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장꼴라 놈들이 은근슬쩍 고구려사를 자기네 역사라고 우기려 드는 판에 기분이 <드러븐> 시절이다. 쪽바리 새끼들이 독도를 다케시마(竹島) 라고 개나발을 불어도 찍소리 못하는 나라이다 보니 우리민족을 아주 호구로 본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째 이런일이> 눈 앞에서 번연하게 이루어질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수상한 바람이 불어 닥치는데도 우리나라는 정신을 못차리고 그에 상응하는 국제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긴 쪽바리들의 뼈아픈 식민 수탈 위에 세워진 반쪽나라이다 보니 우습게 보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비틀어진 역사를 바로 세우지 못한 결과, 훗날인 오늘날 이런 수모를 겪는 게 아닌가 싶다. 우리 역사가 지금 현재에 떳떳하지 못하듯이 지금의 현실은 나중에 역사로 남아 미래에도 수치로 남게 될 것이 뻔하다.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다.
이런 엄중한 시기에 가야문화권을 답사한 것은, 과연 역사란 무엇인가를 가슴에 되새겨 볼 수 있는 뜻있는 기행이었다.
서기 562년 (진흥왕 23년)에 신라장군 이사부와 사다함이 이끈 신라군에게 멸망할 때까지 약 260여 년에 거쳐 지금의 경남북 일대에서 왕국을 이루고 부흥하였을 대가야.
우리는 흔히 고구마, 백개, 심자, 하면서 답안지를 메꿀 요량으로 삼국에 대해서는 달달달 외우면서도 가야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를 못하는 게 사실이다. 이유야 여러가지겠지만 가야사에 대한 연구노력이 부족하였거나, 아직도 발굴과 연구작업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백제와 신라 사이에 끼어 있는 형세로 미루어 (내 맘대로) 추측하건데, 메뚜기 가운뎃다리 만한 가야땅을 헤집고 연구해봤자 시쳇말로 건져 먹을 건덕지가 없어서 아예 손을 놓고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완만하지만 근처에서는 가장 높기도 한 주산(主山)에 널리 퍼져 있던 지산동 고분군만 해도 그랬다. 신라무덤인 경주에는 무덤마다 고유명사를 가지고 있었다. 훗날 역사학자들이 자료를 참고해가며 일일이 꿰다맞춘 결과겠지만 임자 없는 무덤이 없었다. 그런데 지산동 고분에는 한국전쟁 때 이름 없이 죽어간 용사들처럼 44호분, 45호분, 32호분, 33호분...... 이딴식으로 참 속편하게 이름을 붙여 놓았다. 그리하여 외형상 가야무덤이 확실하고 비교적 큰 고분(역사적으로 오래된 무덤)에 한정하여 일련번호를 매겨 현재 72호분까지 정해지기에 이르렀다.
더욱 더 열받는 노릇은 1906년, 경북 고령군 고령읍 지산동 소재 주산의 남쪽 기슭에 있는 대가야 무덤들을 [세키노]라는 쪽바리새끼가 처음으로 발굴을 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1915년에 구로이타, 1917년에 이마니시, 1918년에 하마다, 1939년에 아리미쓰와 사이토 등이 발굴, 조사를 하였다고 한다.
고분군 아래 주차장 근처에 지어놓은 왕릉 전시관에 전시된 유물들이 절대다수 모조품이거나 복원품인 것은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얍싹한 쪽바리새끼들이 무덤을 파다가 돈이 될만한 물건들을 싸그리 <쌔벼갔기> 때문일 거라는 짐작은 누구라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하면 욕밖에 나오는 게 없다. [에이, 시발자슥들]
대가야 왕릉 전시관은 외형이 무덤 형태였고, 내부는 무덤 속을 그대로 복원해 놓고 있었다. 묻힌이가 지배층임을 과시하려고 무덤 안에는 생전에 사용하던 토기류와 무기류, 공예품 등 많은 껴묻거리(부장품)들이 같이 묻혀 있었다. 평소에 쓰던 물건들을 같이 파묻은 것이야 과시하기 좋아하는 주인의 유언에 따라, 혹은 그 시대의 풍습으로 백 번 이해가 가능하다.
그러나 껴묻거리 중에 눈길을 확 잡아 끄는 것이 있었다. 바로 사람이었다. 이른바 순장제도라는 것인데, 노예인 듯한 아버지가 반듯하게 누워있고 배 위에는 어린 딸을 안고 있었다. 아마 모시던 사람이 죽으면 그를 따르던 노예의 일가족도 같이 산채로 묻었나 보았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잔인한 제도가 아닐 수 없었다.
또 하나 실망스러운 것은 내부를 꾸민 돌과 고인돌을 복원시킨 돌들이 두들겨 보면 속이 텅 빈 조잡한 화학제품이라는 것이었다. 문화재를 복구하려는 성의가, 아무리 재정부족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경주의 신라유물들도 시멘트로 땜빵을 하는 수준이고 속리산 법주사의 미륵불에다 누런 똥칠을 하는 판이니 말하면 주둥이에 침만 마르겠다.
대구에서 고령으로 가는 국도변 금산재에서 남으로 뻗은 구릉에는 석기시대 유적지가 있고 구릉동쪽 산쪽의 낮은 땅에는 고인돌이 널리 퍼져 있다.
고령군 개진면 양전동 암각화도 선사시대의 바위그림유적으로 보물 제604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와 눈 그리고 바람에 깎여나가 뚜렷한 그림은 없고 태양을 상징한 것으로 추정되는 동심원과 어쩌면 사자처럼 보이고 어쩌면 방패같기도 한 <가면>이라고 불리는 그림만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바람과 서리를 견디고 있었다.
창녕으로 넘어가는 길에 고령휴게소에서 밥을 먹었다. 관광지 밥이 오죽하랴 싶었는데 먹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콩나물 국에 자반고등어와 청국장, 그리고 갖가지 쌉싸름한 나물들. 임금님 수라상이 부럽지 않은 밥상이었다. 매일 이렇게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기서 곁가지를 하나 치자.
내가 사는 동네인 부산 영도구 태종대라는 곳에 구경오는 사람들은 절대로 그 앞에서 밥을 사먹지 마라. 밥값이 비싼 것은 둘째치고 정말 맛대가리가 없다. 정 배가 고파 쓰러질 지경이면 차리리 컵라면으로 시장기를 달래길 바란다. 내 말을 무시하고 공연히 비싼 밥먹고 <에이, 부산 씨비씨비다> 하지 말란 말이다.
집이 가까워서 태종대로 낚시를 자주가는 편인데 그 앞에 즐비한 <자장면 1500원>에 현혹되어 한 번 들어간 적이 있었다.
[아지매, 짜장 하나 주소.]
말이 끝나자 마자 총알처럼 자장면(자장면에 대한 추억은 접어두자)이 튀어나온다. 멀건 장에다 가락국수처럼 미리 준비된 면발, 슬슬 비비면 딱 두 젓가락 양이다.
[후룩, 후룩, 쩝쩝]
간에 기별이 안가 단무지와 물로 배를 채운다.
[아지매, 을마요?]
[2500원]
[엥, 1500원은 뭐요?]
[그건 시킬 때 미리 말씀을 하셔야지.]
[니미 떠그랄. 내가 다시 여기오면 울 아부지가 개다.]
계산해 보면 자장면 한 젓가락에 천원이고 <다꾸앙>값이 오백원인 셈이다.
본가지로 돌아와서,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리 129번지 일대에는 교동 고분군이 있고, 같은읍 송현리 102번지 일데에도 목마산 서쪽에 송현동 고분군이 하천을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었다. 멀리 산등성이에 그물을 치고 지금도 한창 발굴, 조사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1918년에서 1919년 사이에 쪽바리새끼들이 유물을 깡그리 <쌔벼가는> 바람에 뭐가 얼마나 나왔는지 정확하게 파악조차 안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나중에 쪽바리가 개략적인 보고서를 출판했다고는 하나 그 새끼들이 어떤 놈들인가. 그 많은 유물들의 출토 경위와 유물과 구조물들의 특징이 아직까지도 자세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생각하면 욕이 또 나온다. [에이, 개자슥들.]
현존하는 21기의 고분 중에 1기는 입구쪽을 개봉해 두었는데 내부구조를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구조는 대략 이랬다.
현실(玄室)과 연도는 구별이 없고 장방형(長方形)이 평면횡혈식(平面橫穴式) 석실로 삼면의 측벽은 크고 작은 돌덩이이고 판석(板石)으로 천장을 덮고 있응 모양새였다. 쉽게 풀어쓰면 땅바닥에 돌을 쌓아 시체를 눕히고 판판한 돌로 천장을 만들어 흙으로 덮어놓은 것이다.
산꼭대기로 축 늘어진 시체를 옮기고 그렇게 큰 돌을 나르고 했을 그 시대의 천민(노동자)들의 삶이 머릿 속에 그려졌다. 예나 지금이나 평등세상은 아니었구나, 하는 쭈삣한 깨달음은 가슴이 아픈 것이었다.
창녕 박물관은 교리 87-1번지, 교동 고분군 입구에 초라하게 지어져 있었다. 초라하게 보인 이유는 비단 규모가 작아서만은 아니었다. 전직 대통령의 자택보다도 작은 박물관 안에 전시된 유물들 역시도 거의 다 가짜 모조품이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씁쓸한 일화를 한가지 소개하고 가자.
몇년전에 우리나라가 고속철을 도입하려고 했을 때, 프랑스의 떼제베와 일본의 신깐센이 치열하게 경쟁을 한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때 프랑스 코쟁이들이 떼제베를 사면 1866년에 병인양요를 일으키고 나서 <쌔벼간> 우리나라 국보급 유물들을 반납하겠다고 뒷거래를 하였다.
지금, 그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되돌아 왔나? <드러븐> 새끼들이 이제와서 영구히는 못주겠고 돈을 받고 빌려주겠다고 개지랄을 떨고 있다. 왜? 고속철도를 다시 깔 수는 없기 때문이다. 뭐 빤다고 순순히 돌려준단 말인가. [니겉으면 돌리 주겄나?] 똥배짱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이게 바로 분단된 힘없는 조국의 한심한 외교능력이다. 같은 민족인 이북에다가는 [야 시발놈들아, 퍼뜩 핵 포기하고 미제 좆빠는 시늉이라도 해서 같이 잘묵고 잘살자]며 국제적으로다 일관되게 큰소리를 칠줄만 알았지, 어째서 그 핵이 없었다면 진작에 한반도가 불바다가 되어 물 속에 가라앉았을 거라는 생각을 못하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미제라면 똥도 청국장 못지않게 구수하다]는 숭미사대주의에 신물이 나다 못해 더 늦기 전에 후다닥 이민이라도 가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창녕읍 교상리 28-1번지에 있는 진흥왕 척경비와 1871년 (조선 26대 대빵인 고종 8년)에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였다.
진흥왕 척경비는 신라 진흥왕이 540년에서 576년 동안의 37년 재위기간에 낙동강 서쪽의 가야국을 좋은 말로는 합병을 하고, 나쁜 말로는 침략을 하여 땅을 차지한 기념으로 세운 이른바 진흥왕 순수비라는 것이다. 말이 좋아 순수비지, 비석에 새겨진 내용들은 왕이 새로운 점령지를 다스린다는 것과 이에 관련된 벼슬아치들을 열거하고 있으므로 척경비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진흥왕 척경비는 세월의 두께를 입어 판독이 가능한 글자가 거의 없었다. 희미하게 보이는 <辛巳年 二月 一日 立 (신사년 2월 1일에 세움)>이라는 글자로 미루어 봐서 진흥왕 22년인 서기 561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이남에서 발견된 북한산비(국보 제3호)와 황초령비, 마운령비 보다도 수 년 앞서 세워졌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가야왕국이 이듬해 562년에 망한 것으로 봐서 그 당시 전투가 치열했을 것이며 아마 정치적으로나 백제와 맞장뜰 수 있는, 지리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었을 거라고 유추해 볼 수도 있겠다.
흥선대원군 척화비는 엄밀히 가야의 유물은 아니다. 1866년에 프랑스가 조선을 침략, 병인양요를 일으켰다. 그 뒤 1871년 미국이 다시 침략해서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신미양요란 미국이 겁도 없이 꼴랑 군함 세 척을 이끌고 강화도를 침공한 사건이다. 조선군대와 박터지게 싸우다가 4월 25일 줄행랑을 치게 되는데,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강화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기 위해서 서울 종로에, 경기도 강화에, 경상도 동래군, 함양군, 경주, 부산진 등등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운 것이다.
이 비석들의 운명은 기구하였다. 1882년 (고종 19년) 임오군란(요샛말로 군사 구테타) 때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된 틈을 타 일본공사가 모두 철거를 해버린 것이다. 그 가운데 서울에 세워졌던 척화비는 1882년 8월 종로 보신각 부근에 파묻혀 있다가 1915년 6월에 보신각을 옮길 때 발굴되어 현재 경북궁에 보관되었고, 기장 대변항에 있던 것은 바다에 처박혀 있다가 인양되어 다시 세워졌다. 그 외에도 부산 가덕도, 시립 박물관, 경북 구미와 청도, 경남 함양군 함양읍과 안의면, 포항의 장기, 전남 함평읍, 충북 옥천 등에 1구씩 남아서 아픈 역사를 우리에게 일깨우고 있 다.
지금은 2004년이다. 세계와 한반도 정세는 언제 전쟁이 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시절이다. 미제국주의의 세계패권 논리에 따라 이 지구촌은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미국에 또라이 대통령이 나온다면 지구는 언제 짜개질지, 그래서 언제 우주의 먼지로 남게될지 아무도 모른다.
어느 점쟁이의 말을 빌리면 만약 차기 미국 대선에 부시가 재선되면 미국이 빨리 망할 것이고, 다른 사람이 당선되면 좀 더 천천히 망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이것을 내 논에 물대기식으로 해석하지 않더라도 지금 현재 미국이 망할 징조들이 객관적인 정황들로 이미 나타나고 있다고 판단된다.
2007년 중국의 부상은 미제국주의의 말로와 한치의 오차없이 맞물려 가고 있다. 지금 미국사회는 정치외교력 부재(거의 일방적임), 마약과 포르노그라피 산업의 부흥, 경제력 약화, 사회를 지탱하는 도덕성 결여, 인종문제...... 등등, 한 국가가 몰락하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중국의 고구려사 비틀기는 장꼴라들이 우리민족의 통일을 예견한 결과이다. 지금부터 고구려사를 자기 것이라고 우겨놔야 하는 것이다. 우리민족이 통일이 되어 [고구려 땅 돌리도!] 하면 골치가 아플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인 제국주의가 이제 유일하게 남아있는 군사력만 믿고 전 세계를 상대로 깝죽대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 이라크 파병이다, 자유무역협정이다, 해가며 온 나라가 시끄럽다. 파병문제는 접어두자.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에프티에이는 무엇이 문제인가?
미제는 칠레 농부에게 막대한 지원금을 주고 있다. 한편으로는 우리 정부에게는 촌놈들에게 한 푼도 지원해 주지 말라고 내정간섭을 노골적으로 하고 있다. 과잉생산된 미제 쌀을 팔아 먹으려는 수작인 것이다. 밀가루를 비롯해서 콩, 육고기 등 온갖 것들을 팔고 있으면서 정말 돈이 되는 쌀까지도 사먹으라고 윽박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까짓 휴대전화를 팔아 먹자고 민족의 양식인 쌀을 개방하는 순간, 우리 민족의 생명은 그들의 손아귀에 쥐어주게 된다. 식량을 무기화 시킨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섬찟하다)
농촌의 기반이 무너지고 나서 공산품을 안 팔아도 좋으니 쌀을 좀 달라고 한다면 그들이 옛날에 쪼꼬렛또를 던져주듯 고이 적선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는가?
이 한심한 나라, 두심한 국민들에게 척화비는 이렇게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洋夷侵犯非戰則 和主和賣國> (양이침범비전측 화주화매국)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
[서양 오랑캐가 침입을 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 먹는 것이다.
우리들 만대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
해박하긴...... 자료보고 내 생각을 덧붙였을 뿐.조선경기가 호황이라더니 뜻밖에 3고(원유,원자재,원화)를 맞아 일할 데가 없다.전국적으로 조선소에 철판 수급이 안되고 있다.배를 열 척 만들면 한 척 값은 그냥 날아간다고 한다.정치권에서는 누가 많이 처먹었나,피터지게 싸우는 중이다.모레 파병안이 국회를 통과한다.
첫댓글 해박한 지식에 매번 탄복 합니다. 오늘도 역시..... 참? 요즈음 어떤 가요?...
해박하긴...... 자료보고 내 생각을 덧붙였을 뿐.조선경기가 호황이라더니 뜻밖에 3고(원유,원자재,원화)를 맞아 일할 데가 없다.전국적으로 조선소에 철판 수급이 안되고 있다.배를 열 척 만들면 한 척 값은 그냥 날아간다고 한다.정치권에서는 누가 많이 처먹었나,피터지게 싸우는 중이다.모레 파병안이 국회를 통과한다.
그래요....펑 펑 놀구 있지요. 하는 것도 없이 빈둥빈둥 거리며 곡직이나 하고 피스나 불고, 시험편 모재 만들어 '심' 내고 있지요. 그래도 꼬박꼬박 1시간씩 잔업 합니다. 후후후 그래봐야 거기서 거기인데....후후후
형님 요새 궁하겠네요. 일꾼이 일을 해야 하는데 일을 못 하니 이거원..... 빨리 세상이 '답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답게, .....답게