거운 太陽烈처럼 만물의 왕성한 활동을 뜻한다。입 모양은 입을 동그랗게 혀를 약간 위로 띄워 말리는 듯하게 해서 내는 발음으로써 겉입의 형태가 양볼은 들어가게 하고 입술은 동그랗게 해 앞으로 내미는 듯이 해내는 발음이다。順三角形의 形格을 띄니 불꽃을 연상하는 形으로 불로 비유했다。참고로「우 字形은 逆三角形 形을 띈다 할 것이니 花분 같은 것을 연상한다 할 것이다。 「이」발음은 세운 수직線形의 발음으로써 혀를 어금니쪽에 닷듯이 하여 어금니를 아시물고 약간 비틀듯이 길게 하여 내는 발음으로 날줄(經)과 부피선을 연상시킨다 할 것이다。이미 十字形에서 경위(經緯)를 이루나 이는 설명을「이으」발흠풀이 뒤에 설명할 것을 먼저 한 것에 불과하다。「으 발음은 이를 아시물고 양볼을 양옆으로 넓히면서 목구멍에서 끌어내는 발음形이다。면적을 뜻하는 발음形으로 날씨(緯)를 연상한다 할 것이다。「이으」발음은 날에 날씨를 짜면 맞물리는 점이 생기니(點은 中心부분이다) 이는 中央이라 萬物을 植收(식수=심고 걷움)하는 터(基) 흙(土)에 비유했다。如他의 母音形態는 以上의 基本六音의 和合造化에서 形成됐다 할 것이다. * 아무러크 소니 일편 번뇌 수련장 중에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