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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3 묵상글 ( 부활 제3주간 목요일. - 이끌리고 이끄는 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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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3. 부활 제3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4.23 03:14
- 이끌리고 이끄는 나
오늘 사도행전과 복음에서 공통으로 나오는 말이 바로 “이끌어 주지 않으면”입니다.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그래서 오늘은 ‘이끌리는 사람’이라고 주제를 잡아봤습니다.
이끌린다는 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줏대 없이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줏대 있고 성숙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가는 길을 잘 알아 찾아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사실 그럴 수 있으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길을 그럴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잘못 가는 일이 허다한데
주님께 가는 길을 이끌리지 않고 실수 없이 갈 수 있겠습니까?
이 지점에서 바오로 사도를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매우 똑똑했고 하느님을 누구보다 열심히 믿는 사람이었지만
자신도 주님께 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선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더욱이 그는 가말리엘이라는 아주 훌륭한 스승 밑에 있던 사람입니다.
가말리엘이 어떤 사람입니까?
유대교 지도자들이 사도들의 활동을 막으려고 할 때 사도들의 활동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면 막으려는 것이 하느님 뜻을 막는 것이 될 것이고,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면 가만둬도 저절로 망할 것이라고 얘기했지요.
그렇게 훌륭하고 현명한 스승이 있었는데도 바오로 사도는
스승의 말을 따르지 않고 자기 믿음 대로 주님을 박해하는 일에 나섰지요.
그러니 그는 그저께 스테파노가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했던 바로 그런 사람이었지요.
결국 하느님께서 직접 나서셨습니다.
그가 가는 길을 주님께서 직접 막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성찰도 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누구에게 이끌리고 있는가?
인간 누구에게인가? 하느님에게인가?
성령인가? 악령 또는 더러운 영인가?
그리고 오늘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그러니까 나는 하느님 말씀에 이끌리는 사람인가?
또 필리포스처럼 성령으로 누군가를 주님께 이끄는 사람인가?
그리고 이런 성찰을 바탕으로
주님께 이끌리고 이끄는 내가 되기로 마음먹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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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3. 부활 제3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아름다움, 기억, 그리고 슬픔!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땅은 폭력이 아니라 존중을 요구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관상과 해방, 그리고 활동
아름다움, 기억, 그리고 슬픔!
2026년 4월 22일 수요일
땅은 우리에게 맡겨진 은총의 선물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머니가 되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각자에게 나누어 주도록 주어졌습니다.… 땅은 너그럽고, 그것을 지키는 이들에게 아무것도 아끼지 않습니다. 모든 이의 어머니인 땅은 폭력이 아니라 존중을 청합니다.”
— 교황 프란치스코, 우리의 어머니 땅
우리는 깊은 슬픔의 달콤한 흐름 속으로 내려가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 슬픔은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모든 것, 곧 곧 사라질지도 모를 모든 것을 더 깊이 알게 하고, 찬미하게 하며, 더욱 온전히 사랑하게 해 줍니다.
— 브라이언 맥라렌, 파멸 이후의 삶
브라이언 맥라렌은 어린 시절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자연의 장소를 회상합니다. 그는 우리가 알고 사랑했던 장소들이 변할 때, 그로부터 솟아나는 슬픔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 메릴랜드에서 자라며 탐험하던 습지를 떠올립니다. 그것은 록 크릭 유역의 일부였습니다. 저는 사계절 내내 그 습지를 탐험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때로는 맨발로, 때로는 장화를 신고 들어갔지만, 늘 너무 깊이 들어가 차가운 물이 장화 속으로 흘러들곤 했습니다. 봄에 갈대 사이로 뛰노는 두꺼비와 꿈틀거리는 올챙이를 보는데 어떻게 마른 발을 유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여름에 그곳을 찾지 않고 어떻게 단 한 마리의 푸른 왜가리나, 내 어린 상상 속 공룡 같은 거대한 거북을 만나는 기회를 놓칠 수 있었겠습니까? 가을에 차가운 물 속에서 도롱뇽과 가재를 찾지 않고, 노란 튤립나무와 붉은 단풍, 주황빛의 풍나무 잎이 하늘을 비추는 수면 위에 흩뿌려지는 모습을 어떻게 지나칠 수 있었겠습니까? … 겨울이 끝나 얼음이 녹자마자, 갈색으로 젖어가는 낙엽층 속에서 점박이 도롱뇽들이 신비롭고 느린 짝짓기 의식을 치르는 모습을 보기 위해, 또 근처 버드나무에서 붉은날개검은새들이 "콩크-라-리!" 하고 울어대는 소리를 듣기 위해, 어떻게 다시 돌아가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몇 해 전, 저는 다시 제가 자라났던 옛 동네를 찾았습니다…. 오솔길은 여전히 있었지만 이제는 넓게 포장되어 자전거 길이 되어 있었습니다. 습지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저는 벤치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며, 어린 시절 누렸던 기쁨을 떠올리며 달콤한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곳에서 누리던 잃어버린 마법은 이제 아이들이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되었으니, 적어도 그 자리에서는 이런 아름다움을 더 이상 경험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저는 기억 속에서 이 소중한 장소, 이 신성한 습지를 다시 찾습니다. 나는 그것을 감사히 여기며, 이미 사라졌기에 더욱 그 본래의 아름다움과 은총을 찬미합니다…. 여러분에게도 나에게 알 수 없는 잃어버린 장소들이 있을 것이고, 저에게도 여러분이 알 수 없는 잃어버린 장소들이 있을 겁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선한 피조물들이 단순히 잊히고, 존중받지 못하고, 찬미되지 못하고, 애도되지 못한 채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그들의 존재를 넘어 지속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께 슬픔 속에서 그들을 기억합니다. 그들이 사라져 가는 순간, 오히려 더 깊이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느낍니다….
슬픔 속에 오래 머물러 그 달콤함을 느껴 보십시오. 그 달콤함과 슬픔이 우리의 감수성을 깊게 하여, 우리가 ‘감사, 찬미, 사랑… 그리고 생명’이라 부르는 고통과 환희의 미묘한 아름다움을 더욱 섬세하게 깨닫게 할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제 아내와 저는 이제 은퇴할 때가 다 되어 오래도록 품어온 메인 해안에서의 삶을 희망하며 그 희망을 실현하려고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때때로 저는 이것이 단순히 더 많은 것을 움켜쥐려는 이기심이 아닌가 의문을 품기도합니다. 하지만 파도와 밀물·썰물의 리듬에 영향을 받아 곰곰이 성찰해 보니, 어쩌면 우리는 고통받는 땅과 그 풍요로부터 삶을 이어가는 참된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온전히 ‘현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 가득한 ‘하느님 나라’가 이 땅 위에서 드러나는 기쁨과 슬픔, 엄혹하면서도 복된 현실을 더 깊이 체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Mark T.
References
Brian D. McLaren, Lie after Doom: Wisdom and Courage for a World Falling Apart (St. Martin’s Essentials, 2024), 54–55, 57–58.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iska Vrijburg, untitled (detail), 2017, photo, Netherlands.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우리는 나무와 빛, 사슴을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며 그들을 존중한 다음에야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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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십자가가 내는 끝없는 메시지와 그 사랑의 침묵 속에서의 외침!...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주님의 이 말씀은 당신께 나아가는 일이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리고 이런 나아감은 주님과 '나'의 인격적인 관계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다른 이가 이를 대신해 줄 수도 없는 것이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이는 은총의 역사, 곧 하느님의 끌어당기시는 힘이지 인간의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과거에는 신앙을 억지로 밀어 넣을 수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혹은 적어도 그 방향으로 몰아갈 수 있다고 여겨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밀리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저항하게 됩니다. 흔히 "만일 선이 금지된다면 오히려 더 많은 이들이 그것을 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가장 좋은 길은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뒤에서 몰아세울 때보다 앞에서 이끌어 줄 때 더 쉽게 따라갑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강제적으로 당신께로 끌어당기는 것'이 가 아니라 '내적으로 마음이 이끌려 당신께로 오게끔 하시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강제'는 육체가 아니라 마음에 가해지는 것입니다. 믿으면 오게 되고, 사랑하면 끌려옵니다. 거칠고 불편한 강제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부드럽고 달콤합니다. 바로 그 달콤함이 당신을 끌어당깁니다. 굶주린 양이 푸른 풀을 보고 달려오는 것은 억지로 몰아세워서가 아니라 욕구에 매여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것도 힘들고 긴 여정을 상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믿는 그 자리에서 이미 그분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어디에나 계시는 그분께 우리는 사랑으로 이끌려 가는 것이지, 내 힘으로 배를 몰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끌림은 언제나 강제보다 덜 분명해 보이고, 때로는 덜 만족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주님께서는 강제의 길을 거부하시고 사랑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사랑의 길은 다른 어떤 길보다 더 복잡하고 때로는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지혜는 그것이야말로 함정이 없는 유일한 길임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런 매력을 발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그분은 제도나 어떤 강제적인 수단을 이용하여 우리를 당신께로 오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우리 마음에 사랑의 동기를 부여 하시어 우리를 당신 사랑 안으로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이끌림은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그윽하게 바라보고자 의지를 지니고 그분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느껴지는 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사랑을 계속해서 드러내 주시면서 우리를 당신과의 친밀한 관계 안으로 이끌어 주시기는 하지만 우리가 다른 곳에 눈을 돌리고 있는 동안에는 그 사랑에 이끌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그 십자가가 내는 끝없는 메시지와 그 사랑의 침묵 속에서의 외침을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에 이끌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사랑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물며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깊이 바라보고자 하지 않으면 그 사랑이 나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완전한 자유 의지를 우리에게 부여해 주셨기에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강요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예전에 앤써니 드 멜로의 책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당신도 들 수 없는 돌을 하느님께서 만드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자들에게 던졌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없었습니다. 그냥 불교 선승들의 화두처럼 이 질문만 던지고 다른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이게 정말로 가능한 일일까요?? 하느님이 전능하시다면 당신이 들 수 없는 돌이 있을 수 없겠지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돌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우리 인간의 자유와 관련이 있는 질문입니다.…
"사랑"은 이런 역설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완전히 가능한 현실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관계 안에서 이런 사랑의 자유를 부여해 주셨기에 우리가 그 사랑에 의해 이끌릴 때에만 우리는 그분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하느님의 그 지극한 사랑을 마음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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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3.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제 <복음>과 오늘 <복음> 사이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군중들은 그분의 신원을 두고 수군거렸습니다(요한 6,4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살아있는 빵”이란 당신께서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빵, 건너와 관계를 맺는 활동 중인 “빵”임을 말해줍니다. 곧 자신을 죽여 타인을 살리고 있는 ‘살아있는 활동 중인 빵’입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빵”은 동시에 “살리는 빵”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곧 먹혀서 먹는 이 안에서 ‘부활하는 빵’이요, 먹는 이를 ‘영원히 살게 하는 빵’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그 빵을 가지고 계실뿐만 아니라 그것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주시는 이 빵은 다름 아닌 “당신의 살”, 곧 먹혀서 ‘먹는 이’에게서 살아있는 살이 되고, 당신의 생명이 되게 하는 ‘살’입니다.
이는 당신의 증여를 통해서, 우리 안에서 죽음을 몰아내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참으로 놀라운 ‘신비’입니다. ‘사랑의 신비’입니다. 우리를 당신 신성에 들게 하고, 우리를 부활시키시는 신비입니다. 그러니 “부활”은 단지 죽지 않고 사는 것만이 아니라 ‘드높여지고 영광 되는 일’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감탄하올 신비인가!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참으로 크나 큰 ‘사랑의 신비’입니다.
그러나 이 “생명의 빵”을 ‘먹을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는 우리 스스로가 응답해야 할 몫입니다. 만약 이를 알면서도 먹지 않는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를르의 체사리우스는 말합니다.
“만일 누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먹지’ 않는다면,
(먹지 않고 저장된) 말씀은 만나에 구더기가 들끓었듯이 구더기가 들끓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살아있는 이 ‘빵’, 바로 하느님의 참된 사랑을 받아먹고 살아갑니다. 바로 이 큰 사랑 안에서 우리는 생명을 얻어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요한 6,51)이라 하셨으니, 이제 그 살을 먹은 우리 역시 ‘세상에 생명을 주는 살’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생명이 제 삶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먹혀서 저를 살리듯, 저도 먹혀서 타인을 살리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주님!
오늘도 당신께서는
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당신 자신을 쪼개어 떼어 주시오니,
당신의 생명이 제 삶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제 생명이 당신의 생명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먹혀서 저를 살리듯,
저도 먹혀서 타인을 살리게 하소서.
제 살이 세상에 건네주는 빵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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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3.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5대째 가톨릭을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지 1달이 안 되어서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동생과 함께 첫영성체를 하였고, 고등학교 2학년 때 견진성사를 받았습니다. 물고기가 물에 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교회는 제게 마치 물고기가 살아가는 물과 같았습니다. 어르신들은 ‘본명’을 불러주었습니다. 세상에서 부르는 이름은 ‘재형’이지만 저의 본명은 ‘가브리엘’이었습니다. 언젠가 천상에서 부를 본명은 ‘가브리엘’이었습니다. 아침기도, 저녁기도, 삼종기도, 묵주기도, 연도는 자연스러운 기도였습니다. 어른들은 자식들에게 두 가지를 물려 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는 혈연으로 이루어진 세상의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으로 이루어진 영혼의 이름입니다. 어려서는 이런 가정환경이 얼마나 큰 축복인 줄 몰랐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야 신앙 안에서 살지 못했던 분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같이 입학한 형 중에는 예비역이 많았습니다. 군대를 다녀왔고, 일반 대학을 나왔고, 직장 생활하다가 신학교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어찌 그리 먼 길을 돌아왔는지 물어보면 하느님을 늦게 만났다고 합니다. 세례를 늦게 받았다고 합니다. 형들은 그래서 더 감사하며 신학교에서 지냈습니다. 늦었기에 더 열심히 사목하였습니다.
요즘 우리는 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것을 수학적인 공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리적인 법칙으로 알아내는 것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수학적인 계산으로 답을 찾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물리적인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곁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도 물어보십니다. ‘여러분들도 내 곁을 떠날 것입니까?’ 베드로 사도는 대답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 때문에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사랑 때문에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영원한 생명을 살았습니다. 스테파노 부제, 바오로 사도, 신앙의 선조들은 이런 삶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분들에게 물리적인 방식의 영원한 생명은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수학적인 방식의 영원한 생명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지나간 날을 집착하는 사람들에게는, 오지도 않은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충실한 삶이 과거가 되는 것이고, 지금의 행복한 삶이 미래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시간과 공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원한 삶은 신앙 안에서 지금을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사랑과 갈망이 만나서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건들을 모아서 어려운 이웃에게 보내주는 자매님이 있습니다. 귀찮은 일입니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 일을 몇 년째 하고 있습니다. 자매님의 사랑과 갈망은 굶주리고, 병들어가는 이들에게 생명의 빵이 되고 있습니다.
물리학적인 시간, 생물학적인 시간은 유한합니다. 그러나 순간을 말씀 안에서 충실하게 사는 사람은 신앙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끝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 끝은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순간을 영원처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제나 감사하십시오. 매일 기도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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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3.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체성사의 그리스도여, 당신과 함께라면 저는 그 무엇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복음 말씀의 주제는 생명의 빵입니다.
성체성사에 대한 사랑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복자 한 분이 계십니다.
카를 라이스너 신부님입니다.
이분은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죽을 고생을 했던 신부님입니다.
1915년에 태어나셨고 종전을 목전에 둔 1945년에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신 장소는 아우슈비츠 못지 않게 악랄했던 다하우 강제 수용소입니다.
이분의 사제로서의 삶이 정말 기가 막힙니다.
24살에 부제품을 받은 라이스너 부제는 부제품을 받자 마자 곧바로 나치 강제수용소에 갇히게 됩니다.
건강했던 그는 거기서 꽤 긴 기간인 4년간 버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종전을 목전에 두고 몸이 점점 약해지고, 결핵에 걸려 쓰러집니다.
부제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죽는 것은 아무 미련도 없지만, 사제품을 받지 못하고, 죽는 것이 유일한 아쉬움이고 안타까움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라이스너 부제는 한 가지 지향을 두고 간절히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얼토당토 않은 청이라 여기시겠지만, 혹시라도 제게 사제품의 영광을 주실수는 없겠는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부제의 간절한 청이 하늘에 도달했습니다.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는 수많은 성직자 수도자들이 갇혀 있었는데, 그 중에 주교님도 한 분 계셨던 것입니다.
부제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 주교님이 부제가 누워있는 방을 찾아와서 사제품 주신 것입니다.
1944년 12월 17일이었습니다.
너무나 행복했던 라이스너 사제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해결되지 않은 소원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미사를 봉헌하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의 강제 수용소에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병세가 깊어진 부제를 보고 군인들은 그를 가스실로 보내려고 했는데, 부제님의 얼굴을 보니
그럴 필요도 없겠다 싶어 강제 수용소 밖으로 내던져 굶겨 죽이기로 했습니다.
들것에 실려 밖으로 나가던 부제는 자신을 싣고 나가던 군인 두 명에게 자신이 겪었던 그간의 일들을 말해주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사제가 되었지만, 아직도 미사를 단 한번도 드려본 적이 없다.
죽기 전에 미사 한번만 드릴수 있도록 도와줄 수 없겠냐고?
그런데 놀랍게도 그 독일군들도 신자였습니다.
그들은 카를 신부를 수용소 밖으로 데려나가다가 다시 유턴해서 수용소 병실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미사 도구들을 챙겨다 주고 첫미사를 봉헌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는 죽기 일보 직전 병원 침대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유일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카롤 신부는 단 한번의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봉헌하는 미사이다 보니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라이스너 사제의 눈에서는 미사 내내 감사의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동료 수감자들은 다들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습관처럼 봉헌하는 미사가 누군가에게는 일생일대 가장 간절한 소원이라는 것, 기억하면, 우리의 미사가 더 간절해져야겠습니다.
우리는 매 미사 때 카롤 신부의 그 마음으로 미사를 봉헌한다면 그 미사가 얼마나 은혜롭겠습니까?
라이스너 신부의 고백입니다.
“성체성사의 그리스도여! 저는 당신 없이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라면 저는 그 무엇도 할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의 그리스도여! 당신은 저의 안식처요 집입니다!
성체성사의 그리스도요! 저는 오직 당신께만 속하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미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미사에 대한 최우선적인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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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3. 부활 제3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6,44–51
예수님은 오늘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믿음은
내가 스스로 길을 뚫고 주님께 다가가는 일만이 아닙니다.
그보다 먼저
하느님께서 우리를 조용히, 그러나 깊이 부르시고
당신 아드님께 이끌어 주시는 은총의 사건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말씀을 두고
하느님의 이끄심이 사람의 자유를 없애는 강제가 아니라,
마음을 열고 진리를 사랑하도록 깨우시는 은총이라고 보았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억지로 끌고 가시는 분이 아니라
마음 안에 빛을 비추시고
선한 것을 향하여 움직이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강요된 복종이 아니라
은총에 응답하는 자유로운 신뢰입니다.
예수님은 이어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말씀은 매우 깊습니다.
주님은 단지 생명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생명이십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살아 있는 빵이신 그분을 받아들여
내 존재가 새로워지는 일입니다.
오늘 묵상 안에서
평화와 인내의 씨앗이 보입니다.
평화는
모든 것이 내 뜻대로 풀릴 때만 오는 안정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를 그리스도께 이끄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라나는 고요입니다.
나는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
불리고 있는 존재입니다.
나는 혼자 떠밀려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빵께 초대받은 존재입니다.
이 진실이 마음에 스며들 때
인내는 억지 버팀이 아니라
하느님의 이끄심 안에 오래 머무는 충실함이 됩니다.
오늘 목요일 성모님의 날에
우리는 마리아를 바라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이끄심에
가장 온전하게 응답하신 분입니다.
성모님은 모든 것을 다 이해한 뒤에 순종하신 것이 아니라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며
은총이 이끄는 길을 걸으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청합니다.
주님,
제가 제 힘만으로 믿음을 붙들려 하지 않게 하시고
먼저 저를 부르시고 이끄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신뢰하게 하소서.
그리고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은
우리를 성체성사의 신비로 데려갑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주님은 우리를 멀리서 가르치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우리 안에 생명을 심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평화는
내가 나를 지켜 내는 데서 오지 않고
주님께서 나를 먹여 살리신다는 믿음에서 옵니다.
인내는
답이 늦고 길이 멀어도
생명의 빵이신 주님 안에 머무르는 힘입니다.
주님,
아버지께서 저를 당신께 이끄신다는 사실을 믿게 하시고
살아 있는 빵이신 당신 안에 머물게 하소서.
조급함 대신 평화를,
흔들림 대신 인내를,
불안 대신 신뢰를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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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3. 부활 제3주간 목요일. 굿뉴스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Mark Choi 님
■ 외면하지 말아야 할 공동체의 책임에 대하여
주제: 외면하지 말아야 할 공동체의 책임에 대하여
교회는 진리를 따르는 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과연 그 진리에 충실한가 하는 점입니다.
현실 안에서 우리는 종종, 신앙의 본질보다 사람과 관계, 그리고 ‘가까운 자리’에 더 큰 의미를 두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특정 위치에 있는 이들 주변에 머무르거나, 그 영향력 안에 들어가는 것을 신앙의 일부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문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가 부당한 일을 겪거나 상처를 입을 때, 이를 알면서도 침묵하거나, 심지어 그 분위기에 편승하는 일까지 발생합니다.
직접 가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침묵과 방관 역시 또 다른 형태의 동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우려되는 점은, 이러한 문제들이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안에서 충분히 드러나거나 바로잡히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외부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보며, 오히려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보다 문제에 대한 인식과 자정의 속도가 더디게 느껴진다는 시선도 존재합니다. 이 평가가 불편하게 들릴 수 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외면해서는 안 될 지점입니다.
신부님과 수녀님도 또한 역시 인간입니다.
그들의 열정과 헌신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올바른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선의와 열정만으로 모든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가 실제로 피해를 입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분명히 직시해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는 서로 심판하지 말고, 도리어 형제에게 걸림돌이나 장애물을 놓지 않도록 결심합시다.” (로마서 14,13)
그리고 또 이렇게 요구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큰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오 20,26)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열심이 아니라, 더 분명한 분별과 책임일
것입니다.
좋은 일을 하지 못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는 일에 협조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 기준은 결코 높은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최소한입니다.
t itle: On the Responsibility We Can No Longer Ignore
The Church is a community called to follow the truth.
If so, there is one question we cannot avoid:
Are we truly being faithful to that truth today?
In reality, we often see a different pattern—where relationships, positions, and proximity to influence are given more weight than the essence of faith itself. Being close to certain individuals can be treated as if it were part of one’s spiritual standing.
But the issue does not end there.
When someone is harmed or treated unjustly within this dynamic, there are moments when people remain silent—or even go along with what is happening.
It is difficult to claim innocence simply because one did not directly cause the harm.
Silence and passivity can also become forms of complicity.
What is more concerning is that these patterns often repeat without being adequately acknowledged or corrected within the community. From the outside, there are perceptions that, compared to other Christian communities, awareness and self-correction in such matters may appear slower within the Catholic context. Whether uncomfortable or not, such perceptions should not be dismissed lightly.
Priests and nuns are human.
Their dedication deserves respect, but it does not guarantee that every action leads to the right outcome.
Good intentions and zeal alone cannot justify everything.
If real harm is being done, it must be recognized clearly.
Scripture states:
“Let us therefore stop passing judgment on one another. Instead, make up your mind not to put any stumbling block or obstacle in the way of a brother or sister.” (Romans 14:13)
And also:
“Whoever wants to become great among you must be your servant.” (Matthew 20:26)
What we need now is not more enthusiasm, but clearer discernment and accountability.
We may not always be able to do great good. But at the very least,
we must refuse to take part in causing harm.
This is not a high standard.
It is the minimum required to protect a healthy comm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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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3.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10:35 추가.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44-51).”
1)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라는 말씀은, 표현으로는 ‘믿음도 은총이다.’ 라는 말씀인데, 뜻으로는 “아버지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이 나에게 온다.”, 또는 “나를 믿고, 나에게 오는 것이
곧 아버지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다.”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응답으로 완성됩니다.
응답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은총을 내려 주시는 일을 ‘헛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부르심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응답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부르심과 이끄심을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부르심과 이끄심을 깨달을 때 신앙이 시작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실제로는 그 반대입니다.
먼저 믿고,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이, 아버지의 부르심과 이끄심이 있었음을 나중에 깨닫게 됩니다.
창세기의 요셉이 좋은 예입니다.
그가 모진 고난을 겪으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인내하면서 충실한 신앙인으로 살았던 것이 먼저 있었고, 자신이 겪은 고난들이 하느님의 이끄심이었고 섭리였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긴 세월이 흐른 뒤였습니다(창세 50,20).
바오로 사도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세례를 받은 일이 먼저 있었고(사도 9,18), 하느님의 부르심과 이끄심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 것은 나중의 일입니다.
사도행전 8장의 에티오피아 내시의 경우도 믿음과 응답이 먼저였고, 이끄심을 깨달은 것은 나중의 일입니다.
‘깨달음’은 믿고 응답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은총입니다.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부르심과 이끄심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것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거부하는데도 억지로 은총이 내리는 일은 없습니다.
2)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라는 말씀은, ‘만나’를 깎아내리는 말씀이 아니고, “너희 조상들은,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직접 ‘만나’를 내려 주셨는데도, 하느님의 은총은 생각하지 않고 ‘몸의 배부름’만 생각하다가 멸망했다.
지금 너희도 조상들처럼 ‘몸의 배부름’만 찾는다면, 조상들처럼 멸망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나는 새로운 ‘만나’다.
나를 믿고 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먹는다.’ 라는 말은 ‘믿는다.’ 라는 뜻이고, 예수님을 믿어서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나의 살’이라는 말씀은 ‘나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라는 말씀은, “내가 줄 빵은 ‘나 자신’이다.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생명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1코린 8,6).
요한복음의 머리글에는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3-4).” 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3)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주셨음을 믿고, 믿음으로 응답함으로써 그 생명을 얻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은 ‘이미’ 시작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생활이고, 영원한 생명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이, 믿음 없는 사람들이나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허한 말장난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말장난 같아서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안 믿으려고 하니까 말장난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에서부터 믿음이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믿음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었기 때문에 믿는다는 고백이 아니라, 이해되지는 않지만
생명의 말씀이라고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먼저 믿으면, 믿음을 통해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깨닫게 되면 가지고 있는 믿음에 대해 확신하게 됩니다.
더 깊고 더 강한 믿음의 단계로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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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3. 부활 제3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0:30 추가.
요한 6,44-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이 스스로의 의지로 하느님을 믿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믿음은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그분을 믿고 따르는 교회 공동체로 이끌어주시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매 순간, 여러 사람을 통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신앙으로, 당신과 맺는 사랑의 관계 안으로 부르십니다. 사랑이 그것을 주는 사람과 받아들이는 사람 사이에 마음이 서로 통해야 완성되는 것처럼, 믿음도 우리를 당신께로 이끄시는 하느님과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우리 사이에 마음이 서로 통해야 비로소 완성되지요.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을 믿게 된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은총과 축복인지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받는 은총은 그게 다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라는 귀한 선물을 주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이 빵은 일시적인 배부름으로 끝나는 세상의 빵과는 전혀 다릅니다. 순간의 만족으로 사라지는 세상의 빵과는 달리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빵은 우리 존재와 삶을 충만한 기쁨과 행복으로 채워줍니다. 또한 우리를 주님과 깊이 일치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와 맺는 사랑의 관계 안으로 이끌어 줍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향하고 바라는 ‘영원한 생명’의 본질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현세적이고 불완전한 생명이 영원히 이어지는 걸 뜻하는 게 아니지요. 영원한 생명의 본질은 하느님과 맺는 친밀한 ‘관계’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도, 그분 말씀을 들을 수도 없기에, 우리가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려면 참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느님이시자 주님이신 분으로 믿고, 그분 말씀과 가르침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 구원받는 겁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서 그분과 함께 참된 행복을 영원히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영원한 생명은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는 이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이에게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굳게 믿으며 그분 뜻에 따라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영원한 생명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의 충실한 삶이 쌓이면 뿌듯한 과거가 되고, 늘 한결같은 자세로 지금을 살면 희망찬 미래가 되지요. 그런 점에서 영원한 생명이란 주님께 대한 신앙 안에서 지금을 충실하게 사는 이들이 매 순간 누리는 ‘현실’입니다. 광야를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라는 물질만 보지 않고,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믿음과 사랑으로 그분을 섬겼다면, 또한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하는데에만 집착하며 불평 불만을 늘어놓지 않고, 하느님과 함께 누리는 참되고 영원한 행복을 추구했다면, 그들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죽음을 건너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성체성사 안에서 주님의 몸을 받아모시는 우리가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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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3. 부활 제3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이정임 님
■ 롯과 두 딸 이야기
모압족과 암몬족의 기원을 묵상하다 / 롯과 두 딸 이야기
"롯은 초아르를 떠나 산으로 올라가서 자기의 두 딸과 함께 살았다. 초아르에서 사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롯은 자기의 두 딸과 함께 굴속에서 살았다. 그때 맏딸이 작은딸에게 말하였다.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 풍속대로 우리에게 올 남자가 없구나. 자 아버지에 술을 드시게 하고 나서, 우리가 아버지와 함께 누워 그분에게서 자손을 얻자.' 그날 밤에 그들은 아버지에게 술을 들게 한 다음, 맏딸이 가서 아버지와 함께 누웠다. 그러나 그는 딸이 누웠다 일어난 것을 몰랐다. 이튿날, 맏딸이 작은딸에게 말하였다. '간밤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누웠다. 오늘 밤에도 아버지에게 술을 드시게 하자. 그리고 네가 가서 아버지와 함께 누워라. 그렇게 해서 그분에게서 자손을 얻자.' 그래서 그날 밤에도 그들은 아버지에게 술을 들게 한 다음, 이번에는 작은딸이 일어나 가서 아버지와 함께 누웠다. 그러나 그는 딸이 누웠다 일어난 것을 몰랐다. 이렇게 해서 롯의 두 딸이 아버지의 아이를 갖게 되었다. 맏딸은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그는 오늘날까지 이어 오는 모압족의 조상이다. 작은딸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벤 암미라 하였으니, 그는 오늘날까지 이어 오는 암몬족의 조상이다." (창세 19,30-38)
+ 샬롬 (그리스도의 평화)
창세기 19장 소돔의 멸망과 롯의 구원 이야기에서 보면 롯은 천사들이 소돔이 파멸될 때 휩쓸려 가지 않으려거든 산으로 달아나라고 일렀다. 그러나 롯은 천사의 말을 따르지 않고 재앙에 휩싸여 죽을까 두려워, 저 산으로는 달아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자기가 생각하고 판단한 대로 저기 저 작은 성읍으로 가게 해 달라고 했는데 그 성읍이 바로 초아르였다.
이 상황에서 볼 때 롯의 문제점이라고 한다면, 그저 천사가 일러 준 대로 실행하지 않고 자기의 뜻대로 살게 해 주십사고 청했다는 점이다. 그것도 죽을까 두려운 마음으로. 여기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죽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뭔가를 생각하고 판단하면 올바른 판단을 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아무튼 롯은 그렇게 두려운 마음에서 초아르에 머물게 되었는데 다시 마음을 바꿔서 초아르를 떠나 처음 천사가 떠나라고 일러 준 산으로 올라갔다. 초아르에서 살며 생각해 보니 천사가 일러준 산으로 가서 사는 게 좋다고 생각되었나 보다.
그러나 산으로 올라가서 살게 된 롯은 두 딸과 함께 굴속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들은 왜 굴속에서 살게 되었을까? 사실 산은 어떤 곳인가?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다. 그런데 롯이 굴속에서 살았다는 이야기는 그들이 하느님과 소통을 하지 못하고 살았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만나 소통하는 산에 살면서도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고 살기도 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곧 하느님과 만나는 산에 살면서도 하느님과 만나지 못하고 살면 그것이 바로 자신만의 굴속에서 사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하느님을 만나는 산에 살면서도 하느님과 소통을 하지 못하고 굴속에서 사는 삶을 살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롯의 두 딸과 같이 비정상적인 생각을 하게 되어 있다. 롯의 두 딸은 굴속에서 살면서 세상과 단절되어 살게 되었으니 자신들에게 올 남자가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롯과 그의 딸들처럼 하느님을 만나 소통하고 살아야 하는 산에 살면서도 세상과 단절하고 자신만의 굴속에서 사는 사람에게 누가 다가올 수 있겠는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롯과 롯의 딸들처럼 그렇게 사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이 부분을 묵상해 보면서 우리들도 이와 비슷한 신앙생활을 하며 살 수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도 산에 살면서 곧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도는 하지만 정작 하느님과 소통을 하지 못하고 살게 된다면 바로 굴속에서 사는 신앙생활과 같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굴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면 롯의 두 딸처럼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을 롯의 이야기를 통해서 깊이 묵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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