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법이 자기 고유성질인가..]에서 법이란 대상인 물자체에 있는 [고유성질]이 아닌 인식하는 자들이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라 했다.
물이 습하다는 것은 물의 고유성질이 아니라 사람들이 물이란 대상을 촉할 때 아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지, 화, 풍 성질 역시 물자체에 있는 게 아닌 인식하는 자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것이 된다.
그러기에 법이란 대상을 그렇게 인식하도록 만드는 규범이라 했다.
'장미'라는 법은 안과 색, 이와 성, 비와 향, 설과 미, 신과 촉이 만나 생기는 게 있으면 그것을 분석, 종합한 의입처에서 그에 대한 이미지를 만드니.. 그때 생기는 이미지가 바로 '장미'라는 법이 된다.
그러기에 '장미'라는 법은 11입처 어디에도 없던 것이지만, 색성향미촉 다섯외입처가 없으면 생길 수 없는 것이기에..
"법이라는 외입처는 11입(入)에는 소속되지 않는 것으로서 볼 수도 없고 상대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법을 외입처라고 하느니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알고 있으면 각묵스님의..
먼저 불교의 보편적인 방법론인 ‘자상(自相)을 통한 공상(共相)의 확인’이라는 말을 설명드릴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논의되는 ‘고유성질을 가진 법, 찰나, 상속’ 등은 주로 자상(自相)의 측면에서 논의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한때 초기불교를 비판하는 논거로 아공법유(我空法有)라는 논리가 동원된 적이 있습니다. 초기불교는 我가 空하다는 것은 인정하나, 法은 空하지 않고 법은 있다(有)고 국집한다는 비판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공(空)’은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無我’와 다르지 않은 개념으로 일반적으로 인정되는데, 초기불교에서 법을 ‘sabhāva(고유성질, 자성)'이란 용어로 정의하자 그것을 실체론적인 견해로 생각하고 이를 비판한 것이겠지요.
현재는 이런 논거로 초기불교를 비판하는 주장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됩니다.
라는 주장은 법을 대상의 고유성질로 보는 법유(法有)가 된다.
대승불교인 반야부에서 상좌부를 비판하는 [아공법유]는 바로 각묵스님이 주장하듯, 법을 대상의 고유성질로 보는 것이 잘못임을 지적하고 있는 게 되기 때문이다.
이어서 각묵스님은 공상을 설명하는데.. 공상이란 보편적 특성이며, 공통된 모습으로..
① 자상(自相)의 측면 = 개별적 특징(paccatta-lakkhaṇa = sabhāva-lakkhaṇa) : 고유성질을 가진 법. 4위(位) 82법.
② 공상(共相)의 측면 = 보편적 특징(sāmañña-lakkhaṇa) : 무상·고·무아(無常·苦·無我)
무상·고·무아(無常·苦·無我)가 공상이라 한다.
대상이 무상하고 무아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니라 할 수 있지만, 고(苦)는 대상에 있는 게 아닌 인식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듯, 관찰 대상은 인간으로 제한되며, 더 좁히면 자기 자신이 대상이 된다. 왜냐면 이웃의 고를 자신이 있는 그대로 느낄 수는 없을 터이기에.
해서 [일체개고]에서 '책상이 고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책상이 고가 아니라 하는 것은 일체개고에서 일체는 고를 느끼는 인간인 그것도 자기 자신만을 의미하는 게 되는데, 그것을 일체라 할 수 있을까?
다른 곳에서 [일체는 12처]의 뜻을.. 일체는 12처에 의해 포섭된다는 것이라 했듯이, 5온은 그대로 일체가 아니라 5온은 일체를 포섭하는 게 된다.
물질로 보이는 게 일체요, 느껴지는 게 일체요, 생긴 이미지가 일체요, 의지 대상이 일체요, 알려진 게 일체다.
그러므로 책상이란 법은 외부에 있는 게 아닌 6입처인 의에 생긴 상대요, 5온에 의해 촉이되어 드러난 것임을 알면..
책상이 고라는 것은.. 책상으로 보이도록 하는 물자체가 고가 아니고, 책상이라 인식되고 있는 그것을 고라 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일체개고]에서 일체는 외부에 놓여있는 것들을 의미하는 게 아닌 외부에 있다고 촉으로 인식된 모두를 의미하는 것이다.
책상이란 이렇게 우리가 상(相, 이미지)으로 만들어 놓고 그 상(相)과 같은 것으로 보이면 책상이라 하고, 그 상(相, 이미지)과 다르게 보이면 책상이 없어졌다고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책상이란 自相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안과 색 등 2법에 의에 만들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책상인란 자상이 괴로움이라 하는 것은..
2법이 결합할 때 욕탐이 개입하기 때문이라 하셨다.
이렇게 자상이나 공상은 외부에 있는 법에 대한 설명이 아닌 촉인식으로 생긴 법에 대한 설명이 되는데,
상좌부에서는 법을 외부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인식으로 생긴 것이라고 하지만,
마음이 멋대로 외부에 무엇이 있다고 만드는 게 아닌..
[외부에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접촉하여 생기는 것임을 잊지말아야 하리라.
첫댓글 법은 어디에 있습니까?
[30 ┃불교이해실천┃ 5. 십이입처설 - 법이란 무엇인가 / 이중표 [36] ]
초기경 & 초기 교리 에 들어가면. 불교이해실천이 있고, # 29, 30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그게 님 살림이 아니고 그 책을 쓴 사람의 살림이군요 ^^
그걸 다 덮고 이제 님의 살림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법은 어디에 있나요?
^^..
전법에서는 부처님 법인 옳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거기서는 내 살림, 남 살림 가리기 전에 법이 옳은가 아닌가를 살핍니다.
제가 참고한 내용이 님의 견해와 다르다면.. 혹 틀렸다고 보인다면..
그것을 보여 주시죠.
하하 그만하지요
제가 괜히 한 번 물어본것입니다^^
법은 어디에 있는가?
여기서 법이란 진리라는 뜻이 아닌 일체를 의미하는 법입니다.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있고 그 둘에 의해 6식이 보는 자에게 생긴다고 말할 수 있다면..
법은 보이는 것에 있는 것으로 압니다.
보이는 것은 외부에 대상에 있는 것이라, 법은 대상에 있는 것으로 6경 가운데 마지막에 있습니다.
6근 가운데 마지막에 있는 의근처럼 법경 역시 색성향미촉의 다섯이 종합된 것으로 봅니다.
종합되엇다는 말은..
사과라 할 때.. 사과라는 법은.. 사과라는 색의 모습과 소리(?), 향기, 맛, 느낌이 하나로 드러나는 것을 사과의 법이라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일체는 고유의 법을 지니고 있기에 우리는 일체를 구별해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보통 법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 하겠는데..
사과의 모습, 소리, 향기, 맛, 느낌은 어디에 있느냐는 겁니다.
만일 그것이 사과 그 자체에 있다면.. 사람은 물론 모든 생물들은 사과를 하나의 법으로 인식하게 될 터인데..
과연 그러냐 하는 겁니다.
법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는 그것이 법입니다.
ㅎㅎㅎㅎㅎ ()
[외부에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말하면.. 존재론이 아닌가 할 것 같은데..
불교는 존재론 또는 인식론 어느 하나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있다고 여겨지는 것에 의해 인식이 일어나는데..이때 일어나는 인식은 있다고 여겨지는 것에 의해 생긴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무상하고 무아라는 것은 망식이 아닌 있다고 여겨지는 것의 모습이 됩니다.
이때 苦가 생기는 것은 무상하고 무아임을 잊고 집착을 하니 생기는 게 아닙니까?
일반적으로 우리가 보는 개개의 사람들은 실지로 부딪히고 상대하는 그런 사람이지만 인간이라는 부류로 나누어지는 것은 법상이라 하고 우리는 그 인간이라는 것은 볼 수 없다는 것이라 하더군요.
고유성질이라 표현하는 것은 무리가 있고 지금의 예로 법상을 설명해보려 했는데 제대로 된 것인지 모르겠네요.
그러니까 우리의 인식체계에서 공통적인 어떤 것들을 찾아서 분류하는 것이지요
법상이 가능한 것은 우리 인간 중생이 함께 하고 있는 공업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여기서 법에 대해서도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 것은..
서로 다르게 보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것은 중생에게 보이는 법이란 게.. 하나의 모습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는 반증이 아니냐 하는 겁니다.
법이 우선 무엇인지 모르니까 차이를 보인 다고 할수 있지요. 법은 연기법입니다.
법은 거칠게 두가지 뜻이 잇어요.
하나는 연기법, 4성제법, 3법인에 나오는 진리라는 뜻이 있고.
다른 하나는 일체 법 하듯 12처법, 18계법, 5온법 하듯 일체 각각을 뜻합니다.
기쁜날님은 법을 진리로 새기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서 말하는 법은 시중에서 존재라 알고 있는 사과, 책상, 눈, 사랑, 증오.. 를 말합니다.
법이 거친 법이 있고 거치지 않은 법이 있을까요? 거친 법이라고 하는 것이 거친법아닌지요.부처님은 12연기의 순관과 역관 사성제를 깨닫고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남방불교 3법인은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 이고 북방 불교 는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 적정입니다.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 열반적정을 사법인이라고 하기도 합니다.사성제와 삼법인 연기법은 서로 다른 뜻은 있지만 연기법의 골수를 나타내는 다른 표현들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존재의 이름은 우리의 욕구에 의해 붙여진이름입니다. 이런 것은 모두 욕구의 세계인 욕계 색계 무색계인 삼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삼계의 세계를 멸한상태을 삼법인 이라하고 삼법인이 곳 우리의 삶, 사성제인 고,집, 멸,도, 을 연기법인 순관과 역관으로 고의 집착인실상을 증득하는 것이 곳 도에 이르는 것이 아닌지요?
기쁜날님 만나서 기쁩니다.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순관과 역관으로 구분하여 꼭 역관하는 절차를 거쳐야 고의 집착인 실상을 증득할수 있습니까?
잘은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십이연기설은 누구나 태어나서 죽는다는 이 엄연한 사실이 근본적으로 무명에서 비롯된 착각임을 설명하는 교리라고 생각합니다.유전문만 바르게 이해하고 증득할 수 있다면 생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학인의 입장에서는 유전문과 환멸문을 모두 바르게 알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유전문은 시간성이 존재하지만 . 환멸문에는 시간성이 사라집니다. 유전문과 환멸문을 바르게 이해를 못하면 많은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십이연기를 시간성을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한 무시간적 연기관은 유전문과 환멸문의 바른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