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만원 현상 공모>
2024년 제9회 신인문학상
제9회 신인문학상 심사과정
•원고마감 : 2024년 3월 31일
•응모편수
- 시부문 : 175명 응모(작품 편수 880편)
- 에세이부문 : 77명 응모(작품 편수 207편)
- 평론부문 : 1명 응모(작품 편수 7편)
『시와산문』 신인문학상 부문별 예심
•예심일자 : 2024년 4월 25 (월) AM 11시
•예심 심사위원
- 시부문 : 황인찬, 김양숙, 김명아
- 에세이부문 : 문보영, 이은숙
- 평론부문 : 문보영, 이은숙
〈예심 통과작〉
- 시부문 : 김채원, 「계절의 끝에 서다」 외 11명
- 에세이부문 : 유나경, 「사진 안부」 외 10명
- 평론부문 : 예심통과작 없음.
『시와산문』 신인문학상 부문별 본심
•본심일자 : 2024년 5월 2일 (월) PM 5시
•본심 심사위원
- 시부문 : 장석남, 황정산, 장병환
- 에세이부문 : 황정산, 장석남, 장병환
〈본심결과 수상자〉
- 시부문
-
대 상(1명)_ 임수민, 「칼날 위에 선」 외 2편
우수작(1명)_
신현숙, 「스웨터」 외 1편
- 에세이부문
-
대 상(1명)_ 우주연, 「무꽃」
우수작(2명)_
윤주연, 「단순하게」
조성주, 「이발소 그림 풍경에는」
<예심평>
세계를 매만지는 독특한 시적 인식과 예리한 언어 감각
이번 2024년 시와산문 신인문학상 시 부문에는 175명의 응모자가 880편의 작품을 투고해 주었다. 문학에 대한 깊은 열정과 열의가 느껴지는 작품이 많아 심사하는 동안 큰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해외로부터 전해진 투고작들도 적지 않았다는 점 또한 특기할 만한 부분이었다. 먼 타향에서 모국어를 다듬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귀한 일이라 할 수 있으리라.
예심 과정에서는 이처럼 뜨거운 열정과 더불어 우리 시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고된 수련이 느껴지는 작품들을 선발하고자 했다. 시가 무엇인지 깊게 고민하는 시적 성실성과 더불어 오늘날 우리 시에 필요한 새로운 감각과 목소리가 무엇보다 우선되는 심사 기준이었다. 신인에게 기대되는 것은 시적 숙련도와 완성도뿐만 아니라 우리 시에 활기를 불어넣을 새로운 개성이며, 종래의 세계를 일변할 만한 저력을 지닌 낯선 목소리이다. 그러한 개성과 마주하길 바라며 예심을 진행하였고, 그 과정을 통해 11명의 작품을 추릴 수 있었다.
이선연의 「그는 서랍 속에 살고 있었다」 외 4편은 뚜렷한 이미지를 통해 시를 끌고 가는 점이 신뢰를 주었다. 또한 연속되는 시편들이 일종의 이야기를 구성하듯이 이어지며 독특한 매력을 자아냈다. 일련의 특징을 통해 자신만의 개성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시를 다 읽고 났을 때, 손에 쥐어지는 것이 적다는 것이 무엇보다 아쉽게 느껴졌다.
이교진의 「앵무의 혀는 나의 혀를 닮았다」 외 4편은 언어에 여백이 많아, 시적 긴장감을 자아냈고, 적은 언어를 통해 이미지를 구성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시란 말하지 않은 것을 통해 더 많은 것을 전하는 양식이라는 사실을 잘 이해하는 것으로 보였다. 시편들이 다소 추상적인 경향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목소리를 통해 나름의 개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신현숙의 「스웨터」 외 4편은 오래도록 시를 수련해 온 이의 솜씨가 엿보였다. 사물을 경유해 세계를 매만지고, 독특한 시적 인식에 도달하는 고유의 방식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으며, 때로 과감하게 던지는 시적 선언 또한 시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임수민의 「칼날 위에 선」 외 4편이 보여주는 예리한 언어 감각 또한 좋았다. 단정하고 가볍지만 동시에 선명하게 표현되는 세계가 상당한 신뢰감을 주었다. 작은 움직임을 포착하는 그 예민함 또한 시인에게 필요한 미덕으로 여겨졌다.
김하원의 「고스트 스토리」 외 4편은 감각적인 언어와 개성적인 시적 주체의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자유로운 발상과 상상력을 통해 시가 마주하는 세계를 거침없이 넓혀가는 점이 장점이었는데, 한편으로는 넘치는 표현력이 오히려 시 세계를 가린다는 인상을 주어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김영화의 「숲 도서관」 외 4편이 보여주는 섬세한 문장을 읽으며 즐거움을 느꼈다. 자연물과 사물을 자유롭게 매만지며, 시적 상상력을 넓혀가는 전개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탄탄한 문장력이 미더웠고, 그 구성이 안정되게 전개되는 점 또한 그간의 시적 수련을 반증하는 것으로 보였다.
최웅식의 「나무병원」 외 4편의 대범하고 흥미로운 상상력은 읽는 이의 흥미를 자극했다. 문장 간의 간격이 만드는 활달한 감각 또한 매력적이었다. 거침없이 전개되는 언어와 그 시적 전개가 매우 인상적이었지만 때로는 그로 인해 불거지는 거친 선언과 성긴 문장들이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밖에 이호재의 「기다리지 않는 봄」 외 4편, 김채원의 「계절의 끝에 서다」 외 4편, 류윤하의 「주문」 외 4편, 이동민의 「판화」 외 4편, 양사강의 「모란 경전」 외 4편이 좋은 평가를 받아 예심을 통과하였다. 그와 더불어 아쉽게도 예심을 통과하지 못한 작품들 가운데도 마음에 남는 작품이 남았음을 덧붙이고 싶다. 문학의 가치란 손쉽게 우위를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투고와 심사라는 형식 속에서 아쉽게 손에서 빠져나가는 작품이 있을 수밖에 없기에 이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는 사실 또한 함께 밝혀둔다.
문학이 사소해져만 가는 요즘, 문학에 대한 깊은 애정과 열정을 보여주신 모든 투고자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설령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시의 형식을 갖추고 우리가 그것을 나눌 수 있는 한, 문학은 그 아름다움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시를 사랑하는 그 마음을 잊지 마시기를, 그리고 계속 써나가 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다.
_ 예심 심사위원: 황인찬 김양숙 김명아
좋은 에세이의 기준은 무엇일까
올해로 9회를 맞이한 『시와산문』 신인문학상 에세이 부문에는 총 77명의 응모자가 210편에 가까운 작품을 보내주셨습니다. 전국 각지를 비롯하여 해외에서 온 원고도 있었습니다. 보내주신 원고를 읽으며 깔깔 웃기도 했고 눈물을 조금 흘리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심사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독자가 되어 작품을 감상했습니다. 따라서 심사평을 쓰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어렵게 느껴집니다. 많은 분께서 심사 기준을 궁금해하리라 생각합니다만, 사실 심사 기준이란 것은 애당초 존재하기 어려운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좋은 에세이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기승전결이 잘 잡혀야 한다?” 이 조건을 생각하는 순간, 기승전결을 갖추지 않았음에도 (혹은 그랬기 때문에) 호소력이 있는 작품들이 떠오릅니다. 카프카의 일기에 기승전결이 있나요? 그의 유명한 소설 『소송』은요?
“넋두리와 토로에 그치지 않아야 한다?” 이 기준을 제시하는 순간, 즉각 반례가 떠오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위대한 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지하로부터의 넋두리』라고 바꿔 읽어도 달라질 게 없습니다. 자기연민이 가득한 글이 나쁜 글이라면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은 어떻게 설명할까요?
“신변잡기나 일기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일기는 에세이보다 못한 장르인 걸까요?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웬만한 소설보다 뛰어나지 않나요?
“성찰과 교훈이 담겨야 한다?” 글을 읽을 때마다 무언가를 깨달아야 한다면 아마 숨이 막힐 겁니다. 『지하로부터의 넋두리』를 읽고 무엇을 깨달았나요? 아무것도… 이따금 명작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으며, 아무것도 주지 않는 그들의 빈손을 우리에게 제시할 뿐입니다. 불행으로부터 반드시 무언가를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마당에 내놓은 고추처럼 햇볕에 말리는 과정 역시 글쓰기의 한 과정이 아닐까요. 고통에서 교훈이나 배움을 추출하지 않고 건조하기. 마당에 내놓고 잊기 말입니다. (하지만 어떤 작품은 값진 교훈을 주기 때문에 좋기도 합니다….)
결국 좋은 에세이의 기준이란 것을 떠올리는 순간 수많은 반례가 떠오를 뿐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무엇이 결여되어서, 혹은 이러 이래서 부족하다는 말은 애당초 가능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에세이는 어떠어떠하면 안 된다’라는 말로 에세이를 가두는 대신, 왜 당신의 글이 우리의 마음을 끌었는지, 독자의 입장에서 편지를 쓰는 방식으로 심사평을 작성해 보았습니다.
차성환 님의 「슬픔의 거리」 외 2편은 서두부터 눈길을 끌었습니다. 세 편은 모두 타인의 이야기로 확장하는 힘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묵직한 주제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조한 묘사로 일관하는 이 글은 장면을 차분히 그려보게 했습니다. 독자의 마음을 후벼파면서 쳐들어오는 글이 있다면, 가랑비처럼 젖어 들게 만드는 글도 있겠지요. 그래서 차성환 님의 글을 ‘천천히 다가오는 글들’이라고 이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눈길을 끈 또 다른 점은 문단을 나누는 방식이었습니다. ‘오토바이가 바람을 밀고 온다’, ‘바람이 유모차를 밀고 온다’, ‘어머니가 급하게 마당으로 나갔다.’ 이 문장들은 모두 한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문단이더군요. 시의 연 갈이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이 문단 나누기는 감기에 걸린 어린아이에게 죽을 떠서 먹여주는 누군가의 손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위태롭고도 단단하게 서 있는 이 문장들은 글에 여백을 주었고, 그로 인해 어떤 슬픔이 여백을 통해 스며드는 듯했습니다. ‘오토바이가 바람을 밀고 온다’라는 문장에서는 정말 바람이 부는 듯했습니다. 재미난 점은, 이들이 하는 역할이 저마다 달랐다는 점입니다. 어떤 문장은 여백에, 어떤 문장은 장면 전환에, 어떤 문장은 감정의 고조에 기여하고 있었지요. ‘어머니가 급하게 마당으로 나갔다’라는 문장은 부연 설명 없이도 전개를 뒤집기에 충분했습니다. 차갑고 섬뜩한 바람이 부는 듯했지요. 문장을 오랫동안 홀로 놔두면 서스펜스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점을 선생님의 글을 통해 배웁니다.
또 재미있게 읽은 글은 강민경 님의 「안면 있는 유령이 생긴다는 것」 외
2편이었습니다. 제목에서부터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안면 있는 유령이란 뭘까. 글을 다 읽고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게 되더군요. 더불어 선생님의 문장에는 알 수 없는 힘이 있었는데, 그 동인을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만, 강한 바람에 쓰러지는 나무들, 그럼에도 뽑히지 않는 뿌리의 힘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건 아마 문체의 영향일 텐데, 조심스럽게 유추해 보자면 ‘나’를 ‘너’로 지칭한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를 ‘너’로 치환함으로써 생기는 거리가 글과 주제를 단단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요. 그것은 어머니를 보내는 과정에서 슬픔을 여과하기 위한 어떤 안간힘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넌지시 가늠해 봅니다. 그래서 이 글의 ‘너’에는 옅은 슬픔이 묻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떠나보낸 사람들을 앞으로 안면 있는 유령이라고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움의 새로운 방식을 알려준 강민경 님에게 감사드립니다.
글을 보내주신 분들께 모두 편지를 쓰고 싶지만, 지면의 한계로 이만 말을 줄이겠습니다.
총 11명, 33편의 작품이 예심을 통과하였습니다. 김지호의 「아버지의 술버릇」, 박미림의 「뒷산 친구」, 곽민주의 「그렇게 집이 내게로 왔다」, 이다한결의 「면접관의 변명」, 차성환의 「회혼」, 조성주의 「이발소 그림 풍경에는」, 윤주연의 「단순하게」, 강민정의 「안면 있는 유령이 생긴다는 것」, 우주연의 「무꽃」, 유나경의 「사진 안부」, 김은희의 「나의 환승 연애」 등입니다. 제각각 개성과 강점이 뚜렷한 글들이었습니다. 그중에는 에세이처럼 보이지 않는 글도 있었는데, 그 글이 가진 힘을 믿어보고 싶었습니다. 에세이라고 해서 반드시 에세이의 형식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이것도 에세이가 될 수 있을까?’라는 장르적인 물음을 실천하는 용기를 존중하고 싶었습니다. 에세이라는 상을 머릿속에 정해놓고, 그 형식에 맞는 글을 쓰기보다는 어떤 형식이건 개의치 않고 쓴 뒤에 그걸 에세이라고 우기는 깡에서 개성적인 목소리가 분출되기도 하는구나, 조심스레 생각해 보았습니다.
원고를 보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 예심 심사위원: 문보영 이은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