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에서 삼국지를 읽다
최 재 우
사람들이 사는 지구라는 별은 사년마다 몸살을 앓는다. 월드컵 몸살이다. 이때는 이십세기 유물인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발동한다. 팽팽한 긴장의 끈을 자르는 슈팅 한방에 땅이 들썩인다. 이기고 지는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경적을 울리고, 괴성을 지르며 밤새껏 마셔 댄다.
2018년 제21회 월드컵은 러시아에서 열렸다. 우리나라는 ‘죽음의 조’ 라고 평가되는 F조에서 예선전을 치르었다. 예상대로 우리는 스웨덴과 멕시코에 연패를 당하면서 독일과의 마지막 경기를 남겨두었다. 독일은 FIFA 1위 세계 최강팀이다. 매스컴에서 실낱같은 가능성은 있을 수 있다고는 했다. 그러나 멕시코에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고 간신히 스웨덴을 이긴 독일로서는 조 최약팀인 우리나라를 많은 골 차로 이겨야 16강 진출이 확보되는 그런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독일을 이길 확률은 5%도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독일은 월드컵 조별 리그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독일과 역대 경기에서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 그런 독일과의 경기가 오늘 밤 펼쳐지는 것이다.
맥주하고 치킨은 사다줄 테니, 집에서 차분하게 보라는 아내의 청을 등 뒤로 들으면서, 거리 응원이 펼쳐지는 종합운동장으로 나갔다. 앞뒤를 훑어보아도 나같이 늙수그레한 사람은 보기 드물다. 거기에는 젊은 그들이 있었다.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인데, 벌써 운동장은 젊은이들의 열정과 패기로 끓고 있었다.
2018년 6월 27일 11시. 드디어 뚜껑이 열렸다. 잠깐 딴 데로 눈길을 돌릴 수 없는 열전이다. 발을 동동 구르고, 아쉬움의 탄성을 지르면서 나도 삼사십 대의 늙은 청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전광석화(電光石火) 같은 독일의 슈팅이 쏟아진다. 우리나라 볼 점유율이 30%를 넘지 않을 정도로 독일의 공격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전.후반 구십 분이 다 지나고 추가시간이 주어졌다. 공은 우리 골대로도, 독일 골대로도 들어가지 않았다. 이대로 0:0 무승부로 끝나는가 싶을 때였다. 독일 골망이 출렁인다.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삽시간에 우레 같은 탄성과 뒤엉킨 몸짓으로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든다. 우리나라 태극전사들이 독일 전차군단을 격파하는 극적인 순간이다. 이제 남은 시간은 겨우 이삼 분. 은근한 걱정은 독일에게 한 골을 먹어 1:1 무승부로 끝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생기고 있을 때였다. 바로 그 순간. 푸른 잔디밭을 단독 드리블하여 독일 골대로 질주하는 선수가 보였다. 푸른 잔디밭에는 독일 골대로 구르는 공과 그 공을 쫒아 질주하는 한 선수만 보일 뿐이다. 월드스타 손흥민 이다. 아무도 없는 독일 그라운드를 바람처럼 빠르게 치고 들어가고 있다. 거칠 것이 없고, 막을 수가 없다.
바로 그때, 나는 조자룡이 생각났다. 그를 처음 만났던 것은 까까머리 소년 시절이었다. 삼국지에서 그를 읽었을 때 가슴이 두근대었다. 상산 땅 조자룡이 유비의 아들 아두[뒷날의 촉나라 황제 유선]를 갑옷 속에 품고, 조조의 백만 대군을 돌파한다. 단기필마(單騎匹馬)의 용맹이다. 적들이 수백 수천 겹으로 에워싸고 있는 벌판을 조자룡이 가로 지르고 있다. 잔잔한 호수 위를 가르는 일엽편주처럼 적진을 돌파한다. 대나무를 쪼개듯이,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백만 대군을 가르며 조자룡이 달린다. 그 삼국지 조자룡 모습이 오늘 이 순간 독일전 경기에서 펼쳐지고 있다. 미소년 장수 조자룡이 오늘에 환생하여 저 푸른 벌판을 저리 치닫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으로 스쳤다.
모순(矛盾)이라는 말이 있다. 뚫어야 하는 창과 막아내야 하는 방패가 함께 있다. 모든 축구 경기는 모순이다. 저쪽으로는 공을 넣어야 되고, 이쪽에서는 막아내야 한다. 독일의 집요한 공격을 막아낸 방패가 있다. 세계가 주목하는 골키퍼 조현우다. 그를 보면서 조조의 백만 대군을 혈혈단신(孑孑單身), 홀로 막아선 장비가 생각났다. 표범의 머리에 새까만 얼굴, 곱슬곱슬한 고리 수염의 괴상한 모습이다. 창 하나 꼬나들고 장판교에 딱 버티고 서서 조조의 백만 대군을 막아내었던 것이다. 벽력같은 호통에 적장은 놀라 말에서 떨어지고, 간(肝)이 밖으로 튀어져 나왔다. 조현우는 바로 장비였다. 장비가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하고, 새까만 표범의 머리를 노랗게 물들여 뿔처럼 말아 올리고 소리 소리 지르며 독일과의 경기를 지휘하고 있다. 뻔히 보이는 골인이 조현우의 손끝에서 튕겨져 나왔다. 나는 오늘 독일과의 경기에서 오래전에 읽었던 삼국지의 명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다.
누구든지 진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겼다. 오늘의 독일전 경기는 월드컵 청사(靑史)에 길이 새겨지리라. 두고두고 사람들이 TV속에서 꺼내어 보리라. 삼국지를 읽는 독자들이 단기필마로 백만 대군을 돌파하는 조자룡의 용맹과 장비의 호통을 노래하듯, 오래오래 손흥민과 조현우의 이 경기를 칭송하리라. ‘카잔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축구를 보면서 딸, 아들 같은 젊은 그들에게 전하고픈 말이 자꾸만 입안에서 맴돌았다.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끝났다고 끝나게 아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멋 집니다 . .스포츠는 각본없는 드라마라고하지요 . 전 그냥 이쁜여자만 ㅎ ㅎㅎ
다시 그장면을 보는 스릴를 느끼며 기적을 낳은 독일과의 월드컾에서 손흥민과 골키퍼 조현우를 기억할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